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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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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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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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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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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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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첫 살인

DUMMY

방탄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권총탄 정도는 견뎌낼 수 있었다.


찬호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너겨에게 달려들어 그의 총을 든 손을 잡았다.


너겨는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귀를 찢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총알이 방탄복 위로 푹푹 박혔다. 총탄의 압력으로 배가 아파왔다.


찬호는 상대의 총을 뺏으려고 했지만, 너겨는 의외로 힘이 셌다. 무엇보다 뒤에 쓰려져 있는 슈다이 때문에 함부로 총을 비틀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총구가 얼굴이나 팔다리처럼 방탄복의 보호를 받지 않고 있는 부위를 겨누지 못하도록 누르고 있는 것뿐이었다.


“당신 뭐야! 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찬호가 외쳤다. 너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쥐고 있는 권총의 탄창이 다 빌때까지 찬호의 배에 대고 총을 쏘았다.


마침내 그의 총에서 탄약이 격발되는 굉음이 아닌, 방아쇠가 헛도는 틱틱 소리만 나자 찬호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무릎으로 너겨의 배를 차고,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너겨 역시 옷 안에 방탄복을 입고 있어서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찬호는 결국 서둘러 싸움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총을 뽑으려 했다. 너겨도 자신의 빈 총을 버리고 여분의 총을 숨긴 곳으로 손을 옮겼다.

둘 모두 한 쪽 손은 상대방의 한쪽 손을 잡고 있었고, 나머지 손은 총을 뽑아들고 있었다. 서로가 총을 꺼내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찰나의 시간동안 속도전이 펼쳐졌다. 누가 더 빨리 총구를 총집에서 상대의 급소까지 이동시키느냐의 싸움이었다.


둘의 속도는 비등했다. 찬호와 너겨 모두 서로의 가슴에 총알을 맞췄다.


하지만 이미 열댓발의 총알에 너덜너덜해진 찬호의 방탄복과, 기껏해야 무릎차기밖에 받아본 적 없는 너겨의 방탄복의 강도는 천지차이였다.

너겨는 가슴에 충격을 받는 것에 그쳤지만 찬호는 총알이 방탄복을 뚫어버렸고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총알이 박혔다.


찬호는 쓰려졌다. 그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총알이 박힌 자리를 손으로 감싸고 몸을 움츠렸다. 하필 맞은 자리가 갈비뼈 부위라서 호흡을 하는 것부터 지장이 생겼다. 숨을 들이쉬거나, 뭔가 말을 하려고만 해도 갈비뼈가 들썩이니 상처가 아파왔다.


“억······억······.”


너겨는 여유롭게 말했다.


“넌 안 죽일테니 걱정하지 마. 서로만 요원이면 쓸만하겠지.”


찬호는 조금이라도 덜 아픈 자세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너겨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필요없어.”


너겨의 총구가 찬호의 뒤쪽을 향했다. 찬호는 소리쳤다.


“안 돼!”


하지만 총은 발사되었고, 찬호의 뒤쪽에 쓰러져 있던 슈다이 제브냐가 맞았다. 너겨 엿비는 몇 발을 더 쏘았다. 슈다이의 머리에 총알이 꽂힐 때마다 피가 퍽퍽 튀었다.


“죽일 필요는 없잖아! 하지마! 인질로 쓰면 될 거 아니야!”


찬호는 폐가 아닌 성대를 쥐어짜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유리창에 행주를 문지르는 듯한 삑사리가 났다. 곧 열심히 소리친 대가로 엄청난 격통이 몰려왔다. 찬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런 개짓거리들을 해서······대체 뭘 얻게 되는데? 어? 뭘 위해서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이고······.”

“우리 시대의 평화.”


찬호는 표정으로 그게 뭔 개소리냐고 물었다. 다행히 너겨 엿비는 승리감에 취해있던 것 같았다. 그는 신나게 나불거렸다.


“터리놀은 정말 구역질나는 도시야. 외곽지역에서는 빈민들이 하수구에서 쥐에게 파먹혀 죽어가는데 중앙에 있는 호화 호텔들은 1년 내내 퍼레이드에 불꽃놀이에 서커스까지······. 터리놀뿐만 아니라 가나 대륙은 이런 사회 부조리와 불평등이 만연하고, 보편적이며, 권장되지. 이런 생각 해본적 없어?”

“그래서 혁명이라도 일으키는 거야? 이 사람들은 배부르고 등따뜻하게 살아온 개돼지들이니까 죽어도 싸다는 거냐?”

“한때 음식물 쓰레기를 뒤적거리던 내가 지금 이 자리, 나실 호텔의 비서실장까지 올라오는 동안 뭘 봤는지 너는 상상도 못할 거다. 자수성가한 놈들은 능력만 있다면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하지. 나는 그런 놈들과는 달라!”

“그래, 그 사람들은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죽여대지는 않지.”


너겨 엿비는 쓰러진 잔해 위에 걸터앉았다. 그의 뒤로 총을 든 만칼리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너겨와 찬호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찬호는 공포에 질려 너겨에게 소리쳤다.


“안 돼! 하지 말라고 해! 제발, 제발 하지 마.”

“주브만칼리는 나에게 더 나은 세상을 약속했어. 세상은 개조되어야 해.”


호텔 안쪽에서는 곧 몸을 숨기고 있던 비전투인원들의 비명과 고함, 그리고 총소리들이 들렸다. 찬호는 따라서 비명을 질렀다. 총소리는 곧 멎었다.


총을 들고 안쪽을 청소했던 만칼리군 중 하나가 너겨에게 다가왔다.


“전부 사살했습니다.”

“혹시 위층에 한두명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확인해봐. 이자는 나에게 맡기고.”

“예.”


만칼리군은 파도처럼 우루루 몰려왔다가, 수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우루루 몰려나갔다. 찬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인 정신공격을 감행했다.


“주브만칼리를 믿어? 너 따위는 카추샤 두나를 만나보지도 못했을 텐데 얼굴 한 번 못 본 여자를 그렇게 철썩같이 믿다니 보증도 서주겠다, 응?”

“물론 주브만칼리가 지상낙원 같은 걸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만칼리에 공헌한 나한테는 권력이 주어질거야. 고작 호텔 하나를 관리하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테지. 그럼 뭐라도 해볼 수 있어.”

“결국 권력이구나! 더러운 놈!”


찬호의 남은 여력을 모조리 너겨를 비웃고 헐뜯는 데 사용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너겨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네가 뭘 이해하겠냐는 듯한 멸시의 시선으로 찬호를 내려다보았다.


찬호는 짧은 비난을 내뱉은 다음에는 진이 다 빠져버렸다.


너겨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그는 총을 찬호의 뒤쪽으로 겨눴다. 찬호는 엉거주춤 몸을 뒤로 돌렸다.


미령이 손을 들고 잔해 뒤에서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한쪽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걷는 것도 힘들어했다.


찬호는 너겨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벌서라의 아가씨야!”


그는 몸을 일으켜 미령의 앞을 막아섰다. 너겨는 굉장히 지쳐보이는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찬호는 열변을 토했다.


“벌서라······이 사람은 벌서라 부시장의 장녀야. 난 서로만의 요원이고. 요원은 버리는 패라서 굳이 구출을 하지 않아. 하지만 이 사람은 민간인이고 정치인 가족이라서 벌서라가 뭐든 지불해줄거야. 인질로 충분한 가치가 있어!”

“수가 너무 많다. 여기는 사치를 부리려 왔던 귀하신 분들로 가득차 있어. 너희 둘을 전부 살려둘 여유는 없어.”

“그럼 뭘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


찬호는 고통과 긴장에 벌벌 떨면서 두 팔을 벌렸다. 총상을 입은 왼쪽의 팔은 옆구리에서 벌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오른팔은 그럭저럭 넓게 펴졌다.


너겨는 권총의 탄창을 빼내어 안쪽의 탄약을 확인하고는 다시 끼웠다. 그는 총을 찬호에게 겨눴다.


“찬, 찬, 찬호······.”

“가만히 있어요. 절대 저 사람 심기 거스르지 마세요. 아셨죠?”


“멍청하긴.”


너겨가 읆조리면서 서서히 방아쇠를 당겼다.


찬호는 눈을 꽉 감았다. 그는 혹시라도 미령이 등 뒤에서 튀어나가지 않도록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미령의 팔을 꽉 잡았다.


‘펑’하는 큰 소리가 울렸고 미령이 힘없는 비명을 질렀다. 찬호는 자신이 죽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도 ‘끝’이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찾아오지 않았다.

삼도천이나 그 너머에서 손짓하는 돌아가신 부모님도 없었고 다부님이 인자하게 웃고 있지도 않았다. 찬호는 그저 눈을 계속 감고 있을 뿐이었고, 오른손에 쥔 미령의 팔도 계속 떨리고만 있었다.


찬호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만한 표정으로 총을 들고 있던 너겨 엿비는 사라져 있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머리가 없었고, 머리가 있어야 했을 자리에는 콸콸 흘러나오는 피만 있었다.


고주파의 파장이 느껴졌다. 찬호는 파장이 흘러나오는 그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깨지고 구부러진 창문틀에서 옥토끼 츠카가 첫 살인의 충격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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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해후의 때 22.09.23 27 1 10쪽
62 신의 이름으로 22.09.15 22 1 9쪽
61 저격 22.09.10 31 1 11쪽
60 개전 연설 22.09.06 34 1 10쪽
59 생명줄 22.09.04 32 1 10쪽
58 단둘이 22.09.02 28 1 9쪽
57 나실 호텔의 최상층 22.08.30 19 1 9쪽
56 대장과의 합류 22.08.27 24 1 10쪽
55 분산되는 일행 22.08.23 31 1 11쪽
54 함필규 22.08.21 15 1 10쪽
» 첫 살인 22.08.16 18 1 9쪽
52 너겨 엿비 22.08.14 15 1 9쪽
51 지사리의 보증 22.08.12 14 1 10쪽
50 단군 하비나 +2 22.08.10 30 1 10쪽
49 불안 22.08.06 18 2 11쪽
48 인질들 22.08.05 17 1 9쪽
47 몰살 22.08.03 18 1 12쪽
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2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3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2 1 9쪽
42 모함 +2 22.07.21 29 1 11쪽
41 감금 +1 22.07.09 40 2 13쪽
40 진술 +2 22.07.06 39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7 2 9쪽
38 패륜 +2 22.07.03 29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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