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삐뉘

괴이 아포칼립스 생존지침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살곶이다리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20 08:49
최근연재일 :
2024.09.17 20:20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6,258
추천수 :
379
글자수 :
144,571

작성
24.09.09 20:20
조회
182
추천
12
글자
13쪽

17화. 피난처(6)

DUMMY

벌레는 머리가 날아갔어도 꿈틀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대검으로 날 관통한 다리들까지 모두 잘라냈다.


그래도 이제 알아서 죽을 테니 내버려 두기로 하고, 내겐 다른 과제가 남았다. 바로 몸에 난 상처들을 어떻게 하는 것.


관통상이 있을 땐 구멍을 막은 걸 굳이 제거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러면 안 된다.


“허억, 개, 허억, 새끼...! 후웁.”


숨을 멈추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는 힘을 줘 긴 벌레 다리를 뽑아냈다.


촤아악.


“으아아악! 끄으으으...”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상태로 어떻게든 벽까지 기어가 등을 기대고 앉았다.


다리를 빼내야 했던 이유. 단순하다. 상처를 저 밖의 군인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상처의 존재가 드러나면 분명 부대로 복귀해 의무관에게 치료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추측이지만, 그즈음이면 재생력 덕분에 많이 아문 상태일 것이다.


누군가가 배에 구멍이 뚫리고도 수 시간 만에 나아버린다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처럼 온갖 괴물들이 판치는 세상에선... 그리 좋지 않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다. 괴물의 스파이 같은 거라고 의심하지 않을까.


고통 때문인지 매초가 지독하게 길게 느껴졌다.


피가 꿀럭꿀럭 흘러나온다. 나아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난 그냥 눈을 감고 호전되길 빌었다. 무거운 졸음이 쏟아져서 의식이 드문드문 끊겼다.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흐르지 않았을까 싶을 무렵이다. 상처에 일어난 명백한 변화를 알아차렸다.


내 피가, 좀 역겹지만, 어떤 점성을 띠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더 이상 바닥으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게다가 재생력 특성의 이름대로 미세하게 부글거렸다. 고통은 어느새 줄어들었다. 여전히 토 나오게 아프지만 이전처럼 끙끙거리는 걸 참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더 흘렀다. 반쯤 수면에 취해있던 나는 다시 옷을 들어올려 슬그머니 상처를 살폈다.


“...으엑.”


보면서도 눈을 돌리고 싶은 모습이었다.


상처는 점막 같기도 하고 덜 굳은 핏덩이 같기도 한 무언가로 덮여 있었다. 여튼 중요한 건 출혈이 멈췄다는 거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다친 걸 숨길 수는 있을 것 같다.


문득 지독한 갈증과 허기를 느꼈다.


나는 더플백에서 커다란 황도 캔을 꺼냈다. 카퍼톤의 대검은 손쉽게 캔뚜껑을 파고들었다.


걸신들린 듯 캔 하나를 비우고 하나를 더 깠다. 몸에 나쁜 설탕물이지만 지금 내게는 생명수와 같았다.


“끄으응...”


아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을 때마다 상처가 쑤시지만 고비를 넘긴 것 같았다.


비로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가장 먼저... 활동을 완전히 멈춘 벌레에게 다가갔다. 놈은 버둥거리던 그 모습 그대로 배를 깐 뒤 굳어 있었다.


죽을 고생을 시킨 놈을 노려보는데, 문득 벌레의 가슴 부근에서 어떤 존재감이 느껴졌다.


직감이 찾아왔다. 나는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대검을 들고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콱.


가슴을 갈랐다. 투명한 체액이 터져 나오고, 웬 알 수 없는 장기들도 들어냈다.


역겨운 촉감이지만 지금 나는 모종의 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언가를 흡수하고, 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싶다는 갈망.


잠시 후, 찾던 걸 발견했다. 진짜로 있었구나.


내가 가슴 속에서 끄집어낸 건 순수한 빛이 흘러나오는 구슬이었다.

벌레의 생김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초함이 느껴지는데, 광신도가 죽은 자리에 놓여 있던 것과 비슷하지만 색은 조금 달랐다. 풍기는 분위기도 차이가 났다.


그걸 보고 있자니 참을 수 없었다. 구슬을 바라보며 흡수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순간, 그게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반투명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정수를 흡수했습니다.]


[다음 특성 중 하나를 골라 얻을 수 있습니다.


1. 예민한 감각모 : 촉각이 강화됩니다.


2. 점착성 타액 : 끈적거리는 타액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내가 흡수한 앰플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과 한 번 일어난 일은 다르고, 한 번 일어난 일과 두 번 일어난 일도 다르다. 하지만 두 번 일어난 일은 세 번도, 네 번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아마... 계속 이런 식으로 ‘특성’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괴물을 죽이고, 놈들의 정수라는 걸 흡수하는 것으로.


생각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어떤 특성을 고를 건지부터 정해야지.


솔직히, 이번에 주어진 두 선택지 모두 좀 시원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촉각의 강화와 끈적거리는 침이라.


촉각이 강화되면 뭘 할 수 있지? 좀 더 고통을 잘 느끼는 건가? 흠...


끈적거리는 침에 대해서는 한층 더 기대가 낮다. 그걸 어디다 쓰는데? 편지 봉투 봉인하기? 개미를 고통스럽게 죽이기? 만약 너무 끈적거려서 입이 안 벌려지면 어떡함? 굶어 죽어 그냥?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난 첫 번째 선택지, 예민한 감각모를 골랐다. 그러자 반투명한 창이 빛의 가루가 되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몸에 걸친 옷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공기와 맞닿은 피부가 근질거렸다. 피부 위에 뭔가가 내려앉는 게 그대로 느껴지는데...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옷과 굳은 피 등, 내 피부를 덮거나 접촉한 것들의 온도가 미세하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피부가 근질거리는 건 공기 중을 떠다니다 내게 충돌하는 먼지들 때문이었다.


감각이 예민하다는 게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정확히는,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으로 형성된 내 인지능력과 감각과의 괴리가 낯선 것 같다. 지금 여긴 워낙 자극이 적은 장소라 그럭저럭 버틸 만한데, 밖은 아예 다를 것이다. 아마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끝으로... 아직 확인해야 할 게 하나 더 남았다.


손에 들린 카퍼톤의 군용 대검을 바라보았다.


이거에 대해서는,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분명 관악산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회수 당했는데 어떻게 내 손에 나타났는지.


카퍼톤은 괴이와 싸우는 특수부대원이었으니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다닐 법하긴 하다. 당장 그의 총도 어떤 미래적인 기술력의 산물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진짜 마법 아닌가? 쥐고 있는 지금도,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나와 이 무기가 연결된 느낌이 든다.


머릿속에는 일종의 스위치 같은 게 생겨난 상태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 단검이 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또 어째서 내가 소환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저절로 알게 된 것도 있다.


이 스위치를 끄면 단검이 사라지고, 켜면 다시 나타난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자 마치 환영처럼 단검이 사라졌다. 이후 전기가 통하는 느낌과 함께 손 안에 나타났다.


...그냥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는, 튼튼하고 예리한 무기가 생겼다는 데 감사하기로 하자.


나는 무기를 돌려보낸 뒤 분대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으윽, 끄으으...”


한동안 괴로운 신음을 흘리던 그는 어느 순간 눈을 살짝 떴다. 눈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직후 그는 바닥에 토했다.


“우웨엑, 우웩.”


신발에 조금 묻었지만, 토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소중한 물을 꺼내 그의 입에 흘려 넣었다.


하사의 눈빛이 조금 더 분명해진 건 약 5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시겠어요?”

“당신은... 재희 씨죠.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이곳에 들어온 이후부터입니다. 분명 거수자의 뒤를 쫓았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그는 곧 눈살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은 생각하려 애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음, 결과만 말하자면 일단 살아남았어요.”

“살아남았다? 뭐로부터...? 아, 아닙니다. 지금은 좀 쉬겠습니다.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그러세요. 움직일 수는 있으세요?”


하사가 일어났다. 불안하게 비틀거렸지만 곧 제대로 섰다. 나보다는 더 잘 걸을 것 같네.


우리들, 두 부상자는 아주 천천히, 벽을 짚고 발을 질질 끌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닥쳐올지 모르는 유충의 존재가 대단히 걱정스러웠지만 의외로 그것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큰 녀석을 죽였기 때문인가?

마냥 벌레라고 무시하기엔 놈은 전술의 개념을 아는 듯했지. 약육강식의 논리에 철저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나는 새롭게 얻은 특성, 예민한 감각모의 쓸모를 발견했다.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저 앞쪽에서 다가오는 중이다.


다만 감각모가 없더라도 그들의 접근은 곧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 여러 개의 조명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어, 어어... 설마 하, 하사님? 살아계셨습니까?”


선두에 보이는 건 도망쳤던 분대원들이었다. 빛 너머로 겁에 질린, 하지만 결의가 깃든 얼굴들이 보였다.


그 뒤에 추가적인 병력이 있었다. 지상 층을 맡은 나머지 두 분대가 아닌가 싶은데, 늦게나마 우리의 복수 같은 거라도 해주려고 한 건가?


돌연 병장 한 명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잠깐, 정지! 거기 그대로 계십시오!”


분대원들은 병장의 경고에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신원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사님, 죄송합니다. 거수자를 보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두 분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건 저희 부대 전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입니다.”


기억 상실에 시달리는 하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대신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저도 당연히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분대장님은 지금 기억이 온전치 않습니다. 벌레랑 싸우는 과정에서 좀 다치셨거든요. 여튼, 어떻게 증명하면 될까요?”


병장은 긴장한 눈으로 우릴 쏘아보았다.


나도 떨렸다. 지금은 피칠갑된 옷 때문에 잘 구분이 가지 않지만 만약 탈의라도 시킨다면, 그래서 상처가 보인다면... 그건 절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피를, 피를 보여주십시오. 손바닥이든 어디든 상처를 내서, 피가 붉다는 걸 보여주세요.”


이건 차라리 나았다.


거수자의 경우 탈의시키고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병사들을 지키느라 뒤에 남은 하사에 대한 미안함도 있는 것 같고.


내가 선뜻 나서자, 병사 중 한 명이 날붙이를 빌려주었다.


손바닥에 긴 상처가 났다. 피는 당연히 붉었고 어떤 악취나 벌레 유충이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하사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당당한 태도도 한몫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재빨리 간단한 소독을 한 뒤 거즈를 붙여 주었다.


그럼에도 병장은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감염에 시간이 필요한 걸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아닌 것 같지만, 당분간 정기적으로 확인하겠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그 뒤에야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다만 전투에 대해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병사들은 놈의 죽음을 직접 보고 싶어 했으니까.


현장으로 돌아가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인원이 많으니 빛도 더 많았고 보다 안전하다는 생각에 이동속도도 빨랐다.


곧, 거대한 벌레의 사체가 나타났다. 지상 층을 맡았던 분대원들 중 몇이 몸을 떨었다.


다른 분대의 분대장, 즉 부사관 계급 둘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걸 죽이고도 저 두 분이 추가적으로 습격당하지 않은 걸 보면 아마 다른 놈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긴장해라. 벌레한테 끌려갔다는 병사들만 빨리 찾아서 나가자. 최소한... 제대로 묻어주긴 해야지.”

“예!”


조금 늦게 알아차렸지만, 그들은 아무 대책 없이 들어온 게 아니었다. 우비 비슷한 걸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유충의 침투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병사들 네 조가 흩어졌고, 나와 하사, 그리고 우리를 지키는 나머지 군인들이 이 자리에 남았다.


내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휴식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때가 되면 알아서 깨워줄 거란 마음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 어둠 속에서 벌레도 죽었고 사람도 죽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런 건 내게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나는 순식간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괴이 아포칼립스 생존지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시간 : 월~토 20시 20분 24.08.23 135 0 -
25 24화. 물의 세계 NEW 13시간 전 68 9 13쪽
24 23화. 피난(4) 24.09.16 99 14 15쪽
23 22화. 피난(3) 24.09.14 123 12 12쪽
22 21화. 피난(2) 24.09.13 139 10 12쪽
21 20화. 피난 +3 24.09.12 158 12 14쪽
20 19화. 피난처(8) +1 24.09.11 164 14 15쪽
19 18화. 피난처(7) +1 24.09.10 166 14 15쪽
» 17화. 피난처(6) 24.09.09 183 12 13쪽
17 16화. 피난처(5) +2 24.09.07 198 16 13쪽
16 15화. 피난처(4) +1 24.09.06 201 11 15쪽
15 14화. 피난처(3) +1 24.09.05 208 15 14쪽
14 13화. 피난처(2) +2 24.09.04 220 16 14쪽
13 12화. 피난처 +2 24.09.03 227 15 13쪽
12 11화. 종단(7) 24.09.02 236 16 12쪽
11 10화. 종단(6) 24.08.31 237 17 13쪽
10 9화. 종단(5) 24.08.30 257 16 12쪽
9 8화. 종단(4) +1 24.08.29 261 18 14쪽
8 7화. 종단(3) +1 24.08.28 260 15 12쪽
7 6화. 종단(2) +1 24.08.27 278 15 12쪽
6 5화. 종단 24.08.26 316 15 14쪽
5 4화. 도래(4) +1 24.08.24 332 17 12쪽
4 3화. 도래(3) 24.08.23 368 18 14쪽
3 2화. 도래(2) 24.08.22 405 18 13쪽
2 1화. 도래 24.08.21 533 20 11쪽
1 프롤로그 +2 24.08.21 617 24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