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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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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조회수 :
622,869
추천수 :
8,717
글자수 :
1,341,677

작성
11.08.07 09:33
조회
2,193
추천
33
글자
11쪽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3 - 낙원 (54)

DUMMY

***



그와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약간의 변덕과, 약간의 요행이 겹쳐 만들어낸 만남.


그는 대단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어쩐지 이야기하고 있으면 즐거웠고, 웃을 수 있었다.


계속 함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헤어지는 것이 무서워져서


그에게 자그마한 주술을 걸었다.


부디, 나를─



***



아주 예전부터 외부로 나갔다 돌아온 요정들은 가끔씩 이종족의 풍습을 장난삼아 따라해보곤 했다. 그러한 장난은 대부분 잠깐의 웃음으로 흘러가버리지만 아주 드물게 들불처럼 번져나가곤 했는데 안식처 곳곳에 버려진 오두막들은 그러한 유행의 흔적이었다.


결국, 미관상의 문제로 여왕이 금지령을 내리는 바람에 안식처를 뒤덮었던 오두막들은 대부분이 철거되고 잠시 불었던 건축 붐은 시들해져버리고 말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는 지금도 버려진 오두막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축제병의 말기에 접어든 엘리가 찾은 새로운 거쳐도 외진 곳에 버려진 그러한 오두막 중 하나였다.


그녀의 거처가 확정되자 타라스포는 일찌감찌 사전 작업에 돌입했다. 정신세계에 대한 정보가 모자랐기 때문에 확실한 간섭을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둘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아르모어는 무장과 각성제, 최소한의 식량을 가지고 엘리의 오두막으로 옮겨왔다. 이제부터는 언제 폭주가 일어날지 모르니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함께 생활하려는 것이었다.



***


정신을 집중하는 수련을 마치고 오두막으로 돌아온 아르모어는 거친 숨을 내쉬며 침대 곁에 걸터앉았다.


" 하아... "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 소녀를 보며 문득 영원이란 사실 굉장히 끔찍한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거처를 옮긴 엘리는 침대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초점없는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돌기둥 같아서 아르모어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 너도 참 한심하다. 어떻게 천년을 넘게 살면서 도와주려고 나서는 놈이 나 하나밖에 없냐? "


리사에게 거절당한 그는 다른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가 부탁해보았지만 하나같이 퇴짜를 놓았다. 리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경력이 있는 신디조차 세계수가 상대라는 말에 몸을 사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말리기까지 했다.


'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했던가... '


여왕의 곁에서 이것저것 줏어들은 것이 많았던 그녀는 아르모어의 짓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자살행위라고 하면서 극구 말렸었다.


" 그럴지도 모르지. "


아무렴, 신이 멸망을 위해 준비한 나무라지 않는가. 따지고보면 아르모어가 하는 짓은 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개 인간으로서 세계수를 꺾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른다. 세계수의 외부를 부술 수 없듯이, 세계수의 정신 역시 처음부터 부술 수 없도록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 그래도... 저걸 보고서 어떻게 가만 있을 수가 있냐? "


그는 망부석처럼 굳어있는 엘리의 모습을 힐끔 돌아보고는 한숨과 함께 투덜거렸다.


' 이럴 바에야 자꾸 성격이 변하는 때가 나았어... '


그는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그녀와 보내려고 노력했다. 온종일 침대에 기대 있었으며 먹을 때도 침대의 지척에서 먹었고 볼일을 볼때에도 오두막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하루하루의 시간이 지독하게도 느리게 느껴졌다. 지난 6년간, 언제나 시간에 쫒겨다니던 삶을 살았던 아르모어는 시간이 남는다는 일 자체가 낮설고 힘들었다.


" 어이, 너도 힘들지? "


지루함에 못이겨 괜히 멀쩡한 총을 분해해서 몇 번이고 청소하던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여전히 멍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엘리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지만 아르모어 역시 대답을 구하고 물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한번 피식 웃고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나직히 중얼거렸다.


" 괜찮아, 이것도 지나가고 나면 다 추억일테지. "


그러니까 너도, 나도 지금은 힘들겠지만


" 죽지 말자. "


그래야 먼 훗날, 웃으며 오늘을 회상할 수 있을테니까.



***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한 일상도 영원은 아니었는지 결국, 닷새째 되는 날 새벽에 끝을 맞이했다.


밤을 지배하던 어둠이 서서히 햇빛에 밀려나기 시작할 무렵, 태양이 모습을 들어내기 직전에 엘리의 몸에서 이상한 안개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르모어는 때마침 잠들어 있던 때였으나 피부에 느껴지는 끈적끈적한 감촉에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안개에 묻혀있음을 깨닫고 가장 먼저 소총부터 끌어안았다. 세계수를 처지하건 엘리의 정신세계에서 버티건 무기가 없이는 요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총을 확보한 뒤에야 허리춤에 달린 검으로 시선이 갔다. 지금 배워둔 필살기(?)는 검으로 쓰는 것이지만 실전에서 써먹을 자신은 별로 없는 고로 자신도 모르게 믿음직한 총부터 챙긴 것이다.


' 이제 시작인가? '


막 잠에서 깨어난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는 타이밍도 못잡는 자신의 신체를 탓하며 얼른 품에서 각성제를 꺼내 입안에 털어넣었다.


도서관장이 챙겨준 이 약을 먹으면 생명력, 즉 수명을 깎기는 하지만 고작 하루 정도에 불과하고 대신 이틀간 신체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었다.


과연 효력은 대단해서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아 금새 눈앞이 맑아지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러는 사이 오두막 전체를 집어삼킨 안개는 더욱 짙어져 코앞에 있는 물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농밀해진 안개는 점차 주변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전혀 다른 환경으로 아르모어를 인도했다.



***



" 시작했군요. "


" 음. "


안개가 퍼져나오는 오두막을 바라보며 도서관장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타라스포는 그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덩굴을 움직여 미리 준비해둔 결계를 활성화시켰다.


끊임없이 밀려나오던 안개는 결계에 막혀 오두막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농도만이 계속해서 짙어져갔다. 그제야 여유가 생긴 타라스포는 덩굴을 거두고 도서관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 걱정되나? "


" 조금요. "


" 흥, 드래곤이 인간을 걱정하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로군. "


타라스포가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리자 도서관장은 어께를 한번 으쓱해보였다.


" 그냥 왠지 남같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두죠. "


늙은 거북은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딴은 그렇군. 제 주제를 모르고 무작정 고개를 들이미는게 네놈과 똑같아. 그러고보면 네 아비도 그랬지. "


" 아. "


도서관장은 그제야 왜 아르모어가 남같지 않게 느껴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위해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이 과거의 자신과 꼭 닮아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결국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나겠지. "


" 전 그래도 하나 정도는 건졌습니다만. "


이래저래 방황도 많이 했지만 드래곤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의술을 자랑하는 도서관장은 심통난 얼굴로 약통을 흔들거렸다. 타라스포는 그 모습을 보고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 물론, 멍청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저 녀석에겐 내일이 없다. "


저 녀석은 오늘 죽을 테니까.


생략된 뒷말을 읽은 도서관장은 그 말에 반박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승복하지도 않은 체, 조용히 안개에 휩쌓인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 그거야 뚜껑을 까봐야 알 일이지. '


젊은날의 자신과 겹쳐보이는 소년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



눈 깜짝할 사이에 풍경이 변하고, 아르모어는 물망초가 흐드러지게 핀 호숫가로 이동해 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도 당황하지 않고 무기를 들어 주변을 경계했다.


그의 정면으로는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기나긴 길이 있었고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는 작은 호수들이 여럿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길을 따라 갈수록 호수에서 무언가 장치가 발동하는 구조인 것 같았다.


' 별로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


상황을 대강 파악한 아르모어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체, 꼼짝않고 타라스포의 연락을 기다렸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정신세계의 탈출이 아니라 세계수의 정신으로 침입하는데 있었다. 쓸데없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르르르!


그때, 품속에서 무언가 가벼운 진동을 일으켰다. 아르모어는 통신구에서 나는 진동임을 깨닫고 곧 엄지손톱만한 구슬을 꺼내 살짝 튀어나온 부분을 손끝으로 눌렀다. 그러자 타라스포의 목소리가 잡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 내 말 들리나? "


" 어, 잡음이 좀 섞였지만 그럭저럭 들을만해. "


" 다행이군. 이쪽은 예상대로 세계수의 침투를 확인했다. 지금부터 통로를 고정하는 작업에 들어갈테니 끝날 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버티도록. 이상이다. "


" 알았어. "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통신을 끊은 아르모어는 다시금 대기 자세로 돌아와 전방을 주시하며 다음 연락을 기다렸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정신세계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조용했다.


특별히 습격해오는 적도 없었고 무언가 빠져나가는 기묘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물망초 가득한 호숫가일 뿐이다.


알게 모르게 긴장이 풀려 주변 경관을 감상하던 아르모어는 어느 순간, 호수 표변에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가 시선이 고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 엇!?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한번 고정된 목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극도로 긴장한 가운데 아르모어의 시선을 사로잡은 호수는 서서히 안개를 피워올리며 변화를 시작했다.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빛이 비치는 것도 같고 안개 자체가 빛나는 것 같기도 하더니 어느새 그의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



그는 꿈을 꾸는 듯한 감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한걸음 물러서서 관찰하는 느낌.


그런 그의 눈앞에 한 명의 어린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했다. 그녀는 쉽게 무리로 받아들여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가 되었다.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어째서 그녀가 밀려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단편적으로 비쳐보이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삐걱-!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듯한 불쾌감.


아르모어가 그것을 자각했을 때,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 허억! "


그는 어느새 원래 앉아 있었던 호숫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줄곳 바라보았던 호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빈 자리를 수많은 물망초가 차지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옆에는 아직도 많은 호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타라스포의 언질과 호기심을 저울질하던 아르모어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길 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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