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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알라 님의 서재입니다.

21세기 퇴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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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알라
작품등록일 :
2015.02.13 16:20
최근연재일 :
2015.04.12 18:0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31,541
추천수 :
565
글자수 :
387,690

작성
15.03.0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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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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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21쪽

Chapter3. Love OR Hate(8)

본 글에 등장하는 사건, 장소, 인물, 단체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임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DUMMY

요 며칠 간, 수혁은 집 밖으로 거의 나가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천수 영감네 철물점에 들러서 보수를 받고(천수 영감은 다른 헌터들 몫까지 받아 아주 기뻐하는 눈치였다), 여빈을 만났던 모텔에 세워둔 차를 가지러 갔을 뿐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여빈은 만나지 못하고 그냥 차만 가져왔다.


헌터가 된 후, 하루라도 흡혈귀를 사냥하지 않은 날이 없는 그였다. 허나 누구누구의 말대로 역시 이 몸으론 무리였다. 나가봤자 흡혈귀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개죽음 당할 게 뻔했다.


흡혈귀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기름통을 짊어지고 불 속에 뛰어들 수 있는 수혁조차 그런 개죽음은 싫었다. 한 놈이라도 더 지옥으로 보내야 하는 그다. 잠시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만히 방 안에 앉아있으니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꽃다운 20대 청년이건만 집에는 컴퓨터는커녕 책 한 권 없고, 심지어 유치원생도 들고 다니는 휴대폰 또한 없다.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수단은 신문과 TV뉴스뿐이고, 아주 가끔 pc방에 들러 인터넷을 검색하곤 했다. 왜냐고 물으면, 그게 더 싸다고 말하는 수혁이다.


돈 문제가 나와서 하는 얘긴데 사실 헌터들의 돈줄은 의뢰비를 제외하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흡혈귀의 피는 마법재료로서 제법 값어치 나가는 것임이 틀림없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전투에서 돈을 생각하다간 목이 날아가기 십상이다.


더구나 수혁은 최대한 출혈을 일으켜 흡혈귀의 힘을 약화시키는 전투 스타일을 즐겨 쓰는 덕분에 돈 벌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간혹 혈액을 채취할 때도 있지만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거나 급하게 돈이 필요한 경우에만 썼지 결코 사치를 위한 적은 없었다. 증오의 순수성이 돈에 의해 퇴색될까봐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에 의존하지 않는 것 또한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었다. 그런 걸 보면 수혁은 젊은 나이면서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산책이라도 할까?”


아무래도 집안에만 갇혀있으니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진드기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으니 가볍게 기분전환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 사소한 기분이 나중에는 자신의 손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이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법사 협회의 연구에 따르면 우습게도 전 세계 헌터의 절반 가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하니 우울증이란 녀석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나머지 절반은 흡혈귀와의 전투 중 사망이다. 살아서 이 세계를 나가는 경우는 겨우 3%남짓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밖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바람도 불고 제법 쌀쌀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태풍이 올 시기인가? 흡혈귀들이 날뛰기 아주 좋은 때다. 저주스러운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니 낮에 얼마든지 행동을 취할 수 있으니까.


검은 색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온 수혁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람이 제법 세게 부는 게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날씨 예보를 미처 보지 못한 까닭에 막연히 태풍이라고 추측했을 뿐인데 그게 정말이었나 보다.


회색빛 구름 속에서 섬광이 번뜩이더니 지상으로 빛의 기둥이 내려 꽂혔다. 콰르르릉. 수 초 후 대기가 진동하는 뇌성(雷聲)이 울려 퍼지고 비바람이 거세진다.


산책하기 최악의 날씨였다. 수혁은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간 우산을 썼어도 쫄딱 비에 맞을 게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병든 몸 감기마저 들어버리면 흡혈귀 사냥에 크나큰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동네 한 바퀴를 빙 돈 것만으로 산책을 종료한 수혁은 집으로 허탈하게 발길을 향했다. 날씨가 나쁜 탓인지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촤자자자작


그때 섹시한 굴곡의 붉은 스포츠카 한 대가 빗물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지나칠 줄 알았던 차는 수혁 바로 옆에 붙어 섰다.


지잉. 창문이 내려지고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간만이죠, 수혁 씨?”


단아한 아가씨 같은 인상의 미인, 마여빈이 특유의 발랄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수혁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의아했지만 일단 아는 척은 해주었다.


“아아.”


그건 정말 성의라곤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인사, 아니 인사라고도 부를 수 없었다.


“파하하. 당신다워요.”


유쾌하게 웃어넘긴 여빈이 조수석 문을 열어 들어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순간 수혁은 갈등했다. 과연 그녀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처절한 전투에서 함께 살아남은 전우를 그런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봐서 되겠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함께’는 아니지, 라고 말하려던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차에 올라탔다. 스포츠카 특유의 낮은 차체 때문에 쑥 가라앉는 느낌이 생소했다. 보이는 시야도 훨씬 낮다. 막상 타고 보니 승차감은 편안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한 건데요?”

“날 바보로 보는 거야? 웃기지마.”


이유라면 여러 가질 댈 수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수혁은 ‘우연’이라는 요소를 믿지 않았다.


“천수 영감이겠지?”

“어머머. 어떻게 아셨어요?”


한 번 찔러본 건데 여빈은 즉시 반응을 보였다. 역시 그랬군. 수혁의 주소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남에게 정보를 팔아먹을 수 있는 자는 돈을 무지하게 밝히는 괴팍한 천수 영감밖에 없다.


어제 보수를 받으러 철물점에 갔을 때 쇳소리를 닮은 목소리로 묘한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하여간 너도 얼굴은 못나지 않아서 그런지 인기가 꽤 많단 말이야.’


웬 뚱딴지같은 소릴 하나 싶었더니 이런 거였군. 수혁은 다음에 들리면 반드시 한 방, 아니 정보를 팔고 받은 돈을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용건은 뭐지?”

“수혁 씨 정말 너무하다. 전 순수하게 당신이 걱정돼서 잘 있나 보러 온 것뿐이라고요.”

“살아있다는 소식은 천수 영감한테서 들었을 텐데? 굳이 찾아온 건 역시나 용건이 있단 뜻이겠지.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냉기가 풀풀 날리는 말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있었다.


“에효. 당신은 이겼어요. 그럼 용건만 간단히 하도록 하죠.”


여빈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당신에게 몇 명이 갔죠?”

“4명.”

“거짓말인 거 다 알고 있답니다!”

“7명.”

“땡!”

“10명.”

“딩. 동. 댕.”


꿈틀. 수혁의 눈썹이 살짝 치켜세워졌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대체 왜 물어 본거야? 그보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어머나. 우리의 또 다른 전우를 깜박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죠, 설마?”


수혁은 강혁 이라는 이름을 가진 헌터를 기억할 수 있었다. 말도 많고 불평도 많았지만 그래도 여빈을 제외하고 가장 헌터답게 행동했던 남자였다.


“그쪽엔 추적자가 아무도 붙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후후. 실력은 어중간 하면서 운은 억세게 좋은 남자예요.”


그때 지하실에서 살아남았던 흡혈귀 수는 총 13명이었다. 여빈의 정보가 맞다면 강혁에겐 0명, 수혁에게 10명이니 나머지 3명은 여빈을 뒤쫓아 갔으리라. 눈앞에 그녀가 아무런 상처 없이 있는 걸 보면 그 흡혈귀 3명은 틀림없이 사냥 당했겠지.


“놀랍군. 당신 실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사돈 남 말 하시네요. 저야말로 놀랐는걸요. 혼자 10명을 죽이고 멀쩡하다니. 어떻게 살아남았죠?”


아마도 이 질문이 그녀가 그를 직접 찾아온 이유이리라. 수혁은 말하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감출 필요는 없지만 좋게 말해서 페르소나이지, 툭 까놓고 말해서 단순한 정신병자 아닌가. 또 다른 인격을 끄집어내어 괴력을 발휘한다니. 무슨 헐크도 아니고.


더군다나 수혁은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힘이 아닌 페르소나를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인정하는 순간 편리하기 짝이 없는 그 힘에 점차 의존하게 될 테고, 그건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어린 시절의 결심을 스스로 부수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밀 많은 남자로군요. 의외로 딱 잡아떼는 것도 못하구요.”

“그냥 하다 보니 되었다, 식으로 말해도 어차피 안 믿을 거잖아.”

“헤에. 수혁 씨가 제 성격을 그렇게 잘 알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눈을 흘기며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정말로 안 가르쳐 주실 건가요? 제가 가~안절히, 아주 가~안절히 부탁해도?”

“...”


목소리에 비음을 섞고 귀엽게 교태를 부려봤지만, 역시 헛짓이었다. 수혁은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여빈도 별 기대도 안했는지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뭐, 됐어요. 하지만 제가 못 알아낼 줄 알면 큰 오산이에요, 수혁 씨. 언젠가 당신의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고 말테니까.”

“맘대로 해.”

“치이. 재미없게. 그럴 땐 좀 치고 들어와야죠. 당신은 실력도, 외모도 다 좋은데 유머감각이 너무 없어서 문제에요.”

“살면서 별로 필요한 건 아니잖아.”

“당신은 좀 심하다구요!”


용건이 끝난 듯 그녀는 유머가 얼마나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그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밖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기에 수혁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다. 여빈은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다만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나지막하게 불렀을 뿐이다.


“수혁 씨.”

“뭐지?”

“으응.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건 수혁의 착각이었던 걸까? 여빈은 금세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발랄한 말투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그와 작별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이별입니다, 바이바이!”

“아아.”


대충 손을 흔들어주는 수혁을 뒤로 하고 빨간 로터스 에보라가 물살을 가르고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에 가려져 벌써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빠른 퇴장. 수혁은 스포츠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한 번 피식 웃고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여간 재밌는 여자야.”


빗소리에 묻혀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올 때쯤엔 빗방울이 조그만 돌멩이만큼 커다래져 혹시 우산이 뚫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거센 바람 덕분에 허리 아래는 쫄딱 젖은 생쥐 꼴이었다.


철컥


수혁은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들을 갈아입고 철퍼덕 대자로 뻗어 누웠다. 난방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는 방이지만 밖에서 차가운 비를 맞고 들어온 덕분인지 꼴에 집이라고 등이 따끈해졌다.


천장을 시커멓게 물들인 곰팡이 얼룩이 보였다. 아마 이번 태풍이 지나가면 대청소라도 한 번 해야 할 듯하다. 아니면 아예 이사를 가든가. 이렇게 눅눅한 방 안에 총기류나 화약류, 도검류를 쌓아놓고 있으면 매일 수혁이 정비를 해도 무기들의 성능이 질적으로 급격히 하락하는 건 어쩔 수 없을 테니까.


...


아주 찰나였지만, 수혁은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22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기 싫은 것도 많은 나이였다. 아무리 독하게 살아왔어도, 아무리 독하게 살기로 결심했어도 가만히 누워 사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울컥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대체 왜 내가 내 몸보다 무기의 질을 더 걱정해야하는지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런 삶을 택한 건 5년 전 치기 어린 증오심에 사로잡혔던 자신이니까. 흡혈귀를 증오하는 마음은 아직 변치 않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때의 자신을 쥐어 패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이쯤 되면 등장할 때도 되었는데, 라고 수혁이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어. 또 처량한 사색에 잠겨있는 거냐? 너도 참 한심하군. 그 좋은 머리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라고. 흡혈귀를 죽이는 방법을 새로 강구하거나 아니면 흡혈귀가 어디 숨어있을지 추측하거나 등등. 또 다른 것도 많잖아?


흡혈귀, 흡혈귀, 흡혈귀... 오로지 흡혈귀 타령인 그의 페르소나는 다른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양심이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양심이 사람을 올바른 길로 가게끔 해주는 사랑의 매라면, 이 녀석은 그 끝에 처절하고 처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수라의 길을 걷도록 강요하는 증오의 채찍질이랄까.


이런 게 또 다른 나라고? 수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새삼스럽지만, 자신이 참 삭막한 인간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넌 날 박수혁이라고 부르지. 그럼 나도 널 박수혁이라고 불러야 하나?”


방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혼잣말 하고 있는 수혁을 누가 본다면 미친놈 취급하기 딱 좋으리라.


-너 오늘 좀 이상하군. 평소라면 날 무시하려 했을 텐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수혁은 우연히 페르소나 능력을 각성했던 날부터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외면해왔다. 아마도 미친 거라고 추측하면서. 정말 죽기 직전의 위기까지 몰리지 않으면 정체불명의 검은 오러는 사용해오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 아닌 것에 몸이 휘둘리는 건 정말 꼴불견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잠카이트가 능력의 정체를 알려준 후, 정체불명의 힘은 몰라도 이 녀석의 존재 자체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쨌든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파편이 아닌가. 무시해서도 안 되고,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무시한다면 그건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유는 됐어.”


-흐음. 글쎄. 박수혁도 좋지만 기왕이면 서로 구분되었으면 좋겠는데. 좀 더 대화하는 맛이 있잖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수혁이 문득 말했다.


“슬레이어.”


확실히 흡혈귀를 향한 순수한 증오심에서 탄생한 그의 페르소나에게 그 이상으로 어울리는 이름은 없으리라.


-흐흐. 좋군. 그럼 내게 이름을 준 대가로 좋은 거 하나 가르쳐주지. 지금 밖에 널 노리는 자들이 있다.


수혁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슬레이어가 아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마 흡혈귀들이겠지? 저번에 그 난리를 쳤으니까 복수하러 오겠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수혁이 사는 빌라는 방음이라곤 전혀 안 될 만큼 낡은 탓에 평소에 층간소음이 매우 심하고 소리가 울리는 편이었다.


그 덕분이랄까,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데는 이보다도 좋을 수가 없었다. 침입자가 여러 명이고 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한 가지 아쉬운 건 빗소리에 묻혀 조금 더 일찍 듣지 못했다는 점이다. 발소리의 크기를 봤을 때 적들은 이제 막 2층을 지나는 중이었다.


수혁은 그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고 왔을까, 라는 의문은 잠시 제쳐두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AA-12, 컴뱃 나이프, 글록, 수류탄 몇 개 등 주무장을 챙겼다.


방탄방검복은 입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포기하고 아쉬운 대로 바디벙커를 왼손에 착용했다. 한손으로도 충분히 들 수 있는 가벼운 케블라 소재이긴 했지만 웬만한 서브머신건의 난사에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꽤 오래 전에 거금을 들여서 구입해놓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기회가 찾아올 줄은 그도 몰랐었다.


-박수혁. 내 힘을 쓰는 게 어때?


악마의 달콤한 유혹처럼, 슬레이어가 제안해왔다. 확실히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검은 오러의 힘을 쓰면 흡혈귀 10명이든 20명이든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테니까.


수혁은 단번에 거절했다.


‘넌 닥치고 있어. 내 힘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을 테니까.’


-킥킥. 아까까진 친근하게 굴더니 이번엔 또 매몰차군? 내 존재를 인정하긴 했어도 힘은 별개의 문제라는 건가? 하여튼 그 잘난 고집은 알아줘야겠어. 정말 난공불락이야. 뭐, 네가 위험해지면 저절로 교체될 테니 느긋하게 실력이나 감상해볼까?


마치 영화나 감상하겠다는 투의 태평한 어조라서 수혁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난 진짜 미치고 말았구나, 생각하면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집 안에서 적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외부로 나갈 것인지. 두 선택지 모두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집 안에서 기다린다면 좁은 입구를 이용해서 적과 효율적인 교전을 펼칠 수는 있지만 돌입을 허용해버리거나 수류탄이 투척되면 꼼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그의 집은 각종 폭약류가 즐비하게 쌓여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빌라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 지형지물을 이용해 좀 더 자유로운 전술을 구사할 수 있지만 민간인의 눈에 뜨이기도 쉬운데다가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엔 시야도 제한되고 움직임도 굼떠져서 평소 전투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1초 내지 2초 동안의 짧은 고민 끝에 수혁은 후자를 택했다. 막상 선택한 후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콰창!


수혁은 창문을 깨부수고 바디벙커를 먼저 던져버린 뒤 망설임 없이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집은 빌라 3층. 약 10m쯤 되는 높이는 수혁처럼 고도로 훈련한 인간이라면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을 만한 높이였다.


“크윽!”


뛰어내리자마자 후회하고 말았는데 서두르기 바빠 미처 몸 상태를 고려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다행히 큰 부상 없이 착지에는 성공했지만 발목에 무리가 간 모양인지 짜릿한 통증이 엄습했다.


절뚝거리며 일어난 수혁이 바디벙커를 들어 등 뒤를 보호하기가 무섭게 총알이 꽂혔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듣고서 곧장 방으로 들어온 적들이 밖으로 뛰어내린 수혁을 발견하고 총을 갈기기 시작한 것이다.


퍽 퍽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충격이 전해져 왔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총성을 볼 때 적들의 무기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토카레프나 글록, 베레타 따위의 핸드건. 아무리 최대한 가볍게 만든 바디벙커라도 관통될 리가 없었다.


“저 놈 이상한 방패 같은 걸 들고 있어!”

“슬레이어가 도망친다! 잡아!”


10m 남짓 되는 높이에서 아주 가볍게 뛰어내리고서 곧바로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경이적인 신체능력을 가진데다가 수혁을 슬레이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역시 적들은 흡혈귀인 모양이었다.


“쳇!”


수혁은 쫓아오는 흡혈귀들을 향해 간간히 글록을 쏘면서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뚫고 주차되어 있던 자신의 SUV에 탑승할 수 있었다. 허둥지둥하느라 열쇠구멍에 키를 못 꽂거나 시동이 안 걸리는 식의 삼류 액션 영화 속 작위적인 해프닝은 벌어지지 않았다. 키는 부드럽게 끼워졌고 시동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걸렸다.


기어를 중립에서 운행으로 바꾸고 엑셀을 밟는 순간, 운전석 창문이 깨지면서 코끝을 뭔가가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축축하고 비릿한 맛이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몸이 1cm만 더 앞으로 나와 있었다면 코가 날아갔을 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천운이었지만 수혁은 하늘에 감사하고 있을 여유도 없이 몸을 깊숙이 숙여 총격을 피하고 엑셀을 힘껏 밟았다.


흡혈귀들이 그가 도망가는 걸 보고만 있을 리는 없었다. 수혁이 몸을 깊이 숙여버린 탓에 총이 통하지 않자 그들 중 몇몇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이제 막 가속하기 시작한 SUV의 뒤에 올라타 버린 것이다.


터더텅 하고 차체가 여러 번 출렁거렸다. 수혁이 욕을 내뱉으면서 뒤에 붙은 흡혈귀들을 향해 총을 갈겼다. 유리창이 깨져나가며 한 놈이 떨어져나갔다.


아직 3명이나 매달려 있었다. 그 중 한 놈이 차 위로 올라가려고 버둥거리고 있길 래 핸들을 옆으로 갑자기 꺾어버렸다.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한 녀석은 붕 날아가더니 가로등에 처박힌다. 금방 일어나질 못하는 걸 보니 즉사는 아니더라도 목뼈가 부러져 재생하는데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저 정도면 아마 더 이상 쫓아 오진 못할 것이다.


“슬레이어!”


흔들리는 차에 매달려 한참 안간힘을 쓰던 10대로 추정되는 잘생긴 흡혈귀 소년이 기어이 차 뒷좌석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녀석의 입가에는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넌 이제 죽었어!”

“죽여 봐!”


수혁은 비웃으면서 브레이크 페달을 세게 밟았다.


촤자자자자작!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던 SUV에 제동이 걸렸다. 비록 내린 비 때문에 쭈욱 미끄러졌지만 뒷좌석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타고 있던 흡혈귀가 관성력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튕겨져 나오는 데는 충분했다.


콰직, 하고 녀석의 머리가 앞유리를 처박히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수혁이 훤히 열린 관자놀이에 은탄환을 먹여주었다.




“병신. 그러니까 뒷자석에 타도 안전벨트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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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8) +3 15.04.12 636 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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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6) +1 15.04.03 520 10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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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4) 15.03.31 525 9 19쪽
41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3) +2 15.03.30 672 11 19쪽
40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2) +1 15.03.18 552 11 19쪽
39 Chapter4.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1) +1 15.03.17 622 14 12쪽
38 Chapter3. Love OR Hate(Epilogue) +2 15.03.15 642 10 12쪽
37 Chapter3. Love OR Hate(13) 15.03.13 484 6 26쪽
36 Chapter3. Love OR Hate(12) 15.03.13 462 6 18쪽
35 Chapter3. Love OR Hate(11) 15.03.11 459 9 19쪽
34 Chapter3. Love OR Hate(10) +1 15.03.10 447 10 16쪽
33 Chapter3. Love OR Hate(9) +1 15.03.08 352 9 16쪽
» Chapter3. Love OR Hate(8) +1 15.03.08 605 9 21쪽
31 Chapter3. Love OR Hate(7) +2 15.03.07 528 11 29쪽
30 Chapter3. Love OR Hate(6) 15.03.07 457 9 21쪽
29 Chapter3. Love OR Hate(5) +1 15.03.06 508 9 21쪽
28 Chapter3. Love OR Hate(4) 15.03.05 431 9 17쪽
27 Chapter3. Love OR Hate(3) 15.03.05 513 9 26쪽
26 Chapter3. Love OR Hate(2) 15.03.04 529 9 19쪽
25 Chapter3. Love OR Hate(1) +1 15.03.02 617 16 21쪽
24 Chapter2. 시체놀이꾼(Epilogue) 15.03.01 408 9 11쪽
23 Chapter2. 시체놀이꾼(11) +1 15.03.01 535 10 16쪽
22 Chapter2. 시체놀이꾼(10) 15.03.01 559 15 16쪽
21 Chapter2. 시체놀이꾼(9) 15.02.28 534 10 20쪽
20 Chapter2. 시체놀이꾼(8) +1 15.02.26 447 10 20쪽
19 Chapter2. 시체놀이꾼(7) 15.02.26 676 11 21쪽
18 Chapter2. 시체놀이꾼(6) +2 15.02.25 682 10 25쪽
17 Chapter2. 시체놀이꾼(5) 15.02.24 597 13 24쪽
16 Chapter2. 시체놀이꾼(4) 15.02.23 458 10 19쪽
15 Chapter2. 시체놀이꾼(3) 15.02.22 582 12 13쪽
14 Chapter2. 시체놀이꾼(2) 15.02.22 688 12 14쪽
13 Chapter2. 시체놀이꾼(1) 15.02.21 764 15 19쪽
1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Epilogue) 15.02.20 754 11 14쪽
1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1) +1 15.02.20 584 15 16쪽
10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0) 15.02.19 645 14 17쪽
9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9) 15.02.18 771 13 15쪽
8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8) 15.02.17 764 14 16쪽
7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7) 15.02.17 771 16 20쪽
6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6) +1 15.02.16 931 15 15쪽
5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5) +2 15.02.15 965 19 20쪽
4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4) 15.02.14 1,085 16 17쪽
3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3) +1 15.02.14 1,226 20 16쪽
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2) 15.02.13 1,711 26 15쪽
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 +2 15.02.13 2,893 3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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