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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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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연재수 :
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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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208
글자수 :
296,472

작성
22.09.0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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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생명줄

DUMMY

이제 슬슬 루니가 정신을 차릴 시간이었다. 지원은 평화를 루니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슥 그어보였다.


평화는 스르륵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루니의 염력에 의해 강하게 붙들린 평화가 자욱한 연기 속으로 들어갔다.


‘뻑’, ‘빡’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평화가 안쪽에 있는 인간들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지원이 일어나 인질의 상황을 확인하려 했을 때, 루니가 텔레파시로 제제했다.


<한 명 처리 못했어. 함부로 들어가지 마.>


루니는 폭발로 인한 잔해 사이에서 머리를 흔들면서 솟아올랐다. 잘려나간 귀를 감쌌던 붕대와 인간의 예법에 따라 차려입었던 옷은 폭발로 인해 사라졌다. 그는 알몸이었다.


“한 명 남았다고요? 인질 분을 말하시는 거예요?”

<아니, 당연히 걔는 예외지.>

“그 인질! 내가 지금 껴안고 총을 겨누고 있다! 헛짓하면 이년도 바로 뒤지는 거야!”


군인은 친절하게 안쪽의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지원은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VIP룸의 각 방의 창문은 저격을 위해 열려 있었다. 덕분에 높은 고도에서 부는 강한 바람이 들이닥쳐 환기가 아주 잘 됐다. 연기는 빠르게 빠져나갔다.


방안의 꼬라지가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다. 머리가 터진 채 엎어진 군인들의 시체와, 그 사이에서 패닉에 빠진 채 지원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고 있는 생존자가 있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어린아이가 침대에서 베게를 꽉 끌어안는 것처럼, 그 군인 또한 인질의 갈비뼈가 으스러질까 걱정될만큼 강하게 껴안고 있었다.


<인질을 저렇게 안고 있어서, 혹시라도 총이 발포될까봐 함부로 못 죽였어.>


루니가 지원에게만 들리는 텔레파시로 왜 그를 처리하지 못했는지 변명했다. 군인은 허세를 부리려는 듯, 하지만 절박함을 숨기지 못하고 떠들었다.


“이 여자가 아람 나토샤온, 나실 호텔 주인장의 딸이다. 너희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귀하신 몸이라고. 알겠냐? 이년이 죽었을 때 사고였다는 변명이 통할까 궁금한데, 응?”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원이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는 터리놀이 아니라 서로만 소속이다. 그 사람이 잘못된다 한들 누리 나토샤온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어.”

“서로만? 서로만이 왜 여기에 있어!”

“그건 너 따위가 알 필요 없고.”


지원은 소파 위에 엎어져 있던 머리가 뚫린 시체를 끌어내리고 거기에 앉았다.

군인은 아람 나토샤온이 방패처럼 자신의 몸을 가리도록 허리를 돌렸다. 하지만 루니는 여전히 문앞에서 앞다리짱을 끼고 있었기에,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지원이 냉혹하게 말했다.


“네가 인질을 잡고 있으니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 그 사람은 네 인질이 아니야. 네 생명줄이지. 그렇잖아?”


군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아람 나토샤온을 껴안은 채 지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원은 아람을 상세하게 관찰해보았다. 딱 봐도 지쳐 있었으며, 폭력과 저항의 흔적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기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지원은 본론을 말했다.


“그 사람을 순순히 넘기면 우린 널 죽이지 않겠다. 천천히 손을 들고 총을 등 뒤로 떨어뜨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하······. 짜증나게.”


루니는 모처럼 지원의 감정적인 모습을 보게 되어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지원이 쿵쿵거리며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가자 깜짝 놀랐다.


<어디가?>

“아저씨가 잠깐만 감시해고 있어요.”


이윽고 바깥에서 무언가가 세게 부딪히는 소리, 우지끈 망가지는 소리, 그리고 익숙한 만칼리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파, 아파! 천천히 끌어!”


지원은 루니가 다리를 분질러서 걷지 못하는, 하지만 일단은 살아있는 부상병 중 하나를 질질 끌어서 아람 나토샤온과 군인 앞에 던졌다.


“모나!”

“닥쳐라. 너희 이름이 뭐든 관심없어. 보이듯이 우리는 네 동료도 죽이지 않고 살려뒀다. 이 정도면 믿을 수 있겠지.”

“이걸 가지고 믿으라고······.”

“아직도 네가 의심을 가질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지원은 신경질을 부렸다.


“자비를 베풀고 있는게 누구인지 잊지 마라.”


결국, 그 군인은 자신의 열세를 인정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총을 위로 들었다. 루니는 지원에게만 들리는 텔레파시로 총이 치워졌으니 군인을 제압할까 물어봤지만, 지원은 기다리라고 답했다.


총이 등 뒤로 떨어졌고, 아람 나토샤온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한걸음 한걸음 지원을 향해 걸어왔다.


아람을 자신이 앉던 소파 위에 앉힌 후, 지원은 군인에게 다가갔다.


“손 계속 들고 있어. 팔꿈치가 귀 아래로 내려오면 바로 죽인다.”


지원은 군인의 몸을 수색하여 모든 무장을 빼앗아 한쪽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이제 그를 제압해 둘 차례였다. VIP룸에는 더이상 루니의 텔레파시에 감지되는 생명체가 없었다. 지원은 여유롭게 생존자들을 거실에 모아 묶어둬야겠다고 판단했다.


“나토샤온 씨, 잠시만 이곳에 계십시오. 아저씨, 저좀 도와주세요.”

“어, 저.”


아람이 뭐라 말하려 했기에, 지원은 뒤돌았다.


“왜 그러십니까?”

“옆에 있게 해주세요.”

“죄송하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생존한 적들을 모아서 한 곳에 묶어둘 겁니다. 저들이 저항한다고 흉기라도 휘두른다면 당신을 보호하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계셔주세요.”

“전 괜찮아요. 같이 있게 해주세요. 네?”


지원은 나름 합당한 이유를 댔지만, 겁에 질린 아람은 무턱대고 옆에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지원은 아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냉정하게 내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책상다리를 주워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정 그러시다면······, 기르불! 다 끝났으니 내려오십시오! 이쪽입니다!”


고함을 지르며 책상다리로 벽난로 안쪽을 탕탕 두드렸다. 굴뚝에 울려퍼지는 소음에 기르불이 이끌려 아래로 내려왔다.


기르불은 책상다리의 끝부분에 횃불처럼 붙어 활활 타올랐다. 아람과 군인들의 눈에는 지원이 꺼진 벽난로에서 불을 일으킨 것처럼 보였다.


지원은 이윽고 부숴진 문짝의 잔해를 긁어모아, 그 위에 기르불을 얹었다. 그녀가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사리입니다. 이름은 기르불. 기르불, 이분은 군인들이 인질로 잡고 있던 아람 나토샤온입니다. 잠시만 이분을 경호해주십시오.”

“나토샤온?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네, 나실 호텔 주인의 따님이시라고 합니다.”


기르불은 흥미가 생겼다. 그는 아람에게 ‘걱정하지 마’라거나, ‘네 이야기를 해달라’라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지원은 루니와 함께 생존자들을 처리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너, 날 도와라.”


방금 전까지 아람을 인질로 잡고 있던 군인은 지원의 지명을 받았다. 그가 생존자 중 유일하게 팔다리가 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뭘 도우라고?”

“네 동료들을 거실로 옮기고 포박하는 걸 도와라.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빨리 끝내자.”


군인의 얼굴에서 한가득 불만이 읽혔지만, 지원은 무시했다. 결국 그는 지원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루니 덕에 쓰러진 사람이 죽었는지 아니면 단지 의식을 잃었을 뿐인 건지는 간편하게 판별할 수 있었다. 루니는 부상자가 사망자로 변하는 일이 없도록 중상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염력으로 응급처치를 해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집 한 채 값 치료를 공짜로 받는다’라면서 생색을 냈다.

지원은 그 옆에서 그들의 무기를 뺏어서 쓸 수 없도록 평화로 부숴버렸다.


생존자를 한 곳에 모은 뒤에는 시체를 수습할 차례였다. 지원은 찬호처럼 고인에게 예의를 차려 줄 정도로 사려깊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다리를 붙잡고 질질질 끌어서 방 안에다 모아놓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에도 꽤 감동을 먹었는지, 지원을 돕던 군인은 그녀가 벽에 기대앉아 짧게 휴식하고 있을 때 질문을 던졌다.


“왜······이런 짓을 하는 거지?”

“너희를 터리놀 군대에 인도할 시간이 없으니까. 대충 묶어만 두는 거다.”

“전부 죽일 수도 있었잖아. 저 옥토끼 때문에 살생을 못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죽고 싶어?”


별 뜻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지원은 통 웃지 않고 오히려 살짝 찌푸린 인상이었기에 군인은 그 말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바짝 긴장해 고개를 저었다.


나실 호텔 VIP룸의 청소는 다 끝났다. 적어도 지원이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었다. 나머지는 터리놀 군대의 몫이었다. 이제 지원과 기르불, 루니, 아람 나토샤온은 서둘러 나실 호텔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지원은 도통 엉덩이가 바닥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녀는 조금 지쳐 있었다. 심장이 쿵쿵 거리며 열을 만들어냈고, 그 열이 목구멍을 통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지원은 비록 담배를 피지 않았지만, 왜 옛날 마을의 어른들이 고된 노동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기 전에 밭고랑에 걸터앉아 담배를 꼭 한 개피는 피우고 왔는지 이해했다. 만일 지원이 흡연자였다면 지금 담배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봐, 물 좀 가져와.”


군인이 물을 가져왔다.

지원은 군인에게 한 모금 먼저 마시게 한 후 벌컥벌컥 입에 들이부었다. 거의 절반이 흘러내려 방탄복 안쪽의 옷에 스며들었다. 이미 땀에 쩔은 상태라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루니가 차렷 자세로 서있던 군인의 뒤로 다가왔다.


<이제 가야지. 일단 저 아가씨를 터리놀 군대에 넘기고, 우리는 츠카를 찾아보자고.>

“그러죠.”


아람 나토샤온과 그녀를 돌보던 기르불과 함께, 이제는 호텔을 떠날 시간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아직 반항심이 다 꺾이지 않은 생존자는, 자신이 받은 자비를 수치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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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신의 이름으로 22.09.15 23 1 9쪽
61 저격 22.09.10 31 1 11쪽
60 개전 연설 22.09.06 35 1 10쪽
» 생명줄 22.09.04 33 1 10쪽
58 단둘이 22.09.02 28 1 9쪽
57 나실 호텔의 최상층 22.08.30 19 1 9쪽
56 대장과의 합류 22.08.27 24 1 10쪽
55 분산되는 일행 22.08.23 31 1 11쪽
54 함필규 22.08.21 15 1 10쪽
53 첫 살인 22.08.16 18 1 9쪽
52 너겨 엿비 22.08.14 15 1 9쪽
51 지사리의 보증 22.08.12 15 1 10쪽
50 단군 하비나 +2 22.08.10 30 1 10쪽
49 불안 22.08.06 19 2 11쪽
48 인질들 22.08.05 17 1 9쪽
47 몰살 22.08.03 19 1 12쪽
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2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4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3 1 9쪽
42 모함 +2 22.07.21 29 1 11쪽
41 감금 +1 22.07.09 40 2 13쪽
40 진술 +2 22.07.06 40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7 2 9쪽
38 패륜 +2 22.07.03 30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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