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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커피 님의 서재입니다.

강과 먼지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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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16.09.24 16:04
최근연재일 :
2022.0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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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4.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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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시즌2-85.8 퇴물(1)

DUMMY

2-27. 퇴물




뒷골목의 어두운 밤. 피자노 노리는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일렁이는 촛불을 보면, 한때 촛불만큼이나 찬란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아아, 그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뒷골목의 공포 스카와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사업도 순조로웠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갔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었다.


허나, 그러한 것도 한순간, 갑작스런 화재와 미쳐 날뛰는 창녀들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대화재가 일어났고, 창녀들이 날뛰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때를 기점으로 자신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거였다.


창녀들을 피해 잠시 도시를 떠나자, 그동안 이루었던 명성과 사업은 뒷골목과 함께 잿더미가 됐으며, 웬 외지인 건달과 사생아 년이 뒷골목의 주인임을 자처하였다.


피자노 노리는 뒷골목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이에 맞서려고 했지만, 상황은 더 이상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뒷골목은 창녀들이 무서워 도망친 자신보다 창녀를 죽인 미친개와 부를 축적한 매춘부를 더욱 반기었는데, 결국, 피자노 노리도 그러한 상황에 잠시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겐 이 상황을 정면으로 타계할 힘도 난폭함도 없었기에, 대신 스카와 뒷골목을 양분한 교활함과 인내심으로 때를 기다렸다.


이긴 줄 착각한 미친개와 고양이의 목을 물어뜯을 그때를 위해. 그리고 지금 그때가 도래했다.


“아직 입니까?”


자칭 스카의 아들 ‘피기’가 말했다. 돼지처럼 작은 눈. 아기 같은 작은 코, 성기처럼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그냥 봐도 불쾌한 추남이었는데, 어두운 방 안에서 보니 몇 배는 더 혐오스러웠다.


정말 이 흉측한 사내가 스카의 아들일지 궁금했다.


“기다리게. 계략이란 포도주와 같아. 서두르지 말고 잘 숙성될 때까지 기다려야지. 분명 신호가 올 거야. 그럼, 자네도 아버지의 정당한 유산을 받을 수 있을 테고.”


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멍청했다. 아버지 스카의 구역을 돌려주겠다는 제안에 냉큼 자신의 편이 된 멍청이다웠다.


‘이런 놈이라면 나중에 손쉽게 요리할 수 있지.’


“정말, 기름자루의 딸년이 미친개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이번에는 마르케 무소가 끼어들었다. 그는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초조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엿보였다.


“물론이요. 원한을 품은 여자는 내가 준 독만큼이나 치명적이니.”


“그렇군.”


이 노인은 퇴역 군인 출신답게, 사업수완이 형편없고, 여자 밑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러워하였는데, 그 점을 살살 긁어주자 어렵지 않게 자신의 편으로 회유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모은 주먹의 수는 백 명을 가뿐히 넘겼다. 두목이 독살당해 우왕좌왕하는 조직을 깨부수는 데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젊은 하노 놈까지 끌어들였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일리시아의 발이나 핥는 그 애송이는 도저히 회유할 방법이 없어 포기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바투 놈만 처리하면 그 애송이도 총독의 창녀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을 텐데.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거였다.


때마침, 부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바람에 촛불이 크게 일렁거렸다.


“보스.”


“뭐냐?”


“툴리오와 위디아가 왔습니다.”


“둘이? 좋아, 얼른 들여보내.”


잠시 후, 후드가 달린 망토를 뒤집어쓴 늙은 뚱보와 여자가 들어왔다. 툴리오와 위디아였다.


“툴리오!..... 위디아!”


피자노 노리는 그들을 반기며 살펴보았다.


위디아는 어딘가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없었으며, 툴리오는 긴장한 사람처럼 매우 굳어 있었다. 수상했다.


“무슨 일인가?”


툴리오가 대답했다.


“그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었다고?”


“예, 바투.... 정확하게는 독이 든 포도주를 먹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지요.”


“피를 토해 쓰러져?.... 그럼, 확실히 죽은 건 확인하지 못했나?”


“그렇습니다. 그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건달들이 날뛰기 시작해서.... 불똥이 튀기 전에 위디아 아가씨를 이리 모시고 빠져나왔습니다.”


“위디아. 그 말이 사실이오?”


위디아는 피자노 노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딘가 겁을 먹고 있었다. 뒤룩뒤룩 움직이는 두 눈이 증거였다.


“위디아?”


피자노 노리의 재촉에 그녀는 손을 벌벌 떨며 뭐라 웅얼거렸다. 너무 작고, 발음도 부정확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툴리오가 끼어들었다.


“아마.... 가족들이 걱정돼 이러는 걸 겁니다. 바투가 쓰러지자, 시중을 들던 아가씨를 다들 찾기 시작했거든요. 어쩌면 벌써 아가씨의 집에 사람을 보냈을지도....”


그 말을 들은 위디가아 몸을 벌벌 떨며 울음을 터트렸다. 툴리오가 안쓰럽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 그녀는 더욱 흐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럼, 어찌 됐건 바투 그 미친개는 죽었다는 거군.”


피기가 출렁이는 뱃살을 흔들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허리에 찬 식칼을 뽑아 들 기세였다.


“독약이 얼마나 치명적이냐에 따라 모르겠소. 어찌 됐건 독약을 먹은 것은 확실하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그럼, 확실하구만! 피자노 당장 가세. 죽었든, 안 죽었든, 독약을 먹었으면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거요. 이때, 치고 들어가면 별다른 저항도 없이 놈들을 무너뜨릴 수 있소. 전투는 타이밍이요.”


맞는 말이었다. 허나, 피자노 노리는 특유의 조심성이 발동됐다. 좀 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들 기다려 주시오. 내가 부하들을 보내 상황을 확실히.....”


그때, 위디아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찌나 손아귀 힘이 센지 그녀의 필사적인 심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피자노 님... 제발, 제발 좀 도와주세요. 지금 이 순간도 제 가족이 위험해요.”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피자노 노리는 당혹스러웠다. 얼굴은 시뻘겠고, 충혈 된 눈에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제발, 당장, 그놈을..... 시간을 끌면 제 어머니와 여동생이...”


“기다리시오. 아가씨. 사람을 빨리 보내 상황을 파악해보겠소. 바투가 죽었다면 분명 동요가-”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피기가 갑자기 끼어들며 말했다.


“우리가 시간을 끌면, 그만큼 적들이 방비할 겁니다, 당장 쳐야 합니다.”


“이 뚱보 말이 맞소. 피자노. 당장 쳐야 하오. 우리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낌새를 보이면 놈들은 방어할 준비를 할지도 모르오. 전투에서는 절대 그러면 안 되지.”


피자노 노리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싸움 밖에 할 줄 모르는 무식한 놈들. 허나,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툴리오 자네 생각은?”


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전 싸움에는 문외한입니다. 하지만 바투의 조직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죠. 그의 밑에는 ‘해결사 보어’나 ‘권투사 무로’ 등 여럿 주먹이 있습니다. 어설프게 시간을 주면 위험합니다. 가급적 갈피를 못 잡는 이때 쳐야 합니다.”


“그렇다잖소! 피자노. 바로 움직입시다. 우리 쪽은 당장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버지라면 당장 달려가 멱을 땄을 겁니다!”


피자노 노리는 혼란스러웠다. 부드러운 조언과 강력한 권고, 애원, 협박 등이 모조리 싸우라는 쪽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허나, 동시에 자신의 본능은 더욱 조심하라고 속삭였다.


본능과 주변의 목소리. 피자노 노리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소! 갑시다. 부하들을 모두 준비시키시오. 피노 넌 형제들과 함께 부하들을 준비시켜라.”


“네! 아버지!”


자신의 결단에 피기와 마르케, 아들이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피자노 씨. 위디어 아가씨는 여기 남아 주십시오.”


“자네도?”


겁쟁이 뚱보의 제안에 피자노 노리는 놀라 되물었다.


“예, 제가 빠지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싸우는 건 자신 없어도, 몰래 접근할 샛길 정도는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고맙군.”


“별말씀을. 어차피 한배를 탄 몸. 저 역시 제 생존과 재산을 위해 이러는 겁니다.”


“그렇지. 맞는 말이야. 한 구역을 내주겠다는 약속 반드시 지키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피자노 노리는 조각난 땅에서 만든 얇고 긴 검을 챙긴 후 건물 밖으로 나갔다.


건물 밖에는 식칼을 든 피기와 공화국 갑옷을 입은 마르케 무소, 자신의 아들들이 서 있었다. 그들 뒤로 철퇴와 곤봉, 칼과 도끼로 무장한 백여 명의 주먹들이 보였다.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딸딸 긁어모은 것인데, 이들을 보자 불안감은 점차 사라졌다.


무장한 남자 백여 명이라니. 이만한 병력이 갑자기 쇄도한다면 두목을 잃은 조직은 속절없이 무너지리라. 그렇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모두 들어라!”


피자노 노리가 소리쳤다.


“오늘 밤, 이곳 뒷골목의 주인이 바뀐다! 건방진 외지인 잡놈이 아닌, 이곳에서 나고 자란 우리 토박이로! 모두 용기를 내라! 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은 우리다! 우린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을 것이다!”


그러자 아들 피노 노리를 필두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점점 커지는 함성처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커져갔다.


어느새 피자노 노리는 이미 이긴 듯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길 안내 부탁하지. 툴리오.”


“예, 저만 따라오십시오.”




툴리오는 재개발 와중에 우연히 생긴 샛길로 길을 안내했다.


개미굴처럼 좁다랗고, 복잡한 길은 한 번에 세 명 정도 지나갈까 말까 하였는데, 높다란 건물과 중간중간 배치된 샛길 탓에 아차 하는 순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거기다 바닥에는 진창과 쓰레기가 가득해 여간 불쾌한 게 아니었다.


“이봐, 툴리오. 정말 이 길로 가는 게 맞나? 차라리 원래 있던 길로 가는 게 낫겠는데.”


복잡하고 지저분한 길에 짜증이 난 피자노 노리가 말했다. 꼭 하수구에 들어온 쥐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아마, 큰길로 가면 들켰을 겁니다. 바투의 고아들이 쥐새끼처럼 감시하거든요.”


“아, 고아.... 듣긴 들었지. 도대체 그놈은 뭣 하러 쓸데없는 것들을 거둔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비밀을 캐거나, 소문을 뿌리는 데 쓸 거라는데, 전 전혀 관심이 없어서.....”


흥. 피자노 노리는 콧방귀를 꼈다. 돈이 썩어나니 그런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것이리라. 역시 놈은 멍청한 짐승에 불과했다.


“뭐, 그렇군. 그보다 이 샛길은 언제 끝나지? 이대로 가면 습격이 무의미하겠어.”


“이제 다 왔습니다. 곧 길이 탁 트이는 구간에 들어갑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샛길을 빠져나오자 탓 트인 큰 도로가 나타났다.


여관과 술집, 창고, 인술라가 즐비한 길목이었는데, 피자노 노리도 아는 길이었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개들의 집’이 나왔다. 툴리오가 제대로 길 안내를 한 것이다.


‘그런데 뭐지? 뒷골목이 그것도 밤에 이토록 조용할 수 있는 건가?’


어색할 정도로 깊은 적막. 피자노 노리는 뒷목을 콕콕 찌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거짓말과 사기,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뒷골목에서 이 감각으로 수차례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이상합니다. 저기를.....”


아들 피노 노리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피자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큰길 한쪽이 마차와 목제, 흙 주머니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게 아닌가?


심장이 쿵쿵 울리며,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뭔가 잘못됐다.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


그때, 불쾌하면서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만만하고 경박한 그 목소리 말이다.


“이야, 이제 왔어? 많이 늦었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한 사내가 보였다. 사내는 망토를 뒤집어썼는데, 개와 쥐새끼가 새겨진 금브로치를 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십자궁으로 무장한 궁수들이 한 줄로 빼곡히 서 있었다.


“안 올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멋들어진 대사도 준비했다고. 까먹었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며 망토를 벗었다. 바투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툴리오!”


피자노 노리는 툴리오를 찾으며 소리쳤다. 허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새 도망친 그는 바투의 옆으로 가 아부를 떨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보스. 의심하지 못하게 끌고 오느라 좀 지체됐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너 때문에 멋들어지게 준비한 대사를 다 까먹었잖아.”


“어떤 벌이든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피자노 노리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속은 것이었다. 저 아둔한 뚱보에게 속은 것이었다.


‘아냐, 괜찮아. 아직 괜찮아. 우린 셋이나 있으니......’


그 순간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피기의 거대한 식칼이 마르케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그 꼬장꼬장한 노인이 핑크빛 피거품을 문 채 바닥에 쓰러졌다.


“이게 뭔....”


피자노 노리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눈으로 봤지만, 머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회유할 땐 조심했어야지. 회유 할 수 있다는 건, 반대로 회유당할 수도 있다는 건데. 왜? 너만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바투가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듯 손을 까딱거렸다. 명백한 조롱의 의미였다.


“툴리오!”


피자노가 소리쳤다. 허나, 담담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피자노 씨. 허나, 당신은 과거의 망령인데, 반해, 보스께서는 미래십니다. 이분은 뒷골목 아니, 이 붉은 방패를 지배하실 분입니다.”


피자노 노리는 저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미래라니, 붉은 방패라니. 도대체 무슨......


“위디아... 그년도 날 속인 거냐?”


바투가 대신 대답했다.


“아마, 그건 아닐걸?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진심이었을 거야. 날 죽여 달라는 거나. 자기 가족을 구해달라는 거나. 데려와.”


바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궁수들 사이에서 벌거벗은 여자 둘이 끌려 나왔다. 목에는 도금한 족쇄를 둘렀고, 눈 아래에는 피눈물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가히 엄청난 꼴이었다.


“인사해. 위디아 엄마랑 여동생이야.”


바투는 도금한 족쇄를 개목걸이처럼 쥐며 말했다.


“실패하면 이 두 년 다 죽여 버릴 거라고 했는데, 안 그래도 되겠네. 야, 누가 위디아 좀 데려와라. 가족은 함께여야지.”


피자노 노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처음부터 저놈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거였다니.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공포가 엄습했다.


“아버지!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왕 이렇게 된 거 싸웁시다! 모두 죽기를 각오해라! 여기서 어떻게든 끝을 본다.”


“용감하군. 마치, 버터처럼. 용기랑 버터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의외로 잘 녹는다는 거야.”


바투가 그리 말하며 손뼉을 두 번 쳤다. 양편 건물 위에서 십자궁을 든 궁수들이 나타났다.


거기다 건물과 샛길에서 젊은 두목 하노를 필두로 무장한 주먹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완벽하게 포위. 피자노의 부하들이 두려움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허나, 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바투의 발언이었다.


“모두 잘 들어라. 자비로운 내가 제안하지. 살고 싶은 자 무기를 버리고 뒤로 빠져라. 난 피자노와 그 아들만 원한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무기를 버리는 순간 우릴 다 죽일 거야!”


“믿든 말든 상관 안 해. 안 믿으면 그냥 죽이면 되니까. 하지만, 항복한 놈은 우리 조직에서 받아주지. 때마침 일손이 필요해질 것 같거든. 선택해 지금 주인이랑 같이 죽을지, 아니면 새로운 주인을 섬길지.”


바투의 제안에 침묵이 일었다. 여태껏 있었던 침묵 중 가장 무서운 침묵이었다. 침묵은 피자노 노리의 부하뿐 아니라 마르케 무소의 부하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어느새 죽은 보스의 복수 따위는 가래침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바투가 즐겨 사용하는 나이프를 꺼냈다. 그러자 건물 위의 궁수들이 십자궁을 일제히 겨눴다.


수십 개의 석궁은 보는 것만으로 공포스러웠는데, 도대체 저 많은 무기를 어떻게 구한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빨리 결정해.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죽음과 같은 적막. 누군가 툭 하고 무기를 버렸다. 그러자 무기를 버리는 소리가 하나 둘 늘어나더니, 이윽고 피자노 노리의 곁에는 그 아들들만이 남아 있었다.


버림받은 것이다. 지독한 배신감과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때. 바투가 적당히 이어붙인 나무토막을 들고 와 말했다.


“죽기 전에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사실, 옥상 위에 있는 궁수들 전부 가짜야. 나무토막을 대충 이어붙인 가짜를 들고 있지. 무슨 말이냐면 너희들의 용기나 의리는 이 나무토막만도 못하다는 거야.”


무자비하고 철저한 조롱. 피자노의 아들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제히 덤벼들었다. 허나, 발악이 무색하게 그들의 칼날은 바투에게 닿지 못했다.


바투의 주먹들이 그들을 가로막은 것이다.


갈고리가 박힌 무로의 세스타스(너클의 일종)와 뱀과 같은 보어의 철퇴. 피자노의 아들들은 오히려 살해당하고 말았다. 참혹하게.


아들들의 죽음에 피자노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근육질 덩치와 뚱보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아닌가?


고개를 들어 바투를 보았다. 그는 한때 자신의 부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놈에게 첫 번째 임무를 주지. 피자노와 마르케의 집으로 가. 그리고 그 아내와 딸년, 손녀, 며느리 등 가족을 전부 내 앞으로 끌고 와. 애인도! 이젠 전부 내꺼니까. 성공하면 피자노의 구역 일부를 맡겨주지. 실패하거나, 빼돌리면 네 가족이 빈자리를 메꾼다. 마음에 드나?”


“예.....”


피자노 노리는 제발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허나,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뭔가에 목이 막힌 것 같았다. 오직 눈물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피기. 약속대로 네게 술집과 음식점을 넘기고 정육 사업에도 투자해주지. 하지만, 그 외에는 내 영역이니까. 넘어오지 말고.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붉은 방패는 앞으로 커질 테니, 전혀 불만 없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바투 씨.”


“좋아. 하노.”


“예.”


“아가씨께, 고맙다고 말씀 좀 전해줘. 앞으로 돈놀이는 아가씨를 통해서만 하고, 그 외의 사업도 넘보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알겠습니다. 아가씨께서도 바투 씨의 영역은 넘보지 않겠다고 전해드리랍니다.”


“좋군. 툴리오.”


“예, 보스.”


“이번에 고생 많았다. 적들을 염탐하고, 오히려 회유하다니. 늙은 돼지인 줄 알았는데, 늙고 쓸모 있는 돼지였군.”


“과찬이십니다.”


“약속대로 마르케의 구역을 넘겨주지. 거기서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잘한 전리품 분배를 마친 바투는 피자노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충격받은 얼굴이군. 이럴 줄 전혀 몰랐다는 듯이. 그러게 주제 파악하고 내가 흘린 음식물 찌꺼기나 받아먹었어야지. 이 퇴물아..... 할 말 없나? 살려달라거나?”


피자노는 경악했다. 이 짐승은 부하들을 빼앗고, 아들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신의 영혼을 욕보이려고 하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만은 마지막으로 지켜야 했다.


“죽여라... 외지인 잡놈아!”


바투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콧잔등을 긁적였다. 그러더니 자신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위디아의 엄마와 딸을 보게 했다.


“보이나? 보여? 기름자루의 아내와 딸이야. 이제 내꺼고. 저들 뱃속에 내 씨앗이 자라고 있지.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내 씨앗이. 아들이 태어나면 주먹으로, 딸이 태어나면 창녀로 키울 거야. 그리고 저들 뱃속에 또 내 씨앗을 뿌릴 테지. 죽을 때까지.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아나? 잊게 돼. 자기가 누구였는지, 누구의 아내와 딸이었는지. 그냥 숨 쉬는 고깃덩이가 된다고. 이해되나?”


피자노 노리는 이해 됐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또 얼마나 진심인지. 분노와 증오, 광기에 물든 눈은 순수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진심을 담고 있었다.


“네 가족이라고 뭐 다를 거 같아? 네 마누라가 얼마나 늙었든, 네 딸이 얼마나 어리든 상관 안 해. 넌 날 열 받게 했으니, 네 가족은 더 참혹히 다뤄줄 거야. 자존심을 부수고, 영혼을 더럽힐 거라고. 스스로를 혐오할 만큼.”


“....내가 원하는 게 뭐야?”


바투가 웃었다.


“빌어 봐. 살려달라고 구차하게 빌어. 그럼, 네 가족은 덜 거칠게 다뤄주지. 어쩌면 평범하게 몸이나 팔지도?”


마지막까지 그는 자신을 조롱하고 욕보였다. 모든 것을 앗아갔음에도 마지막 한 톨까지 짓밟고 삼키려고 하였다. 순수한 공포와 두려움.......


덜덜 떨리는 입술. 피자노가 빌었다.


“제, 제발 살-”


그 순간 바투의 나이프가 휙하고 지나갔다. 목 사이로 붉은 미소가 퍼지며, 피가 쏟아졌다.


끔찍한 고통과 공포. 피자노는 벌레처럼 엎어져 꿈틀댔다.


정신이 아득해졌는데, 그 와중 바투의 한마디가 들렸다.


“거짓말이야.”


작가의말

이번 주 추천글이 올라왔더군요. 아주 기뻤습니다. 더욱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재밌게 읽으시고 주말 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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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2-105. 맞서 싸우는 자 (2) +21 20.09.06 1,038 69 16쪽
116 2-104. 맞서 싸우는 자 (1) +18 20.08.30 1,006 53 10쪽
115 2-103. 탄원자 (3) +8 20.08.23 947 63 13쪽
114 2-102. 탄원자 (2) +3 20.08.16 1,013 55 17쪽
113 2-101. 탄원자 (1) +14 20.08.07 1,134 59 15쪽
112 2-100. 개와 쥐의 왕 (3) +36 20.07.31 1,107 73 23쪽
111 2-99. 개와 쥐의 왕 (2) +23 20.07.24 1,051 71 17쪽
110 2-98. 개와 쥐의 왕 (1) +15 20.07.17 1,077 73 14쪽
109 2-97. 미운 오리 새끼 (4) +20 20.07.10 978 82 18쪽
108 2-96. 미운 오리 새끼 (3) +22 20.07.03 1,010 77 21쪽
107 2-95. 미운 오리 새끼 (2) +29 20.06.26 1,024 70 13쪽
106 2-94. 미운 오리 새끼 (1) +16 20.06.19 1,042 65 12쪽
105 2-93. 신의 후손 (3) +26 20.06.12 1,056 74 22쪽
104 2-92. 신의 후손 (2) +29 20.06.05 1,055 72 16쪽
103 2-91. 신의 후손 (1) +20 20.05.29 1,116 69 13쪽
102 2-90. 뿌리내린 가지(2) +19 20.05.22 1,081 75 17쪽
101 2-89. 뿌리내린 가지(1) +33 20.05.15 1,174 69 13쪽
100 2-88.6 시골 귀족(2) +35 20.05.08 1,152 78 29쪽
99 2-88.3 시골 귀족(1) +16 20.05.01 1,130 75 16쪽
98 시즌2-88. 바르무톤 아가씨(3) +17 20.04.24 1,089 63 18쪽
97 시즌2-87. 바르무톤 아가씨(2) +6 20.04.24 999 57 12쪽
96 시즌2-86. 바르무톤 아가씨(1) +22 20.04.17 1,205 80 17쪽
» 시즌2-85.8 퇴물(1) +23 20.04.10 1,142 77 21쪽
94 시즌2-85.4 짐승의 여인(2) +26 20.04.03 1,156 70 15쪽
93 시즌2-85.2 짐승의 여인(1) +18 20.03.27 1,190 69 19쪽
92 시즌2-85. 예비 신랑(2) +26 20.03.20 1,155 7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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