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위대한알라 님의 서재입니다.

21세기 퇴마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위대한알라
작품등록일 :
2015.02.13 16:20
최근연재일 :
2015.04.12 18:0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31,552
추천수 :
565
글자수 :
387,690

작성
15.02.28 15:49
조회
534
추천
10
글자
20쪽

Chapter2. 시체놀이꾼(9)

본 글에 등장하는 사건, 장소, 인물, 단체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임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DUMMY

“왜 제가 그렇게 생각하냐면 말이죠. 그 이유는...”

“도착했네요. 내려요.”

“아, 네.”


흥미 없는 반응으로 일관하자 중개인은 금방 입을 다물고 본연의 일에 충실했다.


벨라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약속된 방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걱정된다며 끝까지 따라 들어왔다.


방은 크고 고급스러웠다. 퇴폐적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스위트룸인 듯 했다. 깔끔하고 깨끗했다. 거실 한 가운데에 마련된 커다란 회의용 탁자가 있었다. 거기에 한 인물이 앉아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등을 돌린 채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제 오셨군요.”


돌아보지 않고 인사를 건넨다. 꽤 건방진 자세였다. 하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괴팍하기 이를 데가 없는 시간 개념 탓에 늙고 음산한 마법사일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벨라 시몬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너무 잘 알고 있죠.”


그 자가 몸을 돌렸다.


“오래간만이에요, 벨라 시몬. 아니, ‘알케미스트’라고 불러야 할까요?”


벨라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얼른 그 정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다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오싹함이 전신에 감돌았다.


“이거야, 이거야. 설마 절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실망이군요. 전 당신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데요.”


그는 마치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벨라는 서커스의 광대처럼 과장된 행동이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그 능글맞은 미소. 그 과장된 행동은...


아! 순간, 아주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누군가의 얼굴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요한 베네딕트?”


벨라가 경악하자 요한 베네딕트는 예의 과장된 연기로 환호한다.


“이야아. 드디어 기억해냈네요.”


요한 베네딕트는 배트맨에 나오는 악당 조커를 연상케 하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벨라를 향해 다가왔다. 벨라가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무릎이 미세하게 떨렸다.


타락한 마법사.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추악하고 흉측한 존재. 불문율을 깨고 금기의 마법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저속한 자. 우주의 섭리를 거부하면서 우주의 근원에 다가가고자 하는 이단아. 인간이면서 인간을 거부하고 불로불사의 몸을 추구하는 마법사, 네크로맨서.


“시체놀이꾼, 요한 베네딕트!”

“하하. 그 별명, 좋은 어감 아닙니까? 누군지 몰라도 참 잘 지었다니까.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이 내게 준 이름이죠? 시체놀이꾼! 콥스 플레이어(Corpse Player)! 크으. 설마 당신에게 그런 센스가 있을 줄 몰랐어요.”

“미친 자식.”

“전에 ‘알케미스트’도 제법 괜찮았지만 전 이쪽이 더 마음에 들어요. 시체놀이꾼! 얼마나 익살스러운 별명입니까. 그런 점에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놀라운 말을 꺼냈다. 알케미스트라니? 그것은 벨라의 현재 칭호이지 않은가.


“하아. 제가 비밀리에 네크로맨시를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만 마법부에 알리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참 안타깝군요.”


요한 베네딕트. 그의 정체는 전(前) 알케미스트였다. 본래 마법사들 사이에서 칭호란 다른 사람들에게 별명처럼 불리는 게 보통이라서 같은 경우가 거의 없지만, 각 분야의 최고를 뜻하는 ‘알케미스트’, ‘인형사’, ‘블랙스미스’ 등 같은 칭호들은 예외적으로 계승되는 전통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요한과 벨라의 경우, 요한은 알케미스트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변성 마법에 능통했으나 불로불사를 연구하는 금기를 저질렀기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 다음으로 실력이 높은 벨라에게 그 칭호가 계승된 것이다.


둘은 선후배 사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실제로 마법 학교에 다닐 시절 요한과 벨라는 1, 2등을 다투는 선의의 경쟁을 하던 선후배 사이였다. 5년 전, 우연히 그가 네크로맨시라는 금지의 마법에 심취해있다는 사실을 안 벨라가 고발하기 전까지.


따라서 벨라는 복수의 대상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헤매며 도망치는 것의 원인을 그녀가 제공한 셈이니까.


“아아. 정말이지. 당신 때문에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엉망이 돼? 벨라는 중얼거렸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를 죽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교수를 죽이고, 심지어 자기 부모까지 죽여서 실험 재료로 쓴 괴물 주제에!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자세히 보니 그건 와인이 아니었다. 걸쭉하기보다 검붉었다. 그게 피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진짜일 줄은.”

“아아. 우연히 고위 뱀파이어의 시체를 손에 얻어서 마침 잘됐다 싶었거든요. 비록 완전한 불로불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절반인 불로(不老)만큼은 이룰 수 있었으니까요. 행운이었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요한을 노려보는 벨라는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이놈은 인간으로서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건가? 벨라는 도저히 눈앞의 상대와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얘기한다면 자신도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본인의 행동에 좀 더 조심스러우면 어떨까요, 벨라 시몬? 난 다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 마법 학교 설립 건으로 왔고 현재는 아인잠카이트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까지.”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요한이 와인잔을 입에 가져갈 때 벨라는 방을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곧 억센 팔에 붙잡혀 무산되고 말았다.


요한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서있던 중개인이 무표정으로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다, 당신!”

“...”


벨라와 대조되는 어두운 금발 머리의 마법사가 박장대소한다.


“하하하! 사실 당신을 어떻게 불러낼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필이면 아인잠카이트와 함께라니. 아무리 저라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인물이잖아요? 그래서 이쪽을 이용해본 겁니다. 그 결과!”


요한은 양팔을 펼쳤다. 그 바람에 와인잔이 저 멀리 날아갔다.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에 맞춰 큰소리로 외친다.


“따란! 당신이 제 앞에 와있는 겁니다!”

“으윽!”

“아, 덧붙여 말하자면 그 자에겐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부디 고인을 욕하지 말아주세요.”

“뭐?”

“죽었습니다. 시체조종술로 움직이는 구울이죠. 제 하인이라고나 할까요. 하나 더. 당신이 만나기로 한 원래 인물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보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중개인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되려 차가움이 느껴졌다.


요한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포개며 말했다.


“아아. 정말이지. 당신을 만날 생각에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그 고민 때문에 지샌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 마침 이렇게 딱 좋은 인물이 있어서 쉽게 풀렸지 안 그랬으면 고생을 했을 텐데. 아아.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그 과장된 행동, 여전하군 그래?”

“워낙 극적인 걸 좋아하다보니 어쩔 수 없지요.”


벨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


“목적은 복수겠지?”


어두운 금빛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복수라고 말하면 제가 너무 속 좁은 인물처럼 보이지 않나요? 다르게 표현을 해보죠. 이건, 그러니까, 음...”


그는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했는지 말끝을 흐리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잇. 그냥 간단하게 복수하러 왔다고 하죠.”


상큼한 웃음. 그리고 명령.


“찢어 죽여 버려.”


콰악. 벨라의 양팔을 붙잡은 악력이 강해졌다.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힘에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요한은 벨라의 팔을 통째로 뜯어버릴 속셈이었다.


“가만히 당할 것 같아?! Wall!”


퍼버벅!


고통이 한계에 이르기 직전, 갑자기 중개인이 허공 위로 치솟았다.


벨라를 중심으로 기둥이 솟아올라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해서 단단한 대리석 바닥을 형태 변화시켜 마치 벽처럼 두껍게 주위에 두른 것이다. 중개인은 그 벽이 솟아날 때 받쳐서 날아간 것이다.


“간단한 시동어만으로 그만큼 형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니 역시 제 후배입니다. 어딘가에 마법진을 그려놓기는 했겠지만 정말 대단합니다.”


요한의 추측대로 벨라의 신발 밑창에는 형태 변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보통의 마법진은 한 번 사용하면 효력이 사라지는 일회용이지만, 어느 정도 실력 있는 마법사는 그려 넣은 마법진에 유지 기능을 추가시켜 마력을 주입하고 시동어만 외치면 언제든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전투형 마법사가 아닌 벨라는 세준처럼 따로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다. 다만 호신용으로 이렇게 늘 준비하고 다녔다. 실제로 사용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훌륭하긴 한데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까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르륵 하고 구울이 몸을 일으켰다.


무덤 근처를 배회하며 시체를 파먹는 유럽의 전설 속 괴물. 시체소생술로 인해 동력을 얻게 된 구울은 방금 전 변형된 대리석 기둥에 얻어맞아 몸의 일부가 함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죽은 이니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자아란 게 없어서 공포 또한 느끼지 못한다. 더구나 상처가 아무는 걸 보니 재생력마저 갖춰 까다롭기 그지없는 적이었다.


벨라는 구울을 상대하는 법을 책으로 배워 잘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구울들은 머리를 터트리면 그대로 즉사하지만, 움직임이 기민하므로 전투형 마법사가 아닌 그녀에게 좀 무리였다. 대신 신체기능의 불능, 즉 다리나 허리를 끊어버리면 움직이지 못하니 우선 그쪽으로 노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재생이 되더라도 최소한 후퇴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구울이 달려드는 걸 보고 벨라는 발로 힘껏 땅을 박찼다. 파지직 하고 신발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반응하면서 기둥을 변형시킨다. 기둥은 이번에 창처럼 변해 달려오던 구울의 가슴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굳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요한의 조종을 받는 구울은 몸이 관통되었어도 그대로 다가온다. 살이 찢기고 내장이 흩뿌려져도 개의치 않고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벨라는 또 다른 기둥을 생성시켜 이번엔 머리를 관통시켰다. 그제야 추욱 시체가 늘어진다.


벨라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을 게 분명한 요한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도망쳤다.


“어라? 도망가는 겁니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재빨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몇 번을 눌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 나온 요한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제법 공을 들였거든요. 이 층은 이미 제 공간입니다. 못 도망쳐요. 그냥 곱게 죽으세요.”

“싫어!”


비상계단을 찾기 위해 복도를 내달리는 벨라를 요한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입가에 미소마저 띄운 채였다.


복도 끝에 비상계단으로 가는 문이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초점 없는 눈, 생기 없는 얼굴을 한 자들이 괴이쩍은 소리를 내며 팔을 내뻗는다.


“헉!”


거의 무의식적으로 벽을 생성시켰으니 망정이지 자칫 붙잡힐 뻔했다. 구울들이었다. 요한이 이미 탈출구를 봉쇄한 것이다.


요한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 뒤로 복도에 줄지어 구울들이 서있다. 수가 어마어마했다. 줄잡아 50명은 넘어 보였다. 호텔의 넓은 복도는 죽은 자들로 가득 찼다.


“말했죠? 이 층은 제 공간이라고. 당신이 오기 전에 각 방에 숨겨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죽으세요.”

“도대체 그만한 수의 구울들을 어떻게 모은 거지?”


구울을 조종하기 위해선 당연히 시체가 필요하다. 구울의 수만큼 시체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저만한 수의 시체를 도대체 어디서 조달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자 던진 질문에 요한이 채 답하기도 전에 벨라는 어떤 사실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최근 벌어진 의문의 연속살인사건에 대해선 그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설마... 흡혈귀를 조종해서 살인을 저지른 게...?”

“네. 바로 접니다.”

“겨우 날 잡기 위해서 50명이 넘는 민간인을 죽였다고?”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입가엔 음흉한 미소가 걸려있다.


“아아, 설마요.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죠. 당신은 덤입니다.”

“무슨 소리야?”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의 뒤에 서있던 구울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두꺼운 벽을 생성시킬 시간이 부족했다. 형태를 바꾸려는 물질의 질량이 크면 클수록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었다.


급한 대로 벨라는 발을 한 번 굴러 바닥을 울렁이는 물결처럼 변형시켰다. 구울들은 불안정한 바닥에 적응하지 못하고 넘어진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번 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죽어버린 고깃덩어리들은 서로를 밟고 넘어서 오로지 그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세준에게 연락만 취할 수 있다면. 아주 잠깐이라도 도와달라고 연락할 수 있는 틈만 있다면.


벨라는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 복도 한쪽 벽을 발로 차더니 구멍을 만들고 그 안으로 쏘옥 뛰어든 것이다. 구울들도 따라 들어오려고 했지만 이미 막혀버린 뒤였다. 목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들은 멍하게 변해버렸다.


다른 방으로 도망치자마자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액정엔 통화권 이탈이라는 표시가 떠있다. 이곳은 서울이다. 그것도 울창한 산 속이 아니라 번듯한 호텔의 최고급 방이었다. 그런데 통화권 이탈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말은 요한이 먼저 수를 썼다는 의미였다. 아마 주변에 쳐진 얇은 마력의 장막이 전자파를 방해하는 결계인 모양이다.


“이 정도쯤은!”


벨라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결계를 통째로 파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고 만반의 준비를 한 요한의 마법을 해제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다만 아주 자그마한 틈을 만들어서 일시적으로 통화가 되게 만드는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마법이란 이미지와 본인의 의지에 의해 현실화되는 것. 벨라는 머릿속에 가느다란 바늘을 떠올렸다. 이미지가 명확해지자 마력을 운용한다. 실제로 마력 자체가 바늘처럼 변하는 건 아니다. 바늘이 가진 ‘날카롭고 물체를 뚫는다’는 이미지가 마력에 그러한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완성된 마법을 결계의 가장 약한 곳에 찔러 넣는다는 상상을 한다. 효과가 있었다. 일시적으로 장막 일부에 틈이 생긴 것이다. 휴대폰 액정엔 미약하지만 신호가 표시되었다.


벨라는 재빨리 저장되어 있는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몇 번 울리지도 않고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세, 세준!”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벨라?”

“지금 쫓기고 있어. 도와줘! 문자 봤지? 00호텔이야! 공격받고 있어!”

“치이이익-- 라! 벨라! 이봐, 무슨 일이야! 치이이익--”


시끄러운 잡음이 가득했다. 벨라는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음성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곧 통화는 끊기고 만다.


“제길!”


한편 밖에 있던 요한은 느긋했다.


“방으로 도망친 건 좋지만 스스로를 가둔 꼴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벨라처럼 미리 형태 변형 마법을 준비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요한 역시 알케미스트 칭호를 가질 수 있었던 만큼 벽 하나에 구멍을 뚫는 정도는 쉬웠다. 짤막한 주문을 외우고 벽에 손을 대자 파지직 하고 스파크가 튄다. 요한은 구멍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구울들 모두가 통과할 수 있게 벽을 부숴버렸다.


그 짧은 시간 사이 벨라는 어디론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손에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다.


“소용없어요. 몇 번을 말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전자파 교란도 생각해놓지 못했을 것 같나요? 아인잠카이트에게 연락을 한 모양인데 소용없습니다. 지금 바쁠 테니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의아해졌다. 설마 요한은 세준의 동선까지 전부 파악했단 말인가?


“이래봬도 제가 좋다고 하는 분들이 몇몇 계셔서 말이죠. 매우 협력적인 자세로 나오시더군요.”

“너 같은 놈을 누가 좋아해?”

“하하. 상처 받는 말이네요.”


여유만만 한 낯짝을 한 요한은 짝짝 박수를 쳤다. 벨라는 그 낯짝을 한 번 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지만 현 상황에선 어불성설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 강하군요. 이런 상황에서조차 당당하다니. 하긴 당신은 학생 때도 그랬죠.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벨라 시몬.”

“징그러우니까 관두지 그래?”

“왜요? 칭찬입니다.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어요.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그 정신, 용기. 대단합니다. 허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용기입니다. 이제 그만 받아들이세요.”

“자, 잠깐!”


벨라는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세준은 전화를 받았다. 그라면 위험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가 올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더 벌어야 했다.


“아까 네가 말했지. 나 말고 다른 목적이 있다고. 그게 뭔지 알 수 있을까?”


어이가 없다는 듯, 또는 재미있다는 듯이 요한이 피식 웃었다.


“왜요?”

“기왕 죽을 거 궁금증이나 풀어보려고.”

“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핫! 벨라 시몬! 당신은 정말이지 최곱니다! 아아, 맞아요. 예전부터 궁금한 건 절대로 못 참는 성격이었죠. 기억납니다. 기억하세요? 체사레 교수가 당신의 질문세례를 피하려고 여자 화장실에 숨어있었다가 하필이면 당시 교감이었던 애니 교수에게 들켜서 한 달 동안 화장실 청소했던 것 말입니다.”


쿡쿡쿡. 요한은 박장대소했다.


“아하하. 맞아. 그랬던 적도 있었죠. 아아, 즐거운 기억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두 분은 잘 계신가요? 저하고도 제법 친했는데 말이죠.”

“네가 죽였잖아.”


뚝 하고 웃음소리가 끊겼다. 벨라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가 네크로맨시를 연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교수들이 붙잡으러 갔을 때 두 분은 거기 계셨다.”

“...그랬군요. 이런, 안타깝습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었군요.”


요한은 정말로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하필 거기 계셨다니. 너무 많은 분들이 쫓아오셔서 되는 대로 죽인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군요. 제대로 작별인사조차 못했으니까요.”


정말 제대로 미친 녀석이었다. 벨라는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행입니다. 당신과는 이렇게 제대로 작별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아직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거 말인데요.”


요한이 손을 번쩍 올리며 말끝을 맺는다.


“죽기 전에 궁금한 거 하나 남기는 것도 좋잖아요?”


신호와 함께 수많은 구울들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욕설을 내뱉으며 벽을 세웠지만 그것을 넘어서 위로 공격해오는 구울을 피해 옆으로 몸을 구른다. 쉭쉭. 벨라가 있던 자리가 날카로운 손톱에 갈라지는 바람소리가 매섭다.


다시 한 번의 돌격. 벨라는 이번엔 벽이 아니라 사방으로 넓게 퍼지는 형태의 방책을 세웠다. 그 끝이 날카로워 달려오는 속도를 이기지 못한 구울들은 거기에 처박혀 꼬챙이가 되는 수모를 당했으나 몇 놈이 그 방책마저 넘어서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구울은 특성상 행동이 느렸다. 전투 경험이 없는 벨라도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벽을 세우고, 방책으로 그들의 전진을 막아도 포위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요한의 말대로 방으로 들어온 건 잠깐의 시간벌이에 불과하고 퇴로를 막는 악수가 되고 말았다.


‘아아. 죽는 거구나.’


구울의 시커먼 손톱이 그녀의 목을 노리고 쏘아져 오는 순간, 그녀는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21세기 퇴마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6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8) +3 15.04.12 637 8 15쪽
45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7) +2 15.04.06 455 10 18쪽
44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6) +1 15.04.03 520 10 26쪽
43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5) +2 15.04.02 497 6 21쪽
42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4) 15.03.31 525 9 19쪽
41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3) +2 15.03.30 673 11 19쪽
40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2) +1 15.03.18 552 11 19쪽
39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1) +1 15.03.17 622 14 12쪽
38 Chapter3. Love OR Hate(Epilogue) +2 15.03.15 642 10 12쪽
37 Chapter3. Love OR Hate(13) 15.03.13 484 6 26쪽
36 Chapter3. Love OR Hate(12) 15.03.13 463 6 18쪽
35 Chapter3. Love OR Hate(11) 15.03.11 459 9 19쪽
34 Chapter3. Love OR Hate(10) +1 15.03.10 447 10 16쪽
33 Chapter3. Love OR Hate(9) +1 15.03.08 353 9 16쪽
32 Chapter3. Love OR Hate(8) +1 15.03.08 605 9 21쪽
31 Chapter3. Love OR Hate(7) +2 15.03.07 528 11 29쪽
30 Chapter3. Love OR Hate(6) 15.03.07 457 9 21쪽
29 Chapter3. Love OR Hate(5) +1 15.03.06 508 9 21쪽
28 Chapter3. Love OR Hate(4) 15.03.05 431 9 17쪽
27 Chapter3. Love OR Hate(3) 15.03.05 513 9 26쪽
26 Chapter3. Love OR Hate(2) 15.03.04 529 9 19쪽
25 Chapter3. Love OR Hate(1) +1 15.03.02 618 16 21쪽
24 Chapter2. 시체놀이꾼(Epilogue) 15.03.01 408 9 11쪽
23 Chapter2. 시체놀이꾼(11) +1 15.03.01 535 10 16쪽
22 Chapter2. 시체놀이꾼(10) 15.03.01 560 15 16쪽
» Chapter2. 시체놀이꾼(9) 15.02.28 535 10 20쪽
20 Chapter2. 시체놀이꾼(8) +1 15.02.26 447 10 20쪽
19 Chapter2. 시체놀이꾼(7) 15.02.26 676 11 21쪽
18 Chapter2. 시체놀이꾼(6) +2 15.02.25 682 10 25쪽
17 Chapter2. 시체놀이꾼(5) 15.02.24 597 13 24쪽
16 Chapter2. 시체놀이꾼(4) 15.02.23 458 10 19쪽
15 Chapter2. 시체놀이꾼(3) 15.02.22 582 12 13쪽
14 Chapter2. 시체놀이꾼(2) 15.02.22 688 12 14쪽
13 Chapter2. 시체놀이꾼(1) 15.02.21 764 15 19쪽
1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Epilogue) 15.02.20 754 11 14쪽
1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1) +1 15.02.20 585 15 16쪽
10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0) 15.02.19 645 14 17쪽
9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9) 15.02.18 771 13 15쪽
8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8) 15.02.17 765 14 16쪽
7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7) 15.02.17 771 16 20쪽
6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6) +1 15.02.16 931 15 15쪽
5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5) +2 15.02.15 965 19 20쪽
4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4) 15.02.14 1,085 16 17쪽
3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3) +1 15.02.14 1,226 20 16쪽
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2) 15.02.13 1,711 26 15쪽
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 +2 15.02.13 2,894 39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