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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커피 님의 서재입니다.

강과 먼지의 왕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16.09.24 16:04
최근연재일 :
2022.0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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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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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2-107.9 하룻고양이 (3)

DUMMY

언덕 중턱보다 약간 아래에 있는 판사로 경의 저택은 여느 붉은 방패의 저택이 그렇듯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불그스름한 벽에, 단풍잎 기와가 올려져 있었으며, 직사각형의 저택은 어딘가 병영과 같은 딱딱한 분위기가 풍겼다.


필히, 군인이었던 선조를 기리며, 연출한 분위기일 테지. 미들리우스, 바르무톤과 마찬가지로 파페머무스 가문 역시 과거 군인인 시조를 두고, 이를 과할 정도로 자랑스럽게 여겼으니.


‘뭐, 그만큼 다루기 쉬우니 나로서는 다행이지.’


미안나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시중을 드는 여노들이 대문의 손잡이를 잡고, 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가느다란 눈구멍이 찰칵 열리며 피곤한 기색의 노예가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리니스 가문의 장녀 미안나 님이 아버님의 친우분을 만나러 오셨다.”


그러자 노예의 눈이 잠시 흔들리더니, 찰칵 눈구멍이 닫히고, 얼마 있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잠금장치를 얼마나 단 것인지, 꽤나 요란스러웠다.


대문이 열리자 문을 연 노예와 주랑에 둘러싸인 안뜰. 그리고 그 안뜰에 서 있는 아버지의 친우 판사로 파페머무스 경과 그 아내, 자식들이 보였다.


아버지들끼리 친하다 보니 미안나는 그들 모두와 안면이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벌써 아군을 만난듯한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렇기에 미안나는 예를 갖춰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파페머누스 경 그리고 부인. 바르무톤 가문의 미안나가 인사드립니다.”


그러자 예상대로 판사로 경은 미안나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 주었다.


“미안나... 우리 사이에 뭐 그렇게 인사하나? 어쨌건 만나서 반갑네.”


미안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이었다. 남편의 말 때문에 약간 걱정했는데, 판사로 경운 자신을 기쁘게 맞이해 주었다. 물론, 아닌 이들도 있었지만.


‘부인과 그 아이들은 표정이 영 좋지 못하네. 소문 탓인가?’


그러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판사로는 서둘러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미안나와 인사시켰다.


“부인, 애들아. 기억나니? 아비의 친구인 그리니스의 큰 딸이란다.”


미안나와 안면이 있고, 남편에게 순종적인 파페머무스 부인은 바로 미안나에게 인사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은 수줍은 듯 어미 뒤에 숨거나, 살짝 고개만 숙였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부인은 미안나에 대한 헛소문을 알고, 자식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상관없어. 도움이 필요한 건 파페머무스 경이니까.’


짧은 인사를 다 마치자 판사로 경이 입을 열었다. 술을 끊었는지, 과거와 달리 제법 정신이 말짱해 보였다. 몸매가 좀 망가지긴 했지만.


“미안나, 와줘서 진심으로 반갑다. 그런데, 이 시간에 왜 왔는지 물어볼 수 있겠느냐?”


미안나가 주변을 둘러보다 답했다.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그리워 아버지의 친우분을 찾아온 것뿐입니다. 좀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판사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하듯 이마를 스스로 때리곤 아내와 자식들에게 말했다.


“이런, 손님이 오셨는데, 무례하게 굴었군. 부인,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들어가시오. 내 곧 들어갈 터이니.”


남편의 말에 순종적이게 보이는 부인이 미안나를 흘겨보며 뭐라뭐라 속삭였다.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제스처를 취하더니, 아내와 자식들을 돌려보냈다. 판사로는 인내심 좋게 기다리던 미안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서재에서 이야기해 보겠나?”



미안나는 판사로의 안내를 받아 안뜰 너머, 저수지와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서재에 들어갔다.

오래된 책 냄새와 두루마리 냄새가 마음을 안정시켰는데, 미안나는 이곳에서 붉은 방패를 좌지우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몇 번이나 오갔을지 문득 상상해 봤다.... 아마,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을 테지. 아버지 그리니스도 그것에 포함될 테고.


‘그리고 이제 내 차례야. 바르무톤 가문의 장녀인 내가 말이야.’


끼이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판사로를 봤다. 그는 서재 곳곳에 불을 켰다. 촛불 탓인가? 아까 전과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 미안나. 왜 왔는지 이제 본론을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착각이 아니었다. 판사로의 목소리와 표정은 어느 정도 선을 긋는 듯한 태도였다. 차가운 것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선 얼마든지 차가워질 수 있는 태도. 미안나는 짜증이 났다.


“갑자기 들이닥친 점 죄송합니다.... 그렇다 해도 제가 찾아온 게 영 반갑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판사로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 같이 일리시아를 비난하자고 말하더니, 안 좋은 소문이 퍼지자 홀로 도망치고, 나중에 남편만 보내 도움을 청한 널 어찌 반갑게만 맞이할 수 있겠느냐?”


묵직한 한마디 한마디에 미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판사로는 인상을 쓴 채 미안나 맞은편에 앉으며 마저 경고했다.


“그나마 네 부친과 친구였기에 가족들 앞에서 예의를 지킨 거니, 그 이상은 바라지 말 거라.”


미안나는 잠시 있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점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판사로 경.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제가 실수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미안나는 그렇게 사죄하며, 판사로를 바라봤다. 판사로는 그런 미안나를 잠시 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 부친과의 사이를 생각하면 용서를 안 해줄 수 없군.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왔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도움?”


“예, 도움.... 저와 제 가문의 명예를 지키게 말입니다.”


다시 납처럼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판사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졌다. 촛불 탓인지 꽤나 교활해 보였다.


“.... 남편이 왔다 갔으니 대충 이 도시의 상황에 대해 알겠지?”


“물론요. 그렇기에 제가 이리 직접 찾아온 겁니다. 부디, 도와주세요.”


미안나가 그리 말했지만, 판사로의 반응은 심심할 뿐이었다.


“그리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압니다.”


“아니, 몰라. 넌 지금 이 도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도 없는 악의적인 소문이 이 도시를 뒤덮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거리의 꼬맹이부터, 거지까지 모두 네 이야기를 하고 있어.”


“제가 아버님을 해쳤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말씀인가요? 설마, 경께서도 그 말씀을 믿는 겁니까?”


미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으나, 판사로의 반응 역시 밀리지 않았다.


“당연히 난 믿지 않는다.... 허나, 내가 믿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야. 네가 소문으로 일리시아를 위협해서 알겠지만, 소문에는 힘이 있다. 그리고 소문이 해괴망측할수록 그 힘이 강하지. 때때로 진실보다. 중요한 건 소문의 사실 여부보다 사람들이 얼마나 믿는가이다.... 이런 건 내가 아니라 네 아버지가 알려 줬어야 하는 건데.”


판사로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미안나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서재로 들어온 후부터 그는 점점 고압적인 자세가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의 우정을 이용해 빌붙어 먹고살던 주정뱅이인 주제에...


허나, 지금의 미안나에게는 그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굴욕을 참아가며 예절의 가면으로 자신을 무장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판사로 경..... 경께서는 늘 절 어여삐 봐주셨죠. 아버지도 늘 의지하라 했고요. 그러니 이리 도움을 구합니다. 어떻게 제가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을지.”


판사로가 또 거드름을 피우다 입을 열었다.


“.... 다행히 네가 아비를 해쳤다는 소문 말고, 또 다른 소문이 근래 퍼지고 있다.”


미안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소문이란 빨리 퍼지고, 빨리 사라졌다.


“뭐죠?”


“바로, 미친 창녀들이 죽였다는 거지.”


“미친 창녀요?”


“왜 있지 않으냐? 대화재 때 건달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매춘부들이 칼을 들었을 때.”


“아아....”


미안나는 기억이 났다는 듯 그리 탄성을 뱉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 자세히는 몰랐지만, 소문 정도는 들었다.


“그것들은 진압됐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 지금 뒷골목을 주름잡는 바투라는 건달 놈에게.”


“바투라면.... 일리시아의 밑에서 일하는 건달 놈이잖아요?”


“그래, 아주 미친개 같은 놈이지. 네 아버지와도 잠시나마 동업한 적이 있고.”


“예?”


“몰랐느냐? 노예무역이 다시 활성화됐을 때, 일리시아와 함께 네 아버지와 동업했다. 뭐, 지나간 이야기니 일단 넘어가자.”


미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아버지가 그런 건달과 같이 동업을 했다니.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는지.... 여하튼, 그때의 그 미친 창녀들이 너희 아버지를 해쳤다는 소문이 새로이 퍼지고 있다.”


“말이 안 돼요..... 그것들을 진압됐잖아요? 뭣보다 그것들이 왜 아버지를 습격하겠어요?”


“글쎄? 네 아비가 매춘부를 좋아하긴 했으니.... 그리 보지 마라.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다만, 살해 현장에서 ‘창녀들에게 자유를! 변태 귀족에게 죽음을! 라기아족 만세!’라는 문구가 적혔다고 하더구나. 도시에 혼란을 야기할 것 같아 바로 치웠지만.”


“.... 헛소리에요.”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긴 어렵다. 도시경비대 여럿이 그 문구를 봤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래서 지금 도시경비대가 경비를 삼엄히 하고, 매춘부들을 이 잡듯이 수색하고 있다.”


미안나는 오는 길에 만났던 경비대와 용병들을 떠올렸다.


“..... 그래도 헛소리예요. 제 아버지는 일리시아 그것에게 살해당한 거예요. 아버지가 죽음으로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봤냐고요?”


미안나가 작지만 힘주어 그리 말했다. 그러자, 판사로가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다. 혹여 듣는 귀가 없는지.


“입조심해라! 널 딸처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그녀는 시리온의 아이를 가졌어.”


“그 아이가 시리온의 아이를 가진 건 진즉에 알고 계셨잖아요?!”


“시리온이 안부를 물을 줄은 몰랐지.... 이 도시는 모두 그에게 데어봤어. 지금 일리시아는 펄펄 끓는 뜨거운 주전자야. 조심해야 해.”


미안나는 억울함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의 친구분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못난 남편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한심한 남자들 같으니라고.


“은화장군이 계시니 결코 그도-”


“-그건 모르는 거지. 은화장군 역시 시리온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는 상황인데, 만약, 그가 분노할, 누구 편을 들겠느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만, 이 도시에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시리온에게 크게 데였다. 모험 같은 것을 하려고 하지 않을 거다.”


미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라 그런지 그의 말에 도통 반발할 수 없었다. 허나,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거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대로 억울하게 당해야 하나요? 아버지의 장녀인 제가요?”


판사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뭐죠? 그 방법이란 게?”


“얼마 전 일리시아가 찾아왔다. 내게.”


미안나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가 아닌 적이란 말인가? 판사로는 진정하라는 듯 미안나를 진정시켰다.


“진정하거라. 진정.... 날 찾아온 건 별거 아니니. 일리시아 그녀는 너와 화해하길 바라고 있어.”


“.... 화해요?”


“그래, 화해. 자신은 집안에 일어난 비극에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고, 억울할 따름이라더구나. 그리고 너와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도 원치 않고, 그러니, 화해하고 싶다고 뜻을 밝혔어. 자신이 원하는 건 오직 평화며, 자신의 재산과 안전만 위협하지 않으면, 널 도와 바르무톤 가문을 이끌고 싶다더구나.”


미안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말이다.


“.... 그 창녀가 그리 말했다고요?”


“그래.”


“그 말을 믿으십니까?”


“... 못 믿을 것도 없지. 솔직히, 네 가족에게 있었던 짓을 임신한 그 여자가 계획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어렵다. 임신한 여자가 뭘 할 수 있겠느냐?”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미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이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어디 가느냐?”


“경의 뜻이 뭔지 알게 됐으니 떠나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절 맞이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미안나가 다시 움직이자, 한숨 소리와 함께, 판사로가 입을 열었다.


“기다려라. 이미 늦었는데, 어디 가겠다는 거냐?”


“.... 문 연 여관이 있겠지요.”


“여자가.... 그것도 공화국의 귀부인이 홀로 여관에 머문다? 네 남편은 물론, 네 가문의 이름에도 먹칠할 거다. 위험하기도 위험하고. 그러니 여기 머물러라,”


미안나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판사로가 다시 설득했다.


“.... 나 말고 다른 이들을 찾아갈 거 아니냐? 그럴 거면 더더욱 여길 떠나선 안 된다. 떠나서 여관이나 가면 다른 이들이 널 더욱 우습게 볼 거다. 재워줄 친구도 없다고.”


맞는 말이었다. 떠돌이나, 상인, 일개 시민이면 몰라도 신분이 어느 정도 있는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설득된 미안나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계속 제 일을 할 겁니다. 그 역겨운 창녀와는 도저히....”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다만, 명심해라. 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똑똑하지 않다는 걸. 때때로 자신의 뜻을 굽혀야 한다는 걸. 나 역시 이 나이가 돼서, 고통으로 간신히 그 사실을 배웠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내일 아침에 말하거나. 그럼, 내가 널 어떻게든 도와주마.”


“... 예.”


미안나는 그리 대답했다. 허나, 속으로는 절대로라고 소리 죽여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미안나는 바로 움직였다. 급한 것도 있지만, 판사로의 집에서 보내는 게 영 마뜩잖은 것도 있어서였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판사로라던가, 경계하는 파페머무스 부인이라던가.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은 이 도시를 지배하고, 지켰던 그리니스 바르무톤의 딸, 그것도 장녀인데, 이제는 모두 길고양이 취급을 했다.


그러나 억울한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미안나는 판사로의 집에서 머물며 한때 아버지와 뜻을 같이한 이들을 찾아다녔다. 포도주 조합의 간부 쿠푸스와 리디우스, 하르시오나, 건축 자재 전문 사업가인 스티우스, 귀족인 코닐 가문 심지어 아버지의 피보호자들에게도 말이다.


그들 모두 아버지 생전 아부하며, 함께할 것을 약속한 사이였는데, 미안나가 도시를 떠난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두 뻔뻔한 거짓말쟁이로 변했다.


미안나가 그들에게 찾아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들먹이며 일리시아에게 천벌을 내리자고 말하자, 그들은 일리시아 역시 아버지의 딸이라고 지껄였다.

아버지가 당한 억울한 일을 들먹여도, 판사로처럼 미친 창녀가 한 짓이라도 딴청을 피웠는데, 심지어 더한 놈들은 은연중에 미안나의 소문을 에둘러 언급함으로 그 일에 대해 파고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까지 했다.


결국, 미안나는 정의와 자존심도 버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큰 재산과 함께, 붉은 방패를 지배할 기회까지 제안했다. 허나, 놈들은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헛소리를 하거나, 미안나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좀 쉬라는 비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미안나는 며칠이나 도시를 돌아다녀 과거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을 만났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실수였다.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잠시 도시를 떠난 사이 미안나의 영향력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모두 미안나와 평생을 함께할 것처럼 굴어놓고, 이제 모두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허나,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은 미안나가 이동할 때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수군거림이었다.


시장, 광장, 도보 등등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날 때면 미안나를 훔쳐보며, 사람들은 뭐라뭐라 수군거렸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왜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건지 따지고 싶은 충동이 이는 등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 마님 괜찮으십니까?”


시중을 드는 여노가 걱정하며 물었다. 미안나는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실상 속은 영 아니었다. 믿었던 이들과 계획에 모두 배신당하고, 수군거림과 눈총의 표적이 되는 건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 것이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말이다. 덕분에 몸은 뻣뻣해졌으며, 배도 점점 쥐어짜듯 아파와 정신이 예민해졌다.


바로 그때, 지나가는 골목 구석에 웬 낙서 하나가 보였다.


알몸의 여자가 웬 남정네와 짐승처럼 성관계를 맺고 있는 낙서였는데, 선을 쭉쭉 그은 조잡한 낙서 아래로, ‘미안나’의 이름과 ‘거시기 큰 라기아족’이라는 글자가 지저분하게 쓰여 있었다.


허나, 더욱 가관인 건 대사로, 미안나로 추정되는 여자가 거시기 큰 남자에게 함께 살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고, 그 유산으로 같이 도망치잖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쓰여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는데, 미안나는 어떤 놈이 이따위 짓을 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식적으로 찾을 수 없었지만, 분노를 주체 못 해 계속 찾아봤는데, 신이 도우셨는지, 꺾인 골목에서 손에 분필을 쥔 꼬마를 찾을 수 있었다.


지저분한 차림으로 보아 딱 봐도 길거리에 사는 꼬마였다. 그 꼬마는 건달처럼 보이는 남성에게 동화를 받고 있었다.


미안나는 그 모습을 보자 마치 원수라도 찾은 듯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와 꼬마가 미안나를 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둘 다 다른 방향으로 뛰었는데,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상황에 미안나는 깊게 생각하지도 못하고, 바로 뛰기 시작했다.


누굴 쫓아야 하지?


잠시 후, 미안나는 잡기도 쉽고, 제압하기도 쉬운 꼬마의 뒤를 쫓아갔다. 낙서의 선명함과 손에 든 분필로 볼 때 분명 저 꼬마가 낙서한 범인이었다.


저 꼬마만 잡으면 분명 자신을 음해하려는 세력을 붙잡을 수 있을 터였다.


본능적으로 그리 판단한 미안나는 귀부인으로서의 체면도 잊고 꼬마를 쫓아갔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자존심은 접어두고, 판사로의 경호원을 빌려오는 거였는데.


허나,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놓칠 수는 없었기에 미안나는 계속해서 뛰었다. 어느새 재건축 중인 건물 근처에 도달했는데, 발 빠른 꼬마는 잠시 멈춰 미안나를 보곤 바로 꺾인 길로 들어갔다.


꼬마가 시야에 사라지자 초조함을 느낀 미안나는 더욱 다급히 뛰어갔는데, 바로 그 순간 발에 무엇인가 걸리며 앞으로 크게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쿠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미안나는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목재 더미와 벽돌을 볼 수 있었다.


“...... 어?”


그것이 미안나의 유언이었다.


작가의말

아버지에 비하면 깔끔하고, 인도적인 죽음이네요.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일요일 잘 보내십시오.


후원해주신 나무젓가락 님 감사합니다.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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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시즌2-87. 바르무톤 아가씨(2) +6 20.04.24 1,000 57 12쪽
96 시즌2-86. 바르무톤 아가씨(1) +22 20.04.17 1,206 80 17쪽
95 시즌2-85.8 퇴물(1) +23 20.04.10 1,144 77 21쪽
94 시즌2-85.4 짐승의 여인(2) +26 20.04.03 1,158 70 15쪽
93 시즌2-85.2 짐승의 여인(1) +18 20.03.27 1,191 69 19쪽
92 시즌2-85. 예비 신랑(2) +26 20.03.20 1,157 7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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