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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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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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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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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1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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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함

DUMMY

기르불은 의외로 지원이 이런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라는 것에 꽤 놀랐다.


그가 상상했던 그림은 찬호가 침대와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면서 ‘나가고 싶어요’라든가 ‘나같은 인재를 이렇게 썩히다니’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칭얼거리고 지원이 그 옆에서 ‘조금만 참으십시오’라고 기계적으로 달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상황에 더 잘 적응한 건 찬호였다. 그는 스위트룸 안의 작은 수영장에서 알몸으로 수영을 하거나 침대에 뒹굴거리며 밖에서 넣어준 만화를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원은 계속해서 똥씹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물론 지원은 언제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기르불은 그녀와 보낸 오랜 시간으로 얼굴 주름이나 눈썹의 모양새가 평소보다 더 각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지원, 지금 기분이 좀 안 좋아?”

“아닙니다.”

“그래?”


기르불은 아무래도 자신의 인간 표정 분석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 행동 분석 능력도 좀 더 갈고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도때도 없이 다리를 떨고, 식사 시간이 아닌데도 계속 간식거리를 입에 집어넣고,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샌드백을 팡팡 때리는 게 안 좋은 기분의 징후가 아니었을 줄이야.


이걸 찬호에게 그대로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간식은 저도 자주 먹는걸요? 운동하느라 배가 고픈가보죠. 여기 음식은 꽤 맛있거든요.”


그때 지원은 샌드백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를 샌드백에 기대고 멍을 때리고 있었다. 찬호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랑 같이 한 판 하실래요? 저도 나름 격투기를 배웠거든요.”


찬호는 웃으면서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찬호는 바보같은 얼굴로 바닥에 누워 있게 되었다. 지원의 다리가 그의 몸을 꽉 얽어매 일어나지 못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기르불이 말했다.


“인간은 남녀의 신체 격차가 있어서 어느 나라는 남자만 군인으로 뽑는다고 들었는데.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른가 봐.”

“어? 뭐지? 수영하느라 몸에서 힘이 빠져서 그래요. 제가 진심 500배만 낸다면······.”

“만전이었다면 찬호가 이겼을 겁니다. 수영은 체력 소모가 심하니까요.”


지원은 찬호의 변명에 긍정해주었다. 그녀는 찬호를 풀어주었다.


이때 어딘선가 규칙적으로 두 물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원과 찬호는 주변을 둘러보거나 하지 않았다. 기르불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르불은 소리의 원인을 곧바로 찾아냈다.


“뭐야, 츠카잖아?”


츠카는 건물 밖에서 창문에 달라붙어 발바닥으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너희 왜 뒤얽혀 있어? 이것 좀 열어줘. 잠금장치가 어디 있는 건지 모르겠어.>

“루니가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루니가 이꼴을 봤으면······.”


찬호가 말했다. 그는 마치 평영을 하듯 바닥을 밀어서 창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복잡하게 생긴 창문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츠카는 몸을 둥둥 띄우던 염력을 거두고 창틀을 밟고 섰다.


<뭔 창문을 이렇게 요란하게 잠궜데?>

“이 밑에 카지노가 있잖아요. 가끔 자살하는 사람이 나오거든요. 여기도 스위트룸이라 이 정도지인거지 어떤 방은 창문도 없대요.”


지원이 물었다.


“루니는 어디있습니까?”

<먼저 기차역으로 갔어. 루니가 이걸 전해달래. 너 혼자 읽으라던데?>


츠카는 루니의 발바닥 모양으로 밀랍 봉인이 가해진 편지 봉투 하나를 건넸다. 지원은 눈앞까지 둥실둥실 떠내려온 편지를 받았다. 아마 어지간히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을 것이다.


찬호가 창틀, 츠카의 발치에 갑자기 엎드려서 우는 소리를 냈다.


“츠카! 저 여기서 좀 꺼내줘요. 며칠째 흙을 못 밟아봤어요”

<흙을 못 밟았다니? 잠깐만, 나 시간이 없어.>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곳에서 옥토끼 하나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할 말 다했으면 가자고. 잠시 후 출발이야.>

<잠깐만, 잠깐만.>


츠카를 재촉하는 그 옥토끼는 시계를 목에 걸고, 서로만의 상징인 반달 문양이 새겨진 밴드를 팔에 차고 있었다. 아마 서로만 대사관의 직원으로서 츠카와 동행하고 있을 것이다.


“저분은 대사관 직원이십니까?”


지원이 물었다.


<어, 어, 맞아. 근데 너희 뭔 짓을 한 거야? 대사관이 시끄럽던데?>


츠카가 호들갑을 떨면서 물었다. 찬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짓? 저희 여기서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여기 주인이 괜히 문제 만들지 말고 방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얌전히 갇혀있는 중이에요.”

<들어보니까 배상 어쩌구 하던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못 들었어. 거기 인간들은 마음을 너무 잘 닫더라.>

“그거 또 했어요? 가나에서는 그거 하면 안 된다니까요.”

<날 바보 취급하는데 어떡해 그럼. 여기서도 그런 식으로 취급받기는 싫어. 흥. 아무튼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니까 몸 조심해. 서로만에서 보자.>


찬호와 기르불은 손과 손 형상을 흔들어서 인사했고, 지원은 고개를 끄덕 숙였다.


츠카가 떠나자 찬호는 다시 뒹굴뒹굴 굴러서 지원의 앞까지 왔다. 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편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편지에 찬호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가려졌다.


기르불이 지원의 머리 위에서 편지 앞면에 쓰여진 문구를 읽었다.


“‘기밀, 서로만 대사 주지원 귀하’. 뭘 써놨길래 이렇게 거창해?”

“혹시 모르니 저 혼자 열어보겠습니다. 찬호, 곧 잘 시간이니 먼저 씻으십시오.”

“네······.”


찬호는 대답했지만 바닥에 붙인 등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원이 밖으로 나갔다.


스위트룸에는 지원이 체크인하고 단 한 번도 쓰지 않았고, 앞으로도 쓸 기약이 없는 방과 시설이 많았다. 예를들어 사무실과 그 안의 책상 같은 것이 그러했다. 하지만 지원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 안에 들어있는 고급스런 천 안에 싸여 있던 각종 고급 문구도구들을 꺼냈다.


그중에는 둔한 날의 편지칼도 있었다. 지원은 360도로 돌아가는 푹신한 검은 의자에 앉아 편지칼로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여러번 루니의 편지를 읽었다.


잠시 후, 찬호가 버튼을 눌러 틀어준 흑백 TV에서 나오는 쥐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매이션을 인간심리학적 측면에서 흥미롭게 감상하고 있던 기르불은 느닷없이 강하게 열어재끼는 문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지원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는 욕실의 미닫이문을 열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너머로 말했다.


“찬호, 씻는데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저 수영하고 나서 씻었으니까 지금 바로 나가도 돼요. 몸만 담그고 있었어요.”

“그럼 지금 나오십시오. 그리고 제가 씻는 동안 기르불과 이 편지를 읽으십시오.”


찬호는 수건으로 몸을 두르고는 밖으로 나왔다. 지원은 그가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옷을 입은채로 욕조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차피 주어지는 옷도 수건도 하우스키퍼가 다 수거해서 세탁해주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왜 갑자기 저렇게 급하게 행동하지? 찬호는 의아함을 느끼며, 동시에 경험적인 불안감을 직감하면서 기르불 앞에 앉아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 뭐라고 적혀있었길래 저래?”

“잠깐만요, 지금 읽어볼게요. ‘지원이에게. 츠카와 함께 이 편지를 읽은 게 아니기를 빈다. 그 애는 이 편지를 읽으면 서로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거야. 본론부터 말한다. 터리놀은 너희와 타카슬을 약점으로 잡고 서로만을 협박하고 있다. 특히 터리놀 앞바다를 측량해서 측량선의 초음파로 타카슬을 괴롭혀 난동을 부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터리놀이 자기들 해안 측정한다고 서로만이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 군인들만 타카슬에게 다치거나 죽게 생겼어. 서로만은 너희들을 얼마 전에 검거된 터리놀의 간첩들과 교환해야 하게 생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서 탈출해서 서로만 대사관으로 와라.’”


루니의 편지를 다 읽은 후, 찬호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기르불이 찬호의 이해를 도왔다.


“누리 나토샤온이 네 뒤통수를 때리고 내 심지에 물을 튀겼다는 거지.”

“하지만 저희한테 매일같이 일류 셰프도 보내주고, 24시간 경호원도 붙여주고, 만화나 소설책도 부탁하는대로 다 제공해줬는데요?”


이때 지원이 신경질적으로 몸에 수건을 문지르며 욕실에서 걸어나왔다.


“셰프와 경호원이 아니라 감시자들이었습니다. 만화와 소설은 저희가 바깥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던져준 것 같습니다.”

“뭐지? 가나 대륙에 왔는데 어째 주브만칼리에서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 같은데?”


기르불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원은 긍정했다.


“맞습니다. 저희는 여기에 갇혔고, 주브만칼리에서와는 다르게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루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타카슬을 자극해 난동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면 지사리 쪽에도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겁니다. 기르불이 타카슬에게 보증을 서줬으니까요.”

“미친놈들.”

“하지만 루니의 편지만 믿고 상황을 속단하는 것도 이릅니다. 일단 현관 앞에 서 있을 경호원들에게 누리를 만날 수 있을까 물어봅시다.”


지원은 엉거주춤 걸으면서 바지를 허리까지 올리고 현관 앞에 섰다. 기르불은 ‘되겠냐?’라고 물었고, 찬호는 만일을 대비해 수건이 아닌, 제대로 된 옷을 걸쳤다.


지원은 현관 앞에서 말했다.


“경호원 선생님들. 잠시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찬호는 옷의 단추를 잠그며 기르불과 의문의 시선을 교환했다. 현관 앞에 있는 사람들이 경호원이든 감시자든 그들은 온 신경을 방 안의 일행에게 집중하고 있는 게 정상이었다.


지원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는, 현관문의 자그마한 렌즈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 것을 택했다.


기르불은 미리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없지?”

“아무도 없군요.”


지원은 현관문을 열었다.


잠금장치는 걸려있지 않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체중을 실어서 문을 밀었다.


아주 조금 열린 문 틈으로 지원은 밖을 내다보았다. 찬호는 그녀의 호흡이 한순간 멈춘 건을 알아챘다.


지원은 침착하게 외쳤다.


“부엌에서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은 싹 다 긁어오십시오. 어서!”


문틈 사이로,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찬호는 문틈으로 힘없이 늘어져 있는 인간의 다리를 보았다. 기르불은 지원의 지시 없이도 알아서 벽난로에서 뛰쳐나와 램프 안으로 들어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문 앞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경호원, 혹은 감시자들이 몸 안의 피를 전부 뿜어내곤 죽어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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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불안 22.08.06 19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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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몰살 22.08.03 19 1 12쪽
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2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4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3 1 9쪽
» 모함 +2 22.07.21 30 1 11쪽
41 감금 +1 22.07.09 40 2 13쪽
40 진술 +2 22.07.06 40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7 2 9쪽
38 패륜 +2 22.07.03 30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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