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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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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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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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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글자수 :
296,472

작성
22.08.3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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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나실 호텔의 최상층

DUMMY

터리놀 시내를 가로지르면서, 찬호 역시 지원이 느꼈던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가 생각했던 터리놀의 상황은 여러 군소 이적 단체들이 각 건물을 드문드문 점령하고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터리놀군이 분산되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제대로 된 전열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군인들은 피아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뒤섞였으며 민간인은 전쟁의 광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찬호는 골목 사이사이를 오가며 벌서라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터리놀의 서쪽에 위치했던 벌서라 대사관 앞에는 벌서라의 상징인 파란 바탕에 햇살 무늬가 그려긴 깃발이 터리놀의 일출 모양 깃발과 함께 휘날리고 있었다.


과연, 찬호의 예상대로 대사관은 함락당하지 않았고 대사관 직원들이 이동하기 위한 퇴로까지 확보해두고 있었다. 만칼리 군인들도 벌서라 대사관 직원들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터리놀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너겨 엿비의 경우처럼 터리놀의 중심까지 만칼리의 사람들이 침투했기 때문이었다. 내부의 적이 더욱 무서운 법이었다.

찬호는 대사관의 주요 인사들은 죄다 외교관이므로 간첩이 파고들지 못했을 것이리라 판단했다.


그는 부디 대사관이 아직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행히도, 대사관 내부는 아직 시끄러웠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불행이겠지만.


찬호는 대사관 주변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대사관 내부를 관찰해보았다. 대사관 내부에서 피난을 준비하는 건지 마당 한쪽으로 중무장한 마차가 조용히 나오는 것이 보였다. 주위에 다른 호위병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찬호는 대사관의 주요 외교관의 피난 행렬임을 직감하고는 곧바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경험과 훈련으로 단단하게 단련된 그의 각력보다도 생존에 대한 열망으로 발버둥치는 수많은 터리놀 시민들의 발걸음이 휠씬 빨랐다.


외교관의 피난 행렬이 대사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희도 데려가 주세요!”

“이 아기만 저 마차에 태워주세요, 고작 쌀자루 하나 무게라고요!”


찬호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그러면서도, 생존을 구걸하는 터리놀 시민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때 경호병 중 하나가 총을 하늘에 쏘았다.


“다가오지 마!”


총소리는 잠깐, 아주 잠깐동안 사람들을 침묵시켜 총소리의 주인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곧 터리놀 시민들은 지금 총소리 하나를 무서워할 때가 아님을 깨닫고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쏘려고? 쏘려고? 쏴 이 새끼야!”

“어차피 우린 여기 있으면 다 죽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이면 총알이 얼마나 남는지 보자고!”

“넌 애미애비도 없냐 이 호로자식아?”


경호병들은 주춤거렸다.


찬호는 이 상황에서 벌서라 '부시장 댁 아가씨인 백미령을 피난 행렬에 끼워달라'고 해봤자 양쪽 모두를 자극하는 꼴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슬쩍 뒤로 빠졌다.


찬호는 미령과 츠카를 숨겨둔 어느 버려전 가정집의 지하실로 되돌아가, 그들과 함께 다음 방법인 기차역 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기차 다음은 항구, 그 다음은 육로로 걸어서 이동하는 것도 고려했다.


최우선 과제는 최대한 빨리 미령을 안전하게 터리놀에서 탈출시키고, 츠카만 데리고 지원과 루니, 기르불, 타카슬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


한편, 지원과 기르불, 츠카는 함께 최상층을 쳐부수는 중이었다.


최상층의 정확한 이름은 ‘VIP룸’이었다. 생각해보니까, 공작대 일행은 스위트룸을 이용하는 아주 중요한 자들이었음에도 한 번도 VIP라고 불려본 적이 없었다.


VIP룸 바깥 복도에 있는 자들은 기르불이 굽고, 루니가 다져서 처리가 쉬웠다. 복도를 전부 청소하고, 시체로 도배된 바닥을 창문에서 튀어나온 지원이 걸어왔다.


“잘 하셨습니다.”

“이제 방 안에 들어가면 돼.”

<텔레파시로 봤는데 방 안에 사람들이 만만찮게 많아. 어림잡아도 열 명은 넘어.>


루니는 염력으로 문손잡이를 열어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잠금장치 내부를 직접 조작해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VIP룸은 열쇠만 해도 4개가 필요했으며, 그 열쇠들을 돌리는 각도와 순서 같은 변수를 포함하면 잠금장치를 직접 조작하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인 짓임이 분명했다.


“안에서 잠궜군요. 그 문은 아마 열리지 않을 겁니다. VIP룸의 창문만으로도 터리놀의 전역을 감시할 수 있을 테니 굳이 복도로 나올 필요가 없겠지요.”

<금고도 아니고 잠금장치가 뭐 이리 복잡해?>

“VIP룸이니까요. 스위트룸도 이렇게 정교하고 단단한 잠금장치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열쇠가 파괴되자 놈들이 저희를 어쩌지 못했습니다.”


기르불은 VIP룸의 문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문에 난 밖을 내다보는 구멍 앞을 가로막았다.


“안에서 우리를 보고 있네. 방금 문에다 석유를 발랐어. 젠장, 아까 들어갈걸.”


혹시라도 문에 미리 석유를 발라뒀을 위험성 때문에 지원은 기르불에게 문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시했었다. 하지만 진작 방안에 처들어갔었다면 일이 쉬웠을 것이다.


“위험한 최선책보다는 안전한 차선책을 택하는 겁니다. 일단 다시 위로 올라갑시다.”


복도의 창문을 통해 지원과 기르불, 루니는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VIP룸 안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 사람은 어리둥절했다.


“루니의 정찰에 의하면 놈들은 창문에 저격을 위한 총을 걸쳐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VIP룸은 창문으로 곧바로 들어간다면 몸이 찢길 겁니다.”


지원은 옥상에 있던 비에 젖은 쓰레기더미를 치웠다. 쓰레기 아래에는 터리놀에 압류되었던 지원의 배낭과 찬호의 보따리가 있었다. 루니가 전쟁의 혼란을 틈타 터리놀 해안 경비대의 압류품 보관소에서 탈환해온 것들이었다.


배낭 안에는 찬호의 리볼버, 불갈대 부스러기, 명죽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이거 가져왔구나?”

“예. 아무래도 터리놀이 알아서 이것들을 돌려줄 것 같지 않더군요.”


명죽 조각들은 잘못하면 바로 피부가 베일 것같이 날카로웠다. 지원은 그것들을 한움큼 쥐고는 쓱쓱 비볐다. 기르불과 루니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감하곤 인상을 구겼다. 과연 몇 주 동안 잊어먹고 살았던 환청이 정신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야야, 그거 빨리 치워.>

“그럴 겁니다. 기르불, 이것들을 굴뚝 안으로 집어넣을테니 10초 정도만 태워주시겠습니까?

”내가?“

”10초면 됩니다. 힘들겠지만 이론상 후유증은 없을 겁니다.“


기르불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지원은 굴뚝 안으로 명죽 조각들을 넣었다. 그리고는 고인 빗물에 반쯤 잠겼던 밧줄을 집어들었다.


석유를 태운 연기도 거의 다 빠져나갔으니 환청 좀 듣는다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환청으로 옛날의 부끄러운 말과 행동들이 들려오는 건 정말 싫었다.


지원은 기르불에게 신호를 보낸 뒤 루니와 함께 밧줄을 잡고 벽을 타고 내려갔다. 기르불은 마지못해하면서도, 그녀를 위해 굴뚝 안으로 들어가 입구에 걸쳐져 있던 명죽을 태웠다.


###


굴뚝을 타고 명죽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온 나실 호텔에 퍼졌다. 아래층일수록 효과가 낮아지겠지만, 바로 밑인 VIP룸에는 충분한 정신적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불쌍한 적들은 아마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갈 것이다. 저들은 환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명죽의 환청을 방어하는 방법은 명죽으로 만들어낸 서로 다른 종류의 소리를 중첩해서 듣는 것이다. 명죽끼리 부딪히거나, 불로 태우거나, 공기와 마찰시키는 게 그 예시였다.


그때 굴뚝을 타고 아래쪽에서 허망한 비명소리가 전해져왔다. VIP룸을 점거한 놈들이 환청을 듣고 정신착란이 와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목소리였다.


비명을 들으며, 기르불은 왜 지원을 제외한 인간들이 환청을 방어하는, 언뜻 너무나 간단해보이는 방법을 수천년 동안 알아내지 못했는지 실감했다.


당연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생물이라면 저런 환청을 이중삼중으로 들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르불은 10초간 명죽을 태운 후, 귓가에서 웅성거리는 뚜렷한 환청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후유증은 남지 않겠지만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지원과 루니에게 가세하는 건 역시나 무리일 것이다.


기르불은 결국 지원의 청소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지원이 놔두고 간, 습기가 가득한 췌화나무를 태워먹었다.

그러면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지원은 과연 어쩌다가 저지경이 되었을지 안타까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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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신의 이름으로 22.09.15 22 1 9쪽
61 저격 22.09.10 31 1 11쪽
60 개전 연설 22.09.06 32 1 10쪽
59 생명줄 22.09.04 32 1 10쪽
58 단둘이 22.09.02 26 1 9쪽
» 나실 호텔의 최상층 22.08.30 19 1 9쪽
56 대장과의 합류 22.08.27 24 1 10쪽
55 분산되는 일행 22.08.23 30 1 11쪽
54 함필규 22.08.21 15 1 10쪽
53 첫 살인 22.08.16 17 1 9쪽
52 너겨 엿비 22.08.14 15 1 9쪽
51 지사리의 보증 22.08.12 14 1 10쪽
50 단군 하비나 +2 22.08.10 29 1 10쪽
49 불안 22.08.06 18 2 11쪽
48 인질들 22.08.05 16 1 9쪽
47 몰살 22.08.03 18 1 12쪽
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1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3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2 1 9쪽
42 모함 +2 22.07.21 29 1 11쪽
41 감금 +1 22.07.09 39 2 13쪽
40 진술 +2 22.07.06 39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6 2 9쪽
38 패륜 +2 22.07.03 29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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