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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 아포칼립스 생존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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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다리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20 08:49
최근연재일 :
2024.09.17 20:20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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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571

작성
24.09.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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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1화. 종단(7)

DUMMY

깨어났다.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 넓지 않은 방이다. 대충 초등학교 교실 정도 되는 면적인데, 바닥에는 알록달록한 고무 타일이 깔려 있고 동화책과 각종 유아용 놀이도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이번에는 벽을 살핀다. 창문 같은 건 없고 오로지 굳게 닫힌 철제문이 보인다.


저 문은 현재 바깥에서 굳게 잠겨 있다. 문이 열리는 건 식사 시간이나 교육장으로 이동할 때, 혹은 ‘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뿐.


...그런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 거지? 식사 시간이나 교육장이라니. 선생님은 또 누구고?


직후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건 꿈이구나. 그것도 자각몽이다.


나는 제법 푹신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블록으로 손을 뻗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꼬마의 그것처럼 하얗고 작은 손이다.


지금의 정신 상태는 대단히 기묘해서, 블록을 만지자 즐거운 상상과 충동들이 떠올랐다. 이걸로 뭘 만들까? 뭐라도 좋겠어. 그저 블록과 블록을 서로 끼워 맞추는 것만으로도 마냥 재밌다.


한참을 몰두해서 놀던 나는 어느새 문이 열렸고, 거기 누군가가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인데... 이상한 건 그 얼굴을 인지할 수 없었다. 분명 보고 있지만 성별이 무엇인지, 연령은 어떻게 되는지, 머리색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그에게 느껴지는 친밀감이다. 나는 저 사람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다.


그가 내게 말했다.


[.........]


목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알아들었다. 밥을 같이 먹으러 갈 거니 손을 닦으라고?


기쁨을 느끼며 방 한구석에 있는 세면대로 달려간다. 손을 꼼꼼히 씻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에는 천사 같은 외모의 꼬마가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나’가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동양인이니까.


직후 꼬마가 입을 벙긋거린다. 시선은 거울 속, 혹은 눈동자 속의 나를 향해 있었다.


- 넌 누구야?


배경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빠르게 멀어진다. 의식이 부상했다.



* * *



파앗.



“......!”


눈을 떴다. 빠르게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와 처참한 광경.


난 그야말로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매대들이 박살나 무너졌고 천장을 포함한 그 모든 곳에 피와 살점이 역겹게 눌어붙어 있다.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기억을 되새긴다. 뭘 하고 있었더라, 왜 이렇게 된 거지?


꿈 때문에 뒤죽박죽인 머릿속이 천천히 진정됐다. 곧,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광신도 새끼와 함께한 자폭!


그 바퀴벌레 같은 놈 앞에서 도저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성적이었나? 내겐 남은 수가 없었고, 그래서 몰래 챙겨둔 수류탄을 깠다.


주마등을 본 건지 뭔지, 팔이 날아가고 온몸 피부에 파편이 박히며 하반신이 찢기는 감각이 선명하게 생각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1초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이었는데...


직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그런데 왜...?”


왜 팔이 멀쩡한 거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상한 건 팔 뿐만이 아니다.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난 최소 반으로 갈라져서 죽었는데.


몸에는 아예 상처 하나 없었다. 갈비뼈 쪽을 쿡쿡 쑤시던 날카로운 통증도, 다리를 잘라내고 싶게 만들던 발목의 통증도 온데간데없다.


그 순간 무언가가 새롭게 내 주의를 끌었다.


걸음을 옮겨 바닥에 놓인 ‘그것’을 주워들었다. 내 몸 상태보다 더 수상쩍게 느껴지는 대상이었다.


그건 진홍색 빛의 덩어리였다.


이게 뭔지, 왜 이걸 ‘만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왜 실제로 만져지는지 전혀 모르겠다.


빛덩이는 주기적으로 기이한 파동을 내뿜었다.


더불어 이 느낌은 굉장히 익숙했다. 훨씬 약해졌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이건 그 붉은 망토의 광신도 새끼가 풍기던 기운과 정확히 같았다.


...천천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1. 정신을 잃기 전, 분명 광신도와 자폭했다. 몸이 갈가리 찢기는 것까지 기억한다.


2. 그런데 깨어나 보니 멀쩡하다. 여긴 여전히 편의점이고, 주변 흔적과 내가 입은 옷을 봤을 때 폭발이 일어난 건 분명한 사실이다.


3. 광신도가 뒈진 자리에는 이 빛의 구슬이 놓여 있었다. 이걸 어떻게 만질 수 있는지 모르지만, 구슬에선 그놈이 흩뿌리던 기분 나쁜 기척이 느껴진다.


그런데 빛의 구슬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배를 채우고 싶은 것과는 조금 궤가 다르다. 이걸 먹어서 나를 보충하고 싶다. 내게 부족한 어떤 부분을.


그때였다. 그런 생각에 호응하듯, 진홍색 빛의 구슬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뭐, 뭐야!”


나는 대단히 당황했다.


그 광신도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지 꺼림칙했다. 먼저 만진 게 실수라면 실수지만, 이게 흡수될 줄 알았겠냐고!

이제 그놈처럼 돌아버리는 건가? 사이비의 교리를 전파하며 피와 살에 미친 괴물이 되는 거야?


눈을 꾹 감고 몸속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집중했다.


어떤 기분 나쁜 일이 벌어질 낌새가 느껴지는 즉시 벽에 머리를 처박건 어쩌건 해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킬 작정이었다. 한 번 자폭했더니 죽음을 결심하는 게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내 예상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빛의 구슬을 본 순간 느낀 순수한 갈망이 천천히 잦아들고, 어떤 기묘한 만족감이 찾아왔을 뿐이다.


일이 벌어진 건 다음 순간이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뜨자, 정면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라 있었다.



[정수를 흡수했습니다.]


[다음 특성 중 하나를 골라 얻을 수 있습니다.


1. 부글거리는 피 : 재생력을 획득합니다.


2. 혈충 소환 : 피를 주식으로 하는 하수인을 소환합니다.]



“......”


이쯤 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내가 미친 건...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진짜 미쳤다면 어차피 스스로 고칠 수도 없을 거다. 그보다는 이 창에 집중하기로 하자.


정수라, 방금 흡수된 빛의 구슬이 정수인가?


일단 문제는 간단하다. 이 특성이라는 것 중 하나를 고르고, 만약 정말로 뭔가 변화가 일어난다면 최소한 내 머리가 돌아버린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다음 문제. 특성 중 뭘 골라야 할까?


우선 혈충이 뭔지 모르겠다. 혹시 추가적인 설명이라도 나올까 싶어 혈충이라는 단어에 손을 가져다 대봤지만 바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결정을 내렸다. 선택은 ‘부글거리는 피’였다. 그나마 예상 가능한 걸 고르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또 지금처럼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재생력만 한 게 있을까.


부글거리는 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마음가짐이 중요했던 건지, 혈충이라는 단어를 건드렸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반투명한 창이 순식간에 빛의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된 건가?


확인해 볼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닥에서 날카로운 금속조각을 주워들었다. 부서진 매대의 일부인 것 같다.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손바닥을 조금 그어 보았다.


따끔.


잠시 후, 금속조각의 경로를 따라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어쩐지 상처에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워낙 집중한 상태라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몇 분이 지나 핏방울을 닦아낸 나는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화냐...”


상처는 사라진 상태였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팔이 자라나거나 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게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았다.


특성이 진짜로 생겼다! 난 재생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벌써 몇 번이나 한 생각이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무슨 웹소설처럼, 세상에 괴물이 나타나면서 그에 맞춰 인간들도 초능력을 각성하기 시작한 건가? 아니면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진 보다 그럴 듯한 이유가 있을까.


다시 한 번 전후사정을 곰곰이 따져보던 나는 곧 한 가지를 떠올렸다. 내가 지닌 것들 중 이런 초현실적인 사건을 일으킬 만한 게 하나 있었다.


손을 집어넣어 가슴팍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그걸 끄집어냈다.


“......”


과연, 카퍼톤이 소중한 거라며 내게 맡긴 금속제 케이스는 파손돼 있었다. 안에 든 앰플은 깨졌고, 내용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명백했다.


앰플에 들어있던 게 무엇이든, 내 몸에 흡수된 것이다. 방금까지 누워있었으니 깨진 뒤 몸속에 스며든 거겠지. 더불어 그게 죽어가던 날 되살리고 이 상태창인지 뭔지 모를 걸 부여하기까지 했다.


진상이 밝혀지자 카퍼톤의 부탁을 영영 들어줄 수 없게 것에 대한 책임감이 크게 다가왔다.


동시에 조금 두렵기도 했다.


세계를 지키던 비밀조직의 강화인간이 목숨 걸고 호송하려던 게 바로 이 앰플이었다. 분명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었다지만, 그게 일반인인 내 몸속에 스며든 것이다. 이거 큰일 난 거 아냐?


물론 그는 만약의 상황엔 내가 써버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나은 건 이걸 그의 동료들에게 건네주고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하, 미치겠네...”


잠시 후, 일단 여기서 움직이기로 했다.


고민해봐야 알 수 있는 건 없다. 관악산에 가보는 수밖에.


앰플을 사용해버린 지금, 카퍼톤의 동료들이 여전히 나를 찾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부디 그러길 바란다. 오직 그들만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 테니까.


깨진 앰플은 특별한 구석이 없는 것 같아 버렸다. 다만 케이스는 챙겼다. 만약 카퍼톤의 동료들이 추적할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이것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총은... 총알은 없지만 일단 가지고 가기로 하고.


또 하나. 카퍼톤이 쓰던 군용 대검을 찾아냈다. 대검은 폭발에서도 조금도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법이나 어떤 신비한 기술로 모종의 처리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대검에 흠뻑 묻은 피를 닦아낸 뒤 쥐어 보았다.


그런데 순간, 기이한 느낌이 찾아왔다. 전류가 흐르는 듯한 짜릿함과 함께 마치 대검이 내 연장된 신체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 생소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그걸 떨어뜨렸다.


“이건 또 뭔데...?”


다시 주워들었을 때, 그 느낌은 온데간데없었다. 찬찬히 살펴봐도 그냥 날이 잘 선 단검이었다. 그걸 찢어진 옷가지로 둘둘 말이 챙긴 뒤 밖으로 나섰다.



딸랑, 딸랑ㅡ


광신도와 싸우기 시작했을 때는 저녁이었는데,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시간이 꽤 길었나 보다.


나는 정적인 거리를 가로질렀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저 멀리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다가갔을 때였다.


“정지! 정지!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잔뜩 긴장한 목소리다. 빛 때문에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는데, 여러 명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침착하게 손을 들고 자리에 멈춰 섰다.


곧 군인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제야 빛이 눈에 조금 익어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여긴 임시로 설치된 검문소였다. 드디어 인간의 영역에... 관악산에 도달한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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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연재 시간 : 월~토 20시 20분 24.08.23 135 0 -
25 24화. 물의 세계 NEW 13시간 전 68 9 13쪽
24 23화. 피난(4) 24.09.16 99 14 15쪽
23 22화. 피난(3) 24.09.14 123 12 12쪽
22 21화. 피난(2) 24.09.13 139 10 12쪽
21 20화. 피난 +3 24.09.12 158 12 14쪽
20 19화. 피난처(8) +1 24.09.11 164 14 15쪽
19 18화. 피난처(7) +1 24.09.10 166 14 15쪽
18 17화. 피난처(6) 24.09.09 182 12 13쪽
17 16화. 피난처(5) +2 24.09.07 198 16 13쪽
16 15화. 피난처(4) +1 24.09.06 201 11 15쪽
15 14화. 피난처(3) +1 24.09.05 208 15 14쪽
14 13화. 피난처(2) +2 24.09.04 220 16 14쪽
13 12화. 피난처 +2 24.09.03 227 15 13쪽
» 11화. 종단(7) 24.09.02 236 16 12쪽
11 10화. 종단(6) 24.08.31 235 17 13쪽
10 9화. 종단(5) 24.08.30 256 16 12쪽
9 8화. 종단(4) +1 24.08.29 260 18 14쪽
8 7화. 종단(3) +1 24.08.28 260 15 12쪽
7 6화. 종단(2) +1 24.08.27 278 15 12쪽
6 5화. 종단 24.08.26 316 15 14쪽
5 4화. 도래(4) +1 24.08.24 332 17 12쪽
4 3화. 도래(3) 24.08.23 368 18 14쪽
3 2화. 도래(2) 24.08.22 405 18 13쪽
2 1화. 도래 24.08.21 533 20 11쪽
1 프롤로그 +2 24.08.21 617 24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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