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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알라 님의 서재입니다.

21세기 퇴마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위대한알라
작품등록일 :
2015.02.13 16:20
최근연재일 :
2015.04.12 18:01
연재수 :
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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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42
추천수 :
565
글자수 :
387,690

작성
15.03.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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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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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8쪽

Chapter3. Love OR Hate(12)

본 글에 등장하는 사건, 장소, 인물, 단체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임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DUMMY

희수는 다리가 부러진 당구대, 두 동강 난 큐대, 먼지 쌓인 의자 등이 즐비한 창고 안에서 양 손이 뒤로 묶인 채 얌전히 앉아있었다. 흡혈귀로서 60세를 바라보는 희수의 근력은 성인 남성의 최대 10배에 근접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를 묶을 수 있는 수단은 없지만 흡혈귀용으로 만들어진 특수 수갑 같은 경우는 순수한 근력만으로 끊을 수 없었다.


두 다리는 자유로웠지만 감시하는 목적으로 붙인 두 명의 흡혈귀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 둘은 슬레이어의 아지트에서 가져온 은탄환이 꽉꽉 채워진 M16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희수를 감시하는 역할만이라면 무장은 필요 없을 것이다. 슬레이어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만약의 경우엔 희수를 감시하는 걸 제쳐두고 바로 전투에 합류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희수 씨. 미안합니다. 이런 꼴로 만들어서.”


감시자 중 한 명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는 광현과 희수가 루터즈 패밀리를 이끌 때 따르던 자였지만 광현이 죽고 구심점을 잃은 조직을 휘어잡지 못한 희수에게 실망하여 배신했다. 다만 희수의 실력만큼은 인정해서 정중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런 건 됐어. 내 잘못이기도 하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수는 그의 태도 덕분에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현주는 어디에 있지?”

“보스와 함께 위층에 있습니다.”

“슬레이어를 위협하려는 속셈인가?”

“그런 거죠.”


감시자는 긍정을 표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광현과 희수를 따랐던 그이니만큼 지금의 보스가 보여주는 야비하고 치졸한 방식은 도저히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와 동료들을 버리고 조직을 탈퇴할 수도 없는 짓이다. 그 또한 슬레이어에게 동료들을 잃은 자.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다.


“정말 올까?”


또 다른 감시자가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태까지 슬레이어의 행적을 되짚어 본다면 반드시 오겠지.”


희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감시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증오의 화신. 도살자. 인간병기. 옷장 속 괴물. 21세기에 들어서 흡혈귀들에게 이토록 공포를 심어준 존재가 과연 또 있을까. 그것도 한낱 인간인 헌터가.


“승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우리에겐 녀석의 아지트에서 가져온 무기가 있다. 반대로 놈의 무장은 빈약할 수밖에 없겠지. 잘만 한다면 정말 슬레이어를 잡을 수 있을 지도 몰라.”


확실히 희수의 판단은 옳았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슬레이어라고 해도 총알세례에서 무사하기는 힘들다. 일단 이쪽의 수가 훨씬 많은데다가 지형도 익숙하다. 거기에 화력마저 압도하니 질 래야 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희수의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래층에서 총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투드드드득. 탕. 탕. 끄아아아악!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왔다.”




퍼억!


통쾌한 소리와 함께 흡혈귀의 몸통을 꿰뚫고 검은 오러에 뒤덮인 손이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혈귀는 그 질긴 생명력으로 아가리를 벌려 자신의 몸을 꿰뚫은 자의 목덜미를 물려고 했다. 시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나빴다. 날카로운 어금니는 검은 오러에 막혀 피부를 파고 들 수가 없었다.


흡혈귀는 도대체 이 정체불명의 검은 오러가 무엇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연기처럼 만져지지 않고 질량도 없으면서 어지간한 공격은 전부 방어해낸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야 겨우 오러를 뚫을 수 있는데 그래봤자 경미한 상처를 입힐 뿐이고 그마저도 금방 재생이 된다. 그러면서 흡혈귀의 단단한 육체를 두 동강 낼 수 있는 공격력도 가지고 있으니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애쓰는구나, 흡혈귀.”


흡혈귀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는 악귀는 다른 손으로 그의 목을 분질러버렸다. 파르르. 흡혈귀가 잠시 경련하다가 축 늘어졌다. 악귀는 그제야 숨이 끊어진 흡혈귀의 시신을 쓰레기 마냥 옆으로 던져버리면서 중얼거렸다.


“1층은 이걸로 정리된 건가?”


수혁의 몸을 차지한 슬레이어의 발치에는 대략 10명 정도 되는 흡혈귀 시신이 쌓여있었다. 사지가 분리되거나 목이 없는 건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허리가 두 동강 나거나 방금 전처럼 가슴이 뻥 뚫려 몸속이 훤히 보이는 시신은 토악질이 절로 나올 정도로 끔찍했다. 정말이지,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를 이룬다는 말이 이보다도 들어맞는 광경이 존재하리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정문에 보초를 세운 만큼 1층에도 흡혈귀들은 진을 치고 있었다. 메모에 적혀있던 당구장의 위치는 이 건물의 4층. 아마도 1층과 마찬가지로 2층과 3층에도 놈들이 있을 것이다. 입주하겠다는 가게가 없어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이 건물은 이미 흡혈귀들의 수중인 듯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건물 전체에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을 테니까.


슬레이어는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앞서 시체를 뒤지며 쓸 만한 무기들을 집어 들었다. 많이는 필요 없었다. 몸 자체가 흉기나 다름없으니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글록, 스턴 그레네이드 정도면 충분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직행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엘리베이터에 어떤 장치를 해뒀을 지도 모르고, 문이 열리는 순간 총격을 가해오면 무방비상태로 맞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페르소나의 방어력이 엄청나다지만 총탄을 정면에서 방어해내지는 못한다. 차라리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가면서 적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는 게 훨씬 나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비상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려는 길에 M16을 든 흡혈귀들이 책걸상 따위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슬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총알을 마구 퍼부어댔다. 물론 그걸 맞아줄 리가 없었다. 그는 재빠르게 벽으로 몸을 숨겼다.


“슬레이어닷! 죽여!”

“쏴라, 쏴!”


목표가 이미 사각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흡혈귀들은 방아쇠를 당겼다. 콰창. 와장창. 대리석 벽이 탄환에 깨지며 시끄러운 소음을 낸다. 먼지와 대리석 가루가 휘날려 시야가 희뿌옇게 변했다.


슬레이어는 바로 옆에서 총알세례가 퍼부어져도 침착하게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쏘아대는 걸 보면 이제 곧 탄창이 텅 비어버릴 것이고 탄창을 교체하는 순간이 공격할 타이밍인 것이다.


이윽고 놈들의 무차별 사격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슬레이어는 놓치지 않고 사각에서 뛰쳐나와 벽을 박차고 계단 위쪽으로 날아들었다. 정말이지 흡혈귀들조차 반응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일단 가까워지면 그 다음엔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자세를 낮게 낮춘 채 한 바퀴 돌면서 다리로 지면을 휩쓸어버리자 흡혈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들 전원의 발목이 깨끗하게 잘려나간 것이다.


슬레이어는 바닥에 쓰러진 흡혈귀들의 머리통을 하나하나 발로 짓뭉갰다. 뻑! 뻑! 가죽이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허연 뇌수와 핏물이 사방에 튀었다. 하급 흡혈귀들은 꼭 은탄환이나 마법이 걸린 무기에 당하지 않더라도 육신이 산산조각나면 아무리 재생력이 있더라도 죽어버리고 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마지막 흡혈귀의 머리통을 밟아 부순 뒤 문득 그가 귓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축축하고 끈적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마 방금 달려들 때 흡혈귀가 쏜 총알에 스친 듯 했다. 역시 검은 오러는 경이적인 방어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총까지 방어해내지 못하나 보다.


“왜 재생이 안 되는 거지?”


거의 죽기 일보 직전에서도 재생했던 그이기에 이 정도 상처쯤이면 1초도 지나지 않아 정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서히 아물고는 있지만 전과 그 속도가 확연히 차이 났다.


“아아. 그렇군. 은탄환인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은이 가지는 능력은 부정(不淨)한 것을 없애는 정화의 힘. 예로부터 그 힘을 알고 있었던 교회나 성당에선 엑소시스트를 순은으로 무장시켰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은탄환이 몸에 박힌 마물들은 눈에 띄게 힘이 약해져 퇴마행위가 더욱 수월해진 것이다.


세월이 지나 그 사실이 널리 퍼져 엑소시스트들만이 아닌 다른 퇴마사들 혹은 헌터들도 은으로 무장을 하는 게 필수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수혁 또한 예외는 아니라서 거의 모든 총기의 탄창에 은탄환을 꽉꽉 채워놓고 다녔다. 흡혈귀들의 힘, 특히나 재생력을 급감시키는 은의 효과는 마음에 꼭 들었다.


적들이 수혁의 아지트에서 무기를 뺏어간 지금, 그에겐 오히려 악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은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소리는 나 또한 빌어먹을 흡혈귀들처럼 부정한 것이라는 건가? 큭큭큭. 멋지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슬레이어가 큭큭 웃어댔다. 하긴, 마이너스의 감정인 증오에 의해 탄생되어 오로지 피만 바라는 페르소나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면 뭐겠는가.


“어이, 박수혁. 네가 증오해마지 않는 흡혈귀들과 동급으로 취급당하는 느낌은 어때?”


허공을 바라보며 슬레이어가 묻자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어서 위층으로 올라가.


“하하. 기분 상했나?”


-...


정말로 상한 모양이군. 슬레이어는 중얼거렸다. 예전의 수혁이라면 ‘나는 네가 아니야.’라고 말할 게 분명했을 테지만 아인잠카이트의 설명을 듣고 나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란 걸 인정한 그가 이제와 변명할 리는 없었다.


“아무려면 어때. 킥킥킥. 흡혈귀만 죽일 수 있다면 부정한 것이든 뭐든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수혁은 슬레이어에게 몸의 주도권을 넘겨준 이후로 쭉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 번이나 경험했지만 기묘한 체험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몸이지만 느껴지는 감각이라곤 오로지 시각과 청각뿐이어서 마치 멀찌감치 떨어져 2D 영화를 보는 듯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사고(思考)는 할 수 있어도, 행동은 불가능했다.


평소에 슬레이어는 이런 상태로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었겠지.


만약 페르소나를 발동시키지 않은 그였다면 애먹거나 힘들었을 상대를 닭 모가지 비틀어버리듯이 손쉽게 살해하는 슬레이어를 보고 있자니 기이한 쾌감이 몰려왔다. 이 힘만 있다면, 정말 흡혈귀를 멸종시킬 수 있지 않을까? 멸종까진 무리더라도 적어도 수 천 명은 학살할 수 있지 않을까? 그와 동시에 도대체 왜 자신이 진작 이 힘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곧 그는 그 끔찍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인잠카이트가 충고했었다. 힘에 취하면 언젠가 페르소나에게 몸을 빼앗겨 버린다고. 그리하여 결국 괴물이 되어버린다고. 수혁은 인간으로서 흡혈귀를 죽이고 싶지 그런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넋을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페르소나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마지막만큼은 그 스스로가 선택을 결정해야 했다. 현주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죽일 것인지.


때문에 정신을 예리하게 가다듬고 냉정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아인잠카이트는 페르소나 사용자는 자유자재로 페르소나를 발현시킬 수 있다고 했다.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사족을 덧붙이긴 했지만, 어쨌든 주도권을 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상 강제로 되찾아 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수혁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불리한 전황을 뒤집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페르소나의 힘을 빌리긴 했어도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내리는 것은 반드시 자신이여야만 했다. 그 어떤 고난이라도, 그 어떤 시련이라도 그 자신의 힘으로 돌파할 것이다. 비록 현주를 죽인다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피가 묻는 건 그의 손이어야지 슬레이어의 손이 아니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비상구 계단 역시 흡혈귀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 마리의 짐승이 벼락처럼 돌진하자 마치 양떼 속에 늑대가 뛰어든 듯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맥없이 피를 뿌리며 나뒹군다.


“죽어! 죽어! 죽어!”


흡혈귀 하나가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여 은탄환을 쏟아냈다. 얌전히 맞을 슬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는 옆이나 뒤로 피해 총격을 피하는 대신 오히려 앞으로 파고든 다음 가슴에 일격을 꽂았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타닥. 무언가가 벽을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뚝 하고 슬레이어의 앞에 동그란 물체가 떨어졌다. 익숙한 형태. 위에 대기하고 있던 흡혈귀들이 수류탄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수류탄을 계단 위쪽으로 발로 뻥 차놓고 자신은 몸을 날려 바닥에 엎드렸다. 잠시 후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쿠릉 하고 흔들리더니 먼지가 쏟아져 내린다.


폭발의 충격이 가시자 수혁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계단 위쪽은 수류탄에 의해 살점과 핏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신속하게 계단을 올라가는데 날카로운 물체가 공기를 가르며 미간으로 날아온다. 운 좋게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흡혈귀가 던진 군용 단검이었다. 슬레이어는 인간의 몸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날아오는 단검을 어렵지 않게 낚아챌 수 있었다. 와지직.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단검이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단검을 던진 장본인은 몸을 날려 몸을 부딪혀왔다. 묵직한 몸통박치기는 검은 오러 덕분에 상처 하나 없이 막아낼 순 있었지만 온 힘을 실은 공격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슬레이어라고 해도 뒤로 튕겨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흡혈귀와 슬레이어가 서로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죽어라!”


퍼벅


호기롭게 외친 것과 달리 부서져 내린 것은 흡혈귀의 머리통이었다. 두개골이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면서 그 안의 내용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슬레이어는 멀쩡한 표정으로 허연 뇌수가 들러붙은 손을 탈탈 털어내고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쿨럭!”

“아직 살아있는 놈이 있었나?”


용케 숨이 붙어 있는 흡혈귀 하나가 쿨럭이며 흉흉한 눈빛을 띠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흉측하게 짓이겨져 있는 오른팔이나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튀는 걸 보니 굳이 끝을 낼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개, 자식. 도대체 우리가, 쿨럭,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이런 짓을...”


이제 겨우 수혁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슬레이어는 기가 찬 나머지 콧방귀를 꼈다. 무슨 죄를 저질렀냐고? 네놈들의 존재 자체가 죄다. 인간을 먹이로 하고, 피를 마시고, 그 위에 포식자로 군림하는 것 자체가 죄다!


“뻔뻔하군, 흡혈귀. 뻔뻔하기 그지없어! 노숙자들을 납치해서 피를 빨아먹은 주제에 뻔뻔하게 죄가 없다고?”

“분명 그 방법에는 잘못이 있지. 그래도 우리는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어.”

“그게 면죄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큭큭. 우습군. 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굳이 인간을 죽이지 않더라도 많을 텐데!”

“네놈 같은 인간이 우리 흡혈귀들에 대해서 대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그래, 네 말대로 피를 구할 방법은 많지! 그게 얼마나 힘든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나?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냔 말이다!”


큭큭큭.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한 차례 비웃음을 흘렸다.


“짐승의 피를 마셔? 살 수야 있지! 항상 두통에 시달리면서 말이야! 죽지 않을 정도로만 피를 마셔?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집집마다 자물쇠가 걸려있고 어디를 가나 환한 요즘 같은 세상에서 가능할 것 같아? 수혈팩을 마셔? 웃기지 마! 집어치워! 우리처럼 가난한 흡혈귀들은, 우리처럼 길거리에서 감염되어서 태어난 흡혈귀들에겐 수혈팩을 살 돈 따윈 없어! 그 딴 건 수 백년을 산 귀족 놈들이나 할 수 있는 사치야!”


흡혈귀로서 살아온 한 남자의 피와 한이 맺힌 절규였다.


“너희 인간들이 우리를 사냥하는 이유는 온갖 가지들이 있지만 실상은 딱 하나야. 아주 간단해. 인정할 수 없는 거야. 인간들은 흔히 말하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킥킥킥. 그래. 그렇게 오만이 하늘을 찌르니 우리를 인정할 수 없는 거지! 먹고 먹히는 건 자연의 법칙일진데 스스로 그 법칙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칭송하는 인간들은 인간 위에 흡혈귀라는 종족이 있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 너 또한 그렇지 않은가! 너 또한 그 오만한 인간들 중 한 명이 아닌가!”


슬레이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로지 흡혈귀를 향한 증오심 뿐. 그저 흡혈귀를 죽이는 게 지상과제이자 단 하나 뿐인 목표였다. 그러니 그에겐 별 상관 없었다.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말만 골라서 하는군.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은 그게 끝이냐?”


스윽. 방금 전 수십의 흡혈귀를 도살한 손이, 그리고 앞으로도 무수한 흡혈귀를 죽음으로 인도할 사신의 손이 올라갔다.


“분명 흡혈귀는 사악할 지도 몰라.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죄일 지도 몰라. 그래도 우리는 엄연한 생명이다. 모두 누군가의 친구고, 가족이고, 연인이란 말이야. 살아있단 말이다. 우리도 살아있단 말이다!”


울컥.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면서 그가 절규했다.


“살아있단 말이다, 이 개자식아-!”


검은 오러로 일렁이는 손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떨어지는 순간, 슬레이어는 번쩍 치켜든 흡혈귀의 손에 기폭스위치가 들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콰콰콰쾅!


무시무시한 굉음이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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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6) +1 15.04.03 520 10 26쪽
43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5) +2 15.04.02 497 6 21쪽
42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4) 15.03.31 525 9 19쪽
41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3) +2 15.03.30 672 11 19쪽
40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2) +1 15.03.18 552 11 19쪽
39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1) +1 15.03.17 622 14 12쪽
38 Chapter3. Love OR Hate(Epilogue) +2 15.03.15 642 10 12쪽
37 Chapter3. Love OR Hate(13) 15.03.13 484 6 26쪽
» Chapter3. Love OR Hate(12) 15.03.13 463 6 18쪽
35 Chapter3. Love OR Hate(11) 15.03.11 459 9 19쪽
34 Chapter3. Love OR Hate(10) +1 15.03.10 447 10 16쪽
33 Chapter3. Love OR Hate(9) +1 15.03.08 352 9 16쪽
32 Chapter3. Love OR Hate(8) +1 15.03.08 605 9 21쪽
31 Chapter3. Love OR Hate(7) +2 15.03.07 528 11 29쪽
30 Chapter3. Love OR Hate(6) 15.03.07 457 9 21쪽
29 Chapter3. Love OR Hate(5) +1 15.03.06 508 9 21쪽
28 Chapter3. Love OR Hate(4) 15.03.05 431 9 17쪽
27 Chapter3. Love OR Hate(3) 15.03.05 513 9 26쪽
26 Chapter3. Love OR Hate(2) 15.03.04 529 9 19쪽
25 Chapter3. Love OR Hate(1) +1 15.03.02 617 16 21쪽
24 Chapter2. 시체놀이꾼(Epilogue) 15.03.01 408 9 11쪽
23 Chapter2. 시체놀이꾼(11) +1 15.03.01 535 10 16쪽
22 Chapter2. 시체놀이꾼(10) 15.03.01 559 15 16쪽
21 Chapter2. 시체놀이꾼(9) 15.02.28 534 10 20쪽
20 Chapter2. 시체놀이꾼(8) +1 15.02.26 447 10 20쪽
19 Chapter2. 시체놀이꾼(7) 15.02.26 676 11 21쪽
18 Chapter2. 시체놀이꾼(6) +2 15.02.25 682 10 25쪽
17 Chapter2. 시체놀이꾼(5) 15.02.24 597 13 24쪽
16 Chapter2. 시체놀이꾼(4) 15.02.23 458 10 19쪽
15 Chapter2. 시체놀이꾼(3) 15.02.22 582 12 13쪽
14 Chapter2. 시체놀이꾼(2) 15.02.22 688 12 14쪽
13 Chapter2. 시체놀이꾼(1) 15.02.21 764 15 19쪽
1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Epilogue) 15.02.20 754 11 14쪽
1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1) +1 15.02.20 584 15 16쪽
10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0) 15.02.19 645 14 17쪽
9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9) 15.02.18 771 13 15쪽
8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8) 15.02.17 764 14 16쪽
7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7) 15.02.17 771 16 20쪽
6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6) +1 15.02.16 931 15 15쪽
5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5) +2 15.02.15 965 19 20쪽
4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4) 15.02.14 1,085 16 17쪽
3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3) +1 15.02.14 1,226 20 16쪽
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2) 15.02.13 1,711 26 15쪽
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 +2 15.02.13 2,893 3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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