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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알라 님의 서재입니다.

21세기 퇴마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위대한알라
작품등록일 :
2015.02.13 16:20
최근연재일 :
2015.04.12 18:0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31,544
추천수 :
565
글자수 :
387,690

작성
15.03.02 17:42
조회
617
추천
16
글자
21쪽

Chapter3. Love OR Hate(1)

본 글에 등장하는 사건, 장소, 인물, 단체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임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DUMMY

사랑과 증오는 같은 것이다. - 독일의 법학자, 한스 그로스(1847∼1915)





----------------------------------



허억! 허억!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남자는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온 몸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난도질당한 상처는 재생되지 않았다. 부정한 힘을 정화하는 은(銀)을 첨가한 무기에 당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그는 누굴 탓해야 할 지 몰랐다. 10년 전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던 그를 살려준 어느 마음씨 좋은 뱀파이어? 그가 속했던 조직의 보스를 죽여 조직을 와해시킨 타락한 마법사? 그것도 아니면 그를 사냥하려는 저 빌어먹을 헌터?


“젠장. 젠장. 젠장. 젠장!”


그는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계속 달렸다. 대량의 출혈 때문에 속도는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현기증마저 나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빈혈이라니! 이 무슨 웃기는 상황인가.


그런데 뒤쫓아 오던 추적자의 인기척이 돌연 사라진다. 흡혈귀는 잠시 멈춰 뒤를 확인해봤다. 역시 추적자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포기한 걸까? 희망을 한순간이라도 가졌던 게 화근이었다. 어둠에 잠긴 골목에서 불빛을 발견한 그 다음 순간, 뱀파이어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끄악!”


이 거리에서 흡혈귀를 상대로 인기척을 지울 수 있다니. 평범한 인간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잡았군.”


그 목소리에 뱀파이어는 진정 소름이 끼쳤다. 목소리에는 담긴 증오와 분노, 살기만이 가득했다. 인간을 먹이로 삼는 종족인 그가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우스운 소리가 또 없겠지만 이놈은 달랐다.


“빌어먹을 헌터.”


헌터. 어떠한 퇴마 능력도 배우지 않고 순수한 인간의 육체와 순수한 인간의 무기로 무장한 채 마물을 사냥하는 이들을 부르는 이름. 한때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우연히 마주친 괴물에게 연인, 가족, 친구 등을 잃고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하에 이면세계에 발을 들이민 불쌍한 피해자.


그들 중 대부분은 첫 전투에서 방아쇠도 제대로 당겨보지 못하고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태어날 때부터 훈련받은 프로 퇴마사들도 마물을 상대하다가 픽픽 죽어나가는 게 이면세계의 현실이었다. 무작정 쏴 갈긴다고 해결이 된다면 말도 안 되리라.


하지만 드물게도, 정말 드물게도 천재적인 헌터가 등장해 명성을 떨치기도 한다. 육체를 한계까지 단련시키는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흉기 그 자체로 변화시키고 총과 칼과 폭탄을 자유롭게 다루는 자들. 평범하게 살았다면 절대로 알아챌 수 없었을 자신의 살인 재능을 우연한 계기로 인해 각성하는 자들.


증오심으로 미쳐버린 나머지 마물을 죽일 수만 있다면 설령 지옥불 속이라도 웃으며 뛰어들 수 있는 버서커(Berserker)...


상처 입은 흡혈귀를 내려다보는 헌터는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 자였다. 그 증거로 헌터의 눈에서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마물들도 두려워할 만큼 깊고 새카만 칠흑이 꿈틀대고 있었다.


“루터의 조직에 있던 놈이라고 하더니 도망치는 게 고작인 실력인가. 실망이야.”


헌터의 비아냥거림처럼 개 마냥 바닥에 엎어진 뱀파이어는 사실 한국에서 꽤나 유명한 흡혈귀 루터의 조직, 루터즈 패밀리에 속해있던 말단 조직원으로서 얼마 전 루터가 의문의 사건으로 행방불명되고 조직이 공중분해 되는 바람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 비운의 흡혈귀였다.


“크윽! 보, 보스만 계셨다면 너 정도는!”


그 말에 겨우 20세를 넘긴 듯한 앳된 얼굴의 헌터가 비웃었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 녀석이 있었을 줄이야. 루터가 요한에게 이용만 당하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 것 같아? 그 일이 있은 직후로 벌써 3주나 흘렀다.”


총 53명의 사망자가 나온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악의 엽기연쇄살인사건이 시체놀이꾼 요한 베네딕트가 뱀파이어들의 신물(神物) ‘타나토스의 오른팔’을 얻기 위해서 벌인 짓이라는 건 그들 세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퍼진 사실이었다.


막강한 정치력을 지닌 교회가 필사적으로 정보를 통제하려고 노력했지만 미카엘의 사도, 뱀파이어 프린세스, 아인잠카이트 등 워낙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고, 또 그들 모두가 대단한 존재들이다 보니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보다...”


헌터는 까맣게 무광처리를 한 글록을 뱀파이어의 뒤통수에 대고 방아쇠를 살짝 당겼다.


“네놈의 친구들이 어디 있는지 불어보실까.”


흡혈귀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내가 그걸 가르쳐 줄 성 싶냐?”

“그렇단 말이지?”


헌터는 아까 은탄환에 관통당한 무릎에 한 번 더 총을 쏴주었다.


퍽!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소음기 탓에 총성은 공이 치는 소리만 났다. 덕분에 근육이 파열하고, 뼈가 박살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으으아아아악!”

“불어.”


퍽! 퍽! 퍽!


“불어.”

“비-일-어먹을! 이 미친 새끼야!”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헌터는 잠시 고민을 한 뒤에 글록을 거두고 등 뒤에 비스듬히 걸치고 있던 샷건을 손에 쥐었다. AA-12. 내부구조가 단순해서 잔고장이 극히 적고 드럼탄창이 20발이나 되는 전자동 산탄총. 샷건 주제에 1분에 무려 300발이나 발사할 수 있는 연사속도를 가지고 있어서 일명 ‘괴물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헌터는 바로 그 괴물총을 뱀파이어의 어깨에 대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쾅 하는 총성이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아무리 인적이 없는 곳이라지만 그것은 매우 대담한 행동이었다.


“................................!!!!!!”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흡혈귀가 쓰러진다. 오른쪽 어깨는 이미 한줌의 핏물이 되어 바닥에 흐르고 있다. 그런 주제에 아직 죽기는커녕 기절조차 하지 않는다. 약점인 은탄환을 사용해도 재생력을 약화시킬 뿐 특유의 엄청난 생명력까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들의 강한 신체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해주지만 이 경우에는... 차라리 기절하는 게 더 나으리라.


“불어.”

“이 미친 새끼! 여긴 서울 한복판이야! 그런 총을 쏘면...!”

“그런데?”


뭘 어쩌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헌터를 보고 흡혈귀는 아연 질색했다.


“네가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네 목숨일 텐데.”

“그냥 죽여! 그냥 죽이라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쯧. 귀찮게.”


쾅! 쾅!


헌터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머지 성한 어깨와 무릎에도 한 발씩 쏴주었다.


“흐아아아아악! 이 악마! 지옥에 떨어질 악마새끼!”

“쿡쿡. 뱀파이어가 인간보고 악마라니. 이보다 웃긴 코미디가 없겠어.”


광기에 찬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는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이 녀석. 도저히 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피도 이 만큼 흘렸으니 흡혈귀의 질긴 생명력으로도 더 이상 고문을 한다면 목숨은 보장하지 못한다. 게다가 아무리 인적 없는 골목이라도 총성은 컸다. 곧 들은 자가 찾아올지도 모르니 이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듯싶다.


“그럼 소원대로 해주지.”


그렇게 생각한 그는 AA-12를 다시 등에 메고 대신 허리춤에서 컴뱃 나이프를 꺼내들어 단숨에 뱀파이어의 목에 꽂았다. 망설임 없이 목숨을 빼앗는 행동은 능숙했다.


“컥! 크르륵!”


나이프가 꽂힌 목을 부여잡고 흡혈귀가 헌터를 쳐다본다. 증오에 찬 눈이었다. 그러나 그 증오의 빛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잃고 사라진다.


그 전에 출혈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피는 별로 솟구치지 않았다. 뒷정리를 따로 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흡혈귀 시체를 잘 안 보이는 구석 쪽에 처박았을 뿐이다. 핏자국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아침 해가 떠 시체는커녕 핏자국도 흔적 하나 남지 않고 불타오를 것이다.


“하긴 너희들에겐 그런 죽음이 어울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몸을 일으킨 헌터는 주변에 떨어진 글록의 탄피, AA-12의 탄피를 주웠다. 시체는 태양이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탄피가 발견되면 총기관리가 엄격한 대한민국에서 한 바탕 난리가 난다. 뭐, 최근 한국은 시끄러워서 그 정도론 이슈도 못 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는 완전히 숨이 끊어진 뱀파이어의 시신을 등지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


“귀국하시는 겁니까?”

“그래.”


저 멀리 비행기가 이륙하는 풍경을 등지고 서 있는 두 남자. 그 중 검은색 신부복을 입고 등 뒤엔 천으로 감싼 일본도를 비스듬히 멘 괴상한 옷차림의 일본인 청년의 질문에 늙은 신부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태도 어느 정도 진정되었으니 이만 돌아가야지. 옛날부터 아인잠카이트와 관련된 일들은 골치 아프기만 했어. 젊었을 때라면 몰라도 이젠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감당하기가 버겁군.”


최근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 특히 요한 베네딕트의 등장은 릴리만 신부라는 거물이 직접 나서서 뒷수습을 해야 할 정도로 그 피해 규모가 엄청났다. 사망자가 무려 53명이나 나왔다는 것도 큰일이지만,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던 그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렀던 건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릴리만과 정예 엑소시스트 부대가 신속하게 대처했기에 실질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진짜 문제는 그들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수가 자그마치 100여 명에 가까웠던 것이다.


릴리만은 어쩔 수 없이 신성 마법으로 목격자들과 사건 관계자들의 기억을 소거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5퍼센트 확률 미만이긴 해도 대상이 백치나 광인(狂人)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한, 두 명도 아니고 100여 명에 달하는 목격자들의 존재는 자칫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또 교회의 막강한 정치력과 권력을 이용해 민감한 정치 스캔들을 터트려 매스컴이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 기사를 내보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놓았다.


동시에 릴리만은 더미(Dummy), 가짜 범인을 만들어 사건을 서둘러 종결시켰다. 사실 조직의 특성상 골치 아픈 일의 뒤처리를 도맡아하는 교회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바티칸 지하 감옥에 흉악 범죄자들을 감옥에 가둬놓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단이나 사이비 교리를 퍼트린 교회의 적이었다. 그들에게 하지도 않은 범행을 자백시킨 뒤에 자살이나 병처럼 꾸며 죽였다. 살려두면 혹시 모를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건은 깊숙이 묻혔다. 자수한 범인이 옥중에서 자살한 사건은 일주일 정도 이슈가 되었을 뿐이지 사람들 기억 속에서 금방 사라졌다. 어차피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선 매스컴에서 다루지 않는 이상 이슈가 오랫동안 유지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라곤 해도 SNS와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떠도는 것은 감히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도시 괴담이라고 불리는 21세기의 전설이 하늘을 찌르는 고층 건물이 들어선 도시에 떠돌기 시작했다. 되살아난 시체, 총화기로 무장한 엑소시스트, 도시의 어둠에 숨어 피를 빨아먹는 괴물들...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되고, 과장되고, 선정적으로 변해 어느 새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 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비웃으면서도 홀로 어두운 골목을 지날 때면 두려움에 떨곤 했다.


“너는 가지 않을 테냐?”

“네.”


릴리만의 제자이자 현 대천사 미카엘의 사도인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을 잡을 셈이냐?”

“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신속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루터가 살해되고 히라노가 행방불명되어 그들이 운영하던 조직이 완전히 해체된 지금, 휘하 조직원이던 수 백 명의 뱀파이어들이 서울의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좌천된 제 5대 뱀파이어 프린세스 세레나 아우렐리에가 어떤 조건도 없이 그들을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지만 효과는 없었다. 애초에 루터나 히라노가 조직을 운영하는데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던 세레나였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극히 적었던 것이다.


하긴, 출생마저 고귀하지 못한 말단 조직원들이 조직이 해체되었다고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세레나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세레나가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약속을 건다고 하더라도 몸을 의탁한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루터와 히라노의 조직에 몸담고 있던 뱀파이어들의 극히 일부만 세레나의 조직으로 흡수되고, 나머지는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자연스레 그들을 구속하던 룰도 없어지고, 벌써 몇몇은 인간을 습격하는 등 대범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무시할만한 수준이었지만 최근엔 갈수록 흡혈귀에 의한 피해가 급증하고 있었다.


마이클이 처리해야 할 일이라는 건 그런 자들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아인잠카이트도 이번 일에 적극적입니다.”

“그 자가?”

“네. 세레나 아우렐리에를 지원하기 위해서랍니다.”

“흥. 늘그막에 나대는군. 아주 재미가 들렸나 보지?”


마이클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아인잠카이트에게 이렇게까지 독설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자신의 스승 릴리만 하나뿐이리라 생각하면서.


“그럼 너까지 나설 필요가 없지 않으냐. 헌터들도 알아서 움직일 텐데.”


떠돌이 뱀파이어들이 설치고 다닌다면 헌터들이 나설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굳이 마이클씩이나 되는 거물이 직접 처리를 할 필요가 없었으나 정작 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에는 실력 있는 헌터가 별로 없습니다. 흡혈귀 한 마리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자들을 믿다간 전염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긴 그렇겠군.”


인간의 근력보다 수배에서 수십 배나 강한 근력을 소유한 뱀파이어들이기에 아무리 총화기로 무장한 헌터라고 해도 아차 하는 순간 당하고 마는 게 일반적인 일이다. 보통 헌터는 하급 뱀파이어 한 마리도 상대하기 힘든데다가 이 나라에는 그 수마저 압도적으로 적다. 가만히 내버려두다간 자칫 전염이 확산되어 흡혈귀의 수가 크게 불어날 수도 있다. 어쨌든 흡혈귀의 전염 속도는 페스트나 흑사병보다도 경이적인 것이니까.


“소문에는 제법 강한 헌터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누군지 알고 있나?”

“네. 최근 주목 받는 헌터가 한국 출신입니다. 저하고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죠. 그땐 헌터가 아니었지만.”

“이름은?”


백발의 신부가 묻자 마이클은 기억 속 청년의 이름을 떠올렸다.


“박수혁. 이름보다 ‘슬레이어(Slayer)’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남자입니다.”



------------------------------------------


“네.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 네. 네. 그럼 조만간... 네.”


금발의 연금술사 벨라 시몬은 자신을 걱정하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괜찮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야 간신히 전화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전화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젊은 동양인 청년이 물었다.


“벤자민이야?”

“응.”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저번 사건 때문에.”


끝을 얼버무리는 벨라의 말을 세준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흡혈귀가 된 네크로맨서 요한 베네딕트가 자신이 금기의 마법을 연구하는 것을 고발한 벨라의 목숨을 노렸을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게 벌써 벤자민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건가?”

“워낙 일이 크게 벌어졌으니까.”

“하긴.”


세준은 납득했다. 미카엘의 사도들. 뱀파이어 프린세스. 그리고 세준이 직접 움직이기 까지 했던 사건이다. 벤자민 시몬과 같은 위치의 남자가 그걸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일은 관두고 당장 돌아오래. 아직 요한이 이 나라에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

“흐음. 그래서 대답은 뭐라고 했지?”

“조만간 돌아가겠다고 했어.”


벨라는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귀국하기가 꺼려졌다. 마땅한 또래 친구도 없는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가 봤자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분량의 연구 과제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늙은 마법사들뿐이다.


집, 연구실, 집, 연구실, 다시 집. 그게 일상이었다. 아무리 천재이며 마법을 사랑하는 그녀라고 해도 이제 겨우 22살의 젊은 여성에 불과하기에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정말 싫었다.


세준은 세월이 주는 경험을 통해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만으로도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동갑내기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나이 차이는 자그마치 500년이 훌쩍 넘는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

“솔직히 싫지만, 돌아가야 해.”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언제까지고 여기 머물 수는 없잖아. 애당초 일하는 동안만 머무는 거였으니까.”


솔직히 세준은 그녀가 머물러주길 바랬으나 그 바람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쌓아온 것이 있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다. 능력을 고려해봤을 때, 어쩌면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낼 지도 모른다. 단지 재미있는 말동무가 없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막는다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뭐라고 할 순 없지.”


세준은 그렇게 말하곤 소파에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창밖의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럼 난 일을 하러 나가야겠군.”


그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그의 애총(愛銃) 질버른 아들러를 품속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 무기로 칭송받는 세준의 걸작이었다.


권총 주제에 약 2kg이나 나가는 은색의 데저트 이글에 새겨진 기하학적 무늬에는 음속을 돌파하는 탄환의 물리력을 제어하는 무시무시한 마법의 힘이 깃들어있다. 질버른 아들러. 독일어로 ‘은빛 독수리’를 의미하는 그 이름 그대로 마법이 발동할 때 총신에서 뻗어 나오는 은빛의 날개는 가히 압도적이다.


현재 서울에는 요한에게 살해당한 루터와 히라노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흡혈귀들이 숨어있다. 갈 곳 잃은 그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는 세레나 아우렐리에의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거부한 채 수많은 사람들 틈 속에 스스로의 존재를 감추고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세준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해도 흡혈량을 적당히 조절할 수만 있다면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만약의 경우, 짐승의 피로 목숨을 연명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그럴 경우엔 만성 피로에 시달리게 되긴 하지만, 어쨌든 살아갈 수는 있다.


세준은 뱀파이어도 지성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라는 점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들이 적정선만 잘 지킨다면 가끔씩 흡혈에 의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융통성 있게 넘어갈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 다만, 뱀파이어의 경우엔 그것이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차이일 뿐이다.


문제는 최근 그들에게 많은 수의 인간들이 살해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살아가기 위해 흡혈을 하다가 생긴 실수가 아니라 명백히 적의를 가지고 습격하는 움직임이었다. 하긴 조직의 방침 때문에 인간을 해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가 그들을 구속할 것이 갑작스레 없어진 지금,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힘을 불릴 수 있는 영양식이 넘쳐나는 뷔페가 눈앞에 차려져있는데 식욕을 억누르는 건 무척이나 힘들겠지.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세준은 직접 나서서 인간을 습격하는 흡혈귀들을 처단하기로 했다.


“나도 갈래.”


벨라가 외투를 챙기며 세준을 따라나섰다.


“상관은 없지만 방해는 하지 마.”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래봬도 나름대로 강하다고. 요한을 상대로도 꽤 버텼잖아?”


요즘 벨라는 꽤 자신감이 붙어있었다. 전형적인 학구파 마법사이면서 만반의 준비를 한 요한을 상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세준의 도움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의 힘이었다. 그 덕분인지 묘하게 앞장서려는 의지가 생겨버렸다.


세준은 피식 웃었다.


“아, 예예. 알겠으니 어서 갑시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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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64 텐토무츄
    작성일
    15.06.11 03:27
    No. 1

    AA-12는 등뒤에 달고 다니기에는 좀 무리가 아닐까요?
    글에는 20발짜리 드럼턴창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크기가 좀 있다보니 등에 밀착이 안되어서
    격한 움직임에는 상당히 걸리적 거릴거 같은데 말입니다..
    차라리 8발짜리 박스형 탄창이라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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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Chapter3. Love OR Hate(10) +1 15.03.10 447 10 16쪽
33 Chapter3. Love OR Hate(9) +1 15.03.08 352 9 16쪽
32 Chapter3. Love OR Hate(8) +1 15.03.08 605 9 21쪽
31 Chapter3. Love OR Hate(7) +2 15.03.07 528 11 29쪽
30 Chapter3. Love OR Hate(6) 15.03.07 457 9 21쪽
29 Chapter3. Love OR Hate(5) +1 15.03.06 508 9 21쪽
28 Chapter3. Love OR Hate(4) 15.03.05 431 9 17쪽
27 Chapter3. Love OR Hate(3) 15.03.05 513 9 26쪽
26 Chapter3. Love OR Hate(2) 15.03.04 529 9 19쪽
» Chapter3. Love OR Hate(1) +1 15.03.02 618 16 21쪽
24 Chapter2. 시체놀이꾼(Epilogue) 15.03.01 408 9 11쪽
23 Chapter2. 시체놀이꾼(11) +1 15.03.01 535 10 16쪽
22 Chapter2. 시체놀이꾼(10) 15.03.01 559 15 16쪽
21 Chapter2. 시체놀이꾼(9) 15.02.28 534 10 20쪽
20 Chapter2. 시체놀이꾼(8) +1 15.02.26 447 10 20쪽
19 Chapter2. 시체놀이꾼(7) 15.02.26 676 11 21쪽
18 Chapter2. 시체놀이꾼(6) +2 15.02.25 682 10 25쪽
17 Chapter2. 시체놀이꾼(5) 15.02.24 597 13 24쪽
16 Chapter2. 시체놀이꾼(4) 15.02.23 458 10 19쪽
15 Chapter2. 시체놀이꾼(3) 15.02.22 582 12 13쪽
14 Chapter2. 시체놀이꾼(2) 15.02.22 688 12 14쪽
13 Chapter2. 시체놀이꾼(1) 15.02.21 764 15 19쪽
1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Epilogue) 15.02.20 754 11 14쪽
1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1) +1 15.02.20 584 15 16쪽
10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0) 15.02.19 645 14 17쪽
9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9) 15.02.18 771 13 15쪽
8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8) 15.02.17 764 14 16쪽
7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7) 15.02.17 771 16 20쪽
6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6) +1 15.02.16 931 15 15쪽
5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5) +2 15.02.15 965 19 20쪽
4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4) 15.02.14 1,085 16 17쪽
3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3) +1 15.02.14 1,226 20 16쪽
2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2) 15.02.13 1,711 26 15쪽
1 Chapter1. 영혼 없는 남자(1) +2 15.02.13 2,894 3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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