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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다르 님의 서재입니다.

더 팔라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레그다르
작품등록일 :
2012.11.30 22:01
최근연재일 :
2014.03.09 00:17
연재수 :
74 회
조회수 :
221,737
추천수 :
2,804
글자수 :
572,268

작성
13.12.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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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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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글자
20쪽

더 팔라딘(The Paladins)-60화: 뒷통수

DUMMY

-60화: 뒷통수

 

× × × × ×

 

북방의 밤은 길었다. 지금 시간이라면, 다른 나라에선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지만 이곳 버려진 땅은 한밤중이었다. 게다가 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방에는 막바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히 내리는 눈은 적막한 밤을 더욱 고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푸드득

하는 갈가마귀의 날개짓과 함께 소나무에 맺혀있던 눈덩이가 아래로 쏟아진다. 그 소리만이 이 북방의 밤에 울려퍼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먼 발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실제로는 수 많은 사람들이 어지럽게 떠드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은 하얀 눈으로 뒤덮힌 건물이었다. 밤은 어두웠으나, 건물 창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밝았다. 그 빛과 함께, 북방사내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또한 스며나오고 있었다.

“우하하하하!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

커다란 배를 흔들며, 금발의 코주부는 벌꿀주를 들이켰다. 이 거대한 덩치에 안겨있는 여인은 환호를 지르며 남자를 돋우었다.

“겨우 그건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반쯤 감겨진 눈으로 어지러운 테이블사이의 음식들을 헤집었다. 그리고 용케도 술잔을 집어들며 소리쳤다.

“자네들! 오늘은 누가 이길 것 같은가!?”

이 갈색 털이 얼굴에 무성한 사내가 술잔을 치켜들며 외치자 주변의 사내들이 소리쳤다.

“빌호른(Wilhorn)! 자네가 이길걸세!”

“아니지! 아니지! 술고래 샤키(Shakii)가 이길거라구!”

술내기를 하는 호탕한 북방사내의 웃음소리 뒤에, 한 왜소한 사내가 테이블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북방사내들 틈에 있어서일까? 이 사내의 몸은 더욱 더 작게만 보였다. 뾰족한 턱을 가리기 위해 검은 수염을 잔뜩 기르고 있었으나, 움푹 패여들어간 볼과 튀어나올듯한 눈은 이 사내의 인상을 간사하게만 보이게 할 뿐이었다. 이 사내는 자코의 패거리였던 도적, 토후바였다. 토후바는 술집의 사내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흥…… 누가 이기긴…… 술집 주인이 이길걸? 돈은 그놈이 다 가져갈테니…….”

-꼬르륵

토후바의 배에서 음식을 넣어달라는 신호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토후바에겐 돈이 없었다. 토후바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는 테이블에 걸쳐져있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은색장식이 되어있는 칼자루 아래로, 칼집처럼 동여맨 가죽이 있었다. 검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죽 끝머리에선 은은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얼핏 보아도 진귀한 명검임에 틀림없었다. 토후바는 이 진귀한 검을 바라보면서도 벌레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가 명검 페어리스트야!?’

그렇다. 토후바가 가지고 있는 검은 기사 베롬의 명검인 페어리스트였던 것이었다. 베롬이 잃어버렸던 검을 토후바가 훔쳐 달아난 것인데 토후바는 페어리스트를 팔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토후바의 눈은 페어리스트의 폼멜로 향했다. 폼멜에는 포효하는 사자의 얼굴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라이온하트 기사단의 상징이었다.

‘제길…… 기사단의 검이라 팔아먹지도 못하고…….’

토후바는 페어리스트를 팔아 한몫 챙기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것이다. 라이온하트 기사단의 위상은 예상외로 유명했다. 토후바는 괜히 이 물건을 팔려했다가 기사단의 추적을 받을 뻔한 일을 생각해내곤 침을 바닥에 뱉었다.

‘그렇다고 검술로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토후바는 도둑이었다. 자코와 함께 도둑집단에서 배운 기술이라곤 남의 등뒤에서 기습하거나 독침을 날리는 그런 좀스런 기술 뿐이었다. 기사인척 사기를 치려 해도 검술이 모자란 그는 좀체로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돈은 돈대로 다 떨어졌던 그는 술집에서 주린 배를 움켜쥘 뿐이었다. 돈이 없었으나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북방의 추위는 남방 제스파니아출신인 토후바에게 너무도 가혹했던 것이었다.

“어이, 형씨?”

한 사내가 토후바의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 사내는 토후바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치열이 어긋난 누우런 이빨이 드러났다.

“뭐요?”

“어…… 자네는 이곳 출신이 아니지?”

토후바는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평정을 찾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 역시도 거대한 북방의 사내들과는 달리,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다. 하지만 토후바보다는 키가 큰 것은 확실했다.

“헤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외지에서 왔으니까 말일세.”

토후바는 이 사내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내겐 무슨 용무가 있지?”

“용무는 무슨…… 이 좋은날 외지인끼리 함께 즐기자고 온 거지. 내가 술을 살 테니 자네가 음식을 사게…… 같이 한잔 하자구.”

토후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어…… 속이 안좋아서 뭘 먹을 기분이 아냐.”

누렁니의 사내는 낄낄 웃었다.

“키킥. 그럼 왜 여기에 있어? 먹지도 않을거면 숙소에나 가지.”

토후바는 정곡을 찔린 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누렁니의 사내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네…… 돈이 없지? 헤헤. 돈 냄새가 안 난다구.”

그 말에 토후바는 빈정이 상했다.

“왜? 자네가 돈을 줄거야? 아니면 꺼져.”

“아니아니, 자네에게 돈을 벌 기회를 줄려고 하는 거란 말야.”

토후바는 큰 눈이 더욱 커졌다.

“뭐? 돈을 벌 기회?”

누렁니의 사내는 입가의 침을 닦으며 토후바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 이 떡대들이 술잔치를 하고 있지만, 나중엔 다 떡이 될거란 말이지…… 그때 저기…… 저 어수룩한 놈 보이지?”

토후바는 누렁니의 사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대머리가 이미 취할대로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 지갑을 털자고. 어때?”

토후바는 피식 웃었다.

“흥. 네놈도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인가보군. 안그래?”

누렁니의 사내는 길게 웃었다. 그가 뭔가 말하려고 하는 순간,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술집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뚱뚱한 여인이 가게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뚱뚱한 여인의 뒤에는 붉은색 코트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서 있었는데, 그자의 얼굴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치, 결혼예복을 입은 채로 돼지우리에 들어가는 남자의 표정이랄까? 이 금발사내는 어수선한 술집의 분위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듯 하였다.

“헤헤. 뚱보마누라가 술에 취한 남편을 붙잡으러 왔나보구먼.”

누렁니의 사내가 낄낄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토후바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남편을 붙잡으러 온 아낙네 치고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뚱보여인의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그 뒤의 사내는 너무도 비싸보이는 코트를 입고있었다.

‘저 둘은 무슨 관계지?’

토후바는 뚱보여인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순간, 뚱보여인의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흡!’

토후바는 재빨리 시선을 피하였다. 한편, 누렁니의 사내는 토후바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대머리사내의 돈을 빼낼 계획을 토후바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자네 체구가 작으니 저 뒤로 들어가서 주머니를 뒤지게. 그러면 내가…….”

하지만 토후바는 누렁니의 사내 말을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오로지 뚱보여인과 비싼코트를 입은 남자에게 향해있었다.

“어서옵셔! 뭘로 드릴까요?”

넉살스러운 주인장의 질문에 뚱보여인이 작게 대답했다.

“오늘은 벌꿀주가 몇통 남았나요?”

뚱보여인의 말에 주인장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토후바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오, 오늘은 열 세통 남았습죠.”

뚱보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일곱통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리 오시죠.”

주인장은 뚱보여인과 붉은 코트의 사내를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가려는게 아닌가? 토후바는 이 둘의 대화가 일종의 암호임을 알아챘다. 이런 식의 암호는 도적들이 사용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술싸움을 벌이던 술꾼들이 소리쳤다.

“어이! 오스건(Osgon)! 자네 어딜가나!? 심판을 계속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오스건은 술집주인의 이름이었다. 오스건은 사람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술꾼들에게 말했다.

“됐어. 자네들 승부도 길어졌고…… 흥이 다 떨어졌네. 오늘은 이만 하자구. 오늘 술값은 내가 낼테니 모두들 마음껏 들게.”

“야호!”

“허레이!”

술꾼들은 주인장 오스건의 말에 환호를 하며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한편 누렁니의 사내는 쾌재를 부르며 토후바에게 속삭였다.

“잘됐어! 이놈들 전부 뻗으면 몽땅 털자고!”

하지만 토후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싫은데…….”

“뭐, 뭣!?”

토후바의 눈이 빛났다.

“이봐…… 내가 이곳 사람들 주머니를 몽땅 턴 것보다도 훨씬 많은 돈을 벌게 해줄테니 내 계획을 따르지 않겠어?”

누렁니의 사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멍청한 새꺄. 여기 있는 놈들 주머니 터는 것보다도 많은 돈을 어떻게 모아?”

토후바는 턱짓으로 지하실로 향한 문을 가리켰다.

“여기가 어딘지 알어?”

“여, 여기가 술집이지 어디야?”

누렁니의 말에 토후바가 웃으며 대답했다.

“잘 들어…… 이곳은 말이지…….”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의 철문이 닫혔다. 지하실 문은 목재로 되어있었지만 그 안쪽에는 두터운 철문이 있었던 것이었다. 오스건은 다급한 목소리로 뚱보여인에게 말했다.

“왕비마마. 마마의 분장솜씨는 말로만 들었지만 정말로 감쪽같군요.”

이 뚱보여인의 정체는 버려진땅의 왕비, 피오니였던 것이었다. 피오니는 뛰어난 분장술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하니까 예전같지 않더군요. 방금 한 사내가 내 분장을 꿰뚫어본 것 같아요.”

피오니의 말에 오스건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리가요. 저도 못알아뵜는데…….”

붉은 코트의 사내가 대뜸 물었다.

“그나저나…… 놈은 불었소?”

“아! 조한 경! 아직 불지 않았습죠. 하지만 시간을 좀 주신다면…….”

피오니가 말했다.

“어서 가봅시다.”

피오니와 그 일행은 지하2층으로 내려갔다. 2층의 긴 복도에는 여러 개의 횃불이 꽂혀 있었으며, 그 횃불들에서 나오는 불빛은 감옥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감옥 저편에서 한 사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흐어어어억!”

피오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오스건에게 물었다.

“고문을 하는 소리인가요?”

“네. 마마.”

“당장 중지하세요.”

오스건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마마.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선 적당한 고문은…….”

“그만하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았나요?”

피오니의 말에 오스건은 어쩔 줄 몰라하더니 복도끝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중지! 중지! 작업(?)을 중지하라! 왕비마마께서 오셨다!”

그제서야 남자의 비명이 멈추었다. 오스건은 감옥문을 열며 피오니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왕비마마의 자비는 세세토록 이 땅을 비추실…….”

“그만하세요.”

피오니는 오스건을 지나쳐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감옥 안에는 한 거한이 양 팔이 쇠사슬에 묶인 채 벽에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게 채찍질을 하던 복면사내는 머리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섰다. 피오니는 피를 철철 흘리는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분다르? 분다르 맞죠?”

고문을 당하던 사내는 해적 분다르였다. 분다르는 부어오른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뚱보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우 탈진한 상태였는데, 복면사내가 물을 뿌리자 비명을 질렀다. 추운 냉기가 전신의 상처를 쥐어짰기 때문이었다.

“고문은 그만둬요! 내가 이런 짓을 하라고 말했었나요!?”

피오니의 호통에 복면사내는 황급히 물러났다. 오스건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피오니에게 말하였다.

“사실, 고문은 조한 서기관님께서 부탁을 하셔서…….”

피오니는 붉은 코트의 사내를 쏘아보았다.

“조한 경! 이게 무슨 짓이죠!?”

“왕비마마. 나라를 위한 길입니다.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하여야 합니다.”

“무슨 나라를 위한 희생! 버릇없는 딸내미 위치를 알아내는게 나라를 위한 희생인가요!?”

피오니는 가출한 히아신스의 위치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서기관 조한은 히아신스를 탈출시킨자가 분다르임을 알아내고 이곳 비밀감옥에서 고문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왕비마마…….”

분다르의 목소리가 피오니의 귀에 들려왔다. 피오니의 푸른 눈이 분다르를 바라보았다. 분다르는 피오니의 눈이 히아신스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소인이 공주님을 빼낸 것은 사실이나…… 공주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는 정말로 모릅니다…… 믿어주십시오…….”

피오니는 분다르의 눈을 잠시 쳐다보았다.

“당신 말을 믿어요.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요.”

그리고는 조한에게 명하였다.

“이 자를 풀어주고 금화 천냥을 주도록 하세요. 내가 전달한 명령입니다. 알겠어요?”

조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반드시 이행하겠습니다.”

피오니는 분다르에게 말했다.

“그대의 고통은 딸내미에게 반드시 전가하도록 하겠어요. 몸을 우선 회복하고 제 못난 딸을 찾도록 도움을 주세요.”

분다르는 왕비가 자신을 풀어주고, 또 돈도 준다는 말을 하자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할 뿐이었다. 그는 피오니가 감옥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왕비마마의 자비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감옥 바깥으로 나가는 피오니에게 조한이 물었다.

“마마. 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뭐가 이해되지 않지요?”

“이래선 나라의 기강이 서질 않습니다. 저런 범죄자를 용서해주고 게다가 금화까지 내리시다뇨.”

피오니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조한을 바라보았다. 조한과 눈이 마주치자 피오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으로서도 별 수가 없었을 거에요. 공주의 말을 어기기가 두려웠겠죠. 그런데 어찌 벌하겠어요? 그리고, 조한 경 같으면 저 상황에 어찌했겠어요?”

조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라면 저런 상황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전에 수를 썼겠지요.”

피오니는 고개를 저으며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 술집에는 이리저리 널부러진 술과 음식냄새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간간히 들려오는 잠꼬대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말썽꾸러기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피오니는 히아신스가 위험에 처해있지나 않을까 근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스건의 인사를 형식적으로 받으며 술집 밖으로 나갔다. 눈은 이미 그쳤으나 냉랭한 북방의 바람은 여전했다.

“조한 경. 갑시다.”

피오니는 조한과 함께 술집을 나섰다. 가득 내린 눈은 피오니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가 어둠속에서 날아들더니 피오니와 조한에게 부딪힌 것이 아닌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끈적이는 물건이 사방으로 튀었다. 놀란 조한이 소리쳤다.

“웬, 웬놈이냐!?”

“끈끈이 가방이에요! 무기를 꺼내드세요! 얼른!”

피오니의 말에, 조한은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려 했으나 두터운 코트가 방해가 되고 말았다. 조한이 허우적거리는 사이, 끈끈이 액이 조한의 팔에 엉겨붙어 팔도 못쓰게 되었다.

“이런!”

피오니는 무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게다가 그녀는 임신중이었다. 몸 상태도 날렵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을 받았기에 그녀 또한 끈끈이 가방에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피오니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오스건!”

하지만 그녀는 술집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널 도와줄 사람은 없어!”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뛰쳐나오더니 피오니에게 칼을 휘두르는게 아닌가? 술집에 있던 누렁니의 사내였다.

“크허허허헉!”

누렁니의 사내는 자신의 가슴께에서 불쑥 튀어나온 푸른검광을 발견했다. 그는 피를 게워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 뒤에는 토후바가 있었던 것이었다.

“너…… 이자식…….”

누렁니의 사내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허연 눈밭에 쓰러지고 말았다. 시체에서 명검 페어리스트를 꺼낸 토후바는 허리춤에서 약병을 꺼내 피오니와 조한의 몸에 뿌렸다. 그러자 끈끈이가방의 초록색 액체가 중화되는 것이 아닌가? 토후바가 꺼낸 약은 도둑들의 비전물약이었던 것이었다. 토후바는 피오니에게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디 다치신데는 없으십니까?”

피오니는 다소 당황하였으나, 이 키작은 사내가 자신을 구원했다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토후바가 가지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명검 페어리스트였다.

“덕분에요……. 그런데, 라이온하트 기사단 소속이신가요?”

토후바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경의 이름은 무엇인지요? 은인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하필 끈끈이액은 피오니의 분장마저 벗겨냈다. 그녀의 얼굴에 붙은 분장을 떼어내자 곱상한 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목에 큰 눈…… 피오니는 임신을 한 상태였으나 그 미모는 여전했던 것이었다.

토후바는 피오니의 분장이 풀리자 다소 놀란 듯 하였으나 이내 고개를 숙이며 피오니의 물음에 답하였다.

“토후바…… 토후바 알드린(Aldrine)이라고 합니다.”

알드린은 토후바의 두목이었던 미첼다의 성이었으며, 제스파니아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의 성이었다. 미첼다가 자코에게 죽었기 때문에 토후바는 자기 주인의 성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한편, 피오니는 미소를 지으며 토후바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었다.

“알드린경……. 그대의 도움으로 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피오니는 조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한 경, 어려움이 오기도 전에 해결하신다고 했지요?”

조한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표정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조한은 할말이 없었는지 화제를 돌렸다.

“알드린 경. 당신이 구한 귀부인은 이 왕국의 왕비님이십니다.”

토후바는 피오니가 왕비라는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렁니의 사내를 부추켜서 죽인 다음에 이 여인의 마음에 들려고 했는데 하필 왕비였을 줄이야. 토후바는 앞으로 자신이 받을 상이 얼마나 클지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피오니는 웃으며 토후바에게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대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이 왕국은 큰 비극을 맞이했을 겁니다. 그대에게 큰 상을 내리고 싶지만 라이온하트 기사단의 기사들은 상을 바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아쉽지만 이제 작별을 해야 겠군요. 경의 이름과 무용은 우리 아기에게 꼭 들려주겠습니다. 그럼 이만…….”

토후바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상이 없다니?’

토후바는 머리를 조아리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왕비마마.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는지요?”

“예? 제 목숨을 구해주신것도 감사한데 또다른 부탁을 드릴수는…….”

“아니옵니다! 기사단의 기사가 귀부인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 분부하실 일이 있다면 제게 일러주십시오!”

피오니는 토후바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그의 행색은 명검 페어리스트와는 다르게 매우 초라해보였다.

“그대는 허영을 좇지 않는 기사도의 표본이시군요. 잘 단련된 무기와는 다르게 옷가짐이 검소하다니…… 그대를 믿고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만.”

토후바는 그제서야 꼬투리를 잡았음을 깨닫고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을 시키겠구나! 그러면 지원명목으로 돈을 뜯어낼 수 있지!’

“제 딸에 관련된 일입니다.”

피오니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군요. 궁으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의말

안녕하십니까? 레그다르입니다. 

오랜만에 잠적했다가 또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돌아와 죄송합니다. 딸은 사랑스럽지만 이것저것 육아에 신경쓰다보니 또 이렇게 연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자식이란게 이래서 좋은가 봅니다.

 

이번 편에선 시점이 북방 땅으로 향해 있습니다. 자코를 괴롭히던 도적 토후바의 시점입니다.

 

오랜만에 피오니가 등장했는데... 전작 소서리스에서도 등장했던 캐릭터입니다. 소서리스에선 중립선의 성직자로 나왔는데, 이곳에선 무려 왕비입니다. 중립선 성향이라 고문을 싫어합니다.


지금 문피아 접속이 안되어서 모바일로 글 올리는데.. 정말 힘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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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더 팔라딘(The Paladins)-65화: 식량 +12 14.01.08 1,983 35 21쪽
65 더 팔라딘(The Paladins)-64화: 신의 대결 +16 14.01.06 1,794 37 17쪽
64 더 팔라딘(The Paladins)-63화: 의식이 완성되다 +4 14.01.03 1,396 29 19쪽
63 더 팔라딘(The Paladins)-62화: 신의 섭리 +8 14.01.02 2,140 31 23쪽
62 더 팔라딘(The Paladins)-61화: 매를 버는 남자 +12 13.12.29 1,630 36 14쪽
» 더 팔라딘(The Paladins)-60화: 뒷통수 +16 13.12.28 1,794 39 20쪽
60 더 팔라딘(The Paladins)-59화: 인신공양(人身供養) +18 13.08.07 2,900 52 27쪽
59 더 팔라딘(The Paladins)-58화: 괴물들이 모이다 +7 13.08.05 2,613 45 15쪽
58 더 팔라딘(The Paladins)-57화: 론 런너(Lone Runner)의 정체 +10 13.08.02 3,270 46 13쪽
57 더 팔라딘(The Paladins)-56화: 레드아이(Red Eye) +22 13.08.01 4,359 63 21쪽
56 더 팔라딘(The Paladins)-55화: 부활 +33 13.03.02 3,192 51 19쪽
55 더 팔라딘(The Paladins)-54화: 외로운 협객 +15 13.02.25 2,569 43 20쪽
54 더 팔라딘(The Paladins)-53화: 라이온하트 기사단 +14 13.02.21 2,592 39 20쪽
53 더 팔라딘(The Paladins)-52화: 악의 군대가 움직이다. +19 13.02.16 2,175 48 18쪽
52 더 팔라딘(The Paladins)-51화: 에뎁세스(Edepses)의 반지 +26 13.02.13 2,611 42 25쪽
51 더 팔라딘(The Paladins)-50화: 지옥의 몽둥이 +31 13.02.11 2,606 32 24쪽
50 더 팔라딘(The Paladins)-49화: 드래곤과 만나다 +17 13.02.08 2,329 41 16쪽
49 더 팔라딘(The Paladins)-48화: 남쪽 동굴 +18 13.02.05 2,770 39 17쪽
48 더 팔라딘(The Paladins)-47화: 두루마리의 글자 +13 13.02.02 2,518 38 17쪽
47 더 팔라딘(The Paladins)-46화: 동방의 무술 +12 13.01.31 2,513 44 26쪽
46 더 팔라딘(The Paladins)-45화: 잡화상 아벤(Aben) +9 13.01.30 2,237 33 18쪽
45 더 팔라딘(The Paladins)-44화: 손님, 손님, 그리고 또 손님 +12 13.01.29 2,345 36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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