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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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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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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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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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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지사리의 보증

DUMMY

“너겨 엿비면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던 그 인간 아니야? 마차를 같이 탔었지.”


기르불이 물었다. 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얼굴 보니까 기억났어요. 저기, 제브냐 슈다이씨?”


남부 지방에서 온, 술을 거하게 마셨다던 사람들 중 한 명인 제브냐 슈다이가 벌건 얼굴로 대답했다.


“응?”


그가 입을 열자 술냄새가 풍겨왔지만 어쨌든 사리분별은 할 수 있는 모양이었으므로 찬호는 지적하지 않았다.


“안쪽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가서 슬슬 일어날 시간이라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도 데려가셔서 전체 인원파악 다시 한 번 해주시고요.”

“그래. 유찬호 부대장.”

“그리고 그 부대장이라고 안 부르면 안 돼요? 뭐, 뭐랄까 좀 창피해요!”

“그럼 대장을 대장이라 부르고 부대장을 부대장이라고 부르지 뭐라 해?”

“찬호라고 부르라니까요?”

“관등성명을 안 할 수야 없지.”


찬호는 부대장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를 붉히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니 다른 사람들은 계속 부대장 부대장 소리를 하면서 그를 놀려댔다.


제브냐 슈다이를 필두로 한 조사대가 로비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통해 그들이 떠드는 소리와 신발이 바닥에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하비나 단군이 다시금 타닥거렸다.


“이제는 내 차례다. 서로만 공작대에게 전할 말인데······, 돛대 없는 배에서 강계에게 물어보니 너희의 현재 목적지는 서로만으로 귀환하는 거라고 하던데, 맞나?”


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 상황이 좀 안 좋기는 한데, 터리놀 군대가 이곳을 수복하는데로 서로만 대사관으로 돌아갈 거예요.”

“서로만으로 가지 마라. 벌서라로 가. 벌서라 중앙박물관에 모여라. 특히 그 무괴, 타카슬을 모시고 와라.”

“모시고 오라니요? 타카슬을?”

“단군, 타카슬은 갑자기 왜 찾으십니까? 제가 강계에게 타카슬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단군께 좋은 소리를 전해드릴 정도로 칭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기르불이 물었다. 하비나는 잠시 후에 대답했다.


“계시가 왔다.”


기르불도, 찬호도, 그 밖의 다른 인간들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기르불은 인간에 익숙해진 자신의 사고 안을 한참 동안 뒤적인 다음에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계시 말입니까?”

“그래, 계시.”

“그거 진짜 내려오는 거였습니까?”

“몇 세대의 단군 동안 계시가 내려오지 않기는 했지. 내려온다 한들 별 시시한 이야기들이었고. 하지만 계시는 분명히 나한테 내려왔다. 그리고 꽤 중대한 사항이야.”


이때 찬호가 묵주팔찌를 찬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계시라고 하면 신이나 높으신 분들이 하늘에서 말씀해주시는 거잖아요? 누가 내려주신 계시인가요?”

“우리에게도 우리의 신이 있다. 팔에 찬 묵주를 보니 너는 다부를 믿는 인간인가? 듣자하니 어떤 인간들은 다른 사람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너는 어떻지?”

“다부교는 애초에 신을 모시는 종교가 아니라서 상관은 없어요. 그런데 그······계시라는 게······어······잠깐, 이런 말 해도 되나?”


찬호는 굉장히 머뭇거리면서 자꾸만 할 말을 삼켰다. 그는 어떻게 하면 덜 무례하게 들릴까 고뇌하면서 자신의 대사를 뇌 속에서 편집하는 중이었다.


휴식 중이던 사람들 중 한 노파가 그걸 보다못해 끼어들었다.


“이봐요, 지사리 여러분. 인간들은 오래 전에 종교랑 정치를 분리했거든요. 그래서 우리 부대장님은 출처가 불분명한 환청에는 별로 따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소방 전쟁의 후유증을 겪던 세대여서 그런지 지사리에게 꽤 날 선 발언을 거리낌없이 쏟아내었다.


찬호는 난처해졌다. 노파를 변호해주기에는 기르불과 하비나의 미움을 살 수 있었고, 그녀를 힐난하기에는 비록 거칠기는 했지만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표현된 발언이었다.


하지만 하비나는 별로 화내지 않았다. 기르불은 겁이라도 좀 주려는듯 몸을 부풀릴 것같이 굴었지만, 하비나가 제지했다.


“이봐, 우리 단군이시다. 말을 신중하게······.”

“됐어, 기르불. 이들의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그리고 유찬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기르불에게는 눈이 없었지만 찬호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르불은 찬호의 뺨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화상 입겠어요!”


하비나는 찬호와 다른 인간들을 위해 설명을 시작했다.


“지사리는 인간과 달리 여러 신이 있지 않아. 우리는 모두 한 위의 신을 모신다. 지사리 언어로는 ‘······’ 이라고 하는데,”


신을 가리키는 지사리 말은, 타닥거리는 소리인 데다가 고유명사라서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하비나는 말을 이었다.


“신이 여럿이 아니다 보니 구별지을 필요가 없어서 따로 이름을 대거나 설명하기에는 곤란하다. 애초에 그분의 존재에 의심을 가져본 적도 없어. 너희 인간들처럼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우리는 해본 적 없다. 하지만 우리 신이 내린 ‘계시’를 믿어줬으면 좋겠다.”

“왜 갑자기 타카슬을 벌서라까지 데려가라는 건가요? 신······께서 그 이유도 설명해주셨나요?”

“그래.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보다는 벌서라 중앙 박물관에서 최대한 많은 인간과 지사리를 모은 뒤에 공표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세상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이유거든.”


찬호는 불안감을 느꼈다.


맘편히 지원에게만 의지하면 되었던 지난 세월들과는 달리, 찬호는 자신이 의사결정을 해야한다는 것에 크나큰 부담감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그의 뒤에는 나실 호텔의 수많은 생존자들과 기르불, 그리고 몇 시간 뒤에 돌아올 지원과 타카슬이 있었다.


찬호가 불안감과 뒤이은 부담감에 아파오는 골을 문지르면서 신음했다.


“듣지 않고 믿는 자 더 큰 복을 얻으리라······라는 건가요. 기르불, 단군님의 말씀과 여러분의 신의 계시를 믿어도 될까요? 솔직히, 저도 종교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중요한 일에 '계시'를 도입하는 건 인간들 사이에서는 한 6000년 정도 옛날 방식이거든요.”


기르불은 삐진 듯 냉랭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왕검께서 지사리의 권익을 대변하신다면, 단군께서는 지사리의 정체성을 보증하시는 존재셔. 단군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건 지사리와 척을 진다는 의미야. 역으로 말하면, 단군께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지사리를 배반한다는 의미지.”

“지사리 전체가 단군에게 보증을 서준다는 거군요. 좋아요. 지원한테 그렇게 전달할게요.”


잠시 후 슈다이 제브냐가 돌아왔다.


그에게서 인원에 전혀 변동이 없음을 전달받고, 물자와 비전투인원들의 상황을 인계받은 뒤 너겨 엿비가 요구한 모든 정보를 하비나에게 알렸다.


찬호는 그 다음 하비나를 데리고 어둑어둑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비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혼령화한 다음, 유리창을 쑥 뚫고 밖으로 나갔다. 찬호는 커튼 너머로 눈구멍을 가져다대고 하비나가 습하고 비내리는 밤공기를 뚫고 아래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호텔 아래쪽에서는 터리놀 군대가 주둔이라도 하듯 임시 거점과 천막을 세워놓았다. 그 중 하나로 하비나가 들어간 뒤 찬호는 커튼에서 물러섰다.


###


지원은 터리놀의 골목 사이사이를 질주했다.


곳곳에서 시민들이 대피하고 있었다.

상황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은 확실했다. 피아의 식별이 원활하지 않았다. 누가 무고한 시민이고 누가 만칼리 반군 혹은 약탈을 일삼는 기회주의자인지 알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목놓아 우는 아이 하나를 지나치면서 지원은 크나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해안가에 도착하여 타카슬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에게 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야 했다.

아이는 누구나 도와줄 수 있지만, 타카슬을 도와줄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머지않아 지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해안가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바다 안으로 뛰어들어갔고, 골반까지 물이 잠기는 곳에서 손바닥으로 해수면을 탕탕 두드렸다.


동시에 지원은 해수면에 대고 ‘타카슬!’이라고 계속해서 소리쳤다.


초조함에 그녀는 곧 자신의 칼을 뽑아 팔 위에 올렸다. 피를 내기 위해서였다. 무괴를 포함한 육식성 물짐승들은 후각, 특히 피냄새에 아주 예민하다.


지원은 칼날을 피부 위에서 움직이며 어디를 상처내는 게 가장 뒷처리가 쉬우며 감염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피를 가장 많이 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무릎이나 어깨같은 관절은 논외였고, 가슴이나 허벅지처럼 옷이 많이 쓸리는 곳, 옆구리나 목처럼 잘 늘어지는 곳은 상처내면 뒷처리가 힘들었다.


얼굴?


지원은 광대에 칼을 가져다댔다. 얼굴로 싸우지는 않으니 당장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칼을 거뒀다.


아직 미련이 있었다. 마음속에 깊은 곳에 뿌리박힌, 언젠가 손에 넣을지도 모를 정상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미련이 얼굴에 흠집을 내는 것을 거부했다.


지원은 망설이다가, 자신의 코 안쪽을 칼로 약하게 찔렀다. 눈에서 본능적인 눈물이, 코에서는 코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얼얼하고 시린 통증이 느껴졌을 때에는 조금 후회했지만, 곧 괜찮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지원은 코피를 바닷물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곧 피냄새를 맡은 타카슬이 그녀를 감지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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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해후의 때 22.09.23 29 1 10쪽
62 신의 이름으로 22.09.15 23 1 9쪽
61 저격 22.09.10 31 1 11쪽
60 개전 연설 22.09.06 34 1 10쪽
59 생명줄 22.09.04 32 1 10쪽
58 단둘이 22.09.02 28 1 9쪽
57 나실 호텔의 최상층 22.08.30 19 1 9쪽
56 대장과의 합류 22.08.27 24 1 10쪽
55 분산되는 일행 22.08.23 31 1 11쪽
54 함필규 22.08.21 15 1 10쪽
53 첫 살인 22.08.16 18 1 9쪽
52 너겨 엿비 22.08.14 15 1 9쪽
» 지사리의 보증 22.08.12 15 1 10쪽
50 단군 하비나 +2 22.08.10 30 1 10쪽
49 불안 22.08.06 18 2 11쪽
48 인질들 22.08.05 17 1 9쪽
47 몰살 22.08.03 19 1 12쪽
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2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3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3 1 9쪽
42 모함 +2 22.07.21 29 1 11쪽
41 감금 +1 22.07.09 40 2 13쪽
40 진술 +2 22.07.06 39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7 2 9쪽
38 패륜 +2 22.07.03 29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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