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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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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조회수 :
25,843
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1.10 14:00
조회
274
추천
5
글자
12쪽

문맹

DUMMY

“명희야, 말 타러 안 가? 오늘 말 타는 거 가르쳐준다고 했잖아? 동희 형은 어디 갔어?” 준이 툇마루에 앉아 화첩을 보고 있던 명희에게 말했다.

명희는 대답 없이 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뭐 해? 어제 그 화첩 보고 있는 거야?” 준이 물었다.

“응. 근데 너도 이리 와서 이 그림들 좀 봐봐. 이런 최고급 안료들은 처음 보는 거라고. 모두 여덟 명을 그렸는데, 각각 하나의 안료만을 썼어. 저고리와 장신구만 한 가지 색으로 칠했다고. 그리고 초본에 단사로 입술만 칠한 사진이 세 점이고, 질 낮은 석청으로 칠하다 만 것이 한 점이야. 그런데 이들은 앞에서 안료로 그린 여덟 명 중에 네 명이지. 굉장한 솜씨야! 난 사진이라고는 할아버지 그리고 고조부와 증조부 빼고 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다, 진화루에서 전신 진채사진을 본 적이 있구나. 어쨌든 이 사진들 모두 대단해. 궁중 화원이 그린 것 아닐까?” 명희가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화첩을 준에게 건넸다.

“말 타러 가자니까, 약속했잖아?” 준이 투덜대며 화첩을 받아들었다. 그러다 화첩을 펼쳐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때, 굉장하지?” 명희가 준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물었다.

“이 사진들 모두 아버지께서 그리신 거야!” 준이 잘라 말했다.

“확실해? 이걸 언제 그리셨어? 그리고 너 이런 안료들 본 적 있어? 그건 그렇고 우리 아버지는 이걸 어디서 구하신 거지?” 명희는 준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쏟아냈다.

“진채사진이야 그려본 적이 있지만, 이런 최고급 안료는 써본 적이 없어.” 준이 안료에 대해서만 대답했다.

“너 진채사진을 그려본 적이 있다고? 언제?”

“내가 직접 그린 건 아니고, 아버지 따라 다니면서 도와드린 적 몇 번 있어. 개성의 부상들은 그걸 좋아하니까. 그리고 고급 안료 사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지. 하지만 이런 안료는 돈이 있어도 못 구할 것 같아. 아마도 궁중에서 어진 그릴 때나 쓰는 것이겠지. 색깔 진짜 좋다.”

“이 인물들 모두 기녀 같은데, 어진 그릴 때 쓰는 안료로 기녀들을 그린다고? 도대체 왜? 이 사진들 어떻게 그려진 거냐? 그리고 누가 소장하고 있었던 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이것 너희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 아니야? 승호가 가지고 왔잖아.”

“그건 그런데, 전에는 본 적이 없는 화첩이야. 게다가 이 화첩 만든 건 며칠 되지 않았어.”

“그런 것 같네.”

“잠깐, 화첩 다시 줘봐.” 명희가 화첩을 건네받아 파란 저고리를 입은 여인을 찾았다. “그래, 이거 진화루에서 본 것 맞아. 관복 가운데 푸르고 푸르러서 눈에 띄던 요대야!”

“뭔 소리 하는 거야? 진화루는 뭐고, 푸른 요대는 뭐야?”

“진화루는 김흥방의 그림 소장처이고, 푸른 요대는 거기서 본 전신 진채사진의 인물이 허리에 두른 요대라고. 자세히 못 봐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사진에 쓰인 나머지 안료들도 이 화첩에 쓰인 각각의 안료와 똑같은 것 같아.”

“그래? 그럼 이 화첩은 그 진채사진 그리기 전에 연습한 거란 말이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런 것 같아. 그건 그렇고, 너 혹시 그림 모사할 때 궤짝에서 서예 작품 봤어?”

“아니, 그림밖에 없던데, 서예는 서첩이든 족자든 하나도 없었는데. 그건 왜?”

“아버지께서 서예 작품은 처분하시려고 그랬는데, 김흥방이 그걸 모두 사려고 했거든. 그러니까··· ”

“야, 너희 아버지는 그런 것까지 말해주셨어?” 준이 명희의 말을 자르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우연히 어디서 들었어. 으음, 혹시 이 사진들을 김흥방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서예 작품을 교환하신 건 아닌가 모르겠네.”

“김흥방이 누군데, 우리 아버지가 그린 사진을 가지고 있어?”

“김흥방은 서울에서 이름난 세도가야. 하지만 그 사진을 어떻게 소장하고 있었는지는 나도 몰라. 혹시 너희 아버지 도화서 화원이셨어? 그랬다면 서울의 도화서에 계실 때 김흥방이 부탁했을 수도 있고··· 모르겠다. 너희 아버지 그렇게 잘 그리셔?”

“지금은 손 놓으셨지만, 그림은 잘 그리시지. 그리고 사람들한테 도화서 화원이셨다는 말은 듣기도 했어. 도화서 화원 솜씨는 모르지만, 아버지 솜씨가 최고이긴 하지.”

“그렇군. 야, 너희 아버지께 이 사진에 대해 물어보면 안 돼?”

“미쳤냐? 맞아죽을 일 있어? 네가 직접 물어보든지.”

“아니야, 아니야!” 명희가 손사래를 쳤다.

“어, 형 왔어?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준이 사립문으로 들어오는 동희와 승호를 쳐다보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밖에서 승호랑 바람 좀 쐬고 왔어.”

“오빠, 아버지 서예 작품 다 처분하셨어?” 명희가 둘의 대화를 자르며 물었다.

“나도 몰라, 그건 왜?”

“준이 그러는데, 모사할 때 보니까 궤짝에 서예 작품 하나도 없다던데.”

“그래? 승호야, 궤짝 좀 가져와봐.”


동희는 승호가 가져온 궤짝에서 화첩과 족자를 모두 꺼내 살펴보았다. 준의 말처럼 서예 작품은 한 점도 없었다.

“그림밖에 없네. 서예는 모두 처분하신 것 같아.”

“오빠, 여기 있는 그림들 뭐가 있는지 모두 기록해놓아야 할 것 같아.”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럼, 내가 준이 모사해놓은 그림에다 기록해놓을게. 준아, 너 그림에다 글씨와 인장도 베껴 써줄 수 있어?” 명희는 동희의 말을 받은 후 준에게 물었다.

“나 한자 몰라. 그래도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을 것 같아.”

“엉, 뭐라고?” 동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준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한자를 모른다고.” 명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몇 글자는 알아. 세워진 작대기 세 개는 ‘시내’라는 뜻이고, 이렇게 생긴 건 ‘나무’인 것 같고···” 준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바닥에 나무 목(木)자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아래 점이 찍힌 건 ‘뿌리’라는 뜻이 아닐까?”

“이거 뭐라고 읽어?” 명희가 준이 점을 찍은 바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모르지. 안 배웠는데.”

“뭐라고, ‘밑 본(本)’자가 무슨 뜻인지 알면서 ‘본’이란 소리를 모른다고? 야, 그럼 이건 무슨 글자야?” 명희는 ‘말 마(馬)’자를 바닥에 그리며 물었다.

“말 같은데, 갈기하고 다리 그린 것 같아.” 준이 대답하고 나서, ‘큰 대(大)’자를 그리면서 물었다.“ 야, 이 글자는 사람이란 뜻이지? 자주 본 글자 중에 하나거든.”

“야, 그건 사람이 아니라 크다는 뜻이야. 그런데 사람이 팔다리 다 펼쳐서 크게 뻗고 있는 모양이지.” 명희는 준에게 대답하며, ‘물고기 어(魚)’자를 그리고 뜻을 물었다. 그러고 준이 맞게 대답하자 상형자를 연이어 그리며 뜻을 물었고, 준은 모두 맞게 대답했다.

“오빠, 얘 그림 천재 아니야?” 명희가 혀를 내두르며 동희에게 물었다.

“그러게, 상당히 추상화되어 있는 글자들도 다 맞추네.” 동희가 명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오빠, 얘 한자 배우면 금방 배우겠는데.”

“그래. 준아, 송도에 아는 책쾌 있어?” 동희가 명희의 말에 긍정하고 준에게 물었다.

“책쾌가 뭐야?”

“책 거간꾼, 책 파는 사람. 여기는 책쾌가 없단 말이야?”

“책쾌가 책 거간꾼이구먼. 책쾌가 있긴 한데 난 책 안 사봐서 모르지.”

“그럼 문방구 파는 데는 어디야?”

“그건 수륙교 근처의 지전(紙廛)에 가면 살 수 있어. 지전에서는 종이 말고도 문방구도 팔거든.”

“야, 수륙교라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알아?”

“맞아, 형은 서울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수륙교는 남대문 근처에 앵계라는 시내가 있는데 거기 있어. 남대문 가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같이 갈까?”

“아니, 됐어. 승호랑 같이 갔다 올게.”

“형, 말 타고 갈 거야?”

“아니.”

“그럼, 나 명희랑 말 타는 거 연습해도 돼?”

“그래, 조심해서 타.”

“오빠, 붓 좀 크기 다른 걸로 여러 종류 사다줘.”

“그래, 그러려고 가는 거야. 시장 구경도 좀 하고···”

동희가 일어서자 승호도 따라 일어섰다.


남대문 밖 앵계 연변에는 지전(紙廛)이 즐비했다. 종로 시전의 전방과 다름없었다. 상인들은 전방의 퇴청에 앉아 손님들을 기다렸다. 여리꾼들은 손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시장 입구를 서성이며 손님들을 가늠하고 있었다.

동희는 여리꾼들을 무시하고 걷다가 규모가 큰 전방으로 들어갔고, 승호도 뒤따라 들어갔다.

“장지 한 속에 얼마나 하오?” 동희가 퇴청에 앉은 상인에게 물었다.

“으음, 두 냥이오.” 상인이 동희와 승호의 차림새를 살피며 대답했다.

“종로 시전보다 비싸지 않아?” 동희가 승호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거시서는 다섯 속에 여섯 일곱 냥이면 살 수 있는데.”

“서울 사람이오? 송도 종이가 서울 종이보다 비싸면 안 된단 말이오?” 상인이 발끈했다.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잖소. 어쨌든 열 냥에 장지 다섯 속 주오.” 동희가 말했다.

“여덟 냥만 내시오. 내 두 냥은 깎아주겠소.” 상인은 동희가 흥정을 하지 않자 발끈했던 게 미안했다.

“고맙소. 혹시 붓도 있소?” 동희가 사례하고 물었다.

“문방구라면 다 있죠. 필관이 옥으로 된 청나라 붓이 있는데 한 번 보시겠소?” 상인은 물건 값 깍지 않는 동희에게 비싼 붓을 권했다.

“필관이 무거우면 붓 놀리기도 힘든데 그런 장식용은 필요 없고, 굵은 것부터 세필 붓까지 황모필로 보여주오.”

“붓 볼 줄 아시네, 붓이라면 족제비털이 최고죠. 그래도 털이 좋다고 붓이 좋은 건 아니죠. 필장의 솜씨가 좋으면 토끼털로도 족제비털보다 더 좋은 붓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송도 최고의 필장이 만든 붓을 보여드리죠.” 상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으로 향했다.

동희는 발끈했다가 수다스러워진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싸구려 붓들은 전방 안쪽에 있고, 이건 제가 따로 보관하고 있죠. 이현화라고 하면 송도에서는 알아주는 필장이지만 서울에서 오셨으니 잘 모르실 거요.” 상인이 벽장에서 꺼내온 황모필을 열댓 자루를 펼쳐놓으며 말했다.

“아주 좋은데, 이런 건 서울에서도 구하기 힘들 거야.” 동희가 붓을 살펴보고 만져보다 승호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러게요. 심부름하면서 종로 시전에서 비싸게 산 붓보다 훨씬 좋은데요.” 승호가 붓끝을 만지며 동희의 말을 받았다.

“그렇죠? 진짜 물건 볼 줄 아시네.” 상인이 물건 칭찬에 흥분했다.

“이거랑 이거··· 이렇게 다섯 자루 주쇼. 그리고 혹시 《천자문》이나 《소학》 같은 책 좀 구할 수 있소?”

“그 책들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고, 안쪽에 책 좀 쌓아놓은 것이 있으니 거기 한 번 찾아보쇼. 없으면 책쾌한테 구해달라고 할 테니 서명(書名)을 남겨놓으시오.” 상인이 동희가 고른 붓을 챙기며 말했다.

“알겠소. 우선 한 번 가보자.” 동희가 상인에게 대답하고 일어서며 승호에게 말했다.

승호가 따라 일어서다 전방으로 들어오는 젊은 사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털보가 들어왔다. 승호는 털보의 험상궂은 인상에 놀랐다. 날카로운 눈매에 오른쪽 뺨 위에는 칼 맞은 흉터가 위압감을 풍겼다.

털보가 승호와 눈길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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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아버지 사진 22.04.13 166 5 11쪽
50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 22.04.12 170 6 12쪽
49 고의 패배 22.04.09 165 4 13쪽
48 악몽 22.04.08 160 5 11쪽
47 그림 매매 22.04.07 179 5 10쪽
46 묵연당(墨緣堂) 22.04.06 172 4 11쪽
45 문지기 22.04.05 169 4 11쪽
44 의심 22.04.02 165 4 12쪽
43 삼촌 22.04.01 172 4 11쪽
42 묵향(墨香) 22.03.31 165 3 11쪽
41 양주(揚州) 22.03.30 183 4 11쪽
40 수중전 22.03.29 166 3 11쪽
39 상선(商船) 22.03.26 172 3 10쪽
38 결의(結義) 22.03.25 174 4 10쪽
37 포구 22.03.24 170 4 11쪽
36 변발 22.03.23 177 4 11쪽
35 탈출 22.03.22 170 5 10쪽
34 무인도 22.01.22 170 5 12쪽
33 생선 요리 22.01.21 174 5 11쪽
32 표류 22.01.20 179 5 10쪽
31 돛단배 22.01.19 171 6 11쪽
30 출항 22.01.18 180 4 11쪽
29 체포 22.01.17 181 6 11쪽
28 자상(刺傷) 22.01.16 201 5 12쪽
27 무승부 22.01.15 226 5 11쪽
26 싸움꾼 +1 22.01.14 238 5 12쪽
25 도강(渡江) 22.01.13 246 5 12쪽
24 사라진 말 22.01.12 260 3 12쪽
23 종이 가게 22.01.11 259 5 12쪽
» 문맹 22.01.10 275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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