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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 님의 서재입니다.

빙의한 곳이 어딘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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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
작품등록일 :
2021.12.1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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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8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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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7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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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시뮬레이션 전투(9)

DUMMY

“...... 어?”



눈을 끔뻑였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다. 정말로 세상이 멈춰 있었다. 나에게 달려들던 괴물도, 피어오르던 먼지도 전부 허공에 가만히 멈춰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내 피부에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것들뿐.


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일단은 손에 든 문짝을 내려는 놓았지만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고, 난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오지? 안 그래도 시간 부족한데.”



그때,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삐딱한 그 상태 그대로다. 진우는 멈추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멈추지 않았을까. 인간은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작동되도록 설정이 된 거지?


아니면...... 저기에 서서 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쟤가 이걸 멈춘 게 아닐까.


아이들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잘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움직이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리가 점차 차게 식었다. 아마 내 짐작이 맞는 것 같은 느낌이다.



“빨리 와. 넌 곧 가야되니까.”



일단은 가란 대로 가라는 말을 따랐다. 나 이런 거 되게 잘 따르는 사람이다. 줏대가 좀 없는 편이라. 친구들한테도 줏대가 있으면서 없는 이상한 새끼라는 소리 많이 들었다.


다가오는 나를 보며 진우가 설명했다.



“여기 시간을 멈췄어. 밖에 송출되는 화면으로는 네가 여전히 싸우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떨고 있는 상태로 보일 거야.”



짐작이 맞았다. 진우가 이 세상을 멈췄다. 자신과, 소율이와, 나를 빼고.



“...... 왜?”



그 사실이 확실히 되고 가장 먼저 든 의문이었다. 저 아이는 이 세상을 왜 멈췄고, 거기에 왜 나를 포함한 걸까.


나는 그렇게 믿음직스럽거나 뭘 잘한 사람은 아니다. 지금까지 한 건 그냥 고집을 내세워서 내 멋대로 행동한 거랑, 문짝을 휘두르면서 괴물 죽인 게 다인데.



“대화를 좀 나누려고. 잘나신 눈들을 피해서.”



이번에 답한 건 소율이었다. 존댓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말투가 뭔가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공손하고 순수했던 아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조금 비아냥대는 투였다.



“아무튼, 길지도 않은 시간이니까 빨리빨리 이야기나 나누죠.”



진우가 손뼉을 한 번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자고? 굳이 조작까지 해가면서?



“너희는...... 인공지능이잖아.”



나는 정말로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내가 과몰입을 해서 지키겠답시고 별 이상한 짓을 다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인공지능인데. 인공지능은 원래 사람 말을 듣는 게 아닌가? 사람 말을 안 따르는 거면 이건 오류인가?


아니. 시뮬레이션이라면서. 시뮬레이션이라면 매번 똑같은 환경 안에 다른 사람들을 넣고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 평가하는 거 아니야?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



“푸하하! 오랜만에 듣는 반응이네. 인공지능...... 좋지. 멋있고.”



그런데 내 질문에 소율이와 진우는 그저 깔깔대며 웃었다. 왜...... 웃지? 인공지능이 아닌가? 나는 인공지능 대신 살아있는 누군가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있었던 건가?



“이건 시뮬레이션이 아니야.”



한참을 웃던 소율이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 그래?”



그럼 뭘까.



“우리한테는...... 회귀지.”



...... 회귀라고?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회귀물도 많이 보긴 했다. 그런데 이 시뮬레이션이 회귀라면 그건 도대체 뭔 상황이지?



“우리는 매번 11월 3일 오후 1시 27분, 7층 아동복 매장에서 눈을 떠. 아무도 없는 세상이야. 아, 그건 아니지. 진우가 곁에 있거든. 그리고 매번 바뀌는 사람 한 명도 있어. 그게 오늘의 경우는 당신이네.”



아이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정신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돌발행동을 할 수 없어. 제약이 찾아와. 별다른 제약은 아니고 많이 아픈 건데, 아픈 게 싫어서 열심히 따르지. 당신 같은 사람들을 안내하는 게 내 일이야.”


“...... 그렇구나.”



그러나 마음속 한구석에 품어진 의심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커졌다.


이 모든 게 시뮬레이션이라면, 아이의 이야기 역시 전부 시뮬레이션의 일부가 아닐까?



“믿지 않아도 좋아. 이걸 시뮬레이션의 일부라 생각해도 좋고. 어차피 믿지 않을 사람들은 평생 믿지 않거든. 또...... 나가면 다들 잊어버리고. 이건 그냥 내가 수많은 회귀를 반복하면서 생긴 버릇일 뿐이야. 그러니까 너도 딱 그 정도로 생각해. 그저 의심스러운 이야기.”


“그래. 의심할게.”


“...... 넌 다른 사람들과 꽤 다르네. 물론 좋다는 소리야. 날 불신하는 눈빛으로 믿겠다는 말을 하는 것보단 솔직한 게 좋거든. 마음껏 의심하고 잊어버려.”



나를 보는 아이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의심을 반기다니, 도대체 얼마나 데었길래.


아니. 아직은 믿지 말자. 어차피 줏대 없는 내 마음은 아이의 말을 결국 믿어버리고 말겠지만, 일단은 기다려보자.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우리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기절하는 사람, 우리를 공격하려 하는 사람, 미친 것 같아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은 사람, 위선적인 사람. 여기 있으면서 참 많은 인간상들을 봤지. 환멸은 진작에 지났고 이젠 해탈과 탐구의 경지에 이르렀어.”


“너 바로 전에 온 사람은 우리를 만나자마자 머리를 깼지. 그 사람, 좋은 평가는 못 받을 거야. 우리가 진짜 괴수라면 잘한 일이지만 우린 선량한 NPC인걸.”



진우가 끼어들었다.



“넌 또 게임했냐. 하여간, 게임중독이라니까.”



소율이가 진우의 머리를 톡 때렸다. 이렇게 보면...... 아이인 것 같나. 잘 모르겠다.



“NPC 정도는 게임 안 하는 사람들도 다 알아먹거든. 그렇지 주서현?”


“나 게임도 좀 해서...... 일반인 반응은 딱히......”


“봐봐. 쟤도 중독이잖아.”


“쟨 어른이고. 넌 어린이고.”


“쟤보다 내가 더 많이 죽어봤는데 난 왜 계속 어린이야? 아니, 애초에 산 시간만 따지면 난 진작 중년이라고.”


“그래 봤자 나보다 작은 주제에.”


“...... 아무튼, 주서현 너는 좋은 평가 받을 거야. 애초에 이렇게까지 오래 버티는 사람들은 몇 없거든. 능력도 사용할 줄 알고. 불쌍하게.”


“불쌍해?”


“응. 네 앞에 고생길이 훤해. 탈모도 오겠네. 불쌍해.”


“...... 미래를 볼 수가 있어?”



탈모는 내 미래에 없을 줄 알았는데. 친가 외가 다 풍성하신 분들이었는데.



“아니. 그냥 내 짐작.”


“헛소리 작작 해.”



소율이가 진우의 뒤통수를 팍 때렸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동료의 느낌이 났다. 도대체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아마 궁금할 거야. 왜 내가 너한테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전부 내 하소연이잖아. 네가 들어봤자 뭘 해줄 수 있다고.”


“그렇지.”


“별 건 아니고, 할 수 있으면 기억해달라는 거야.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거든. 못한 건지, 안 한 건지. 사실 내가 보기엔 못한 것 같긴 해. 왜냐하면 똑같은 사람이 한 번 더 이곳에 온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한 말을 처음 듣는다고 했거든. 여길 나가면 다 잊어버리나 봐.”


“그러면 나도 너희를 아마 잊을 거야.”


“괜찮아. 아까도 말했잖아. 이건 그냥 내 습관이라고. 매일 괴물에게 먹힐 때 그런 생각을 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냥 검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눈을 뜨는 곳이 7층 아동복 매장, 눈을 뜨는 시간이 11월 3일 오후 1시 27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아이는 웃었다. 나는 사람이 웃을 때 그렇게 슬퍼 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너는 죽어야 해. 죽어야 여길 나갈 수 있거든. 그러니까 더 힘 빼지 마.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과 오래 있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야. 뭐, 나름 재밌었어. 나중에 또 만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나가면 너희는 어떻게 돼?”


“처음엔 그냥 바로 죽었지. 내가 이능력자라는 사실을 떠올리질 못했거든. 초반에 만난 사람들도 모두 이능력 한 번 쓰지 못하고 죽었고.”



...... 그렇구나. 하긴, 그렇겠지.



“그런데 이능력을 쓰는 사람을 보니까 내가 이능력자라는 게 생각이 났어. 그 뒤로는 열심히 도망가는 거지. 여긴 내 생각보다 넓고 좋더라고.”



아이는 웃었다. 나는 딱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네가 떠나고 우리는 바로 조작을 사용해 괴수들을 멈추게 만들 거야. 그리고 열심히 계단을 걸어 위로 올라간 뒤에, 맛있는 것도 먹고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쟨 게임을 하겠지. 그러다가 결국 괴수에게 먹히고 눈을 뜨면 새로운 11월 3일 오후 1시 27분을 맞이하는 거지.”


“우리는 성장할 수 없거든. 능력에 아직 한계가 많이 있어.”


아이들은 씩 웃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한 번 와달라는 소리야. 세상에 둘뿐인 건 외로워서.”


작가의말

탈락은 아니겠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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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6. 시뮬레이션 전투(10) 22.01.18 21 0 9쪽
» 25. 시뮬레이션 전투(9) 22.01.17 20 0 9쪽
25 24. 시뮬레이션 전투(8) +1 22.01.15 20 0 10쪽
24 23. 시뮬레이션 전투(7) +1 22.01.14 25 0 9쪽
23 22. 시뮬레이션 전투(6) +6 22.01.13 33 2 10쪽
22 21. 시뮬레이션 전투(5) +3 22.01.12 29 2 9쪽
21 20. 시뮬레이션 전투(4) +8 22.01.11 41 6 9쪽
20 19. 시뮬레이션 전투(3) +7 22.01.10 51 4 10쪽
19 18. 시뮬레이션 전투(2) +2 22.01.08 42 2 9쪽
18 17. 시뮬레이션 전투(1) +1 22.01.07 40 1 11쪽
17 16. 너무 힘들다(2) +1 22.01.06 52 9 9쪽
16 15. 너무 힘들다(1) +1 22.01.05 54 8 9쪽
15 14.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8) +1 22.01.04 53 4 9쪽
14 13.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7) +1 22.01.03 53 3 10쪽
13 12.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6) +2 22.01.01 62 5 9쪽
12 11.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5) +2 21.12.31 65 7 11쪽
11 10.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4) +1 21.12.30 69 7 11쪽
10 9.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3) +1 21.12.29 82 14 11쪽
9 8.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2) +1 21.12.28 83 10 10쪽
8 7.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1) +1 21.12.27 86 9 12쪽
7 6. 그런데 나는 그걸 좋아하지 +1 21.12.25 100 8 10쪽
6 5. 사람들도 이상하다 +1 21.12.24 107 9 11쪽
5 4. 세상이 이상하다(4) +3 21.12.23 126 10 13쪽
4 3. 세상이 이상하다(3) +1 21.12.22 155 16 11쪽
3 2. 세상이 이상하다(2) +6 21.12.21 276 75 10쪽
2 1. 세상이 이상하다(1) +9 21.12.20 373 80 9쪽
1 프롤로그 +27 21.12.20 445 112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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