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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조회수 :
622,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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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7
글자수 :
1,341,677

작성
11.10.21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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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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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
22쪽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4 - 친구찾아 삼만리 (17)

DUMMY

휘이이이잉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위를 싸늘한 바람만이 지나친다. 청년, 아르모어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한 마을이 있었던 공터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맙소사, 이런 말은 없었잖아? "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말에 답한 것은 발치에 앉아있던 검은 고양이었다. 이 까만 털의 짐승은 사람보다도 깔끔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답했다.


" 약간의 변수가 있었어. "


일찍이 수천의 오크가 거주하던 마을이 날아갔음에도 고양이의 어조는 지극히 담담했다. 옆집 개가 죽었다고 해도 그보다는 슬퍼할 것이었다.


지독하게 태연한 대응에 오히려 머리가 식는다. 그래, 이놈들은 원래 이랬다. 일단 죽어버린 생명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심한 것들이다. 이성을 되찾은 그는 한숨을 쉬며 일단 사건의 전말부터 알아보자고 생각했다.


" 후우... 자세히 설명해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야. "


힘이 하나도 없는 그의 물음에 고양이는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한번 하고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전말을 늘어놓았다.



***



승리의 흥분이 가신 뒤, 숨을 어느 정도 돌린 기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일으켜 소녀의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죽음을 맞이한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찰나간에 맞이한 죽음이었다곤 해도 몸통이 반토막이 났는데도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듯, 무심한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무표정한 시체. 그것은 산 사람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기괴한 것이었으나 평생을 시체와 더불어 살아온 기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표정이 어찌되었건 시체는 그저 시체일 뿐이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검을 들어 시신의 목을 찍었다.


콰직!


굵고 묵직한 대검의 날이 땅속을 파고들며 가녀린 목을 완전히 끊어놓는다. 볼일을 마친 그는 머리를 회수해 밖으로 나가려다 뒤늦게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발걸음을 멈췄다.


주르륵...


놀랍게도 시신의 절단면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투명했던 것이다. 이토록 이상한 사실을 어째서 지금에서야 깨달았을까?


" 허어... "


종족을 막론하고 투명한 피를 가진 생명체는 없다. 기는 흥미를 가지고 시신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갈라보며 내부를 관찰했다. 그리고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이건 인형이로군. "


시신의 피륙은 최소한 겉보기와 감촉만큼은 인간의 그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마력 회로가 잔뜩 박혀있는 금속성의 뼈를 지니고 있었으며 음식물을 소화하기 위한 내장이 전혀 없었다. 자연계에 이러한 생물이 있을 리 없으니 의심할 필요도 없는 인공물인 것이다.


" 제기랄. 이거 기분 더러운데. "


부족의 전사로서 전쟁사를 배우며 고대의 인형병기가 무섭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고작해야 공장에서 찍어져나온 인형 따위에게 수십년을 고련해온 전사들이 쓰러졌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분과는 별개로 부족을 위해서라도 인형의 잔해를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의 인형은 군사적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의학적으로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이래저래 버리고 가기에는 아까운 것이다.



***



" 잠깐만, 그럼 기가 이겼단 말이야? "


묵묵히 전말을 듣고 있던 아르모어는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의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데, 기가 이겼다면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양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더니 혀를 차면서 말했다.


" 말했잖아. 그건 '인형' 이었다고. "



***



' 과연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


기는 흉수에 대해 생각하며 수거를 시작했다.


제 아무리 고대의 인형병기라고 해도 결국은 도구다. 명령을 내린 주인이 없으면 인형은 움직이지 않는다. 문제는 과연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하는 점이다.


' 누군가 이득을 보기에는 피해를 본 부족이 너무 많아. 게다가 뛰어난 전사들이 많이 죽었지만 넓게보면 큰 타격이라고 보기 힘들다. '


뛰어난 전사 한둘의 죽음은 전사대의 입장에서는 큰 손실일지 몰라도 부족 전체로 봤을때는 별 것 아니었다. 게다가 무력의 아이콘은 상급 전사가 아니라 템플러였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도 약했다.


' 관점에 따라선 오히려 부족들을 배려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드는군. '


나름대로 궁리를 해봤지만 그의 머리로는 흉수의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결론이 나지 않자 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작업에 집중했다.


덜그럭


" 쯧. "


기껏 올려놓은 인형의 팔이 바닥에 나뒹군다. 딴에 신경써서 쌓아올린 것이지만 인형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갈라본 탓에 생각보다 정리하는게 쉽지 않았다.


찌익!


몇번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짜증이 난 기는 인형의 옷을 찢어 길쭉한 끈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동강난 잔해들을 묶어서 고정시킬 요량이었다.


사르르륵


그러나, 몸통에서 떨어져나온 의복은 서서히 부스러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하얀 가루가 되어 모래처럼 흘러내려버렸다. 할 수 없이 자신의 옷이라도 찢어서 고정하려던 그는 이미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옷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우선 나가서 묶을거라도 가져오는게 나을 것 같군. '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등줄기에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것이라곤 부서진 인형과 자신 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기는 이성보다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콰앙!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내리친 대검에 인형의 머리통이 산산히 부숴졌다. 그 바람에 안구나 치아 따위가 원래의 자리에서 이탈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 .....후우, 과했군. "


기는 자신이 저지른 꼴을 보고는 후회했다. 제 아무리 고대의 인형이라도 머리가 잘리고 몸통이 반토막난 상황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괜히 과민반응을 보여 소중한 연구자료를 부숴버렸다고 생각하니 약간 침울해졌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빠지직


" 어, 어어? 아, 안돼! "


난데없이 인형의 잔해에 금이 간다 싶더니 순식간에 하얀 가루로 변해 흩어지는 것이었다. 소중한 자료가 한 줌 먼지로 변해갔지만 기는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는 사이에 인형의 잔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분해되어 하얀 가루만 수북히 쌓이고 말았다.


" 허어... 이게 왠 날벼락이람. "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결백을 주장할 유일한 증거가 사라져버렸으니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영영 글러먹은 일이 되어버렸다. 설령, 인형을 부린 흉수를 잡는다 하더라도 범행의 유일한 증거물이 가루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희망은 완전히 끝장나버리고 만 것이다.


그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람도 없는데 하얀 가루들이 허공으로 솟구치기 시작하더니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간 것이다.


" 헉! "


깜짝 놀란 기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가루들을 흩어버리려 했지만 모래를 베는 것처럼 의미없는 일이었다. 방해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형상을 갖춘 가루들은 몇번 일렁이나 싶더니 어느새 처음과 같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 이럴수가! "


기껏 파괴한 인형이 원상복구되자 기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대의 인형들이 전쟁사에 모습을 들어냈지만 한번 파괴당한 인형이 재생한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의복까지 완전히 복구한 인형이 눈을 떴다. 부숴지면서 입은 손상은 물론, 그 이전에 망가진 부분까지 깔끔하게 수리된 모습이었다.


파괴당하기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흰색이었던 눈동자가 이번에는 푸른색을 띄고 있다는 점과 무표정한 가운데에서도 어딘가 가벼운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것 정도였다.


' 끝장이다. '


인형의 새파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기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한번 이긴것도 요행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기껏 파괴해도 금새 재생해버리다니. 이건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다.


' 도망쳐야하나? '


그는 순간적으로 도주를 떠올렸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출구가 없는 이공간 안에서 도망쳐봤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인형을 잡지 못하면 그의 신분은 일개 탈주전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사회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그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


기는 이를 악물며 대검을 곧추세웠다. 어차피 이기지 못하면 비참한 버러지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느니 깔끔하게 전사로서 살다가 죽는 것이 훨씬 나았다.


" 이야아아아압! "


그는 기합과 함께 쏜살같이 뛰어들며 대검을 내리쳤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쾌속함과 육중한 힘이 더해지자 상대하기 까다로운 기술로 변모했다.


검을 내리치면서도 기의 머리는 상대의 수를 예측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 지금까지의 패턴이라면 좌측으로 피하면서 칼날을 쏘아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방패를 형성해 막으면서 안쪽으로 파고들지도 모르지. '


0.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시간동안 그는 몇가지의 가능성을 검토하고 대응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인형이 보인 대응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콰앙!


막강한 올려치기가 기의 대검을 날려버렸다. 주로 가느다란 칼날을 뽑아 빈틈을 찌르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이번에 인형이 만들어낸 무기는 기의 것과 똑같은 외형의 새하얀 대검이었다.


" 크윽! "


설마하니 힘으로 받아칠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탓에 갑작스러운 충격에 하마터면 대검을 놓쳐버릴 뻔했다. 기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충격을 해소했지만 그 바람에 선기를 놓치고 말았다.


쾅! 콰쾅!


인형은 가녀린 외관에 걸맞지 않게 자신의 몸보다 세배는 길고 두꺼운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그녀의 검술은 쾌속할 뿐만 아니라 막강한 위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대검과 대검이 부딛칠 때마다 기의 손목이 시큰거렸으며 폭음이 터져나왔다.


' 말도 안돼! '


아무리 상대가 인형이라지만 반토막도 되지 않는 인간에게 힘에서 밀리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믿던지 말던지 현실은 현실이었고, 수세에 몰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 젠장! '


그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기회를 엿봤지만 폭풍처럼 몰아치는 검격을 막아서는 것만도 벅찼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기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고 있었다.


" 후우! "


기는 칼끝으로 상대의 궤도를 틀어내며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그가 보기에 인형의 대검술은 별 것도 아니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아직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한 신참 전사 정도?


' 기술은 별 것 아니다. '


이제 막 힘에 의존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상대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따름이다.


기는 크게 휘둘러오는 인형의 대검을 비스듬히 받아 검신을 밀착시켰다. 두 대검의 검신이 허공에서 겹쳐지자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들어올렸다.


" 흐읍! "


아랫쪽에서 밀려올라오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새하얀 대검의 궤도가 위를 향한다. 덕택에 머리 위로 검을 흘려버린 기는 자신의 대검을 살짝 뒤로 물려 자세를 바로잡고 힘을 실어 인형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카앙!


그러나 어설픈 검술과는 달리 인형의 신체능력 만큼은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허공을 갈랐던 새하얀 대검은 출발이 훨씬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돌아와 기의 대검을 막아섰다.


' 윽! '


완벽한 자세를 잡고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막은 검과 부딛치자 손목이 시큰거렸다. 공격자가 타격을 입을 만큼 강력한 일격을 고작 한손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인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몸뚱아리 하나만큼은 괴물이로군! '


오크족의 전사로서, 이종족에게 - 그것이 비록 기계일지라도 - 신체능력으로 밀릴 줄은 꿈에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기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정신없이 날아드는 대검을 하나하나 침착하게 받아넘겼다.


인형이 날카로운 창이라면 기는 부서지지 않는 방패였다.


그러나 팽팽해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싸움의 무게추는 인형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강력하고 재빠른 공격에서 틈을 찾아내기 위해 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는데 극도의 집중과 긴장상태가 지속되자 기의 신체는 빠르게 지쳐갔다. 하지만 상대방은 문자 그대로 기계인 탓에 체력적인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점차 지쳐가는 전사와 지치지 않는 인형.


시간이 누구의 편인지는 바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대로라면 당한다! '


그렇잖아도 수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판국에 체력까지 떨어지면 죽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승부를 걸어볼 기화가 나오기만을 손을 꼽아 기다렸다.


쾅!


좌측 상단에서 날아든 호쾌한 내려치기를 검면으로 받아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반탄력을 활용해 검을 거둔 뒤, 하단을 쓸어온다. 그 모습을 보던 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 지금이다! '


물러서거나 다시 한번 검면으로 막으면 무난히 넘길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분위기는 반전되지 않는다. 기는 승기를 잡기 위해 도박을 걸 타이밍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과감하게 점프하여 참격을 피하면서 첫 일격을 막으며 밀려났던 검을 그대로 위로 들어올렸다.


번쩍!


한 전사의 평생이 담긴 일격이 인형의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인형은 공격을 하느라 자세가 아랫쪽으로 쏠린 탓에 즉각적으로 반격하는 것이 힘들었으며 자신이 휘두르는 대검의 무게에 휘둘려 쉽사리 몸을 빼기도 힘든 타이밍이었다.


부웅!


두 자루의 대검이 동시에 허공을 가른다.


도저히 피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인형은 검을 제어하는 대신 오히려 휘두르는 힘에 편승하여 놀라운 속도로 몸을 한바퀴 회전하며 내려치는 참격을 피해냈다. 동시에 기의 발밑을 통과한 순백의 대검은 회전하는 몸을 따라 기의 상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 틀렸다. '


기는 필살의 의지를 담아 휘두른 대검이 허공을 가른 순간, 자신의 삶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인형의 새하얀 대검이 왼쪽 허리를 노리고 날아드는게 뻔히 보였지만 그의 몸은 허공에 떠 있었으며 내리친 대검은 아직까지 바닥에 닿지 못했다. 도저히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촤악!


호쾌한 순백의 검날이 허공에 뜬 전사를 양단했다. 일찍이 자신이 인형을 갈랐던 것처럼 왼쪽 허리에서부터 오른쪽 어께까지 베여버린 기의 몸통은 두 토막이 난 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것이 바스투이의 전사, 기의 최후였다.



***



전투에 돌입한지 정확히 4분 17초만에 전사를 끝장낸 인형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공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외부와 단절된 이공간은 전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당연하다.

애초부터 기와 이공간은 아무런 관련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공간의 열쇠를 쥐고 있는 고양이 요정들은 문을 열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기껏 승리한 보람도 없이 공간째로 지워지게 되리라.


" ..... "


사태를 파악한 인형은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마력을 움직여 공간을 구성하는 술식을 더듬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물체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더듬어 형상을 추측하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수법은 도구에 의지하는 현대의 마법사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번쩍


회로의 파악이 끝났는지 사방으로 퍼져있던 마력이 거두어진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분 남짓. 이공간을 형성한 마법의 난이도를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속도였다.



***



" 좋아, 이제 대충 전말은 알겠어. 그런데 거기서 왜 이런 참사가 생기는거야? 문제가 될 건덕지가 없잖아. "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으면 바보라도 이후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인형은 어떤 방법을 썼던지 이공간에서 탈출했을 것이고 그들이 펼쳐둔 마법은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이 날아가버린 일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 글쌔,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추측이지만 말이야... "



***



이공간을 형성한 마법은 총 47개의 마력회로의 집합체이며 이들 회로의 종류는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대기중의 마력을 흡수하여 동력을 확보하는 집마(集魔)회로.

둘째. 흡수한 마력을 각 회로로 전달하는 연결회로.

셋째. 마력을 통해 현상을 만들어내는 출력회로.

넷째. 현상의 범위를 통제하는 제어회로.


이 네 종류의 회로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마법을 성립시키고 또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 녀석은 회로의 구조를 대략적으로만 파악했을 거야. 아니면 파악은 했지만 제어 계통의 보안을 뚫지 못했거나. "


만약, 회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모두 알았다면 제어회로를 사용해 정상적으로 탈출구를 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인형은 그러지 못했다. 고양이의 추측대로 제어 회로에 간섭하지 못했거나 세부적인 운용 방법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게다가 임의로 회로를 짜서 삽입할만한 능력도 없었겠지. "


정히 보안을 깰 수 없다면 탈출구를 만드는 회로를 구성해 기존의 회로에 추가시키면 된다.

그러나 복잡하고 방대한 마력을 다루는 회로일수록 회로간의 연계가 긴밀하기 마련이며 잘못 건드리면 폭주하여 겉잡을 수 없게 된다.

애석하게도 인형의 마법 실력은 문제없이 회로를 수정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 만약 마음대로 고칠 수 있었으면 출입구를 열었겠지. "


그렇다면 인형이 선택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 녀석은 제어회로의 극히 일부만을 조작했을거야. "


조작한 내용은 아마도 두가지.


하나는 유입되는 마력량의 한계를 없애버린 것이며 둘째는 이공간이 확장될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없애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인형이 조작을 가한 직후, 집마회로는 막대한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고 그 마력을 토대로 이공간이 끝없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제어회로가 무사하다면 이러한 현상은 자동적으로 조절되어 결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 그렇게 무식하게 덩치를 키운 이유가 뭐야? "


설명을 듣던 아르모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공간이 커지면 그저 내부의 공간이 확장될 뿐 아닌가? 현실과 단절된 공간은 아무리 커져봤자 의미가 없었다.


이 의문에 고양이는 자신의 추측을 내놓았다.


"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건 꽤 번거로운 일이야. 그래서 한번 열어둔 통로를 완전히 막아놓지 않았어. 녀석은 그걸 간파했겠지. "


이공간 자체가 덩치를 키워나가자 현실 세계와 연결된 자그마한 공간의 틈 역시 커지기 시작했다.


이는 본디 책갈피와 같은 것으로 필요에 따라 탈출구를 열기 위해 걸쳐둔 아주 미세한 틈이었다. 기껏해야 손가락 하나를 겨우 넣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공간의 확장과 더불어 덩치를 키운 틈은 마침내 출구의 역할을 수행할 정도로 커져버렸다. 허공에 공간이 열리며 현실로 이어지는 통로가 모습을 들어냈다.


인형은 지체없이 탈출구를 통해 빠져나갔다. 이것으로 볼일을 마친 그녀는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난데없이 덩치가 커진 이공간은 이내 제어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애당초 고양이들이 구성한 회로는 지금처럼 막대한 마력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던 탓이다.


초당 1리터의 물을 통과시키라고 만들어놓은 수도에 초당 10리터의 물을 들이부었으니 결과는 뻔하다. 잠시간은 버텨냈지만 이내 제어회로를 필두로 회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 완전히 손쓸 수 없는 일이 되버린거지. "


제어 회로가 망가진 이공간은 넘치는 마력으로 현실에 침범하여 공간을 제멋대로 왜곡했다.


햇살이 내리쬐다가도 폭우가 내리는가하면 마을 한복판에 난데없이 들판이 생기는 등,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주민들은 난데없이 찾아온 재앙에 놀라 달아나려했지만 공간 자체가 미쳐버린 판국에 달아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기를 약 5분.


마침내 현상을 만들어내던 출력회로까지 파괴되자 이공간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공간과 반쯤 섞여버린 마을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마을이 있는 공간은 법칙이 괴상하게 꼬여버려 자연적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이 골치아픈 '오류'는 세계의 법칙에 따라 소멸되고 새롭게 생성된 공간이 빈 자리를 대체했다. 물론,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에 생명체 따위는 포함되지 않았다.


"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어. "


고양이는 그렇게 말하며 담담하게 혀로 발바닥을 핱았다. 전말을 모두 들은 아르모어는 자신이 선 땅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결국은... 내 탓이라는 건가? "


애초부터 이공간 따위를 만드는게 아니었다.

이공간을 만든다는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수천의 죄없는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 뭐, 상관없잖아? "


자책감을 느끼던 아르모어의 발치에서 고양이는 마음이 없는 것마냥 잔인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 어쨌건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했으니까. "



***


작가의말

시간이 됐습니다.
일터로 전속전진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94 쉐모트
    작성일
    11.10.21 23:44
    No. 1

    기를 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이시다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1 그라피아스
    작성일
    11.10.22 00:01
    No. 2

    기가 결국 죽었군요.
    혹시 살려나 했더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6 잠수타기
    작성일
    11.10.22 11:47
    No. 3

    역시 죽는건 정해졌고 덤으로 마을하나 추가하셨네요

    대신 주인공 팔은 멀쩡하니 그나마 다행인가요.

    다음부터는 액스트라도 적당히 간다는 것에 만족해야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3 流寧
    작성일
    11.10.22 18:21
    No. 4

    이미 기가 죽는건 예측했습니다! 하하핫!
    이젠 또 어떤 멋쟁이씨가 나와서 어떤식으로 죽을지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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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6 파란황금
    작성일
    11.10.24 16:49
    No. 5

    지못미 기!!!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월충전설
    작성일
    11.10.26 09:54
    No. 6

    음... 예전 나비효과란 영화를 보는 것 같군요. 어떻게 과거를 바꿔도 죽을 사람은 죽어버리는... 기는 그런 존재였어.... ㅡㅡ; 불쌍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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