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위대한알라 님의 서재입니다.

21세기 퇴마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위대한알라
작품등록일 :
2015.02.13 16:20
최근연재일 :
2015.04.12 18:0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31,528
추천수 :
565
글자수 :
387,690

작성
15.03.07 00:05
조회
456
추천
9
글자
21쪽

Chapter3. Love OR Hate(6)

본 글에 등장하는 사건, 장소, 인물, 단체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임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DUMMY

“하하하하하! 좋아. 멋진 걸?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그 모습, 얼마나 멋져! 킥킥킥킥. 좀 더 발버둥 쳐 봐! 좀 더 벌레처럼 기어봐!”


검은 오러를 내뿜기 시작한 이후로 수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박장대소하며 무자비하게 그의 머리통을 짓밟아 터트렸다.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모두 도망쳐! 여긴 내가 막겠다!”

“보스!”

“어서!”


살아남은 몇몇 흡혈귀들은 광현의 명령에 따라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혁이 아니었다.


“어이어이. 멋대로들 착각 하지 마. 너희 모두 여기서 못 살아나가.”

“아아악!”


또다시 허공에 두 개의 검은 궤적이 그려지기가 무섭게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주인을 잃은 머리가 땅에 굴러다닌다.


이로써 광현을 제외하고 모든 흡혈귀들이 전멸했다.


“자아, 빌어먹을 흡혈귀, 이제 네 놈 하나 남았다.”


검은 오러를 갑옷처럼 전신에 두른 채 수혁이 입을 열었다.


“슬레이어어어어어-!!”

“덤비는 쪽인가? 배짱은 두둑한 놈이군.”


동료들의 죽음에 반쯤 정신이 나간 듯 광분한 광현이 무작정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위기의 순간에 발휘된 그의 잠재능력 탓이었을까. 눈으로 쫓기 힘든 빠른 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옆구리를 허용하고 말았다.


광현은 곧 경악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방금 공격으로 내장이 파열되는 건 물론 몸이 꿰뚫리고도 남았을 텐데 수혁은 아무런 피해 없이 그 자리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너... 정말 인간이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행동이었다. 파밧 하고 땅을 박치는 소리와 함께 두 눈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길이 쏘아져온다.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은 광현은 가드를 단단히 올리지만, 소용없었다. 예의 검은 오러가 휘감긴 공격은 가드를 뚫다 못해 몸까지 관통하고 만다.


“컥, 컥!”


광현은 말도 끝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푸하하하하하! 흡혈귀가 인간보고 악마라고? 이거 나보다도 더 미친놈 아냐?”


쑤욱. 꿰뚫은 팔을 빼내자 피가 뿜어져 나와 이미 피투성이가 된 몸 위에 뿌려졌다. 더 이상 붉어질 수가 없을 것 같은데도 색은 더욱 붉어진다.


점멸하는 가로등불 아래 펼쳐진 살육의 현장은 지독하게 참혹했다. 목을 잃은 몸뚱어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고여 만든 거대한 피웅덩이와 그 속에 잠겨있는 죽기 직전 표정 그대로의 머리.


허연 뇌수와 새빨간 피로 그려진 그로테스크한 무늬는 미쳐버린 예술가의 역작처럼 난해하면서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악취를 풍기는 살점은 밤하늘에 박힌 별 같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지옥, 그 자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 듯한 광경. 그 한 가운데에 피를 뒤집어 쓴 악귀가 검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새빨갛게 물든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 학살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손은 아직 피가 고픈 듯 탐욕스럽게 떨고 있다.


“흐흐, 흐흐흐흐. 좀 더, 좀 더 많은 흡혈귀를...”


짝짝. 그때 박수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단하군.”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웬 남자와 여자가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게 보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 수혁은 그들을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누구냐?”

“눈빛이 참 멋진 걸, 당신.”


가로등불 아래 그들의 모습이 명백히 드러났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이상적인 육체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남성으로 현신한 듯한 미모를 가진 아름다운 동양계 흑발의 청년과 늘씬한 몸매와 화사한 금발, 조금은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 잘 어울리는 백인 미녀였다. 둘 모두 20대 초반으로 나이는 수혁과 비슷해 보인다.


그들이 다가오자 수혁은 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표현하기 매우 어려운 기분이었으나 굳이 말하자면 낯선 집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생소함과 기묘함, 그리고 이질감이랄까. 수혁은 그런 감각이 마법사 특유의 주위 공간을 지배하는 힘, 소위 공간지배력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외국에서 마법사들 곁을 지나칠 때면 느끼곤 했던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공간지배력은 처음이다. 조금만 경계를 늦춰도 상대에게 삼켜질 것만 같은 위압감은 마치 맹수 앞에 선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수혁은 눈앞의 마법사들이, 특히 남자 마법사의 실력은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대단한 것임을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넌 마법사냐? 흡혈귀인가? 그럼 죽인다.”

“마법사인 건 맞지만 흡혈귀는 아니야. 그리고 이제 이 근처에 흡혈귀는 없어. 당신이 살해한 녀석들이 전부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주(主)인격에게 몸을 양보하는 게 어때? 당신이 계속 몸을 차지고 하고 있으면 그리 좋지 않을 텐데 말이야.”


수혁, 아니 수혁의 몸을 빌린 무언가가 깜짝 놀란다.


“너 범상치 않은 녀석이군.”

“자주 듣는 말이지.”


어깨를 으쓱거린 청년 마법사.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적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수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공기 중에 팽배하던 살기가 조금 누그러지자 수혁의 몸을 갑옷마냥 감싸고 있던 검은 오러가 연기처럼 변하더니 휘리릭 하고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두 눈에는 이글거리던 광기에 찬 빛이 모습을 감췄고 평상시의 차갑고 딱딱한 수혁으로 돌아와 있었다.


“누구지?”

“생각보다 전환이 빠르네. 주위에 흡혈귀가 없어서 그런가?”

“이봐. 넌 누구냐니까.”

“지나가던 마법사야.”

“그럼 계속 지나가지 왜 나타난 거지? 무슨 용건이라도?”

“내가 용건 있었던 건 네 쪽이 아니라...”


마법사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흡혈귀들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쪽에 널브러져 있는 흡혈귀 쪽이지.”

“...?”

“저 녀석들은 해체된 루터즈 패밀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원들인데 최근 노숙자 연쇄 실종사건의 범인이 바로 저들이라더군. 아지트를 급습하려던 참이었는데, 보아하니 내가 나설 기회는 이제 없어진 같네.”


단 두 명이서 아지트를 급습하려 했다고? 수혁은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곧 생각을 고치고 관두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지금 간신히 서있는 상태였다. 두 다리는 덜덜 떨리고, 시야는 자꾸만 흐려지고 있었다. 능력을 너무 오래 썼던 부작용이 찾아온 것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럼 난 이만 가도 되겠지?”


수혁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탄피를 줍기 시작했다. 흡혈귀들의 시체야 동이 트면 불타 재도 안 남기고 사라질 테지만 탄피는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발견되기라도 하는 날엔 꽤 골치 아프리라.


“그 몸으로 뒷정리도 하고 집까지 갈 수 있을까?”


마법사가 말했다.


“원한다면 도와줄 수도 있어.”


대꾸는 간단했다.


“꺼져.”


땡그랑. 말과는 달리 벌벌 떨리는 손 때문에 탄피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혁은 다시 주우려고 했지만 이번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이를 악 물고 버티려 해도 그것도 잠시 뿐, 곧 무릎마저 땅에 꿇고 주저앉고 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모습을 본 마법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아까 입었던 상처가 전부 재생되어서 괜찮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건 큰 착각이야. 상처를 재생시킨 힘은 다름 아닌 네 생명력이니까. 겉으론 멀쩡해보여도 당장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의 기력이 낭비된 상태지. 혼자 몸도 못 가누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누군지도, 모르는 녀석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수혁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흐음. 거 지독한 놈일세.”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수혁이 막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털썩 하고 쓰러진 것이다. 마침내 한계에 부딪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식의 끈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기절한 수혁을 내려다보며 흑발의 청년이 중얼거렸다.


“이런 인간을 도대체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거지?”


---------------------------------------


이건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대는 고작 인간 한 명에 이쪽은 무려 3명, 그것도 흡혈귀들이었다. 더군다나 적은 별다른 무장도 하지 않은 여자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지? 흡혈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은 사슬에 휘감겨 옴짝달싹 할 수 없는지, 왜 다른 동료들은 힘도 못 써보고 참혹하게 온 몸이 찢겨나갔는지.

치르르륵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목숨마저 노리고 있는 괴이한 사슬이 가면 쓴 여인의 손짓에 따라 한층 더 몸을 옭아맨다. 사슬이 불똥 튀기는 소리는 마치 눈앞에 놓인 먹이를 탐욕스럽게 노리는 뱀이 쉭쉭대는 것만 같았다. 얇은 사슬이 피부를 파고들어 신경을 자극했다. 아찔한 고통에 흡혈귀는 비명을 지르려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일까, 생각해보다가 그는 깨달았다.


아, 맞다. 내 목에도 사슬이 휘감겨 있었구나.


찌아아아아아악! 쫘자자작!


사슬이 양쪽으로 당겨지자 흡혈귀의 몸이 종이마냥 맥없이 찢어졌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핏방울과 살점, 잘게 부서진 뼈, 쏟아지는 내장. 한 생명이 갈가리 찢겨져 사라지는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그럴까? 사람이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의 수위를 가볍게 뛰어넘은 그 광경은 끔찍하기보다 차라리 경이롭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다.


툭 튀어나온 광대, 두 갈래 콧수염, 귀에 걸린 미소. 모든 게 우스꽝스럽게 짝이 없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여인이 손을 휘젓자 사슬이 치르륵 불똥을 튀기며 허리에 휘감겼다. 신기하게도 방금 전 세 흡혈귀의 몸을 갈가리 찢은 사슬은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세 명이 왔으니 수혁 씨에겐 최소한 5명 정도 간 건가? 어쩌면 그 이상이 갔을 수도 있겠네.”


가면을 벗은 여인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단아하고 수려한 이목구비. 짙은 눈썹과 분홍색 입술. 온실 속에서 자라난 청초한 미모의 아가씨를 연상케 하지만 가죽옷 위로 은근히 드러나는 단단한 몸의 윤곽은 그녀가 결코 곱게 자라온 여인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푸른 힘줄이 솟아난 손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 정도에서 죽으면 곤란해요, 수혁 씨.”


후훗.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요염하게 웃어 보인 여인, 마여빈이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비단결 같은 흑발이 어깨 근처에서 나풀거린다.


“당신은 좀 더 오래 살아서, 내 이상(理想)을 이루기 위해 싸워줘야 하니까.”


--------------------------------------------


증오(憎惡). 참 묘한 여운을 남기는 단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그랬다고 한다. 사랑과 증오는 같은 것이라고.


수혁은 거기에 백번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저 빌어먹을 흡혈귀 놈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거칠어지고 식은땀이 나니까. 그리하여 흡혈귀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나 자신은 살아갈 수 없게 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증오해마지 않는 그들의 존재가 바로 수혁이 살아 숨 쉬는 이유가 되고 만 것이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만약 헌터가 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갔을지 상상하곤 한다. 남들처럼 대학교에 다니고, 군대에 가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까? 남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시 헤어지고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손자를 보고, 늙은 아내와 함께 조용히 살다 평화롭게 죽을까?


현실감이 영 느껴지지 않는 상상을 하다보면 언제나 머릿속에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봐. 박수혁. 지금 그딴 상상을 해서 뭐하자는 거지? 그런 평화로운 일상 따위, 어차피 너에겐 어울리지 않아. 과거라면 어울렸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지금 당장 헌터 짓을 때려치우고 저 아름다운 빛의 세상 속으로 돌아간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우하하핫! 너 정말 웃기는구나. 넌 살인마야. 아니, 살인마가 아니면 넌 아무 것도 아니야. 대의도, 명분도 없이 그저 증오와 복수라는 사적인 이유만으로 생명을 마구 죽이는 게 살인마가 아니고 뭐냔 말이다! 쿡쿡쿡쿡! 이미 황폐해 질대로 황폐해진 그 정신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어. 림. 없. 는. 소. 리!


-넌 헌터가 아니면 살 수 없어. 애초에 넌 생명을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이야! 모든 일의 발단, 흡혈귀에게 애인을 잃은 건 그냥 미친개에 물렸다 치고 잊어버리면 된 거였어. 보통 사람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넌 어땠지? 네 발로 직접 이 세계에 뛰어들었지. 킥!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봐봐! 지금의 넌 누구보다도 강해져서, 누구보다도 유명해졌어. 네가 실은 초능력자란 사실도 깨닫게 되었지. 즉 넌 태어날 때부터 헌터로서 자질이 있었던 거야! 하하하하. 네가 흡혈귀 사냥꾼이 된 건 신이 정해준 운명이었다고!


-그러니 죽여라. 네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숨을 내뱉는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아껴서 흡혈귀를 죽여! 그것이 네 존재 의의이고, 그것이 네 삶의 유일한 목적이야. 네 미래는 어차피 세 가지야. 싸우다 죽거나, 혹은 흡혈귀가 되거나, 혹은 흡혈귀가 되어 스스로 머리통을 날려버리든가! 그 세 가지 외에 다른 미래는 없어. 딴 마음 품지 마. 돌아간다는 허튼 소리는 그만해!


미쳐가고 있는 걸까? 수혁은 언제부턴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자기 자신을 비웃는 또 하나의 자신을 자각했다. 녀석의 말을 가급적 무시하려고 하지만 하나하나가 너무도 옳은 말 뿐이라서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생각에 태클을 걸어오는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언제나 같다.


-너는 증오를 먹고 살아가는 짐승이야!


화악


이불을 거칠게 젖히며 수혁은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려고 하자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이 손바닥에 불쾌한 감촉을 남긴다.


“후우. 빌어먹을.”

“악몽이라도 꾼 거야?”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수혁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상대도 설마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지 덩달아 움찔했다.


“뭐, 뭐야.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잖아.”

“누구지?”


처음 눈에 띤 것은 태양을 떠올리게 하는 화사한 금빛 머리카락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매끄러운 금발이 반쯤 가리고 있는 고운 이마와 조그마하고 새하얀 얼굴이 있었다. 시원스러운 눈매, 오똑한 코, 앙다문 입술 탓인지 상당히 고집 있어 보인다.


까칠한 수혁의 물음에 금발 미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벨라 시몬. 널 구해준 사람의 동거인이야.”


날 구해? 수혁은 지끈지끈 아픈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자신은 흡혈귀들의 포위망에 갇혀 죽을 기세로 싸웠고 승리했다. 능력의 부작용 때문에 힘든 몸으로 뒷정리를 하고 있던 중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마법사들.


“그때 있었던 마법사냐?”

“맞아.”


벨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대뜸 수혁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처음 보는, 아니 두 번째 보는 낯선 이가 갑자기 손을 대서일까.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고 바깥쪽으로 홱 꺾였다.


“아얏!”

“왜 내 몸에 손을 대는 거지?”

“난 단지 아직 열이 있나 보려고 하는 거야. 얼른 팔 놔. 아프단 말이야.”


상대를 믿어도 될 지,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놨다. 짧은 순간 그가 가한 힘은 실로 엄청나서 고통에 익숙하지 못한 벨라는 울상이 되었다. 엄살이 아니었다. 벨라의 손목에 붉은 자국이 벌써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힘을 주었으면 부러졌을 지도 몰랐다.


“으으. 아파라.”


고개를 푹 숙이고 손목을 쓰다듬고 있는 벨라를 보니 냉혈한이라 불리는 수혁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발이 요동치면서 새하얀 얼굴이 수혁에게 다가왔다.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에서 나는 좋은 향기 탓인지, 아니면 조각처럼 아름다운 미모 탓인지 수혁은 일순 숨이 막히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네 옆에 몇 시간 동안 붙어서 치료해주고 간호해준 사람한테 폭력을 쓰고 나서 미안하다면 다야?”

“...”


벨라의 공세에 수혁은 그답지 않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빼꼼이 고개를 내민다. 인기척을 느낀 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어젯밤 벨라와 같이 등장했던 검은 머리 청년이 씨익 웃고 있었다.


“오. 벌써 친해진 거야?”

“아니!”

“아니.”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게 뭐 그리 재밌는지 청년은 또다시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움직일 수 있으면 어서 나와. 밥 차려놨으니까.”


말할 것도 없이, 수혁을 구해준 마법사들의 정체는 세준과 벨라였다. 사실 그들은 수혁과 마찬가지로 노숙자 연속 납치 사건이 흡혈귀들의 소행임을 짐작하고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며칠에 걸친 조사 끝에 대충 용의자의 윤곽은 잡았지만 정확히 어디에 아지트가 있는 줄은 몰랐던 차였다.


시간이나 죽일 겸, 의심되는 몇몇 장소를 방문하다가 운 좋게도 세준의 감각에 흡혈귀들의 기척이 감지된 것이었다. 누군가를 노리며 포위망을 구축하는 움직임에 일단은 모른 척 가만히 따라가고만 있었는데 그들이 수혁과 싸우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세준은 수혁과 흡혈귀들의 싸움을 중간에 말릴 수 있었지만 일부러 말리지 않았다. 인간 주제에 다수의 흡혈귀들을 상대로 선전하는 수혁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가 위험에 처해있을 땐 거의 나설 뻔 했으나, 그 직후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수혁이 순식간에 흡혈귀들을 제압해버렸기 때문에 나설 타이밍을 잃고 결국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자기소개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세준이 묻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날아왔다.


“남의 정체를 물을 땐 먼저 자기부터 밝히는 게 순서지.”

“흐음. 그 상대가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엄연히 말해서 목숨을 구해준 건 아니지. 단지 기절했을 뿐이니까.”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그를 보면서 벨라는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세준은 ‘재밌는 녀석이군.’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일단 식탁에 앉아. 밥 다 식겠어.”


의자에 앉자 검은 머리 청년이 음식을 내왔다. 김치찌개, 불고기, 무김치, 김, 멸치볶음, 하얀 쌀밥 등 굉장히 한국적인 식단이다.


턱. 세준이 수혁의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보이는 그대로 죽이지.”

“왜 난...”


죽을 주는 건데, 라고 말하려던 수혁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순간 저들의 손에 의해 구해진데다. 치료까지 받고, 식사도 대접받는 주제에 투정부리는 게 창피했던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병자 취급당하는 게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수저를 들어 한 술 떠먹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맛있잖아?’


수혁은 흐뭇한 미소를 한 채 그를 쳐다보는 세준의 존재를 잠시 잊어버리고 수저를 열심히 움직였다. 이미 머릿속에선 자신을 구해준 두 명의 마법사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경계심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무려 5년 동안 라면, 냉장식품 같은 인스턴트로 길들어져 있던 식욕이 죽 한 그릇에 되살아나는 건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옆을 슬쩍 시선을 돌리니 금발의 외국인, 벨라도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국적인 식단임에도 불구하고 꽤 잘 먹는다. 이것도 전혀 다른 의미에서 컬쳐 쇼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벨라는 한국어도 유창했다.


잘생긴 청년도 숟갈을 뜨기 시작했다.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 생김새였다. 섬세한 이목구비, 결 좋은 머리카락이 마냥 여성스럽게만 보였지만 날카로운 턱선이나 콧날을 보면 꼭 그런 것만 같지도 않았다.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남성적인 매력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 하지만 중성적이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인상과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묘한 얼굴이다.


만족할 만큼 배를 채우자 포만감과 함께 몸이 나른해졌다. 아마도 헌터 일을 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나른함이 아닌가 싶었다. 수혁이 그 나른함을 즐기고 있을 동안 어느 새 식탁을 치워졌다.


“넌 누구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21세기 퇴마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6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8) +3 15.04.12 636 8 15쪽
45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7) +2 15.04.06 454 10 18쪽
44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6) +1 15.04.03 519 10 26쪽
43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5) +2 15.04.02 497 6 21쪽
42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4) 15.03.31 525 9 19쪽
41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3) +2 15.03.30 672 11 19쪽
40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2) +1 15.03.18 552 11 19쪽
39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1) +1 15.03.17 622 14 12쪽
38 Chapter3. Love OR Hate(Epilogue) +2 15.03.15 642 10 12쪽
37 Chapter3. Love OR Hate(13) 15.03.13 484 6 26쪽
36 Chapter3. Love OR Hate(12) 15.03.13 462 6 18쪽
35 Chapter3. Love OR Hate(11) 15.03.11 459 9 19쪽
34 Chapter3. Love OR Hate(10) +1 15.03.10 446 10 16쪽
33 Chapter3. Love OR Hate(9) +1 15.03.08 352 9 16쪽
32 Chapter3. Love OR Hate(8) +1 15.03.08 604 9 21쪽
31 Chapter3. Love OR Hate(7) +2 15.03.07 528 11 29쪽
» Chapter3. Love OR Hate(6) 15.03.07 456 9 21쪽
29 Chapter3. Love OR Hate(5) +1 15.03.06 508 9 21쪽
28 Chapter3. Love OR Hate(4) 15.03.05 431 9 17쪽
27 Chapter3. Love OR Hate(3) 15.03.05 513 9 26쪽
26 Chapter3. Love OR Hate(2) 15.03.04 528 9 19쪽
25 Chapter3. Love OR Hate(1) +1 15.03.02 617 16 21쪽
24 Chapter2. 시체놀이꾼(Epilogue) 15.03.01 408 9 11쪽
23 Chapter2. 시체놀이꾼(11) +1 15.03.01 535 10 16쪽
22 Chapter2. 시체놀이꾼(10) 15.03.01 559 15 16쪽
21 Chapter2. 시체놀이꾼(9) 15.02.28 534 10 20쪽
20 Chapter2. 시체놀이꾼(8) +1 15.02.26 447 10 20쪽
19 Chapter2. 시체놀이꾼(7) 15.02.26 676 11 21쪽
18 Chapter2. 시체놀이꾼(6) +2 15.02.25 682 10 25쪽
17 Chapter2. 시체놀이꾼(5) 15.02.24 597 13 24쪽
16 Chapter2. 시체놀이꾼(4) 15.02.23 458 10 19쪽
15 Chapter2. 시체놀이꾼(3) 15.02.22 581 12 13쪽
14 Chapter2. 시체놀이꾼(2) 15.02.22 688 12 14쪽
13 Chapter2. 시체놀이꾼(1) 15.02.21 763 15 19쪽
1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Epilogue) 15.02.20 754 11 14쪽
1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1) +1 15.02.20 584 15 16쪽
10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0) 15.02.19 644 14 17쪽
9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9) 15.02.18 770 13 15쪽
8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8) 15.02.17 764 14 16쪽
7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7) 15.02.17 771 16 20쪽
6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6) +1 15.02.16 931 15 15쪽
5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5) +2 15.02.15 965 19 20쪽
4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4) 15.02.14 1,084 16 17쪽
3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3) +1 15.02.14 1,225 20 16쪽
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2) 15.02.13 1,710 26 15쪽
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 +2 15.02.13 2,891 39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