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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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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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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65
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1.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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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무승부

DUMMY

승호는 숙취에 시달렸다. 어제 양진후라고 이름을 알려준 털보에게 끌려 다니며 과음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현은 아침부터 또 중노미를 통해 승호를 찾았다.

주막으로 건너온 승호는 한현의 핏발 선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조카, 은자 좀 더 융통해주게.” 한현은 승호의 눈빛을 피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제가 가진 은자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여기 온 첫날 드린 은자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그건 변 역관님 재물이지만, 저번에 제가 드린 은자는 역관님과 관계없는 제 것입니다.”

“조카, 뭘 그렇게 따지나? 내 돈 네 돈 따지지 말고, 은자 좀 빌려줘. 저번에 빌려준 것까지 합쳐 두 배로 갚아줄게. 그리고 말도 찾아올 거야.”

“알겠습니다. 또 한 번 빌려드릴 테니, 우선 잠이라도 좀 주무시고 가십시오.”

“그래, 빌려준단 말이지. 근데 잠은 필요 없고 지금 당장 빌려주게.”

“건너갔다 올 테니 잠깐 기다리십시오.”

“그럼, 그럼, 기다리지 어디 가나? 빨리 갔다 오시게.”


승호는 집으로 돌아가 큼직한 은덩이를 꺼내들고 주막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걸 한현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 이 정도 밑천이면 판돈 다 긁어모을 수 있다. 조카 고맙네. 내가 그 털보 놈한테 따서 두 배로 돌려줄게.”

“좀 쉬다 저랑 같이 가십시오.” 승호는 앞에 꺼내놓았던 은덩이를 집어 들어 품에 넣으며 말했다.

“쉬긴 뭘 쉬어? 빨리 가서 본때를 보여줘야지.”

“우선 잠시 쉬십시오. 저 이거 그냥 못 드립니다.”

“조카, 빌려준다며 왜 다시 집어넣나?”

“아니요, 제가 언제 빌려드린다고 했습니까? 이건 제 은자니까 그냥 드리겠습니다. 안 갚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근데, 드리긴 드리는데 저랑 같이 가십시오. 거기 가서 내어드리겠습니다.”

한현은 마음이 달았지만 더 이상 애걸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후 충혈된 눈을 비비며 방바닥에 누웠다.

“으이그, 그놈의 털보 놈 때문에···” 한현은 누운 채로 방바닥을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예? 털보요?” 승호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서울에서 온 털보 놈이 있는데······” 한현은 승호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잠시 사이를 두고 반응을 살폈다.

“예? 서울에서 온 털보요?”

“그래, 요즘 그놈이 송도 돈을 다 쓸어간다니까. 개 같은 놈이 감히 어디서··· 그놈 때문에 분통이 터진다고.”

“그래요? 우선 좀 주무십시오. 있다 와서 깨워드릴 테니, 그 때 저랑 같이 가십시오.”

“그래, 알았다. 있다 저번에 빌린 것까지 합쳐서 두 배로 만들어줄 테니 걱정마라.” 한현이 허풍을 떨었다.

“예, 알겠습니다.” 승호는 대답하고 일어섰다.


승호는 한현을 따라 남대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남대가(南大街)가 십자가에서 광화문으로 뻗어 있었고, 길의 양 옆으로 시전이 즐비했다. 종이를 사러 갔던 앵계의 지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종로의 시전에 버금갔다.

한현은 승호를 시전 뒷골목 기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기방 안에는 노름판이 벌어져 있었다. 세 명은 콩기름을 먹인 투전목을 들고 노름에 몰두해 있었고, 세 명은 방구석에 누워 쉬고 있었다.

한현이 낯선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자, 방안의 사람들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한현이 물주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떡였다.

“한 화원도 왔는데, 좀 쉬었다 하자.” 수염이 흰 사내가 말했다.

투전하던 사람들은 판을 끝내고 투전목을 던지고 한 쪽으로 밀어놓았다.

“털보 놈은 아직 안 왔소?” 한현이 자리에 앉으며 투전꾼들에게 물었다.

“그놈 정말 손속이 났어. 어젠 술 취해 와서도 돈을 긁어가다니. 그래도 오늘은 그 동안 딴 돈 다 털어놓아야 될 걸! 하하하.” 방구석에 누워 있던 사내가 말했다.

그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승호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털보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싸움꾼 털보 양진후였다. 그 뒤에는 정만이 따라 들어왔다.

“아니, 승호 네가 여긴 웬일이야?” 진후가 승호를 반겼다.

방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털보가 반기는 승호에게 모였다.

“아는 사이야?” 한현이 승호에게 물었다.

“예.” 승호는 짧게 대답했다.

“마침 잘됐다. 바둑이나 한 판 두자.” 진후가 방 한구석에 놓인 바둑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뭔 바둑이야?” 투전꾼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투전은 당신들이나 하쇼. 난 오늘 바둑 한 판 두어야겠소.” 진후가 그들에게 말하고 나서 혼잣말을 뱉었다. “하하하,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여기서 뭔 바둑을 두겠다는 거요?” 투전꾼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진후는 투전꾼들의 불만을 무시했다. 그러고는 승호를 잡아끌고 바둑판 앞으로 갔다.

정만은 진후를 뒤따르며 불만 가득한 투전꾼들을 노려보자, 그들은 시선을 피했다.

“내가 선수를 두고 덤을 열 집 줘라.” 진후는 바둑돌을 들어 화점을 채우며 승호에게 말했다.

“덤이 뭐야? 그런 게 있어?” 투전꾼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이 사람들아, 내 실력에 조선의 국수에게 덤도 안 받으면 두어볼 필요도 없이 내가 진 것 아니야!”

“조선의 국수라니?”

“지금까지 내가 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최고수라니까. 이런 대국을 볼 수 있는 것도 당신들한테는 평생 없을 기회야.”

“선수로 두고 덤까지 열 집이나 받는다고? 이런 건 들어보지 못했어.” 투전꾼들 중 바둑을 둘 줄 아는 몇이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니까. 이게 투전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진후가 장담했다.

“그래? 근데 진짜 덤을 열 집 주는 거야?” 흰 수염이 승호에게 물었다.

“예, 그렇게 해보죠.” 승호가 자신 있게 승낙했다.

“돈을 거시오. 누가 이길지 내기를 걸고 관전을 해야 더욱 흥미 있지 않겠소? 하하하.” 진후가 외쳤다.

투전꾼들은 그 말에 눈빛이 빛났다. 그 눈빛은 노름에 빠진 인간들의 탁하게 빛나는 눈빛이었다.

“아무리 고수라도 열 집은 극복할 수 없는 것 아니야?” 투전꾼 중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래, 맞아! 난 털보에게 걸겠어.” 다른 한 명이 동의했다.

투전꾼들 대부분이 진후에게 돈을 걸었다.

“난 조선의 국수를 믿어보지.” 흰 수염이 승호가 내보인 자신감 때문에 이렇게 결정했다.

“정만아, 너도 걸어라.”

“예? 형님···”

“한 번 걸어봐.”

“예, 형님, 전 승호에게 걸겠습니다.”

투전꾼 모두가 진후에게 돈을 걸었고, 정만과 흰 수염은 승호에게 걸었다. 판돈 비율은 진후가 사이고, 승호가 일이었다.

“나머지 삼은 내가 채워주지. 그래야 나한테 건 분들도 돈을 좀 딸 게 아닌가? 하하하.” 진후가 한바탕 웃고 나서 한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 화원님은 어디 거실 거요?”

“잠깐만 기다려봐.” 한현이 진후에게 말하며 승호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는 사역원 생도 중에 가장 똑똑했어. 아니, 희수 형은 당시 또래들 중에서 중인들뿐만 아니라 양반까지 통틀어 최고의 천재라고 했지. 네가 조선의 국수라고? 네가 둔 바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난 희수 형의 아들인 널 믿는다.’


“난 무승부에 건다.” 한현의 선언했다.

“뭐? 무승부?” 진후가 예상하지 못한 선택지에 놀랐다.

승호를 제외한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한현을 바라보았다.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거의 불가능한 것 아냐? 확률이 일 할, 아니지, 일 푼도 안 될 것 같은데!” 흰 수염이 말했다.

“어쨌든 그것도 재미있겠군. 우리 둘이 비기면, 한 화원이 양쪽의 판돈 모두를 가져가고, 승부가 나면, 이긴 쪽에 한 화원이 건 돈을 보태서 배분하면 되겠군. 하하하.”

“그래, 그것 재미있겠어.” 방안의 모두가 진후의 말에 동의했다

승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무승부!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승부다. 한 집을 이기든 열 집을 이기든 아니면 불계승을 거두든, 자기의 바둑을 두어 이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비기기 위해서는 한 수 둘 때마다 계산을 해야 하고 상대의 수에 따라 그때그때 계산을 바꾸어야 한다. 이런 바둑은 어렵지만 이미 명희에게 한 집만 져주기 위해 두어봤었다. 정확히 열 집만 이겨야 하지만 자신 있다. 자신감을 갖되 한순간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두어보자.’


털보의 선수로 바둑이 시작되었다.

승호는 초반부터 좌변을 파고들어 흑 여섯 점을 잡았다. 그러고는 중반을 운영하며 열 집을 이길 정도로만 국면을 이끌었다. 결국 끝내기에 접어들어서는 바둑알통을 두드리며 정교하게 계산하여 열 집만 이길 수 있는 수를 두었다.

그렇게 대국이 끝났다.

승호는 정확히 열 집을 이겨서 덤을 제외하고 비겼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하하하.” 한현이 웃으며 모든 판돈을 쓸어 담았다.

“이게 뭐야? 정말 비긴 거야? 말도 안 돼!” 투전꾼들은 망연자실했다.

“역시 조선의 국수야. 하하하, 명불허전이야!” 진후는 잃은 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명불허전이라고? 그럼 일부러 비겼다는 거야?” 투전꾼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나도 고수들 바둑 몇 번 봤지만, 이런 고수는 처음 본다. 무승부도 만들어낼 수 있다니··· 허허.” 흰 수염이 헛웃음을 뱉으며 감탄했다.

투전꾼들이 흰 수염의 말에 승호를 바라보았다.

승호는 승부에 대해 별 감정 없이 덤덤했다.

“그래도 여기서 바둑 볼 줄 아는 사람이 있군.” 진후가 흰 수염을 바라보며 말하다가 “내가 뭐랬어? 투전보다 재미있을 거라고 했지?” 투전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일부러 비겼다면 대단한 거야. 아니, 일부러 비긴 게 맞는 것 같아. 허허허, 내 판단도 틀리지 않았구먼. 한 화원이 무승부에 걸지 않았다면 내가 돈을 땄을 테니까.” 흰 수염도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돈 잃었는데, 뭐가 재미있어?” 바둑을 모르는 투전꾼이 투덜댔다.

“그만 투덜대고 술 한 잔 마시고 나서, 투전이나 하자. 오늘은 내가 한턱 내지. 하하하.” 진후는 투전꾼들을 달래고, 즐거워하며 정만에게 말을 이었다. “정만아, 주인한테 가서 여기서 가장 좋은 술과 비싼 안주를 장만하라고 해라.”

“예, 형님.” 정만이 대답하고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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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 22.04.12 169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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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악몽 22.04.08 159 5 11쪽
47 그림 매매 22.04.07 177 5 10쪽
46 묵연당(墨緣堂) 22.04.06 170 4 11쪽
45 문지기 22.04.05 167 4 11쪽
44 의심 22.04.02 162 4 12쪽
43 삼촌 22.04.01 170 4 11쪽
42 묵향(墨香) 22.03.31 160 3 11쪽
41 양주(揚州) 22.03.30 179 4 11쪽
40 수중전 22.03.29 163 3 11쪽
39 상선(商船) 22.03.26 170 3 10쪽
38 결의(結義) 22.03.25 171 4 10쪽
37 포구 22.03.24 167 4 11쪽
36 변발 22.03.23 174 4 11쪽
35 탈출 22.03.22 168 5 10쪽
34 무인도 22.01.22 168 5 12쪽
33 생선 요리 22.01.21 171 5 11쪽
32 표류 22.01.20 177 5 10쪽
31 돛단배 22.01.19 169 6 11쪽
30 출항 22.01.18 177 4 11쪽
29 체포 22.01.17 178 6 11쪽
28 자상(刺傷) 22.01.16 198 5 12쪽
» 무승부 22.01.15 223 5 11쪽
26 싸움꾼 +1 22.01.14 234 5 12쪽
25 도강(渡江) 22.01.13 244 5 12쪽
24 사라진 말 22.01.12 259 3 12쪽
23 종이 가게 22.01.11 257 5 12쪽
22 문맹 22.01.10 273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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