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조회수 :
25,727
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4.09 16:00
조회
163
추천
4
글자
13쪽

고의 패배

DUMMY

승호와 세현이 내기바둑을 두러간 곳은 소동문가(小東門街)의 이층짜리 술집이었다. 소동문(小東門)은 지금의 양주성 동쪽이 아닌 남북을 가로지르는 중앙의 있다. 과거에는 구양주성의 동문이었지만, 그 동쪽으로 신양주성이 계발되었기 때문에 양주성 전체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거리에는 주루들이 즐비했고 손님들로 붐볐다.

승호는 며칠 동안 한 판도 지지 않고 승승장구했다. 처음에는 대국 상대와 몇몇 구경꾼들과 내기를 했으나 점점 판이 커졌다.

양주의 노름꾼들은 어디에서 찾아냈는지 날마다 천하의 고수라는 인물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승호 앞에서 천하의 하수로 전락했다. 천하의 고수들에게 걸었던 노름꾼들은 빈털터리가 됐다. 그들은 빈털터리가 된 후에야 천하의 하수들에게 돈을 걸었음을 깨달았다. 자존심이 상한 그들은 복수를 꿈꾸며, 다음날 또 다른 고수들을 데려와 그들에게 돈을 걸었다. 그러나 판돈은 자신들의 몫이 아니었고, 복수는 물거품이 되었다.

승호는 마음껏 이겼다. 조선의 양반들이 민중을 대하 듯 ‘피도 눈물도 없이’ 그렇게 이겨줬다. 그래서 바둑은 긴장감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어떤 이들은 잃은 돈보다 재미없는 바둑에 화를 냈다.

오늘은 양주의 최고수라는 인물이 상대였다. 입소문이 났는지 사람들은 평소보다 많이 모였다. 이층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고, 사람들은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귀공자 차림의 젊은이가 하인을 시켜 승호의 상대에게 거액의 판돈을 걸었고, 그러자 노름판이 술렁였다.

지금까지 외지에서 온 승호에게 돈을 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승호 대신 돈을 건 세현이 상대방의 판돈을 모두 쓸어 담을 수 있었다. 세현은 귀공자가 거액을 걸자 며칠 동안 따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다 걸었다. 양쪽에 꽤 많은 은자가 걸리자 다시 한 번 노름판이 술렁였다.

“어서 시작하셔.” 귀공자가 오른손에 든 접힌 부채로 왼손바닥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노름꾼들도 그의 말에 동조하며 빨리 시작하라고 외쳤다. 어떤 이는 귀공자를 쳐다보며 그가 누구냐고 수군거렸다.

“그럼, 먼저 바둑을 시작하고 나서 판돈을 나눌 비율은 바둑 두는 동안 계산하겠습니다.” 분배를 위해 판돈을 챙기던 주루의 일꾼이 대국의 시작을 선포했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됐다.

승호가 흑을 잡고 바둑판에 먼저 돌을 놓았다.

바둑이 시작되자 바둑판 주위의 분위기는 금세 어지러워졌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바둑도 모르면서 돈을 걸기 위해 왔기에 술을 마시며 잡담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둑을 보고 싶어도 앞사람들 때문에 바둑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도 술을 마시며 잡담을 하다가 앞사람에게 바둑의 진행상황에 대해 묻기도 했다. 어느덧 바둑은 중반으로 접어들자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승호는 지금까지 집중하던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어 상대를 살폈다.

그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양 볼에는 살집이 퉁퉁하게 올라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이었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왼손으로는 느릿느릿 부채를 부치며, 오른손으로는 거만하게 돌을 놓았다.

승호는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에 찬 손길로 다음 수를 두자, 상대의 부채질이 전보다 조금 빨라졌다. 거만하게 바둑판을 내리치던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승호의 응수는 앞의 수를 이미 다 읽은 듯 빨랐다. 상대는 바둑판에 고개를 파묻고 머뭇거렸다. 아무 의미 없던 부채질은 이제 제대로 된 부채질로 변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는 부채질이 제격이었다. 상대는 대마가 죽고 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대마를 살려도 집으로는 바둑을 이길 수가 없었다. 진퇴양난이고 사면초가였다. 그러나 승호는 상대의 대마가 살 수 있는 곳에 자신의 돌을 놓았다. 상대는 재빨리 대마를 살렸다. 승호는 실수를 한 자신을 자책하는 것처럼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웅성대기 시작했고, 바둑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앞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찻집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이후에 승호는 실수를 연발했고, 큰 차이가 나던 바둑은 작은 차이로 좁혀졌다. 결국 바둑은 끝났고, 승호는 겨우 네 집을 이겼다.

주루의 일꾼은 귀공자의 돈을 모두 세현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이 걸었던 나머지 돈은 자신이 수수료로 챙겼다.

돈을 잃은 사람들의 반은 욕을 하며 술집을 떠났다. 그중 반은 다음 판에 돈을 걸기 위해 남았다. 그들은 또 다시 모두 양주의 최고수에게 둘째 판의 돈을 걸었다.

귀공자는 첫째 판만큼 돈을 걸었고, 세현은 본전과 이번에 딴 돈을 모두 걸었다. 그러자 귀공자는 세현의 본전만큼을 더 걸었다.

둘째 판이 시작되었다. 절반가량의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둑 보기가 편해졌다. 여전히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첫째 판과는 달리 엎치락뒤치락하는 공방이 이어졌다. 승부는 막판까지 오리무중이었고, 관중들은 바둑을 끝까지 흥미롭게 관전했다. 이번에도 승호가 이겼지만 차이는 한 집밖에 되지 않았다. 세현을 빼고 다들 돈을 잃었지만 욕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바둑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판이 시작되기 전에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돈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바둑을 보려고 남은 사람들은 많았다. 귀공자가 판돈을 둘째 판만큼 걸자 관중들이 술렁였다. 이번에는 승호에게 걸었기 때문이다.

“공자님, 이러시면 돈은 거의 따실 수가 없습니다. 저분은 이제까지 항상 이쪽에게 돈을 걸었습니다.” 일꾼이 권유하며 말했다.

‘저분’은 세현을 가리켰고, ‘이쪽’은 승호를 가리켰다.

“하하, 그러시면 이번에는 저쪽에다 걸죠. 그래야 내기가 될 것 아뇨. 저는 이걸 모두 다 걸 거요.” 세현이 웃으며 지금까지 딴 돈을 모두 승호의 상대에게 걸었다.

귀공자는 하인을 불러 무언가 묻더니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종이에다 어음의 내용을 쓴 후에 ‘마일환(馬日煥)’이라고 수결을 했다.

“거기서 건만큼 걸지. 지금은 은자가 모자라니 이 어음으로 대신하자.”

“저 그건 좀······” 일꾼이 난색을 표하며 말을 끌면서 어음의 수결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어음이라 안 되냐?”

“마 총상님 삼(三) 소야(小爺)이시네.” 하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마 공자님이셨군요. 몰라 뵈었습니다. 양주성에서 공자님 어음이라면 현금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일꾼은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리다가 세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소? 현금으로 가져가시려면, 이 어음은 우리 가게에서 바로 바꿔드리겠소.”

“난 양주 사람이 아니라 마 공자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어음으로 하쇼.” 세현은 마 공자든 어음이든 아무 상관없다는 투로 동의했다.

승호는 상대에게 모든 돈을 건 세현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셋째 판도 엎치락뒤치락하는 승부가 이어졌다. 이미 돈을 다 잃고 구경을 하는 사람들도 불꽃 튀는 대결에 숨죽였다. 끝까지 아무도 승부를 예상할 수가 없었다. 바둑은 마지막 공배까지 다 채우고 끝이 났다. 집을 세는 동안도 승부를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계가가 끝났다. 승호는 한 집만 졌고, 상대는 이겼어도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공자님 이건 됐소. 내기바둑에 뭔 어음이요.” 세현이 은자만 챙기고 거액의 어음은 찢어버렸다.

관중들은 경악했다. 세현은 호의였지만 마일환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들 마일환의 표정을 살피며 불안해했다.

“외지 놈이라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어쨌든 지금 싫다면 됐다. 그 돈은 어음이 없어도 언제든 줄 것이니 나중에 날 찾아오너라.” 마일환은 잠시 일그러졌던 표정을 펴고 말했다.

승호는 바둑판에서 뒤쪽으로 조금 물러앉아 있다가 자신을 살피는 마일환의 눈길을 받았다.

“누구에게 걸던 내가 지는 내기였지만, 표도 안 나게 잘도 두더구나. 어쨌든 바둑 자체는 재미가 있었다. 근데 진짜로 두면 어떻게 두느냐?”

“얘가 조선의 국수 아니, 국수란 말이오.” 세현이 승호 대신 자부했다.

“내가 한 수 배우고 싶구나. 다음에 마가항(馬家巷)에 꼭 한 번 와서 나를 찾아라. 여기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것이다.” 마일환이 세현의 말을 무시하고 승호에게 말했다.

승호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마일환은 그런 승호에게 고개를 끄떡이고 일어서자, 하인이 길잡이로 나서 앞장섰다. 마일환은 그를 따라 나갔고, 문밖에는 가마가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현과 승호는 가마에 올라타는 마일환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현과 승호는 음식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준은 유탄(柳炭)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남매는 준의 앞에 앉아 그림을 보고 있었다.

세현과 승호는 오랜만에 밖에 나와 있는 명희의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는 그들 아래 있는 남자의 초상을 살펴보았다.

“왔어. 닮았지?” 며칠 동안 말이 없던 명희가 승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승호는 그림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얘가 밑그림을 다 그린 다음에 색칠도 해준댔어.” 명희가 승호에게 말한 후, 세현을 바라보면 말했다. “우리 아버지 그리는 거야.”

“너 아버지 닮았구나.” 세현은 그림의 얼굴과 명희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명희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우선은 다 된 것 같아.” 준은 유탄을 내려놓고 소묘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남매는 고개를 끄떡이며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내일 가는 붓으로 윤곽을 그릴 때, 고칠 데가 있으면 고치면 되겠어.” 준은 유탄과 그림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남매는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은 세현과 승호가 사온 저녁을 먹었다.

“오늘 너희들 배에서 잃어버린 만큼 땄어.” 세현이 말을 꺼냈다.

“응?” 남매는 둘 다 세현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오늘 너희들이 배에서 빼앗긴 만큼 돈을 땄다고. 아니 그것보다 훨씬 많을 거야.” 세현은 다시 한 번 말하며 남매의 표정을 살폈다.

남매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돈이면 양주에서 무슨 가게라도 차릴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계약을 하려면 신분도 걸리고, 너희들끼리 장사하는 것도 그렇고······ 우선은 안기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아.”

남매는 고개를 끄떡였고, 승호는 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요즘은 묵연당에 안 가봤지?” 세현이 침묵을 깨며 물었다.

“그래. 그리고 준이 봤다는 범관의 서명 있잖아? 두 번째로 갔을 때는 못 찾았어.” 명희가 대꾸했다.

“그래? 혹시 주인한테 서명이 있는 걸 아는지 떠보기는 했어?”

“그랬지. 근데 모르는 눈치였어. 그리고 양주에 그것과 유사한 그림이 또 있다더군. 그래서 둘 중 어느 것이 범관이 그린 것인지 확인하는 데 서명의 존재 여부가 중요한 것 같아.”

“다른 그림이 또 있다고? 그럼, 내 말대로 범관의 서명을 발견하면 틀림없이 안기를 만날 수 있어.” 세현이 단정 짓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내가 좀 돌아다니면서 알아봐야겠어. 내일부터는 바둑 두러 안 갈 거야.”

명희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너 승호랑 바둑 두면 한 집만 강제로 이겼다고 했었지? 내가 오늘 그걸 목격했어. 어쩔 수 없이 상대방에게 걸었더니 딱 한 집만 져주더라고.”

“내가 쟤 조선의 국수라고 했잖아?”

“청나라 전체에선 어떨지 모르겠는데, 양주에서는 제일인자야. 오늘 두 판을 내리 지고 마지막 판에 한 집만 강제로 이긴 상대가 양주의 최고수라고 했거든. 그리고 양주에는 마 총상이라고 안 총상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부자가 있다더군. 근데 그 집안의 셋째 공자라는 젊은이의 돈을 다 따고 어음까지 찢어버렸어. 하하하.” 세현은 기분이 풀린 것 같은 명희 때문에 일부러 수다스럽게 말했다.

“나도 따라가 볼 걸 그랬네. 재미있었을 텐데. 조선이랑 다른 규칙으로 두는 바둑도 보고 말이지.” 명희가 승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 다음에 여기 방식으로 두는 바둑 가르쳐 드릴게요.” 승호가 오늘 아침까지 말조차 붙이기 어려웠던 명희에게 대꾸했다.

“그래, 알았어.” 명희가 대꾸하고 준에게 조선말로 말했다. “야, 아까 그 소묘 다시 보여줘.”

준은 그것을 내주었고, 명희는 그것을 받아들고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은 기분이 풀린 소녀 때문에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그림과 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1 아버지 사진 22.04.13 165 5 11쪽
50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 22.04.12 169 6 12쪽
» 고의 패배 22.04.09 164 4 13쪽
48 악몽 22.04.08 159 5 11쪽
47 그림 매매 22.04.07 178 5 10쪽
46 묵연당(墨緣堂) 22.04.06 171 4 11쪽
45 문지기 22.04.05 168 4 11쪽
44 의심 22.04.02 162 4 12쪽
43 삼촌 22.04.01 170 4 11쪽
42 묵향(墨香) 22.03.31 163 3 11쪽
41 양주(揚州) 22.03.30 181 4 11쪽
40 수중전 22.03.29 164 3 11쪽
39 상선(商船) 22.03.26 171 3 10쪽
38 결의(結義) 22.03.25 173 4 10쪽
37 포구 22.03.24 169 4 11쪽
36 변발 22.03.23 176 4 11쪽
35 탈출 22.03.22 169 5 10쪽
34 무인도 22.01.22 169 5 12쪽
33 생선 요리 22.01.21 172 5 11쪽
32 표류 22.01.20 178 5 10쪽
31 돛단배 22.01.19 170 6 11쪽
30 출항 22.01.18 179 4 11쪽
29 체포 22.01.17 180 6 11쪽
28 자상(刺傷) 22.01.16 199 5 12쪽
27 무승부 22.01.15 224 5 11쪽
26 싸움꾼 +1 22.01.14 235 5 12쪽
25 도강(渡江) 22.01.13 245 5 12쪽
24 사라진 말 22.01.12 259 3 12쪽
23 종이 가게 22.01.11 257 5 12쪽
22 문맹 22.01.10 273 5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