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6)
이마를 짚은 남자는 잠시 그렇게 있었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였다. 아무것도 몰라서 모른다고 한 사람한테 왜 그런 반응이세요. 아는 척하는 것보단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낫지.
물론 남자는 나에게 타박을 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냥 좀 눈치 보여서 그랬다. 나는 눈치 잘 본다. 그래서 주접도 속으로만 떠는 거고, 그래서 다행히...... 그 주접을 입 밖으로는 안 내뱉었지. 진세희 선생님과 태의헌 선생님.
빌어먹게도 오늘 저녁, 또 이불킥을 할 것 같다. 젠장.
“...... 일단은 여기 있고, 담당자 와서 기본 할 일 전부 확인한 뒤에...... 하아. 잠시만 기다려. 3팀장이랑 이야기 좀 할 테니까. 맥주 캔 잔뜩 쌓인 곳이 네 자리야. 거기서 앉아 있어.”
남자는 손가락으로 자리 한 군데를 가리켰다. 맥주 캔이 정말로 잔뜩 쌓인 자리였다. 말술이시군요, 이곳의 주서현 씨. 아, 에스퍼라서 안 취하는 건가. 근데 그럼 그냥 보리 향 맛없는 음료수 아니야? 뭐 마실 거면 다른 거나 마시지......
“어디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어차피 바로 옆에 갔다 오는 거니까.”
나를 뭔 천방지축 꼬맹이로 아시나. 근데 천방지축은 맞긴 하다.
“옙.”
나는 남자가 알려준 자리로 갔다. 맥주 캔이 가득 쌓여 있어서 술 냄새가 엄청 날 것 같았는데 그러진 않았다. 딱히 물기가 보이지도 않았고, 나름 질서정연하게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그냥 취향이 특이한 사람인가보다. 내가 보기엔 맥주 캔은 물로 깨끗이 세척한 것 같았다. 진짜 취향 특이하네. 맥주 캔을 연필꽂이로 쓰고, 받침대로 쓰고, 스트레스 해소용인지 공처럼 뭉쳐져 있는 것도 있고.
나는 그렇게 맥주 캔들을 구경하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근데 좀 싸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까 그 사람이 나갈 때 어디 나가지 말라고 해서 그런가. 나는 눈치도 보지만 나름 반골 기질도 있다. 나처럼 모순적인 사람은 없을 거다. 물론 있을 수 있다는 거 안다.
그래도 아직 이곳의 주서현과 내외하는 사이라 쉽게 무언가를 건드릴 용기는 나지 않았다. 너무 심심해서 컴퓨터를 켜 보고는 싶었는데, 컴퓨터 한 번 켰다고 중요한 자료 날려 먹을까 봐 걱정됐다.
아, 그래. 나에겐 알렉산더의 유지를 이은 알렉산데르가 있었지.
나는 알렉산데르를 꺼내 들었다. 검은 몸체가 손에 착 잡혔다. 미안해 알렉산더. 네 주인은 너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남지 않은 새로운 아이를 만났어.
알렉산더는 내가 오늘 아침에 고이 보내주었다. 화장을 하면 다이옥신이 나올 것 같고, 매장을 하면 토양 오염을 시킬 것 같고, 수장을 하면 수질 오염을 만들어 낼 것 같아서 쓰레기통에 잘 넣었다.
폐가전제품 무상 수거가 내가 살던 대한민국에는 있긴 했는데 여긴 내가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그냥 버렸다. 괜찮...... 겠지? 갑자기 안 괜찮을 것 같다. 미안하다 지구야.
나는 지구에 대한 미안함을 삼키며 알렉산데르를 들었다. 근데 뒤판이 뭔가 신기한 재질인 것 같다. 뭘까.
우선은 알렉산데르의 설정 앱에 들어갔다. 그리고 알렉산데르의 기종명을 알아낸 뒤에 그걸 검색포털에 검색해봤다. 오, 근데 검색포털 명은 내가 살던 대한민국에 있던 거다. 창작이 귀찮았나 보다.
알렉산데르는 내 알렉산더와 다르게 아주 쌩쌩하게 잘도 돌아갔다. 역시, 새것이 좋은 것이여.
검색을 해보니 폰 기종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갤...... 와우. 얘도 이름 안 바뀌었군. 생긴 게 너무 달라서 아예 다른 회사의 폰이 아닌가 싶었는데 내가 전에 쓰던 라인이다. 알렉산더야, 너의 흔적은 이곳에도 남아있는 것 같다.
뭐, 충분히 이럴 수 있다. 나는 이곳을 대한민국의 세상을 따와 그곳에 이능력자라는 걸 집어넣은 로맨스 소설의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니까 좀 복잡한 것 같긴 한데...... 뭐 복잡한 세상 맞다.
아무튼, 이런 세상을 만들고 주인공을 하나둘 넣고 염병첨병 사랑하는 커플들까지 넣으면 이런 사소한 디테일을 설정하긴 힘들다. 솔직히 설정하는 게 변태지.
물론 나는 그런 것까지 설정하는 소설 좋아한다. 그런 설정 때문인지 연재 주기가 극악이라서 차라리 그냥 오세요 작가님......! 하고 생각한 적도 있긴 했지만.
어우, 왜 자꾸 잡생각만 많아지냐. 내 거취가 곧 결정될 거라 그런가. 마음이 심란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어서 이러는 것 같기도 하다. 생각 없이 살면 안 되는데 주서현아.
알렉산데르의 기종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봤다. 사실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았다. 어라, 근데 신기한 게 하나 있긴 했다.
“빛 충전?”
대박인데. 이거 그럼 그냥 빛에 두기만 해도 충전되는 거야? 와, 신기해.
내친김에 나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가 알렉산데르의 뒤판을 햇빛이 잘 닿도록 했다. 그렇게 조금 있자, 알렉산데르의 배터리가 1퍼센트 증가했다.
“와! 와!”
이게 되네. 다른 세상에 와서 좋은 점을 하나 찾았다.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나 싶은 기계들을 쓸 수 있다. 말이 되는 기계라면 말이 돼서 쓸 수 있고, 말이 안 되는 기계라면 초능력도 있는 세상인데 고작 그 기계 하나가 뭐라고라는 말로 퉁칠 수 있다.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아까 나한테 여기 있으라고 했던 남자였다. 전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창을 향해 뻗었던 손을 내리고 맥주 캔이 가득한 자리에 다시 앉았다.
“네. 그럼 절차 밟아주세요. 감사합니다.”
절차......? 혹시, 내 퇴사 절차라도 밟는 건가? 물론 에스퍼는 짤리지 않는다고 하긴 했던 것 같지만......
얼마 있지 않아 통화가 끊어졌다.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야기했다.
“담당자 오면 아마 검사 같은 거 할 거야. 우선은 따라가고, 복귀하면 여기서 짐 싸 들고 3팀으로 가. 마침 3팀에 휴직 중인 직원 있으니까 그 자리 채우면 돼. 3팀 팀장이랑 이야기 마쳤고 서류 절차도 부탁했어. 넌 거기서 일 배워.”
이야, 사람을 들이자마자 내쫓으시네.
그렇지만 불만은 없다. 솔직히 저게 맞는 반응 아니겠어. 당장 자기가 뭔 능력을 쓸 수 있는 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뭘 맡길 수가 있겠나.
“알겠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좀 홀가분했다. 윈도우 처리 1팀이 에이스들만 간다는 곳이라 했으니까. 나는 에이스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다.
괜히 가슴 졸였네. 이젠 좀 마음 편해진 것 같다.
“기억은 어디서부터 사라진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게 초면인 기분이라서...... 하하하.”
제발 우리 기억 이야기는 그만하자. 나 이러다가 실수하면 안 된다. 안 그래도 마음 편해져서 까딱하면 입 잘못 나불댈 거란 말이다.
“당장 저번 주 일만 해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넵.”
내 저번 주 기억은 회사 다닌 게 끝이다. 운동이나 공부 같은 자기계발 같은 걸 할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있을 리가. 퇴근해서 폰 보다가 기절하고 깨고 출근하기를 반복했다.
똑바로 살아야 되는데 똑바로 살 시간이 없다. 그런데 사실 똑바로 못 사는 이유는 시간이 정말 모자라서가 아니라 똑바로 살 수 있는 시간을 똑바로 안 살아서 그렇다. 여기서부터 난 좀 글렀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
“아, 모릅니다.”
내가 뭘 알겠니. 나 염력능력자라는 것도 방금 알았고, 휴가였다는 것도 아까 알았고, 나이가 스물여섯이라는 것도...... 방금 알았는데.
“...... 그래.”
남자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움직이는 고개가, 뭔가 좀 아니꼽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그쪽은 날 뭐 그렇게 탐탁찮게 보십니다. 내가 아니꼬워요?
나도 내 상황이 아니꼽긴 하지만 남이 욕하는 건 못 참는다. 솔직히 당신네들이 욕할 게 있나.
“나는 금세빈이야. 나이는 스물여덟이고, 윈도우 처리 1팀 팀장.”
남자, 금세빈이 눈을 뜨고 다시 이야기했다.
“아하. 알겠습니다.”
성이 특이하다. 있는 건 알지만 내 주변에 금 씨는 본 적이 없어서. 여기 센터에 은 씨랑 방 씨 있으면 금은방으로 불릴 것 같다.
근데 나이가 스물여덟? 하긴 뭐. 이능력자 사회는 철저한 능력제겠지. 돈도 많이 벌려나. 고된 일 하는데 돈은 많이 주겠지.
그럼 영앤리치핸섬톨이겠네. 나도 리치랑 핸섬만 있으면 가능한데. 스물아홉이면 영은 확실히 충족된다. 아 인간은 그냥 반백 전이면 다 어린 거지.
“궁금한 거 더 있어?”
“아니요. 초면이시라...... 하하.”
사실 난 그냥 집에 가고 싶다. 그게 안 된다면, 하다 못 해 숙소라도. 내가 왜 이렇게 빨리 나왔을까.
기억상실증으로 변명하는 것도 질렸다. 초능력이 있다는 것도 적응이 안 된다. 나는 그냥 아무 능력 없는 주서현이었는데.
안락했던 삶이었다는 걸 안락했던 삶을 떠나니 깨달았다. 슬프고, 후회스럽고, 그립다. 나 돌아갈 수는 있겠지.
- 작가의말
202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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