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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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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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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57
추천수 :
45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4.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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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버지 사진

DUMMY

“오빠도 정말 범관의 서명을 봤어?” 명희가 묵연당을 나오자마자 동희에게 말을 걸었다.

동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어디 있는데?”

“그 큰 그림에서 어떻게 설명해. 사흘 후에 가서 봐.” 동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준아, 서명 어디 있어?” 명희는 동희가 대답하지 않자 조선말로 준에게 물었다.

“오른쪽 아랫부분의 숲 속 있잖아?” 준은 말을 끊고 주위를 살폈다.

“그래, 빨리 말해봐. 사람 없잖아?” 명희가 재촉했다.

“거기 나귀 행렬 기억나지?” 준이 고개를 끄떡이는 명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뒤쪽 숲 속의 나뭇잎 사이에 있어.”

“그래! 숨겨진 낙관이군. 비밀스럽게 서명한 것이, 아까 주인이 말한 곽희나 이당처럼 송나라 때 관행이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범관의 서명은 원작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거야. 하하.”

“두 번째로 갔을 때 못 찾아서 처음에 잘못 본 줄 알았어.”

“그랬군.”

“야, 너희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세현이 준과 명희의 대화를 끊고 명희에게 말했다. “명희야, 준한테 너희 아버지 사진을 나흘 동안에 완성할 수 있는지 물어봐. 아니구나, 사흘 만에 완성해야겠구나.”

“그건 왜?”

“안기 만나러 가는 날 가져가보게.”

“그거 좋겠네. 두 분 서로 뵌 적이 있을 테니까.” 명희가 세현의 의도를 알아채고 나서 준에게 물었다.

준은 그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동희도 옆에서 준과 세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준아, 너 필요한 것 있으면 화방에 가기 전에 미리 말해. 그리고 거기서는 물건 보고나서 좋으면 고개를 끄떡이고 싫으면 고개를 저으면 돼.” 명희가 말했다.

“가는 붓하고 질 좋은 생명주하고 물감도 좀 사야해. 가서 보고 내가 손짓으로 할게.” 준이 대꾸했다.


모두들 화방에 같이 갔다.

화방 주인은 남매와 준의 비싼 옷차림을 보고 찾는 것은 모든 재료를 최고급으로 권했다. 준은 주인이 권하는 그림 재료들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승호는 흥정도 하지 않고 값을 치르자 주인은 물건 볼 줄 안다며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세현은 그런 소리가 지겨워서 값을 치른 것들을 빨리 싸달라고 했다. 주인이 그림 재료를 싸주자 세현은 일행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온 준은 거추장스런 겉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적삼 차림으로 자리에 앉았다. 화방에서 사온 송연묵(松烟墨)과 벼루를 꺼내 먹을 갈기 시작했다. 벼루 위에서 이내 그윽한 솔향기가 풍겨 나왔다. 연한 먹물에서는 푸른빛이 감돌았다.

‘먹은 검은색이 아니다. 먹은 수많은 빛깔을 낼 수 있다. 먹을 갈면서 그 빛을 살펴보아라. 먹의 빛깔을 알 수 있어야 붓 쓰는 법도 배울 수 있다.’ 준은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지만 아버지가 그립지는 않았다.

준은 네 살 때부터 먹 가는 법을 배웠다. 그 나이에는 무엇에도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없는 나이였다. 하지만 갈수록 변하는 먹빛은 어린 준의 호기심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이놈아, 집중해라. 너 어디다가 정신을 빼놓고 먹을 가는 것 아니냐?’ 아버지가 소리쳤다.

준은 고개를 흔들며 환청을 떨쳐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먹을 갈았다.

한참이 지나고 그윽한 솔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푸른빛이 감돌던 먹빛은 어느새 칠흑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갈아야해?” 명희는 방해가 될까봐 나지막하게 물었다.

솔향기 묵향에 취해 있던 세현은 침묵을 깬 명희의 말에 흠칫했지만, 준은 먹 가는 것에 집중하느라 그녀의 말을 듣지 못 했다.

“준아, 얼마나 더 갈아야해?” 이번에는 세현이 조금 큰소리로 되물었다.

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으나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얼마나 더 갈아야하냐고?” 명희가 조선말로 다시 물었다.

“응, 초묵(焦墨)을 쓰려면 아직 한참 더 갈아야해. 이 먹물은 아직 덜 익었거든.” 준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오빠, 초묵의 ‘초’를 한어로 어떻게 발음하지?”

“지아오.” 동희는 발음만 알려주었다.

세현이 승호에게 무슨 이야기 하냐고 물었고, 승호는 통역을 해주었다. 그러자 세현은 초묵이 뭐냐고 물었다.

“농묵(濃墨)보다 진한, 그러니까 물기가 거의 없는 아주 진한 먹물이지. 번지지 않게 그리려고 초묵을 쓰려는 것 같아.”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고는 지루한 표정으로 먹을 가는 준을 바라보았다. 큰 동작으로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이제 됐어. 반나절 쉬었다가 시작하면 돼.” 준도 세현을 따라 기지개를 켰다.

“반나절을 쉰다고?” 명희가 물었다.

“그래, 진하게 갈았으니 물기를 날려야 돼.”

“이 상태에서 수분을 증발시키는 거야? 난 지금 이런 농묵도 써본 적이 없는데. 과연 화원이라 다르군.” 명희가 중얼거렸다.

“그럼, 난 나가서 먹을 것 좀 사올게.” 세현이 승호의 통역을 듣고 말했다.


세현은 먹을 것을 사가지고 돌아왔고, 조선인들과 함께 그것을 먹었다.

준은 다 먹고 그림 그릴 준비를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구경할 준비를 했다.

준은 종이에 그린 밑그림을 찾아서 펼쳤다. 밑그림 위에다 화방에서 사온 고급 명주를 올렸다. 밑그림 위에 깐 명주의 위와 좌우를 문진으로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명주 위에 비친 유지초본을 초묵으로 베끼기 시작했다. 심혈을 기울였지만 붓질은 머뭇거림이 없이 빨랐다. 얼굴 윤곽이 잡히자 옷깃과 주름을 그렸다. 이 작업이 끝나자 명주를 뒤집어 다시 고정시켰다. 가장 가는 붓을 들었다. 이미 그린 반대 면에다가 눈썹, 귀밑머리, 수염을 차례로 그려 나갔다. 마지막으로 속눈썹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준은 붓을 놓자 온몸에 진이 빠져 늘어졌다.

남매와 승호는 화원의 예술행위를 보며 아무 말로 못하고 넋이 빠져 있었다.

세현도 준의 사진 그리는 솜씨에 감탄했다. 그런데 왜 명주를 뒤집어 그렸는지 물어보려다가 그림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반투명 상태로 비치는 얼굴 윤곽이 딱딱하지 않고 은은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뒤집어 그린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남매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명희야, 울지 마. 울면 이 그림 안 줄 거야.” 준이 늘어진 몸을 추스르며 명희에게 말했다.

명희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떡였다.

“색칠은 내일부터 할게. 내일부터 이틀이면 마무리 지을 수 있어.”

준이 오늘의 작업이 끝났음을 선포하자, 구경꾼들도 긴장을 풀었다.


나흘 후, 다섯 사람은 약속시간에 맞춰 묵연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묵연당 앞에는 가마꾼들이 가마를 한쪽에 세워놓고 잡담을 하고 있었다.

문 앞에는 고급스런 옷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가 손님 다섯을 맞았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부탁한 후 묵연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청년이 밖으로 뛰어나와 손님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들 오시게. 대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집사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들을 재촉했다.

집사가 손님을 데리고 갔고, 청년은 손님들이 들어가자 문을 닫고 뒤따랐다.

안기는 묵연당의 주인이 늘 앉아 있던 상석에 앉아 있었고, 주인은 그 옆에 앉아 그에게 차를 대접하고 있었다.

집사는 안기의 옆에 가서 자리를 잡고 섰고, 청년은 손님들의 자리를 잡아주며 앉기를 권했다.

“너희가 범관의 서명을 찾아냈다고 하면서 날 보자고 했다고.” 안기가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말을 꺼냈다.

“예, 꼭 뵙고 싶었습니다.” 동희가 대꾸했다.

안기가 침묵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앉은 남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둘을 번갈아가며 자세히 관찰한 후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그러면 제가 먼저 다시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러려무나.”

동희는 일어서 〈계산행려도〉를 향해 걸어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리에 남아 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명희는 오빠의 걸음이 긴장감으로 무거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문득 준처럼 갑자기 그것을 못 찾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준도 같이 왔으니 못 찾아도 걱정은 없었다.

동희는 〈계산행려도〉의 몇 걸음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그림 전체를 훑어보았다. 심호흡을 하고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의 우측하단에 서서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그림을 살피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여기 있습니다.” 동희가 흥분을 누그러뜨리고 낮은 소리로 외쳤다.

동희의 말에 모두들 안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집사는 안기가 일어서려고 하자 의자를 빼주었고, 안기가 일어서자 〈계산행려도〉를 향해 앞장섰다. 안기는 흥분했지만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동희는 그림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기는 아까 동희가 멈춰 섰던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림 전체를 시선 속에 넣어보았다. 그러고는 동희처럼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계산행려도〉 앞에 선 동희에게 다가갔다.

동희가 안기에게 그림 한 부분을 가리키자, 그는 그곳을 살펴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서명이 분명히 있다고요.” 뒤따라온 주인이 안기의 미소를 보며 말했다. 마치 자기가 발견한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안기는 고개를 돌려 주인을 흘겨보자, 그는 과장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고 굽실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동희는 세현이 왜 주인과 협상하지 않고 안기를 불러내려고 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주인에게 말했다면 아마도 안기를 만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주인이 모든 공을 차지했으리라.

“하하, 이게 바로 원작이었구나.” 안기는 혼자 중얼거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주인이 서명의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돌아가서 앉자.” 안기가 주인을 무시하고 말한 후, 뒤돌아섰다.

주인은 위치를 확인하지 못 하고 안기를 따라 뒤돌아섰다.

서명을 확인한 안기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차를 마시며 〈계산행려도〉를 다시 바라보았다.

“고맙구나. 명 태조께서도 원작과 모작을 동시에 소장하셨지만 둘을 가려내시지 못하였는데, 나 때에 이르러서야 이걸 밝히다니, 하하.” 안기가 기분 좋게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줄 테니, 말해보아라.” 안기가 동희를 보며 사례에 대해 말을 꺼냈다.

동희는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부자들은 다들 무엇이든 대가로 준다고 그러더군요. 돈이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다 돈만 바라는 건 아니오.” 세현이 끼어들어 항의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말해보아라.”

“사진을 한 번만 보아주세요. 이게 우리가 원하는 거요.” 세현이 다시 나서 말했다.

“내가 사진 보는 걸 원한다면, 어디 한 번 내놓아보아라.”

“명희야, 아버지 사진 보여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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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사진 22.04.13 164 4 11쪽
50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 22.04.12 167 5 12쪽
49 고의 패배 22.04.09 162 3 13쪽
48 악몽 22.04.08 157 4 11쪽
47 그림 매매 22.04.07 176 4 10쪽
46 묵연당(墨緣堂) 22.04.06 169 3 11쪽
45 문지기 22.04.05 166 3 11쪽
44 의심 22.04.02 161 3 12쪽
43 삼촌 22.04.01 169 3 11쪽
42 묵향(墨香) 22.03.31 159 2 11쪽
41 양주(揚州) 22.03.30 177 3 11쪽
40 수중전 22.03.29 162 2 11쪽
39 상선(商船) 22.03.26 169 2 10쪽
38 결의(結義) 22.03.25 169 3 10쪽
37 포구 22.03.24 166 3 11쪽
36 변발 22.03.23 171 3 11쪽
35 탈출 22.03.22 167 4 10쪽
34 무인도 22.01.22 166 4 12쪽
33 생선 요리 22.01.21 170 4 11쪽
32 표류 22.01.20 176 4 10쪽
31 돛단배 22.01.19 168 5 11쪽
30 출항 22.01.18 176 3 11쪽
29 체포 22.01.17 177 5 11쪽
28 자상(刺傷) 22.01.16 196 4 12쪽
27 무승부 22.01.15 221 4 11쪽
26 싸움꾼 +1 22.01.14 232 4 12쪽
25 도강(渡江) 22.01.13 242 4 12쪽
24 사라진 말 22.01.12 257 2 12쪽
23 종이 가게 22.01.11 253 4 12쪽
22 문맹 22.01.10 270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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