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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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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조회수 :
25,461
추천수 :
45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4.08 16:00
조회
157
추천
4
글자
11쪽

악몽

DUMMY

그날 밤, 세현은 명희의 방문을 두드렸다.

“왜 그래?” 명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잠깐 나와 봐. 밖에서 얘기 좀 하자.”

“싫어.”

세현은 명희가 거절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척이 있어서 그냥 기다렸다.

잠시 후, 명희가 문을 열고 나왔고, 그들은 집 밖으로 나갔다.

“여기도 내기바둑 두는 데가 있어?” 명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있지. 근데 승호 말로는 규칙이 조선과는 다르다고 하더라. 여기서는 네 귀의 화점(花點)에 대각선으로 둔 다음에 시작하는데, 조선에서는 거기에다 네 변에도 두 칸씩 미리 포진하고, 천원(天元)이라고 했던가? 정중앙에 흑이 두고 시작한다고 했어.”

“맞아, 조선에서는 그렇게 두지.” 명희가 세현의 말에 긍정한 후 물었다. “오빠는 바둑 못 둬?”

“바둑 못 두냐고? 바둑 두는 것 끝까지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야.”

“네 귀의 화점만 대각선으로 두고 시작하면, 처음에 포진하는 것부터 계획을 세워야 하겠군.”

“응? 너도 바둑 둘 줄 알아? 승호가 한 말을 똑같이 하네.”

“나도 알지. 조선에서 승호랑 바둑 둔 적 많아. 언제나 내가 강제로 한 집만 이겨야 했지만.”

“강제로 한 집만 이겨? 무슨 말인지?”

“그런 게 있어. 그런데, 승호가 규칙이 다르다고 당황하지 않았어?”

“아니, 손돌 아저씨가 기보를 많이 구해줘서 그런 규칙으로 둔 바둑을 이미 보고 공부도 했다더라고.”

“그래? 손돌 얘기도 했어?”

“어. 돌아오면서 이런저런 얘기 많이 했어.”

“그랬군. 승호가 조선의 국수(國手)야.”

“조선의 국수! 멋있군.” 세현이 감탄한 후 말을 이었다. “승호가 너희들한테 말은 못 하고, 무인도에서 편지와 은괴가 든 봇짐 빼앗긴 것 때문에 자책을 많이 하더라.”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잖아?”

“승호 걔가 소심해서 그런 건데 뭘···”

“맞아, 소심하긴 하지.”

“어쨌든, 오늘 날 찾아와서 내기바둑 두는 곳을 물어보더라고. 은자는 네가 준 거지?” 세현은 명희가 고개를 끄떡이자 말을 이었다. “내기바둑 두러간 이유도 봇짐에 든 은괴만큼 돈을 따서 채워놓으려고 하는 것 같아.”

“그랬군. 말린다고 안 할 것도 아니겠지?”

“맞아, 잃어버린 만큼 채워야 그만둘 것 같아.”

“그럴 필요 없는데···”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옷 있잖아, 너희 내일 묵연당에 다시 가려면 사양하지 마라. 거기 주인이 무시하는 게 승호한테는 무척 마음에 걸렸나봐. 소심한 승호 생각해서라도 묵연당 갈 때만이라도 꼭 입어.”

“알았어.”

“동희한테는 네가 잘 말하고.”

“알았어. 근데 이건 어때?” 명희가 다짜고짜 옆차기를 높이 날렸다.

세현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날아오는 발을 살짝 들어올렸다.

명희는 디딤 발이 흔들리며 소리 없이 넘어졌다.

“야, 나보다 키도 한참 작으면서 이렇게 높이 차면 어떡해? 옆차기는 상대를 일격에 쓰러뜨릴 상황이 아니면 복부 이하를 노려야지.”

“그러네. 가만히 서 있는 나무한테 하던 거랑 다르잖아?”

“그러니까 실전이 중요한 거야.”

“넘어뜨려놓고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아?” 명희가 따지듯이 물었다.

“낙법을 제대로 하던데 뭘?”

“넘어지는 걸 잘 넘어져야 한다고 했잖아?”

“그래, 제대로 배웠어. 게다가 연습도 많이 한 것 같군. 옆차기도 연습할 때는 높이 차는 것도 해봐. 그렇다고 실전에서 함부로 쓰라는 건 아니야.”

“예, 알겠습니다. 스승님.” 명희는 고개를 숙이고 공수를 했다.


변양호는 붉은 오랏줄에 묶여 의금부로 끌려갔다. 옥에 갇혀 있던 그는 국청에 끌려나왔다. 그곳은 지옥과 같았다.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고막이 찢겼고, 피비린내가 사방을 뒤덮었다. 임금은 심문을 시작했지만, 변양호는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듣지 않으려고 하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분노에 사로잡힌 임금은 붕어처럼 입만 뻥긋댔다. 고문이 시작되었다. 변양호는 모든 걸 포기했다. 사금파리 위에 꿇은 무릎 위로 돌이 얹어졌다. “당신은 임금이 아니라 선왕을 시해한 역적이야!” “저 놈의 목을 쳐라!” 임금이 명령했다.


“안 돼! 아아, 아버지···” 명희는 악몽에서 깨어 치를 떨며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그들은 아침을 함께 먹고 집에서 나와 헤어졌다. 세현과 승호는 내기바둑을 두러갔고, 남매와 준은 묵연당을 찾았다.


주인은 원탁에 앉아 있다가 비단옷을 입은 손님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훑어보았다.

“안녕하세요.” 남매가 주인에게 먼저 인사했다.

“어서 오시오.” 주인이 어제보다 달라진 태도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예?” 명희는 주인의 공손해진 말투에 놀랐다.

“안녕하세요. 저희들이예요.” 동희가 다시 인사를 했다.

주인은 동희의 말에 손님들의 얼굴을 살펴보고 차림새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림 좀 볼게요.” 동희가 말했다.

“그래라. 너희들 또 왔구나.” 주인이 대꾸했다.

‘묵연당에는 위작은 걸어놓지 않는다더니 과연 그렇군.’ 명희는 동기창의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가 빈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들은 거리를 두고 〈계산행려도〉 앞에 섰다. 그들은 어제처럼 엄습해오는 그림의 웅장한 중량감에 압도되지 않았다. 오늘은 다행히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 그림의 구도를 살필 수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산이 우뚝 솟아있다. 그 크고 묵직한 봉우리는 웅장한 기세를 뿜어냈다. 산의 검은 골짜기에서는 하얀 폭포가 실처럼 흘러내렸다. 폭포 주위를 검게 그려서 심산유곡임을 표현했기 때문에 하얀 폭포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림의 중간은 안개에 의해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나뉘었다. 아랫부분에는 낮은 앞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뒷산의 나무들은 원경이라 나무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근경인 앞산의 나무들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산 아래의 언덕에는 활엽수가, 산꼭대기에는 침엽수가 그려져 있었다. 우측하단의 언덕 아래의 길에는 나귀를 이끌고 가는 행렬이 등장한다. 그림의 하단인 길 아래의 중앙에는 커다란 바위가 그려져 있었다. 이는 중복적이라기보다는 상단의 웅장한 봉우리를 안정적으로 떠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준은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그림 앞으로 다가갔고, 남매도 그를 따라 그림에 가까이 갔다. 준은 뚫어져라 우측하단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을 살펴보던 준은 남매를 돌아보며 손짓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다가 손바닥에 뭔가 적는 동작을 했다. 그러고 자신의 눈을 가리킨 다음에 양손을 좌우로 휘저었다.

주인은 그런 준의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왜 없는 거야?” 명희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넌 뭐가 없다는 거니? 그리고 걔는 또 왜 그러는 거냐?” 주인이 물었다.

남매는 고개를 돌려 주인을 바라보았고, 그는 앉아서 남매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어요.” 명희가 뭔가 말하려는 동희의 소매를 잡아끌고 자신이 대답했다.

“너희들 이쪽으로 와서 앉아봐라.” 주인이 손짓을 하며 그들을 불렀다.

동희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준을 끌고 탁자로 향했다.

주인은 그 사이 어제처럼 일꾼을 불러 차를 내오라고 했다.

일꾼은 그들이 앉고 나서 잠시 후에 차를 내왔다. 그는 손님들 앞에 공손히 차를 따라주며 굽실거렸다. 아마도 어제 왔었던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매는 자신들이 아니라 비단옷이 대접받는다고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저 그림이 그렇게 좋으냐? 어제 보고 갔으면서 오늘 또 보러온 거냐?” 주인은 점원이 돌아가자 누구를 특정하지 않고 물었다.

“예, 그럼요.” 남매가 동시에 대답했다.

“너희들이 보기에 저 그림이 진짜냐 가짜냐?” 주인은 어제와 같은 질문을 했다.

“저런 대작이 진짜가 어디 있고 가짜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어제부터 왜 그걸 물으세요?” 명희가 물었다.

“그 그림과 거의 비슷한 그림이 양주에 또 있다.”

“예? 비슷한 그림이요?”

“그래, 크기도 거의 같고 구도나 준법도 거의 비슷한 그림이지.”

“그래요? 으음, 그렇다면 그건 진짜냐 가짜냐의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지, 저런 대형 작품을 일부러 가짜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닐 테니까. 어떤 것이 먼저냐의 문제겠지.”

“맞아요. 근데 저 그림이 범관이 그린 게 확실해요.” 명희는 준이 어제 보았다는 범관의 서명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동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보라보는 눈길을 무시했다.

“어떻게 아느냐?”

“모르겠는데, 그냥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적 없으세요? 왜, 어떤 그림들은 보자마자 진짜라는 느낌이 들잖아요?” 명희는 대답을 하며 오빠의 안도하는 표정을 확인했다.

주인은 소녀의 당돌함에 미간 찌푸리며 잠시 세 줄의 주름을 잡았다가 폈다. 마치 자신에게 그림 보는 직관력은 지녔냐고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방 무표정한 근엄함을 되찾았다.

“넌 다른 그림도 본 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만약에 저 그림에 범관이 자기 이름을 써놓았다면 범관이 그린 게 아닐까요?”

“네 말대로라면 그렇지.”

“안대인께서는 여기 언제 오세요?” 명희가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안대인? 너 그 분은 어떻게 아냐?”

“우리 아버지 지인이세요.”

“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무슨 소리가 아니라 사실이에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동희가 끼어들다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렇다며 너희들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그는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동희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먼 데 계신데,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명희는 울먹이며 말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주인은 소녀의 울음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동희는 동생의 등을 토닥거리며 울지 말라고 했지만 명희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동희는 동생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명희는 그 손길을 따라 일어섰지만 울음을 그치지는 않았다. 준도 남매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따라 일어섰다. 동희와 준만 그에게 꾸뻑 인사를 하고 그림가게를 나섰다.

주인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매와 준은 며칠 동안 묵연당에 가지 않았다.

명희는 방에 처박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희는 동생을 달래다 지쳐서 혼자 양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준은 승호가 사다준 문방사우로 양주에서 본 풍경들을 이것저것 그렸다.

세현과 승호는 묻는 말에도 대답조차 하지 않는 명희를 그냥 놓아두었다. 그들은 낮에 나가 저녁까지 내기바둑을 두다가 저녁을 사서 돌아왔다.

다들 모여 밥을 먹었지만 대화는 거의 없었고, 명희는 밥도 몇 술 뜨지 않고 자리를 떴다.

남자들은 우울한 소녀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서로 함께 있는 자리는 서먹서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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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아버지 사진 22.04.13 164 4 11쪽
50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 22.04.12 167 5 12쪽
49 고의 패배 22.04.09 162 3 13쪽
» 악몽 22.04.08 158 4 11쪽
47 그림 매매 22.04.07 176 4 10쪽
46 묵연당(墨緣堂) 22.04.06 169 3 11쪽
45 문지기 22.04.05 166 3 11쪽
44 의심 22.04.02 161 3 12쪽
43 삼촌 22.04.01 169 3 11쪽
42 묵향(墨香) 22.03.31 159 2 11쪽
41 양주(揚州) 22.03.30 177 3 11쪽
40 수중전 22.03.29 162 2 11쪽
39 상선(商船) 22.03.26 169 2 10쪽
38 결의(結義) 22.03.25 169 3 10쪽
37 포구 22.03.24 166 3 11쪽
36 변발 22.03.23 171 3 11쪽
35 탈출 22.03.22 167 4 10쪽
34 무인도 22.01.22 167 4 12쪽
33 생선 요리 22.01.21 170 4 11쪽
32 표류 22.01.20 176 4 10쪽
31 돛단배 22.01.19 168 5 11쪽
30 출항 22.01.18 176 3 11쪽
29 체포 22.01.17 177 5 11쪽
28 자상(刺傷) 22.01.16 196 4 12쪽
27 무승부 22.01.15 221 4 11쪽
26 싸움꾼 +1 22.01.14 232 4 12쪽
25 도강(渡江) 22.01.13 242 4 12쪽
24 사라진 말 22.01.12 257 2 12쪽
23 종이 가게 22.01.11 253 4 12쪽
22 문맹 22.01.10 270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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