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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알라 님의 서재입니다.

21세기 퇴마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위대한알라
작품등록일 :
2015.02.13 16:20
최근연재일 :
2015.04.12 18:01
연재수 :
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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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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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87,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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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1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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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Chapter3. Love OR Hate(11)

본 글에 등장하는 사건, 장소, 인물, 단체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임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DUMMY

-어때, 박수혁?


사방이 어둠에 덮인 공간에서 수혁은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칠흑에 시야가 막혀 전혀 앞을 볼 수 없다.


-어딜 보는 거야? 여기라고, 여기.


그제야 수혁은 어디서 목소리가 들려오는지, 또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다 생각했는데 바로 자신이지 않은가. 말을 걸어오는 건 눈앞을 가득 채우는 검은 것이었다. 이 공간 자체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어쩔 거지? 그녀는 널 쐈어. 운이 좋아 살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죽여야지. 당연한 것 아니야? 널 죽이려고 했고 거기다 흡혈귀야. 이유는 충분해.

-...

-킥킥. 뭘 망설이는 거야. 비정하게 널 쐈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고. 그런데 그 빌어먹을 년을 죽일 수 없어? 내가 아는 건 슬레이어는 그런 말을 하는 인물이 아닐 텐데? 정신 차리라고, 박수혁. 주저앉아 있을 시간 없어.

-내가 현주를 죽여? 그럴 순 없어.

-왜 네가 그녀를 죽일 이유가 없는데? 그 년은 흡혈귀야. 무려 흡혈귀라고! 5년 동안 그 년이 인간을 몇 명이나 잡아먹었을 지 넌 모르잖아.

-닥쳐. 현주는... 달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공간을 가득 채운 암흑이 요동쳤다.


-뭐? 큭, 크크칵칵칵칵! 너, 너 정말 걸작이구나. 킬킬. 정말 걸작이야. 뭐,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으라고. 그녀는 너와 달라! 넌 틀림없이 방아쇠를 당길 거야. 난 널 잘 알아. 왜냐하면 난 너고, 너는 나니까. 그래. 그래서 난 널 잘 알아. 넌 틀림없이 그녈 쏠 거야. 틀림없이!


-결국 넌 증오를 택하게 될 거야.


-넌 증오를 먹고 사는 짐승이니까!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벽지가 벗겨진 콘크리트 천장이 아닌 며칠 전쯤 보았던 깔끔한 아파트 천장. 수혁은 어제 일을 기억해내는 데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천운이었는지,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현주의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인지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차가운 빗물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땐 머릿속에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살아서 다시 한 번 현주의 앞에 서고 싶다는 그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의 무게를 견뎌가며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배를 부여잡고 이곳으로 왔다.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라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서.


그리고 그는 이렇게 살아있다.


그의 옆에는 화사한 금발을 늘어뜨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외국인이 있었다. 벨라 라는 이름이었을 거다, 아마도. 그를 간호했던 듯 그녀 옆에는 수건과 물을 받아둔 그릇, 붕대 따위가 놓여 있다.


우우웅-


그가 누워있는 침대를 중심으로 그려진 둥근 마법진이 기묘한 울림소리를 토해냈다. 파란 빛을 은은하게 뿜는 마법진에는 룬 문자며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형적인 도형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혁은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그린 것으로 추측했다.


수혁은 최대한 벨라가 깨지 않게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불에 데인 듯한 통증과 함께 윽 하고 신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그 소리에 벨라가 선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났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네가 치료해 준 건가?”

“무지 딱딱한 말투네. 처음 만난 것도 아니면서. 지난번에 만났을 때 대화를 많이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명의 은인한테 조금 심한 거 아니야? 여기가 무슨 무료병원인 줄 알아? 정말 깜짝 놀랐단 말이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인 줄 알라고. 태풍이 아니었다면 이 동네 주민들이 전부...”


이게 바로 문화차이라는 걸까? 수혁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벨라가 주절주절 떠드는 걸 곤란하게 여겼다.


“고맙군.”


수혁은 대충 그녀의 말을 대충 자르고 물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있었지?”

“하루 정도. 그 정도 상처를 입고 하루 만에 일어난 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거든? 살아났다는 거에 감사히 여기지 그래?”


알케미스트. 변성 학파 마법사 중 가장 권위 있는 마법사로서 벨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연구해왔고 그 중에는 당연히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런 이유로 상처를 치료하는 마법에도 조예가 있는 그녀에게 단순한 총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문제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는 점이었는데 다행히 혈액형이 같아서 즉석에서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 혈액형은 간단한 마법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아인잠카이트는 어디 있지?”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왜?”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수혁을 만난 지 이제 겨우 두 번째지만 벨라는 설마 그가 ‘부탁’이라는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조금 놀랐다.


“녀석은 언제 돌아오지?”


벨라가 이제 곧 돌아올 거야, 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타이밍 좋게 철컥 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준이 방문이 열고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어. 두 번째네.”


그는 수혁이 일어나있는 걸 확인하자 싱긋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구해줘서 고맙다.”

“나한테 하면 안 돼. 거기에 있는 벨라에게 감사하다고 하도록.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널 구해준 건 다름 아닌 그녀니까. 그리고 핏자국 같은 흔적도 전부 혼자 치웠거든.”


수혁은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로 벨라를 쳐다보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고맙군.”

“별로 고마워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받도록 할게.”


세준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상처를 입고 온 거야? 재생되질 않은 걸 보니 페르소나는 사용한 것 같지 않은데.”

“아인잠카이트.”

“응?”

“부탁이 있다.”

“알아. 현주라는 사람을 찾아 달라는 부탁이지?”


설마 현주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실은 조사를 좀 해봤어. 네 집에도 한 번 다녀왔지.”

“내 집은 또 어떻게 찾아갔지?”

“그 난리를 피웠는데 설마 못 찾았을 리가 있겠어? 탄피와 핏자국은 전부 물에 휩쓸려갔다 해도 시체나 버려진 차는 어쩔 건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갔을 땐 이미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고 주민들 몇몇이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어.”


천만다행인 건 태풍 때문에 목격자들이 무척 적었던 데다가 경찰이 오기 전에 세준이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목격자들의 기억을 일부 소거한 뒤 마법으로 차와 흡혈귀들의 시체를 흔적도 없이 분해시켰다. 원래는 방치되어있던 흡혈귀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도 봉인해야 하지만 엄청난 양의 빗물에 희석되어 굳이 조치를 취하지 않더라도 전염의 위험은 없었다.


세준은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떨어뜨린 과자부스러기처럼 흡혈귀의 시신들을 따라가 마침내 집까지 갈 수 있었다.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흡혈귀들이 모조리 털어간 것 같아.”


하긴 조직이 풍비박산 난 흡혈귀들이 보란 듯이 널려있는 수혁의 무기를 가져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아지트를 구하기도 힘든 지경일 테니까 무기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를 습격한 흡혈귀들도 기껏해야 토카레프나 베라타 따위의 권총들로만 무장했었다.


“메모를 남기고 갔더군.”


건네받은 노란 포스트잇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슬레이어, 현주를 구하고 싶다면 빠른 시일 내에 XX동의 형님당구장이란 데로 와라.


“이제 네가 말할 차례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수혁은 애꿎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과거를 남에게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허나 아인잠카이트는 그를 벌써 두 번이나 도와줬으니 질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곧 그는 결심하고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 간략하게, 최대한 감정을 절제해서. 5년 전, 현주가 흡혈귀들에게 납치당한 것부터 실은 죽었다고 생각한 그녀가 살아있었고 그를 습격해온 일까지 전부 다.


설명을 다 들은 벨라는 새삼 그를 동정한 반면, 세준은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를 죽일 거냐?”


대답은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사랑을 택한다면, 그녀는 살 것이다. 그러나 복수를 이유로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흡혈귀를 살해한 수혁은 어떻게 될까.


헌터가 되기 전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를 호되게 채찍질해서 단련시킨 건 오로지 흡혈귀들을 향한 증오심 하나뿐이었다. 그 증오심이 이제 전부가 되어버렸다. 5년 동안 매일 밤마다 살육을 저지르면서 가까스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버팀목이 증오심이었다. 그게 없어지게 되면 과연 무엇이 남게 될까.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과 정신, 인생 전체를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흡혈귀가 되어버린 현주와 인간인 그가 앞으로 도대체 무얼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증오를 택한다면, 그녀는 죽겠지만 헌터로서 살아온 이유를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는 여태까지보다 더욱 더 흡혈귀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말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을 흡혈귀라는 이유로 죽였으니 앞으로도 흡혈귀를 죽임으로써 그녀를 죽인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자책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 그는 목적을 잊은 채 증오라는 굴레를 영원히 벗어버리지 못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끝에는 절망뿐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하다.


사랑과 증오, 어느 쪽을 택하든 수혁은 상처받고 무너지고 만다. 자신이 여태껏 싸워왔던 이유는 어떤 선택을 하던 자기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릴 것이며 앞으로 돌아갈 장소, 자신을 반겨줄 사람 따위도 없다. 이후의 삶에 이어지는 건 죄책감에 얼룩진 지옥 같은 나날 혹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살육 뿐이다.


넘지 못할 시련의 벽과 조우했을 때, 인간이 취하는 행동을 수백 년을 살아온 세준은 잘 알고 있다. 도망치는 것. 견디기 힘든 현실에서 도망치는 가장 효과적이고 편리한 방법은 바로 자살이다. 수혁이 칠흑 같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올 자살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세준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다가올 결과는 참혹하고 지독하기 짝이 없는 딜레마(Dilemma). 고작 20년 남짓한 세월을 살아온 인간이 감당해내기엔 그 무게가 너무나 무겁다.


“갈 테냐?”


핏기 없이 창백한 헌터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가야지.”

“마땅한 무기도 없으면서? 네게 남은 건 그 몸뚱어리뿐이야.”

“내겐 페르소나가 있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준이 일갈했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기껏 하는 소리가 페르소나라고? 그걸 사용해 흡혈귀들을 전멸시킬 순 있겠지. 허나 페르소나를 사용한 채 현주라는 여자의 앞에 섰을 때 넌 너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수혁의 페르소나를 단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증오’다. 수혁이 죽거나 지구상의 모든 흡혈귀를 섬멸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거대한 증오 덩어리. 페르소나를 자유자재로 사용 가능하더라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수혁은 눈앞에 흡혈귀를 두고 자신의 증오를 멈출 수 있을까? 현주를 만났을 때도 페르소나가 뛰쳐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지 않았던가.


“페르소나는 자주 사용하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힘을 가진 능력이야. 또 다른 인격을 바깥으로 불러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몸의 주도권을 점차 뺏기게 돼. 언젠가 주객이 전도되어 버리는 거야. 괴물이 되는 거라고. 네가 죽든가, 아니면 흡혈귀가 멸종하든가. 그 둘 중 어느 하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거야.”


세준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난 정말 널 죽여야 할지도 몰라.”


잠시 정적


“그럼 그때 가서 날 죽여.”

“그럴 수 없어.”

“왜지? 왜 그렇게까지 날 동정하는 거냐? 페르소나 때문인가?”

“페르소나 따위는 상관없어. 멍청한 놈이 스스로 죽겠다는 데 말리는 건 정상이지.”


두 사람이 철저히 대립하자 보다 못한 벨라가 끼어들었다.


“가서 도와주면 되잖아. 세준, 너라면 흡혈귀들 정도는 간단하잖아.”

“그건 안 돼.”

“어째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수혁의 입에서 나왔다.


“이 싸움은 너희들과 상관없어. 끼어들지 마.”


냉정히 말하는 수혁. 세준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난 이해 못하겠어. 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굳이 가시밭길을 가려는 건데? 게다가 이미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아놓고 이제와 끼어들지 말라는 것 자체가 좀 웃긴 거 아니야?”


세준은 이해하지 못하는 벨라를 이해했다. 마법사로서 평생을 살아온 그녀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와 아무 상관없는 내게 두 번이나 도움을 준 건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도움을 받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거야.”


어쩌면 다른 이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살면서 도움을 한두 번 받는다고 뭐 그리 죄스럽게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게 바로 수혁이 살아온, 살아가는 방식이다. 세상에 동떨어진 외딴 섬처럼 덮쳐오는 파도와 몰아치는 폭풍을 스스로의 힘으로 견뎌야지만 자기 자신에게 떳떳해질 수 있으며 동정을 수치로, 도움을 치욕으로 받아들이는 고집불통인 것이다.


그만의 철칙은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세상으로 매몰차게 내쳐진 십대 시절에 형성된 것이리라.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야. 반드시.”


수혁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한 번씩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분명 남들의 도움을 받으면 간단할 텐데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날지라도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기이한 강박관념에 시달려본 경험이...


세준이 말했다.


“벨라. 사람에겐 때로 혼자서 해결해야만 하는 일도 있는 거야. 언젠가 너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겠지.”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세준도 더 이상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자리를 떴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즈음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큼 회복된 상태였다.


수혁에겐 나이프 한 자루도 없었다. 옷도 그가 입고 왔었던 반팔, 반바지 차림이었다. 세준은 말없이 자신의 옷을 건네주었다.


“무기 없이 괜찮겠어?”

“페르소나를 쓴다.”


후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너 같은 고집불통은 정말 몇 십 년 만인지 모르겠다.”


그러곤 홱 몸을 돌린다. 마중조차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간 고마웠다.”


앞으로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작별인사를 남기며, 그는 떠났다.


------------------------------------


태풍이 본격적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미크로네시아라는 소국(小國)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폭풍신 ‘이위냐’ 라는 이름의 태풍은 대한민국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켜 정말 문자 그대로 바람의 칼을 휘두르고 벼락의 창을 내리꽂았다.


하늘은 온통 회색과 검은 색으로 칠해져있고 구름 때문에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비는 폭포라도 쏟아지는 듯 끊임없이 지상으로 낙하한다.


험상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XX동에 위치한 형님당구장의 입구 앞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있었다. 처마 밑에 몸을 집어넣긴 했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전혀 비를 막아주지 못했다. 들이치는 비에 그들은 이미 머리부터 발까지 쫄딱 젖은 지 오래였다.


“제길. 아무리 흡혈귀라곤 하지만 정말 너무했다고. 이런 날씨에 보초라니.”


그들은 흡혈귀였다. 지금 시각은 낮 2시. 평소 때라면 어두운 지하실에서 잠에 빠져있어야 할 그들이지만 태양이 사라진 하늘 덕분에 이렇게 나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쳇. 보스도 참 너무하지. 아무리 눈이 뒤집힌 흡혈귀 사냥꾼이라도 이런 날에는 안 온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대체 이런 날씨에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쳐들어온다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쏴아아아. 콰르릉! 빗소리 사이로 간간히 으르렁대는 뇌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들 중 한 명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저기 봐.”

“이 날씨에 웬 사람이지?”


흡혈귀의 발달된 눈으로도 꿰뚫을 수 없는 비의 장막 덕택에 실루엣의 주인을 얼른 알아볼 수 없었다. 거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인상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거센 바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이쪽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온 몸으로 비를 맞아가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통 사람은 분명 아닌 듯 했다.


찰박


발목까지 잠긴 물을 헤치고 묵묵히 다가오던 실루엣이 갑자기 멈춰 선다. 거리는 약 10미터. 괴한이 고개를 들자 흡혈귀들은 움찔 하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살기 충만한 눈동자를 본 순간 그들의 머릿속엔 단 한 명의 헌터가 떠올랐다.


“슬레이어?”


좀 이상한 모습이었다. 헌터의 온 몸에서 연기 비슷한 것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색이 칠흑 같이 검었던 것이다. 흡혈귀들은 오싹함을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연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눈에는 마치 검게 타오르는 커다란 불꽃처럼 보였던 것이다.


폐부를 찌를 듯한 살기를 주위에 두른 괴한은 틀림없이 슬레이어였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흡혈귀들은 경악해하면서 재빠르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느려.”


수혁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땅이 푹 파였다. 순식간에 흡혈귀들 지척까지 도달한 그가 수평으로 손을 한 번 휘젓자 허공에 검은 궤적이 그려지면서 두 줄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툭. 데구르르르. 몸과 분리된 머리통들이 빗물에 휩쓸려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몸뚱어리는 털썩 하고 쓰려진다.


스윽. 수혁, 아니 수혁의 몸을 빌린 슬레이어가 두 팔을 벌리고 광기어린 미소를 짓는다.


“킥킥. 자아, 흡혈귀들아. 날 즐겁게 해봐라.”


작가의말

챕터 3도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과거 연재 분 절반 쯤 왓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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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4) 15.03.31 525 9 19쪽
41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3) +2 15.03.30 673 11 19쪽
40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2) +1 15.03.18 552 11 19쪽
39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1) +1 15.03.17 622 14 12쪽
38 Chapter3. Love OR Hate(Epilogue) +2 15.03.15 642 10 12쪽
37 Chapter3. Love OR Hate(13) 15.03.13 484 6 26쪽
36 Chapter3. Love OR Hate(12) 15.03.13 463 6 18쪽
» Chapter3. Love OR Hate(11) 15.03.11 460 9 19쪽
34 Chapter3. Love OR Hate(10) +1 15.03.10 447 10 16쪽
33 Chapter3. Love OR Hate(9) +1 15.03.08 353 9 16쪽
32 Chapter3. Love OR Hate(8) +1 15.03.08 605 9 21쪽
31 Chapter3. Love OR Hate(7) +2 15.03.07 528 11 29쪽
30 Chapter3. Love OR Hate(6) 15.03.07 457 9 21쪽
29 Chapter3. Love OR Hate(5) +1 15.03.06 508 9 21쪽
28 Chapter3. Love OR Hate(4) 15.03.05 431 9 17쪽
27 Chapter3. Love OR Hate(3) 15.03.05 513 9 26쪽
26 Chapter3. Love OR Hate(2) 15.03.04 529 9 19쪽
25 Chapter3. Love OR Hate(1) +1 15.03.02 618 16 21쪽
24 Chapter2. 시체놀이꾼(Epilogue) 15.03.01 408 9 11쪽
23 Chapter2. 시체놀이꾼(11) +1 15.03.01 535 10 16쪽
22 Chapter2. 시체놀이꾼(10) 15.03.01 560 15 16쪽
21 Chapter2. 시체놀이꾼(9) 15.02.28 535 10 20쪽
20 Chapter2. 시체놀이꾼(8) +1 15.02.26 447 10 20쪽
19 Chapter2. 시체놀이꾼(7) 15.02.26 676 11 21쪽
18 Chapter2. 시체놀이꾼(6) +2 15.02.25 682 10 25쪽
17 Chapter2. 시체놀이꾼(5) 15.02.24 597 13 24쪽
16 Chapter2. 시체놀이꾼(4) 15.02.23 458 10 19쪽
15 Chapter2. 시체놀이꾼(3) 15.02.22 582 12 13쪽
14 Chapter2. 시체놀이꾼(2) 15.02.22 688 12 14쪽
13 Chapter2. 시체놀이꾼(1) 15.02.21 764 15 19쪽
1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Epilogue) 15.02.20 754 11 14쪽
1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1) +1 15.02.20 585 15 16쪽
10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0) 15.02.19 645 14 17쪽
9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9) 15.02.18 771 13 15쪽
8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8) 15.02.17 765 14 16쪽
7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7) 15.02.17 771 16 20쪽
6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6) +1 15.02.16 931 15 15쪽
5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5) +2 15.02.15 965 19 20쪽
4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4) 15.02.14 1,085 16 17쪽
3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3) +1 15.02.14 1,226 20 16쪽
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2) 15.02.13 1,711 26 15쪽
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 +2 15.02.13 2,894 3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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