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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알라 님의 서재입니다.

21세기 퇴마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위대한알라
작품등록일 :
2015.02.13 16:20
최근연재일 :
2015.04.12 18:01
연재수 :
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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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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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글자수 :
387,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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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0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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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Chapter3. Love OR Hate(2)

본 글에 등장하는 사건, 장소, 인물, 단체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임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DUMMY

건장한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우면 꽉 들어차는 좁은 방에서 박수혁은 눈을 떴다. 시선의 끝이 닿는 곳엔 더러운 천장이 있었다. 비만 오면 누렇고 검게 곰팡이가 피는 천장은 너덜너덜해진 벽지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했다. 뜯어진 벽지 사이로 보이는 콘크리트에는 초록색 이끼마저 끼어 있어 이 방이 그다지 위생상 건전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창문으로 붉은 석양의 빛이 새어 들어와 그의 몸을 어루만지자 인간의 육체를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여 단련시킨 근육이 드러난다. 킥복싱, 무에타이 등 실전용 무예로 단련된 육체는 비록 뱀파이어에 비해선 손색이 있지만 웬만한 성인 남성은 단번에 때려눕힐 수 있는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수혁이 누워있던 자리를 제외하면 방에는 각종 도검류와 총기류, 심지어 폭약류도 보란 듯이 널려있었다. 만약 경찰이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간단히 징역 20년은 얻을 만큼 방의 풍경은 살벌했다. 물론 불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경찰이 올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빛을 피해 밤에 활동하는 뱀파이어의 생활 주기에 맞추는 것은 헌터의 기본 사항이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 즈음, 수혁은 라면으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사냥하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그 전에 앞서 어딘가 들릴 데가 있기에 집을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품속에 글록을 숨겨둔 채였다. 탄창에는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은탄환이 꽉꽉 채워져 있다.


수혁이 사는 동네는 서울의 외각에 위치한 외진 곳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슈퍼마켓과 그 옆에 새로 들어선 대형 마트. 두 곳 모두 손님이 없어 파리 날리기는 매 한 가지인 동네. 수혁은 중얼거렸다.


“한가롭군.”


매일 밤마다 피로 피를 씻는 그와 달리 세상 사람들은 한가롭게 살아가고 있다. 자기들 딴에는 하루하루 벌어먹기도 힘들다며 온갖 푸념을 늘어놓지만 글쎄... 수혁의 삶을 단 하루,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체험한다면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한 인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문득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 던지니 커다란 빌딩들이 숲을 이룬 도시의 일부분이 망막에 비친다. 같은 지명을 가진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수혁이 발을 붙이는 이곳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극히 부조리한 풍경.


수혁은 모순된 도시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날뛰고 있는 존재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피를 갈구하고, 인육을 취하며, 인간에게 자신의 피를 주입하여 개체수를 확산시키는 짐승들. 겉보기론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지만 햇빛에 노출되면 온 몸에서 불이 피어올라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비현실적인 존재들.


뱀파이어.


인간과 비슷한 외형으로 엘프(Elf), 드워프(Dwarf) 등과 함께 대표적인 유사인종에 속해있는 그들은 인간을 먹이로 삼고 비록 햇빛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불로(不老)의 힘을 가졌으며 강력한 육체를 가진 신화 속 괴물이다. 타액 또는 혈액을 인간에게 주입할 경우, 대상이 수 시간 이내에 뱀파이어로 변하는 경이적인 전염 속도 때문에 과거 어마어마한 세력을 떨치던 종족.


그것도 먼 옛날의 이야기다. 근대에 들어서 인간이 발명한 총이라는 무기는 나약한 인간일 지라도 흡혈귀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주었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처럼 십자가나 마늘에 영향을 받지 않는 현대의 흡혈귀들이라고는 해도 육체를 이루는 구성 물질은 인간과 동일하기 때문에 죽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200살 이상 되는 고위 뱀파이어라면 재생력으로 어느 정도의 상처쯤은 금방 재생할 수 있겠지만 그 숫자는 전체 뱀파이어들 중 고작 상위 1%에 불과하고 나머지 99%의 뱀파이어들은 은탄환에 뇌가 관통당하면 즉사할 만큼 약해 빠진 존재들이다.


수혁은 그들을 사냥하는 헌터였다. 그 밖에 마물을 사냥할 때도 있지만 수혁의 주된 사냥감은 흡혈귀였다. 대부분의 헌터가 그러하듯, 그 또한 흡혈귀에 의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다.


욱씬!


순간 가슴에 통증이 찾아왔다. 수혁은 고통에 겨워 가슴을 움켜쥐면서도 피식 웃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그 날의 기억이 칼날처럼 변해 가슴을 찔러대곤 한다. 통증이 사라질 때 즈음이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지옥의 염화처럼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참을 수 없는 살인 충동이 그의 몸을 지배하게 된다.


“후후후후후후후. 좋아. 모조리 죽여주지.”


눈을 가릴 만큼 길게 자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드러난 눈동자에서 증오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수혁의 걸음이 멈춘 곳은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어느 허름한 철물점 앞이었다. 주위를 살펴보고 인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안으로 들어간다.


대부분의 철물점이 그렇듯이 내부는 금속 특유의 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넓지도 않은 철물점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냄새는 더욱 지독하게 다가왔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일주일에 한 번 꼴은 꼭 들리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혁은 아직 이 냄새가 적응되지 않았다.


“아아, 왔는가.”


구석 쪽에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쇳조각을 만지작거리던 노인이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오른쪽으로 휘어진 매부리코, 얼굴을 덮은 자글자글한 주름과는 다르게 숱이 풍성한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그는 수혁을 잘 아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저께는 잘 해주었어, 슬레이어.”

“약해빠진 놈이더군. 별로 수고할 건 없었어.”


그러자 노인은 누가 철물점 주인 아니랄까봐 쇠를 긁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키히히힉. 그거야 너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 자식은 루터즈 패밀리 내에서도 꽤 한 가닥 하던 놈이었다구.”

“그 놈이? 천수 영감의 안목도 낮아질 대로 낮아졌군.”

“네놈이 더 괴물 같아진 게 아니라?”


수혁은 노인을 천수 영감이라고 불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철물점을 찾는 모든 사람이 그를 천수 영감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진짜 천수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불렸고, 그도 딱히 별 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두들 그렇게 불렀다.


천수 영감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과거엔 헌터였다. 실력은 수혁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보잘 것 없었다. 다만 성격이 좋아서 인맥만은 풍부했다. 그래서 이렇게 은퇴한 후에 의뢰와 헌터를 연결시켜주는 브로커 짓도 가능했던 것이었다. 정보, 장비를 파는 등 여러 가지 잡다한 부업도 겸해 한국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이 자주 찾는 곳이 바로 천수 영감의 철물점이었다.


“의뢰 있나?”

“있지. 있지. 요샌 아주 넘쳐나. 루터즈 패밀리와 H엔터테인먼트가 해체되고 나서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의뢰가 쏟아져 나오고 있어. 이럴 때면 빌어먹을 흡혈귀 자식들도 꽤 도움이 된다니까.”


H엔터테인먼트란 흡혈귀 히라노의 조직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소속된 몇몇 가수들은 꽤 잘된 모양이라서 표면상으론 아주 건전한 회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안의 직원들 대부분이 흡혈귀였다.


“할 만한 일은 뭐가 있지?”

“요 며칠 새에 강남 일대에 노숙자들이 줄지어 실종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너도 들어본 적 있겠지? 처음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노숙자들 몇 명이 경찰에 신고했다는군. 웬 택배 트럭이 와서 자기들이 자는 동안 인체실험장으로 데려간다고 말이야.”

“경찰은 움직였나?”

“설마 술 취한 노인네들 몇 마디로 경찰들이 움직일 것 같나?”

“그럴 일은 없겠지.”


성폭행 당하고 있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신고를 해도 몇 분 동안 정확한 주소를 대라는 둥 쓸데없는 짓만 하다가 민원이 두려워 사이렌 한 번 울리지 않고 경찰관 몇 명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만 하는 게 대한민국 경찰의 현실이었다. 노숙자들의 신고 따위 제대로 접수될 리가 만무했다. 아마 흡혈귀 쪽도 그 점을 노리고 일을 벌였으리라.


“흡혈귀들 짓이 분명해?”

“의뢰주가 확신하니까 그러겠지. 그 자식들, 사냥하기 귀찮으니까 아예 납치해서 사육하던가, 아니면 파티라도 실컷 벌이는 모양이야. 워낙 흔히 일어나서 놀랄 것도 없지만.”

“장소는?”


천수 영감은 지명은 물론 자세한 번지수까지 알려주었다. 철물점에서도 멀지 않은 데 위치한 모텔촌 근처였다.


“의뢰주는 그 구역을 관할하는 ‘구동파’의 보스 마구동이라는 자인데 이쪽 세계에도 한 발 담그고 있는 모양이야. 흡혈귀를 무서워하기 보단 오히려 귀찮아는 기색이더군. 신기해서 잠깐 뒤 좀 캐보니까 흡혈귀들을 몰래 밀입국, 출국시키는 짓도 하는 모양이더라구. 어쨌든 질 나쁜 놈들이 거기 둥지를 틀었다는 걸 안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정도라고 해. 언제 난리를 칠지 모르기 때문에 의뢰를 했대.”

“마구동?”


수혁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의뢰 때문에 자주 외국에 나가긴 하지만 한국 사정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천수 영감에 말마따나 이쪽 세계에 발 한 쪽 담그고 있는 마구동이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는 고개를 저어 그 인물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 참. 그리고 말이야.”


천수 영감은 잊고 있었다는 듯 문득 말했다.


“이번 의뢰는 너 말고 6명이 함께 수행할 거야.”


수혁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잠깐. 난 혼자 움직여. 모르진 않을 텐데?”

“알지, 알지. 알지만 의뢰주가 일주일 내로 해결해달라는 걸 어떡해? 이건 단순히 의뢰를 해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 대한 신뢰와 평판도 걸려있다구. 게다가 정보에 따르면 흡혈귀들의 숫자도 제법 되서 너 혼자로선 답이 없을 거야.”

“...”

“기분 나쁜 건 이해해. 내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른 놈한테 부탁하고 자네는 쉬는 수밖에.”


천수 영감은 오랜 경험으로 수혁을 자극하는 방법을 터득한 음흉한 노인이었다. 눈앞에 흡혈귀가 있는데 겨우 돈 문제 때문에 회피할 수혁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신 말에 놀아나는 것 같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군.”

“고맙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팀원이 많은 건 네 입장에서도 그리 불리할 게 아니야.”

“왜지? 한국에 있는 헌터들 중에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 녀석은 없어. 있다손 치더라도 그놈들 대부분은 외국에 나가있겠지.”

“킥. 그건 인정하지. 그래도 고기방패로는 쓸 수 있을 것 아닌가.”


히죽. 주름진 입가를 양쪽으로 길게 찢으며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만큼 자네에게 돌아가는 보수도, 내게 남는 이익도 커질 테고 말이야.”


그제야 수혁은 이 노인의 속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게 본심이었던 것이다. 의뢰의 위험성을 강조한 뒤 의뢰주로부터 비용을 더 뜯어내고 싸구려 헌터들을 모집한 다음, 그들이 죽어 받지 못한 보수를 대신 챙길 셈인 것이다. 의뢰는 해결해야 하기에 실력이 확실한 수혁을 고용한 건 일종의 보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뛰어난 장사수완에 감탄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내비친 속내에 소름이 끼친 건지 수혁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헌터가 아니라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더라면 좋았겠군.”


무지무지하게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노인이 박장대소했다.


“크히히힉. 맞아. 나도 요즘 그 생각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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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완전한 밤이 되길 기다린 수혁은 창문 밖이 어둑어둑해지자 무장을 챙겼다. 방탄 기능이 있는 검은색 레이싱 슈트, 그 위에 방탄조끼를 덧입고 허리춤엔 소음기를 단 글록을 꽂았다. 그가 고생해서 얻은 AA-12, 일명 괴물총은 등에 비스듬히 매달았다. 섬뜩한 예기를 품은 쿠쿠리 나이프 두 자루는 허리에, 스턴 그레네이드와 그레네이드는 허리에 맨 벨트에 달았다. 짤막한 컴뱃 나이프는 허벅지에 찬 칼집에 집어넣었다.


완전 무장을 마친 수혁은 마지막으로 오토바이 헬멧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시야가 제한되고 움직이는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어서 전투 도중엔 벗는 게 보통이었지만 중무장을 하고서 이동하는 가운데 혹시라도 얼굴이 들킬까봐 쓴 것이었다. 또 그 자체로써 방어력을 증가시켜주는 것도 착용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실제로 헬멧 덕분에 저격에서도 살아남은 경험이 수혁에겐 있었다. 그 후로 헬멧은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그 밖의 필요한 장비들을 챙긴 후 수혁은 자신의 차, 어둠에 녹아드는 검정 색 SUV에 몸을 실었다. 내부는 집처럼 온갖 무기가 즐비했다. 바깥에선 볼 수 없도록 교묘하게 숨겨놓았다.


10분 정도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많은 모텔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텔촌이었다. 화려하고 시끄러운 유흥가와 거리가 많이 떨어져있는 것도 아닌데 지독한 정적만이 존재하는 동네였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야릇한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여기는 하룻밤 욕정을 풀기위해 모여든 인간들이 마음껏 소리를 지르는 곳이니까.


수혁은 약속 장소인 xx모텔의 주차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건물을 살펴보았다. 거리에서 가장 커다랗고 세련된 그 건물은 모텔이라기 보단 차라리 고급 호텔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단순히 술에 취한 취객들이 아니리라.


주차를 한 뒤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만 챙긴 채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최소한의 장비라고 해도 살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라 조금은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모텔 카운터에 앉은 미모의 여성은 수혁의 차림새를 보고서 전혀 당황해하지 않았다.


“손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수혁이었다. 미리 얘기가 다 되어있으니 가면 알아서 대접해줄 거라고 천수 영감이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성의 반응은 예상 외였다.


“슬레이어시죠?”


9층 버튼을 누른 후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이미 수혁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왠지 모르게 수혁은 그녀가 그와 동류일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당신은?”

“처음 뵙겠습니다. 마여빈이라고 합니다.”


마여빈. 마여빈. 두 번 입속으로 되뇌어봤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읽었을까. 그녀는 푸훗 하고 웃었다. 나이는 수혁과 비슷하거나 더 많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은 얼굴은 상당한 동안이었다.


“풋내기 헌터랍니다.”

“아아.”


예감은 들어맞았다.


“당신 소문을 자주 들어서 한 번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오른 손을 내밀었다. 푸른 핏줄이 돋아난, 아주 단단해 보이는 손이었다. 수혁은 우물쭈물하다가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전해져 오는 악력을 통해 깨달았다.


여자는 스스로가 소개했듯이 풋내기나 초보가 아니라 오랜 시간 몸을 단련해온 진짜 헌터였다. 어지간한 노력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이만큼 단련해온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는 걸 고려해보면 이 여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수혁과 동류, 오직 흡혈귀들의 박멸을 위해 살인기술을 배운 인간인 것이다.


그제야 수혁은 그녀에게 흥미를 갖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처음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단아하고 수려한 이목구비는 험한 일을 하지 않은 귀한 집 규슈를 연상케 했고 새하얀 얼굴이나 어깨 근처에서 찰랑이는 윤기 나는 흑발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은 거의 안했지만 한 듯, 안 한 듯 옅은 화장은 오히려 미모를 돋보이게 한다.


천상 아가씨 같은 인상인 생김새와 달리 검은 양복에 가려진 몸은 전사의 몸을 그 자체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거칠고 단단한 손, 균형 잡힌 밸런스와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은 체계적이고 오랜 훈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제게 흥미가 있으신가요?”


요염한 웃음. 그녀는 자신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수혁에게 미소를 날렸다. 아무리 냉혈한인 그라도 아주 잠깐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 당신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곧 그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여빈이라는 여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순간, 쉭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좁은 엘리베이터 내부공간에서 한 줄기 섬광이 나타났다.


팍! 수혁은 당황하지 않고 팔을 잡아채 공격의 궤도를 틀어버렸다. 왼쪽 뺨에서 5cm 가량 빗나간 허공에는 애들이 장난칠 때나 쓰는 주머니칼이 빛나고 있었다.


“장난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자라곤 생각할 수 없는 힘으로 손아귀에서 팔을 빼낸 뒤 목젖을 노리고 찔렀다. 수혁은 막지 않고 고개를 살짝 젖힌 것만으로 피해버렸다. 동시에 오른 쪽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가격하려고 했다.


마여빈은 대담하게도 앞으로 일보 전진해 힘이 덜 실린 팔꿈치를 그냥 맞아버린 후 어깨를 이용해 수혁을 엘리베이터 벽 쪽으로 밀어버렸다.


수혁이 벽에 부딪히자 쿵 하고 엘리베이터가 출렁였다.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 여빈의 키는 수혁의 턱 밑까지 밖에 되지 않았기에 누가 보면 포옹하는 듯한 자세였으나 그녀의 손엔 작지만 날카로운 칼이 들려있었고 한껏 젖혀졌다가 단숨에 폐를 노리고 들어가는 움직임에는 자비가 없었다.


늑골 사이로 파고들 날붙이는 그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허공에서 멈춰 섰다. 도대체 언제였을까. 첫 공격을 막았던 수혁의 왼손에는 어느새 소음기를 단 글록이 잡혀있었고 그 끝은 움푹 들어간 여빈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죽이실 건가요?”

“지금 내가 널 쏘면 안 되는 이유를 대면 살려주지.”


여빈은 빙그레 웃으며 먼저 칼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수혁의 총은 겨누는 곳이 관자놀이에서 미간을 노리는 걸로 바뀌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놀란 기색 없이, 또는 낭패한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고용한 사람의 딸입니다.”


띵하는 소리가 들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수혁은 글록을 거두었다.


“참고로 방금 전 일은 당신이 정말 슬레이어인지, 슬레이어라면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실력을 가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다른 목적을 품었던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군요.”

“시험이었다는 건가? 결과는?”


여빈은 후훗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수혁도 그 뒤를 따랐다.


“기대했던 만큼은 만족했습니다.”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투였다. 기대했던 만큼은 만족했지만 기대했던 것 보다 더 대단한 걸 원했다는 듯한 반응.


여빈이 그를 데려간 곳은 9층 복도의 맨 마지막 방, 912호였다. 그녀는 카드키로 문을 연 뒤 들어갔다.


“여러분, 슬레이어가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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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4) 15.03.31 525 9 19쪽
41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3) +2 15.03.30 672 11 19쪽
40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2) +1 15.03.18 552 11 19쪽
39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1) +1 15.03.17 622 1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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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Chapter3. Love OR Hate(12) 15.03.13 462 6 18쪽
35 Chapter3. Love OR Hate(11) 15.03.11 459 9 19쪽
34 Chapter3. Love OR Hate(10) +1 15.03.10 446 10 16쪽
33 Chapter3. Love OR Hate(9) +1 15.03.08 352 9 16쪽
32 Chapter3. Love OR Hate(8) +1 15.03.08 604 9 21쪽
31 Chapter3. Love OR Hate(7) +2 15.03.07 528 11 29쪽
30 Chapter3. Love OR Hate(6) 15.03.07 457 9 21쪽
29 Chapter3. Love OR Hate(5) +1 15.03.06 508 9 21쪽
28 Chapter3. Love OR Hate(4) 15.03.05 431 9 17쪽
27 Chapter3. Love OR Hate(3) 15.03.05 513 9 26쪽
» Chapter3. Love OR Hate(2) 15.03.04 529 9 19쪽
25 Chapter3. Love OR Hate(1) +1 15.03.02 617 16 21쪽
24 Chapter2. 시체놀이꾼(Epilogue) 15.03.01 408 9 11쪽
23 Chapter2. 시체놀이꾼(11) +1 15.03.01 535 10 16쪽
22 Chapter2. 시체놀이꾼(10) 15.03.01 559 15 16쪽
21 Chapter2. 시체놀이꾼(9) 15.02.28 534 10 20쪽
20 Chapter2. 시체놀이꾼(8) +1 15.02.26 447 10 20쪽
19 Chapter2. 시체놀이꾼(7) 15.02.26 676 1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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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Chapter2. 시체놀이꾼(5) 15.02.24 597 13 24쪽
16 Chapter2. 시체놀이꾼(4) 15.02.23 458 1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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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hapter2. 시체놀이꾼(2) 15.02.22 688 12 14쪽
13 Chapter2. 시체놀이꾼(1) 15.02.21 763 15 19쪽
1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Epilogue) 15.02.20 754 11 14쪽
1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1) +1 15.02.20 584 15 16쪽
10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0) 15.02.19 644 14 17쪽
9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9) 15.02.18 770 13 15쪽
8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8) 15.02.17 764 14 16쪽
7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7) 15.02.17 771 16 20쪽
6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6) +1 15.02.16 931 15 15쪽
5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5) +2 15.02.15 965 19 20쪽
4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4) 15.02.14 1,084 16 17쪽
3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3) +1 15.02.14 1,225 20 16쪽
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2) 15.02.13 1,711 26 15쪽
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 +2 15.02.13 2,891 3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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