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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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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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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1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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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글자
56쪽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3 - 낙원 (50)

DUMMY

어쩌면, 어쩌면 그냥 우연일지도 모른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요정 특유의 괴이한 변덕일 뿐이고, 얼마 뒤면 멀쩡해지는 그런 사소한 헤프닝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제발 아무일도 없기를...


오직 그것만을 자나깨나 빌었다. 누구라도 좋았다. 그녀를 구해줄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주저없이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모든 기도를 군말없이 들어줬던 누군가는 이번만큼은 들어주지 않았다.


처음 사흘간은 매일마다 요정이 변했다. 첫날은 순진무구한 아가씨가 되었다가 둘째날은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처럼 험악하게 굴었고 셋째날엔 다섯살배기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굴었다.


닷새가 지나자 급기야 매시간시간마다 요정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헤실헤실 얼빠진 요정처럼 굴다가 돌아서면 잘 벼린 칼날처럼 싸늘한 냉기를 뿜어낸다. 그야말로 변화가 죽 끓듯 했지만, 그녀 스스로는 이러한 변화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어떻게 변하든 자신은 항상 이랬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더 이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누가봐도 명백한 전형적인 축제병의 증상이었다. 마침내 어떻게든 부정해보려던 도서관장조차 고개를 저으며 인정하고 말았다.


그토록 빌고 또 빌었지만.


기적은 없었다.


하다못해 악마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 증세가 나타난지 닷새가 됐으니 앞으로 짧으면 25일, 길어야 40일쯤 버틸거다. 슬슬 마음에 준비를 해둬라. "


" 뭔가,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만 있다면 이 두 눈을... 아니, 그 어떤 대가라도 기쁘게 치르겠습니다! 제발, 제발 어떻게든 해주세요! "


마지막을 예고하는 도서관장의 말에 아르모어는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달라붙어 애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 참으로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손 쓸 도리가 없구나. 축제병의 무서운 점은 원인 불명이란 점이야.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이상이 없다. 마나끼리 융합도 제대로 되고 있고 신체에 영력도 문제없이 흐른다. 물론, 증세는 실제로 나타나고 있으니 어딘가는 분명히 고장이 났겠지. 하지만 현존하는 기술로는 그 이상을 잡아낼 수가 없다. 어디가 고장난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고치겠나? 도저히 방법이 없어. "


" 그, 그렇다면 기본적인 저항력을 붇돋아주는건 어떨까요? "


사람이나 요정이나 백혈구와 같이 기본적으로 외부의 병에 저항하는 저항력이 있다. 원인을 모른다면 차라리 자체회복력과 방어력을 올려서 스스로 극복하게 만들자는 아르모어의 제안에 도서관장의 고개는 이번에도 가로저어졌다.


" 그런 단순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축제병은 정복되지 않았다. 즉, 소용없는 짓이란 말이다. 말귀를 깨달은 아르모어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드리운다. 과거, 세상이 무너져버렸을 때에도 이토록 절망하진 않았었다. 멍청히 도서관장을 올려다보던 그는 이윽고 몸을 부르르 떨며 발작하듯 억지를 부리며 악을 썼다.


" 그럼 뭔가 다른 수라도 써봐요! 방법이 없다니...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 당신 드래곤이잖아! 인간 따위보다 훨씬 굉장하고, 지혜로운데다가 마법의 조종이잖아? 세상에서 자기네 종족이 최고라고, 자기네야말로 위대한 존재라고 자뻑하고 다니는 드래곤 주제에 이까짓 병 하나 못 고친다는게 말이 돼!? "


악을 쓰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그는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그는 태어나서 이보다 더 꼴사나웠던 적이 없었을 정도로 눈물범벅에 찌그러진 한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이럴수는 없어... 뭐라도 방법을 알려줘 제발... "


차라리 재료가 없어서 손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세상의 끝까지라도 가서 구해올 각오가 있었다. 괴물의 아가리 속에도 웃으며 들어가줄 수 있었고 맨몸으로 심해에 들어가라고 해도 기꺼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뿐이다. 죽음의 병에 걸린 친구를 구하기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은 태산같은데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 능력이 없어서 못해주는 것보다 시도할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극심한 무력감을 가져다주었다.


" 다 지껄였나? "


뻐억!


마침내 그의 말이 사그러들자 도서관장이 발을 들어 아르모어의 턱주가리를 갈겨버렸다. 가볍게 걷어차였을 뿐인데 천지가 바뀌고 눈앞이 캄캄했다. 도서관장은 완전히 뻗어버린 아르모어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기적이라도 일어나면 모를까,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


목소리는 얼음같이 차갑지만 도서관장의 얼굴엔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 자존심 높은 드래곤에게 있어 자신의 무능을 스스로의 입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큰 치욕은 드물다. 그렇기에 도서관장 역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축제병은 현재로서는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의사라도 고개를 내저을 수 밖에 없는 난공불락의 병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엘리의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아르모어의 몸을 새로이 일으켜세웠다.


" 그렇다면... 기적이라도 일으켜보이겠어! "


방법이 없다는 현실 따윈 거짓말이다. 방법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뛰어넘고 말겠다. 우리들은 이까짓 병 따위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고 아르모어는 속으로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 할 수 있다면 해봐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고. "


아르모어는 도서관장의 모습을 힐끗 돌아보고는 방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도서관장은 참아왔던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닷새동안 연락도 없더니 터무니없는 과제를 들고 찾아왔군. "


타라스포는 절박한 표정의 아르모어를 보며 혀를 찼다. 도서관장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니 뭐니 지껄였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칠래도 바위가 어디있는지를 알아야 부딛쳐 볼 것이 아닌가.


아르모어는 타라스포가 해결책을 제시해주리라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박식한 그에게서 뭔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온 것이었다.


" 뭔가 짚히는 것 없어? 저번에도 왜, 엘리의 팔을 고쳐줬었잖아. "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네가 보기엔 똑같아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세계에서 타격을 입은 것과 축제병은 전혀 다른 분야의 이야기야. 나로서도 축제병에 대해서는 손 쓸 도리가 없다. "


아르모어는 깍지를 끼고 검지손가락으로 손등을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 그럼 일단 아는대로 축제병에 대해 이야기해줘. "


타라스포가 답을 찾지 못했다고 아르모어조차 그러라는 법은 없다. 그는 타라스포의 지식을 신용했다. 스스로를 지식의 탐구자라 칭할 만큼 지식을 사랑하는 그는 수천년간 쌓아온 넓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모어는 그 지식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면 무언가 얻을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글쌔, 축제병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워낙에 희귀한 병이 되어서 연구할 소재가 적거든. 일단 가장 난해한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나온 가설 중에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만 추려보면 세가지쯤 되는군. "


타라스포가 제시한 가설들은 아래와 같다.


첫째. 세계수가 원인이라는 설.


병의 특성과 단독생활을 주로하는 외부의 요정들의 습성이 맞물려 생겨난 기록 누락일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안식처 바깥에서는 발병한 기록이 없었다.


또한, 많은 요정이 세계수 주변에 몰리는 축제를 전후하여 발병율이 급격히 올라간다는 것을 고려했을때, 세계수가 원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가설이었다.



둘째. 계곡물이 원인이라는 설.


요정의 안식처를 흐르는 특유의 따스한 계곡물이 축제병의 원인이 아니냐는 설이다. 안식처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특징을 짚어내기 위한 시도였지만 세가지 설 중에서는 가장 신빙성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여러 차원이 교차하는 안식처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다. 차원의 경계와 경계가 부딛치며 발생하는 특수한 마나의 파장이 요정에게 악영향을 미치는게 아닌가 하는 주장이었다. 또한 차원과 차원이 가장 빈번하게 부딛치는 포인트가 세계수 주변이고 축제날엔 그러한 위험지대에 몰리는 요정이 급격히 늘어나므로 유달리 발병율이 올라간다는 주장이다.


그는 설명의 말미에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말이야', 하고 덧붙였지만 아르모어에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코너에 몰린 불치병 환자 가족들이 검증되지 않은 신약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과 같은 흔한 이야기다.


" 그렇다면 일단 의심가는 것은 모두 피해야겠네. "


" 발병한 후에는 의미없는 짓이다. "


" 최소한 진행을 늦출 수는 있겠지. "


무의미하다는 타라스포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린 아르모어는 도서관장에게 엘리를 도서관에 묶어두라고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도서관을 나서지만 않으면 계곡물에 노출될 일도 없고 세계수 주변에 얼쩡거릴 일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세계수 자체가 악영향을 미친다면 이건 안식처를 떠나지 않는 이상 피할 도리가 없었다.


' 그럼 아예 안식처를 뜰까? '


들고다니기 불편해서 그렇지 자금은 충분히 있었다. 현지인 만큼은 아니지만 일상회화가 가능한 언어는 여럿 있었기에 외부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 축제병에 걸린 요정이 외부로 나가는 경우엔 어떻게 돼? "


다만, 의외의 부작용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아르모어는 확인하는 차원에서 타라스포에게 물었다. 타라스포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눈을 뜨곤 답했다.


" 그런 실험도 분명히 있었지. 꽤 최근에... 700년쯤 전이었던가? 의도는 좋았지만 안식처의 영역을 벗어나자마자 환자가 마르기 시작하더니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


" 원인은... 불명이겠지? "


타라스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정리한 아르모어는 그에게 다른 정보가 없는지 물었고 주로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 위주로 원인을 추측하려고 해봤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특별히 떠오르는 원인이 없었다.


' 축제날에 발병확률이 높음. 안식처 밖에서는 발병하지 않음. 일단 발병한 환자는 안식처를 벗어나면 머지않아 죽는다... 확실한건 이 정도인가. '


미리 알고 있던 증세들을 제외하면 다른 실험들이 알려주는 이야기도 대부분 별 것 없었다.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잔인하기도 한 많은 실험들이 있었지만 축제병은 여전히 그 원인의 실마리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 세계수를 분질러보면 어떨까? "


그나마 의심가는 것이 세계수였던 아르모어가 중얼거리자 타라스포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 재미있는 발상이군. 아서라, 네 능력으론 밸 수도 없을 뿐더러 그랬다간 여왕에게 당장 목이 달아날게다. "


" 여왕! "


아르모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왜 잊고 있었을까? 아직 이 안식처에는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은 위대한 요정이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여왕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


그가 떠오른 말을 입에 담자 타라스포는 재미있다는 듯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긍정했다.


" 그럴 수도 있겠지. 뭐니뭐니해도 세상의 시작과 함께 태어났다는 오래된 요정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 여왕이 과연 너와 만나줄까? 지금까지 줄곳 피해왔는데? "


" 만날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


자그마한 희망이 보였다.


초월적인 병이 초월적인 해답을 요구한다면, 초월자에게 답을 구하면 그만이지 않는가. 그의 가까이에는 한없이 상식과 동떨어진 초월자가 분명히 존재했다. 여왕이라면 분명 무언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근거없는 확신이 아르모어의 전신을 휘감았다.


" 그래, 잘 해봐라. 재미있는 결과를 얻으면 나중에 내게도 알려주도록. "


타라스포는 의욕에 불타는 계약자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운이 좋으면, 가만히 앉아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지식의 탐구자인 그에게는 한없이 기꺼운 일이었다.



***



아르모어는 혼자서 여왕의 거처로 향했다. 몇 번이나 와 보았던 길이지만 혼자서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그의 곁에는 엘리가 있었고, 때로는 신디와 함께 셋이서 여왕을 만나러 갔었다.


' 여기가 원래 이런 곳이었던가? '


세계수 아래에서 내려다 본, 언젠가 장관이라며 감탄했던 안식처의 정경은 오늘따라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자연은 변한 것이 없으니 변한 것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고작 요정 하나가 곁에 있고 없고 차이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는 새삼 자신에게 있어 엘리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실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디를 동반하든, 타라스포를 동반하든 여왕은 결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심지어 여왕이 총애하는 신디라 할지라도 아르모어가 대신 질문을 부탁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어김없이 출입이 막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가장 절친한 친구의 목숨이 어께에 얹혀있는 것이다. 오늘의 아르모어는 죽으면 죽었지 여왕을 만나지 않고 물러설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


" 들여보내줄 수 없어. "


없어~없어~ 하는 페어리들의 수다스러운 목소리가 아르모어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여왕은 이번에도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지금껏 여러번 겪었던 일. 언제나라면 여기서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언제나 그를 말려주었던 엘리가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멀어서 어딘가 막연하게 느껴지던 목적과 달리 확고부동하고 절박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왔다.


" 들여보내줘! 어떻게든 여왕님을 만나야 한단 말이야! "


아르모어는 평소와 같이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대신 막무가네로 몸을 들이밀었다. 어차피 로열 가드를 상대로 논리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도, 어떤 부조리한 일이 있어도 '여왕님 명령'이란 한마디로 일축해버리는 요정들이었다.


" 안~돼~ "


안돼~안돼~안돼~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잔혹하게 들려온다.


' 이렇게 된 이상, 강행돌파다! '


" 비켜! "


말이 안통한다면 되든 말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아르모어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페어리들 사이를 노리고 돌진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성공할 리가 없는 돌진이었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을 무시했다.


' 됐...!? '


뜻밖에도 이 돌진은 성공했다. 손바닥만한 페어리들은 이 무모한 돌진에 허를 찔렸는지 미처 저지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내심 환호성을 지르려는 찰나, 아르모어는 자신이 끈적끈적한 무언가에 붙잡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억!? '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 3자의 눈으로 보면 그는 혼자 굳어버린 체 막 뛰쳐나가려는 자세로 석상마냥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요정화의 영향일까, 지금의 그의 눈에는 어렴풋이나마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의 윤곽이 보였다.


' 뭐야 이게!? '


이 기이한 현상을 정확히 형언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공간의 일그러짐 정도랄까? 선두의 페어리는 아르모어 주변의 공간만을 선택적으로 왜곡시켜 공간을 아르모어의 신체에 맞춰 고정시켜버렸다.


'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거지? '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간'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흔들린다. 차라리 다이아몬드로 만든 벽이 흐물흐물하게 변하는 것이 훨씬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놀람은 잠시뿐이다. 중요한 것은 로열 가드의 기묘한 기술이 아니라 이것이 그를 붙잡는 방해물이라는 사실이다.


' 이까짓 걸로 날 막을 수 있을 줄 알아? '


아르모어는 이를 악물고 힘을 쏟아부었다. 이상하게 변질되버린 공간의 경계가 만들어낸 소름끼치는 감촉이 피부를 타고 올라오며 하나의 메세지를 만들어낸다.


『움직이면 죽는다.』


생물의 본능이 공간이 전해주는 경고를 알아차린다. 순간, 이성의 명령에 따르던 그의 몸이 별안간 돌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죽음의 위기를 느끼자 이성을 누르고 본능이 몸을 장악한 것이다.


' 젠장,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야! '


그의 이성은 어찌하든 움직이려 애썼지만 공간이 전해주는 지독하게 차갑고 섬뜩한 경고를 해독해버린 육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생물의 본능은 무엇보다 살아남는 것을 중시했다.


' 빌어먹을! '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기술을 시전한 페어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깔깔대고 동료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러한 것은 별 것도 아닌 잔재주인 것이다. 그 따위 것도 풀지 못하는 무력한 자기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 뭔가 방법이... 응? '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하던 그에게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것은 여왕의 눈에서 발산되는 이질적인 기운이 일그러진 공간을 아주 약간이나마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공간'을 밀어낸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느낌이었다. 아르모어는 한번 느끼면 결코 잊을 리 없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것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탈출구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음에도 단번에 깨달았다.


' 이 힘을 좀 더 키운다면... 탈출할 수 있어! '


여왕의 눈에서 자연적으로 흘러 나오는 힘은 지극히 미미했다. 허나, 그 눈에는 구속을 깨부수는 것을 넘어 로열 가드 전체를 찍어누를 만큼 강대한 힘이 잠재되어 있었다. 어떻해야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 집중하자. 집중해보면 무언가 잡히는게 있을거야. '


그는 판타지나 무협지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의식을 눈에 집중했다. 육신이 제압당한 상황에선 달리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을 뿐더러 보통 이러한 초능력은 생각의 힘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여왕의 눈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내 생각이 틀린걸까? '


극도의 집중하에서도 반응이 없자 아르모어의 표정에 실망의 기색이 떠오른다.


' 이대로 꼴사납게 제압당하고, 멀뚱멀뚱히 세워져있다가 추방당하는 결말이라고? '


절망의 벽 앞에 선 그의 뇌리에 말없이 부서져가는 엘리의 환상이 떠올랐다. 그것이 그의 투지를 다시 한번 불살랐다.


' 아니야!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여왕을 만나고야 말테다! '


지금 그의 어께에는 가장 절친한 친우의 목숨이 걸려있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친구가 아닌가. 이번에는 그의 차례였다. 그녀를 고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으면 죽었지 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르모어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 그래, 집중하는 것 자체는 틀리지 않았어. 하지만 그것만으론 단순히 힘이 집중될 뿐이야. 힘을 방출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미지다! 내가 원하는 구체적인 결과를 생생하게 떠올려보는거야! '


그는 생생하게 떠오른 엘리의 환상에서 답을 찾아냈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바라는 결과를 떠올리면 되는 것이다. 아르모어는 눈에 쌓인 에너지가 왜곡된 공간을 밀어내며 정상적으로 되돌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최대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또 쥐어짰다.


마침내, 여왕의 눈이 반응했다.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풍겨나오며 기이한 에너지를 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체불명의 힘은 아르모어의 의도대로 주변의 공간을 서서히 밀어내며 일그러진 공간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 좋았어! '


처음으로 초능력을 발휘한 아르모어의 표정에 흥분의 빛이 깃든다. 하지만, 풀려나온 에너지의 양이 너무 적었다. 기껏해야 얼굴 표면에 막을 하나 덧씌운 정도밖에 공간을 펴지 못한 것이다. 완전히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힘이 필요했다.


' 느껴진다! 느껴져! '


본격적으로 힘을 추구하자 마침내 그의 의식은 자신의 눈에 틀어박힌 강대한 에너지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그 양은 실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 어떻게 이만한 에너지가 눈알 따위에 담길 수 있는거지? '


여왕에 눈에 담긴 힘은 바다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우주와도 같이 광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막대한 에너지가 안구라는 껍대기 안에 압축되어 있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현상이었다.


그가 뽑아쓰고 있는 힘은 우주와도 같은 에너지의 아주 가장자리의 찌꺼기.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러한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늘어간다는 점이었다. 어디서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오는 것인지 아니면 내부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는 몰라도 에너지 덩어리는 천천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덩치를 불려갔다.


' 이러니 드래곤이 탐을 내는구나! '


아르모어는 처음으로 여왕의 눈의 가치를 깨닫고 경악했다. 동시에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러한 굉장한 힘이 몸 안에 틀어박혀 있는데도 6년이나 모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 이 힘을 조금만이라도 꺼내 쓸 수 있다면...! '


우주와도 같은 에너지에서 한 주먹의 힘만 퍼다올 수 있다면, 이 같잖은 속박 따위는 단번에 찢겨나갈 것이다. 아르모어는 극도의 흥분속에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눈에 틀어박힌 에너지를 슬그머니 잡아당겨 외부로 끌어오는 모습을 이미지했다. 상상이 겹쳐지고 이미지가 점차 확고해지자 조용히 눈에 뭉쳐있던 에너지 덩어리가 슬그머니 반응하기 시작했다.


' 됐어! 풀리기 시작한다! '


이윽고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극히 가느다란 실 형태의 에너지 한가닥이 구체에서 풀려나왔다. 흥분한 아르모어의 의지에 따라 안구 밖으로 향하던 그것은 안구를 거의 다 벗어난 순간, 갑자기 아르모어의 제어에서 벗어나버렸다.


' 아니!? '


본체에 비하면 극히 작아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힘이었지만 외부의 공기와 닿는 순간, 자신이 무엇인지 깨달은 위대한 요정의 에너지는 아르모어 따위의 하등한 존재의 제어를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구를 통해 외부로 빠져나온 에너지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라도 하듯, 그의 이마 주변을 맴돌더니 자신을 속박하는 외부의 압력이 기분 나빴는지 별안간 폭발을 일으켰다.


투-쿵!!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약한 에너지 덩어리가 뿜어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파동이었다. 페어리의 힘에 의해 일그러진 공간이 순식간에 자유를 되찾으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기어이 페어리가 건 속박을 풀어내고야 만 것이다. 그러나 아르모어는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거슬리는 것을 치워버린 에너지가 자신을 담기에 걸맞지 않은 숙주를 죽여버리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몸속을 마구 해집기 시작한 것이다.


" 큽...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


평생 이러한 고통을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는 아르모어는 전신이 세포 단위로 찢겨져나갈 듯한, 말로 형언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며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수 있는 것은 잠시뿐이었다. 광포하게 육신을 휘젓고 다니던 에너지가 목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비명은 커녕, 끅끅대는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게 되버렸다.


' 주, 죽는다! '


요정화를 통해 겨우겨우 균형을 맞췄던 힘의 밸런스가 완전히 깨져버렸다. 아르모어는 극심한 고통속에서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도서관장이 했던 경고대로 자신의 몸이 산산히 찢겨나갈 것을 직감했다.


' 아, 안돼! '


죽는 것도 문제지만 아직 해야할 일이 있었다. 아르모어는 어떻게든 미친듯이 날뛰는 에너지를 제어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지독한 고통은 생각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생각이 이뤄지지 않으니 이미지를 떠올릴 수가 없고 당연히 제어도 할 수 없었다.


설령, 아르모어가 집중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변할 것은 없었다. 아무리 미미한 조각이라지만 애당초 아르모어가 컨트롤 하기에는 지나치게 강대한 힘이었던 탓이다.


마침내 파국이 찾아왔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찢어지는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르모어란 사람은 산산히 분해되어 한 줌 핏물로 화해버릴 것이었다.


' 아...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


고통이 극에 달하자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아르모어는 이것이 죽음 직전에 찾아오는 마지막 불꽃, 흔히 무협지에서 말하는 회광반조(回光返照)란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막나가는 건데, 하고 아르모어는 후회했다. 선불을 주더라도 도서관장을 대동하거나 타라스포를 대동해서 깽판을 치는게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랬으면 분명 여왕을 끌어낼 수 있었을텐데...


'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뒤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가... '


안식처에서 크게 깽판을 쳐버리면 어찌되었건 좋게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모어는 일찍이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엘리가 죽은 뒤를 계산하고 있었던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 큭, 그러니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죽어버리는거야. '


스스로를 비웃은 그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들을 돌아보았다. 지구에서 살아온 19년을 되돌아보았고 안식처에서 보낸 6년간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어준 엘리를 떠올린 아르모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미안하다. 결국 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게 없었어... '



***



" 인간이란 하나같이 제 분수를 알지 못하는구나. "


눈이 없어도 안식처의 모든 것을 굽어보던 여왕은 아르모어가 파국을 맞은 것을 느끼며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가만히 있었으면 별일 없었을 것을... "


그녀는 일견 안타까운 듯 혀를 찼지만, 딱히 구해줄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6년 전이었다면 모르되 계약에서 명시한 기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은 인간 따위의 보모 노릇을 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 결국 내게로 돌아오는구나."


능력 밖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 아르모어의 신체는 완전히 파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여왕은 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르모어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죽으면 남게 될 자신의 눈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 딱히 필요는 없으나 함부로 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


6년 전, 눈을 버림으로서 여왕은 충분한 대가를 얻었다. 애초에 눈에 담긴 힘쯤이야 실로 하찮은 것. 잃으나 마나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필요없다고 해서 남들에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더욱이 안식처에는 천지분간하지 못하는 애송이 도마뱀이 있지 않는가. 쓸데없는 분란의 소지를 남기느니 회수하는 것이 옳았다.


그때, 여왕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조차 상정하지 못한 뜻밖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동시에 안식처 전역의 공간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여왕으로부터 비롯된 파동이 아니었다. 보지 않아도 짚히는 것이 있던 여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왕자가 태어날 것인가, 공주가 태어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인가? "



***



아르모어는 파국을 맞이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능력으론 도저히 미친듯이 날뛰는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후의 최후에 그의 뇌리를 일깨우는 소리가 있었다.


" ---! "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유독 발이 느려서 아이들 사이에서 놀림을 받았던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다른 괴롭힘은 아니었다. 그때도 가장 친했다고 자부한 진환조차 이 소재로 한번쯤 놀린 적이 있을만큼 별 것 아닌 일이었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보는 악의없는 잠깐의 놀림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그에겐 크나큰 콤플렉스로 다가왔다.


그래서 남몰래 연습하기 시작했다. 까짓거 니들이 뛰어봤자 얼마나 잘 뛰냐는 마음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 좀처럼 속도가 늘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분명 폐활량과 지구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지만 유독 속도만큼은 별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100m 달리기 기록이 두달 전이나 지금이나 1초의 차이밖에 나지 않자 실망한 어린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매일 같이 뛰러 나가던 아들이 몇 일이나 나가지 않자 어느날 아버지가 불현듯 물었다.


" 매일같이 뛰러 나가더니 요즘 들어선 잠잠하구나. 목표는 달성한거니? "


언제나와 같이 부드러운 햇살처럼 따스하던 아버지의 표정은 그가 고개를 젓자마자 변덕스러운 대해의 날씨처럼 금새 먹구름이 몰려왔다.


"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는데 왜 그만뒀느냐? "


드물게 정색한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언제나 이해심 깊은 아버지는 전에없이 화난 기색으로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아르모어는 그때가 아마 태어나서 아버지에게 처음 맞았을 때라고 생각했다. 그 직후 너무나도 아파서 눈물이 핑 도는 어린 그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포기하지마라! 너무도 막막해 평생이 걸리더라도, 세상 모두가 말리더라도, 사나이가 한번 뜻을 세웠으면 죽으면 죽었지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


아르모어는 눈을 번쩍 떴다. 모든 것을 포기했던 그의 얼굴에 독기가 어렸다.


' 죽기는 누가 죽어! '


그는 어떻게든 여왕의 힘을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죽음을 앞둔 자가 보인다는 마지막 불꽃을 피우듯이 믿을 수 없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 아...! '


극도의 집중에도 아랑곳않고 여왕의 힘은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 목줄을 쥐고 힘껏 당겨봐야 말이라면 모르되 미쳐 날뛰는 드래곤을 제어할 수는 없는 것과 같았다.


아르모어는 이를 악물고 더욱 정신을 집중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미쳐 날뛰는 드래곤을 제어하려면 100의 힘이 필요한데 그가 가진 힘은 1밖에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몇배나 되는 집중력을 발휘해봤자 2나 3의 힘을 더하는 것 밖에 되지 않으니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젠 꼼짝없이 죽는 수 밖에 없었을 터였다.


" 아아, 여왕님의 기운이다! "


반전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제어를 잃고 제멋대로 날뛰는 여왕의 힘이 페어리들을 자극한 것이다. 여왕의 직계인 페어리들은 자신들의 근원과도 같은 힘이 무절제하게 풀려나오자 마치 마약에 이끌린 중독자들처럼 이성을 잃고 아르모어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본디 페어리란 종족 자체가 비상시 여왕을 대신하기 위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존재의미는 여왕이 기능을 상실하였을때 그 잔해로부터 힘을 흡수해 새로운 군주를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강력한 여왕으로 인해 페어리들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여왕의 눈을 지닌 아르모어가 힘의 제어권을 상실하면서 여왕의 힘이 무절제하게 풀려나왔고 페어리의 본능은 그것을 여왕의 죽음으로 인한 일이라 인식한 것이다.


자연히 본래의 기능이 되살아나고 페어리들은 아르모어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여왕의 힘을 정신없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의 페어리들이 빈틈없이 아르모어에게 달라붙어 힘을 탐했다.


' 됐다! '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아르모어는 날뛰던 에너지가 외부로 빨려나가기 시작하자 한결 여유를 되찾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그에게 있어 천운이었다. 난폭한 침략자가 사라지자 다시는 일어날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신체는 차근차근 망가진 부분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 어, 어어어? '


그것만이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몸속을 날뛰던 일부의 기운만이 아니라 여왕의 눈에 틀어박힌 우주같은 덩어리가 미친듯이 풀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풀려나기가 무섭게 외부로 빨려나갔다. 아르모어가 덜컥 겁을 집어먹을 만큼 무서운 기세였다.


' 이거 이러다 잘못되는거 아닌가? '


힘이 상실되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있어봤자 쓰지도 못하는 힘아니었던가. 누군가 쪽 빨아가주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제거되는 것 같아 기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기세가 너무나도 강하다. 마치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급격한 에너지의 방출에 이대로 있다간 여왕의 힘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까지 남김없이 빨려나갈 것 같았다.


' 어쩌지? 이럴때는 어떻해야 좋지? '


한편, 아르모어가 자신의 세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바깥에서는 대형사고가 터지고 있었다. 여왕의 힘을 흡수하던 페어리들이 하나둘 폭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앙!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본디부터 여왕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페어리들이 본신의 힘도 아니고 눈에 담긴 일부의 힘, 그것도 수백이 달라들어 분산시킨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대로 한다면 이미 여왕의 눈은 힘을 상실하고 남은 페어리들이 서로 교감하여 새로운 여왕에 가장 적합한 개체에게 힘을 몰아주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전자가 상정한 이론에 불과했다. 현실의 여왕은 유전자의 예상보다 월등히 강했다. 여왕은 페어리 퀸이란 종의 한계 따윈 까마득한 옛날에 초월해버린 존재인 것이다. 타라스포나 되면 모를까 일개 페어리가 받아들이기엔 애시당초 글러먹은 막강한 힘이다. 이대로라면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기는 커녕 아까운 로열 가드만 줄초상을 치를 판이었다.


물론, 페어리들 쪽에도 희망은 있었다. 그들은 하나둘이 아니라 수백이다. 어떻게든 에너지를 흡수하기만 한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에너지만 충분하다면 굳이 하나에게 몰아줄 필요 없이 다수의 후계자가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역시 ' 힘을 흡수할 수 있다면 ' 이라는 전제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 말도 안돼! '


아르모어는 자신 안에 웅크린 여왕의 힘을 느끼며 경악했다. 이건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세상 모두를 빨아들일 듯한 흡입력이 걸신들린 듯이 끊임없이 퍼내가고 있는데도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


급기야 외부의 흡입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왕의 눈 안쪽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세상 전부를 빨아들일 것 같은 블랙홀과 같은 흡입력이 빨아간 에너지가 실개천으로 보일 만큼 강대한 힘의 파도였다.


그것은 마치 어린애와 슬렁슬렁 놀아주던 장사가 ' 이제 힘 좀 써볼까? ' 하고 팔을 걷어붙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 나는 지금껏 대체 뭘 눈에 박고 다녔던 거냐!? '


퍼버버버버벙!


아르모어의 경약과 동시에 빨려나가는 에너지가 일순, 수십배로 증가하자 페어리들이 버티지 못하고 연이어 폭사했다. 수백에 달하던 수가 열둘까지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초면 충분했다. 남은 열둘조차 몸이 팽팽하게 부어오른 것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으나 여왕의 눈은 여전히 쌩쌩했다.


' 설마하니 정말로 늘어나고 있는건가!? '


어디 쌩쌩하기 뿐인가. 원래보다 훨씬 강대한 힘이 빠져나가고 싶어 줄을 섰다. 나가면 나갈수록 더욱 많고 강한 힘이 줄을 이으니 정말로 에너지가 자가 증식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 많던 페어리가 다 죽고 하나만 남았다. 그조차 전신이 새빨갛게 물든 것인 한계가 명백해보였다. 여왕의 눈은 여전히 멈출 줄을 모른다. 미처 바깥 상황을 알지 못한 아르모어였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커다란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 큰일났다! '


뭐가 큰일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생존본능이 위험신호를 끊임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 마, 만약 지금 외부로 빠져나가는 힘이 멈춘다면? '


보고만 있어도 경악할만한 막강한 에너지다. 고갈될때까지 계속 방출되어준다면 별다른 탈이 없겠지만 저게 그대로 눌러앉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실낱같은 힘의 파편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 섰던 그다. 하물며 저만한 힘이라면 날뛰기는 커녕, 몸에 머물기만 해도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전신이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얌전히 여왕의 눈으로 돌아가 틀어박혀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글쌔, 아르모어로서는 저 고삐풀린 미친 기운이 얌전히 골방에 틀어박혀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지막 페어리가 한계에 다다랐다.


수백이 분산해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버티지 못했던 에너지를 단신으로 수초나 버텨낸 것은 칭찬해줄만 하지만 애당초 격이 너무 달랐다. 앞서간 요정들처럼 허무하게 터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 호오, 결국 탄생한 것은 공주인가? "


여왕이 모습을 들어냈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산산조각나 사방에 흩어진 페어리들의 사체를 힐끗 쳐다보더니 가볍게 손은 들었다.


그 순간, 아르모어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 어!? '


세상 거칠 것이 없어보였던 막강한 에너지가 슬그머니 꼬리를 말고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미쳐 날뛰던 드래곤이 난데없이 얌전한 개가 되어 골방에 틀어박히는 모습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 원주인이 돌아온 것인가? '


마침내 모든 것이 정리되자 겨우 세상을 돌아볼 수 있게 된 아르모어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의 눈앞에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여왕이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모어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다.


세상천지 대적할 것이 없어보였던 힘이지만 결국 원류는 여왕의 것이지 않는가. 당연히 여왕이라면 간단히 제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살아난 시점에서 여왕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떠 있는 또 하나의 페어리는 정녕 뜻밖이었다. 몸통만한 크기의 여왕과는 달리 일반 페어리처럼 손바닥만한 몸집을 지녔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여왕과 판박이었다.


" 네 객기 덕분에 여러 요정이 상했구나. 이를 어찌 보상할 참이더냐? "


너무나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여왕의 냉혹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러자 아르모어는 홀린 듯이 시선을 돌렸다. 사방을 한번 훝어본 그는 더 이상 크게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이게 어찌 된 셈인지 주변에는 산산조각난 페어리들의 시체가 즐비했던 것이다.


" 이, 이건...!? "


" 한 생명을 살리고자 수백의 생목숨을 지웠으니 무게추가 맞지를 않는구나. "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엔 분노가 실려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이럴까. 원인을 짐작한 아르모어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 그렇게 날뛰던 에너지가 외부로 빠져나간 것은... '


그랬다. 아르모어는 페어리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눈의 힘에 이기지 못해 폭사한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기실 정상적으로 눈의 힘이 모두 빨려나갔다면 그의 목숨도 덤으로 빨려나갔을 것이지만 결과가 이리되고보니 아르모어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습니다. "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변화무쌍한 것이다. 타라스포와 도서관장을 동원해서라도 치워버리고 싶을 만큼, 매번 그를 가로막은 얄미운 요정들이었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어갔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여왕이 노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여왕은 노기를 거두었다.


" 허나, 기껏 살린 목숨을 죽이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을 뿐더러 네 객기 덕분에 공주가 탄생했으니 이번만큼은 네 잘못을 묻어두도록 하겠다. 썩 꺼져라. "


실로 파격적인 처사였다.


로열 가드가 어디 보통 전력이던가. 아르모어는 도서관장을 전력의 한 축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로열가드 앞에서 도서관장 따위야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1:1로 맞붙는다면 몰라도 수백의 로열가드가 상대라면 드래곤 일족 전체가 몰려나와야 겨우 균형이 맞을까말까한 것이다.


능히 세상을 엎어버릴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을 아르모어로 인해 잃어버렸다. 곱게 죽여만줘도 감지덕지할 일이거늘 여왕은 관대하게도 용서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으로 난데없이 일어난 참사는 조용히 마무리되려는 것 같았다.


"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


아르모어는 굴러온 행운을 걷어차고 위험속으로 자진해서 몸을 집어던졌다. 여왕이 변덕 한번만 부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목과 몸통이 분리되는 사건이 벌어지겠지만 그는 기껏 여왕과 대면한 이 찬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뭐냐. "


무시하고 공간을 넘어가버릴 것만 같았던 여왕은 뜻밖에도 날개를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속이 텅 비어있을 곱게 감긴 눈을 바라보던 아르모어는 침을 꿀꺽 삼키곤 조심스래 물었다.


" 두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 이제보니 낮짝이 참으로 두껍구나. 벗겨서 방패로 만들면 못 막을 공격이 없겠어. "


아르모어는 뜨끔했지만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로서는 이대로 멈출 수 없는 노릇이다. 기껏 수백이나 죽여놓고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체, 꼬리를 말 바에야 시작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대번에 아르모어를 죽여버릴 것만 같았던 여왕은 무슨 생각인지 잠시 말이 없더니 뜻밖에도 새로이 태어난 공주를 공간의 저편으로 던져버리더니 입을 열었다.


" 하나뿐이다. '나' 개인이 해줄 수 있는 질문이라면 답해주마. "


" 가, 감사합니다! "


이 같은 친절은 여왕이 입은 손해를 생각해보면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르모어의 얼굴에 서광이 비친다. 그는 혹시라도 여왕이 마음을 바꿀까 싶어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 여왕님이 아는 축제병에 관련된 모든 것을 듣고 싶습니다. 원인과 치료법을 포함해서요. "


그녀는 아르모어의 질문을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알 자격이 있는 이야기군. 단, 다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마라. "


" 어떠한 경우에도... 말입니까? "


치료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경우에는 내용을 알려야 할 상황이 있을지 몰랐기에 아르모어는 주저했다.


" 정 필요하면 나에게 허락을 구하라. "


" 알겠습니다. "


일단 여지는 남겨놓았기에 아르모어는 한발 물러나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왕은 축제병에 대한 해결책까지 아는 모양인데 남에게 알릴 생각이 없어보인다. 자신의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는 병을 여왕이란 작자가 치료법을 알면서도 왜 불치병으로 남겨두는 것일까?


여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답은 아르모어를 멍청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



" 빌어처먹을! "


아르모어는 비틀비틀 위태로운 걸음으로 여왕의 거처를 뒤로했다. 복구되기는 했지만, 한번 망가졌던 몸은 아직 정상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나 지금 아르모어의 머릿속엔 자신의 상세따윈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 너희들은 병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


여왕이 말하는 축제병의 진실은 지독한 무력감을 그에게 선사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축제병이란 세계수가 원인이 되는 것이 맞았다. 좀 더 근본적으로 따져들어간다면 세계 그 자체가 원인이었다.


" 무엇부터 설명해야 좋을까? 조금 장대한 이야기가 되겠구나. "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생각보다 조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행성 하나를 중심으로 구축되는 '극소세계', 하나의 은하를 구성한 '소세계', 다양한 은하들이 뭉친 우주를 구성한 '중세계', 마지막으로 상기한 모든 세계들이 뭉쳐 만들어진 '대세계' 가 그것이다.


이러한 세계들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인 마나는 한번 사용하면 쓸 수 없는 음의 마나로 변환된다. 이것은 어떻게 재활용 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으로, 모든 세계는 마나로 충분한 상태로 시작하지만 언젠가는 쓸 수 없는 마나로 그득찰 운명인 것이다.


" 그리되면 배고픈 괴물이 냉큼 집어삼켜버리지. "


여왕은 그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라며 그런 농담 같은 말을 했다.


" 괴물의 뱃속을 거친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 역시 아는 바가 없다만, 적어도 살아있는 것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세계의 관리자, 너희들이 말하는 신이라 해도 말이다. "


극소세계에서 대세계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관리하는 '관리자'는 반드시 존재한다. 세계의 시작과 함께 태어나는 그들은 세계의 끝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 너희들은 신을 모든 것을 초월한 불멸의 존재라 여기지만 실상 작은 세계의 신일수록 자신의 죽음에 민감하지. 그래서 세상에 많은 간섭을 하기 마련이다. "


신과 인간의 시간관념은 전혀 다르다. 1억년이 인간의 눈으로는 까마득한 세월이지만 '관리자', 신의 입장에서 보면 찰나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생존에 대한 욕구는 분명히 존재했다.


이 세상의 관리자도 예외는 아닌지라 예로부터 피조물의 눈으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수도 없이 저질러왔다. 그 중 가장 악랄한 산물이 바로 세계수였다.


" 세계수는 세계를 끝내기 위한 나무다. "


세계수는 신이 보내는 '종말'의 나무였다. 그것은 깊고 강대한 뿌리로 대지에 흐르는 모든 생기를 빨아들인다. 처음에는 사막화 정도로 그치지만 뿌리가 행성 전체를 휘감을 즈음이 되면 대지의 에너지를 갈취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지 위의 모든 생명체를 직접 잡아먹기 시작한다. 행성을 떠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멸망인 것이다.


"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나무이기도 하지. "


그렇게 잡아먹은 생물들의 정보를 조합하여 세계수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초목, 새로운 동물, 새로운 인류 따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모든 임무를 마친 세계수는 마침내 생기가 고갈되어 말라죽고 만다.


" 먼 엣날엔 너희가 멸망해버린 자들이라 부르는 종족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들은 수십만년의 세월동안 서서히 발전하여 마침내 마도에 극에 이르러 세상의 법칙을 어그러뜨릴 정도가 되었다. 그로 인해 관리자의 눈 밖에 나, 조용히 솟아오른 세계수로 인해 멸망을 맞이하였다. "


여기까지 말한 여왕은 기억을 더듬는지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가 재개했다.


" 세계수는 그들의 정보를 조합하여 새로운 종들을 만들어냈다. 인간이 태어났고, 엘프가 태어났으며, 오크가 태어났고, 드워프가 태어났으며 많은 잡종들이 태어났다. 과거 한번도 이러한 일이 없었을 정도로 수많은 종족들이 태어나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지금의 네 종족의 성세는 소수 종족이라 칭해지는 다양한 종족들의 시체 위에 쌓아올린 것이다. 그들은 고작 5천여년의 세월 사이에 앞서간 자들이 수십만년간 쌓아올린 문명을 상당수 따라잡고 말았다. 그들은 너무도 빨리 발전했고, 관리자는 폐기를 결정했다. "


그리하여, 지금의 세계수가 태어난 것이다.


" 다음 세상은 우리 요정의 세상이 될 것이다. 이미 세계수는 요정을 기본으로 한 새로운 생명체를 하나 둘 만들어가며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아르모어의 반응을 살폈다. 허나, 그녀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실망의 빛이 약간 감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세계수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위해 수많은 가능성을 수집한다. 수집대상이 된 개체는 특정한 증세를 보이다 마침내 세계수의 뿌리를 통해 흡수되지.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말하는 축제병의 정체다. "


너무도 뜻밖의 원인에 아르모어는 경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침내 할 일을 찾아낸 그는 확인차 여왕에게 물었다.


" 그렇다면, 세계수를 부숴버리면 수집할 주체가 없어지겠군요. "


" 부술 수 있다면 네 말대로 될 것이다. "


여왕의 답은 거기까지였다. 아르모어는 더 이상 열리지 않는 그녀의 입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분노와 의문을 동시에 품고 몸을 돌렸다.


축제병에 대한 해답은 나왔다.


요는 어떻게든 저 빌어먹을 멸망의 나무를 분질러버리면 해결될 일이었다. 눈앞의 일은 답이 나왔지만 찝찝한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 여왕은 어째서 그런 것을 알고 있지? '


아니, 출처는 일단 제쳐놓고 그녀의 말이 옳다면 이상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애당초 지난번 세계수가 세상을 리셋한 것은 5천여년 전이다. 따라서 지금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5천살을 넘어가서는 안된다. 하지만 현존하는 요정들 중 아르모어가 아는 노친네들만 꼽아봐도 7~8천살을 넘는 요정들이 수두룩했다. 겉으로는 알 수 없지만 캐트시만해도 벌써 6천살을 바라보는 노땅인 것이다.


이것은 드래곤족도 마찬가지라, 도서관장은 어리지만 타라스포에게 죽은 그 부친은 명백히 5천년 전에도 생존해 있었다. 하물며 타라스포의 경우엔 도서관장은 커녕 그 부친도 꼬맹이로 여겼는데다 나이 따윈 귀찮아서 세지도 않는다고 말할 만큼 살아있는 역사서 같은 존재인데 여왕은 그 타라스포조차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괴이한 생명체였다.


' 이거 말이 안되잖아? '


정말로 세계수가 모든 생명체를 잡아먹는다면 이런 변종들은 있을 수가 없다. 뭔가 그가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이다.


" 뭐, 좋아. 그거야 타라스포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니까. "


아르모어는 생각을 매듭짓는다는 의미에서 일부로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새로운 의문점을 떠올렸다.


' 세계수가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수집하여 새로운 종을 조합해내는 나무라면 엘리는 돌연변이란 말이 되겠지. 그렇다면... '


곰곰히 생각해보던 아르모어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두 눈을 만져보고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마침내 여왕이, 아니. 세계수가 자신에게 눈을 넘겨준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 세계수는 요정을 베이스로 신 종족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어. 그것을 위해 다양한 변종들을 잡아먹으며 수많은 경우의 수를 시험하고 있다는 여왕의 말이 맞다고 쳤을때, 나는 누구보다도 특이한 재료잖아!? '


애시당초 이세계의 존재다. 새로운 종의 조합을 위해 다양한 샘플을 원하는 세계수 입장에선 뜯어보고 싶어 안달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 그럼 왜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을까? '


인간인 체로 잡아먹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요정을 베이스로 한 생물을 조합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세계수는 인간 상태의 그를 먹어서는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없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100% 요정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곧 제삿날이라는 말이 된다.


' 아냐, 그 가설은 허술한 구멍이 너무 많아. '


아르모어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머릿속을 휘감은 생각을 떨쳐냈다. 이 불길한 예측은 확실히 구멍이 많았다.


먼저 아르모어가 여왕의 눈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확률이 매우 높다. 세계수가 어떤 형태로 생물을 수집하는지는 몰라도 산산히 터져죽은 시체보다는 멀쩡히 살아있는 쪽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요정화에 걸리는 시간이다. 막말로 지금부터 아르모어가 여왕의 눈 따위는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어지간히 재수없지 않은 한, 요정화가 진척될 일은 없었다. 또 요정화가 무조건 진행된다는 보장도 없다. 어느 순간 떡하니 막혀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르모어는 한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아니, 일부러 외면했다.


세계수는 관리자, 즉 신의 의지로 인해 태어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모든 모순히 사라져버린다. 신이 자신의 세계에서 무슨 일을 일으키든 이상한 것이 없다. 그가 짚은 허점이란 어디까지나 피조물들의 입장에서 본 이야기인 것이다.


짝!


그는 소리나게 자신의 볼을 양 손으로 두들기곤 눈을 번쩍 떴다. 지금은 그런 확실치도 않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입한다. 그랬다. 지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엘리의 죽음을 회피해야했다.


" 부순다. 어떻해서든 네놈을 분질러버리고야 말겠다! "


그는 멀리 보이는 육중한 세계수의 모습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그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심플하고 알기 쉬운 목표가 말이다.


***


투타타타타타타탕!


콰앙! 콰앙! 콰앙!


요정의 안식처에 때아닌 폭음이 일었다. 찰칵 찰칵, 아르모어는 더 이상 탄환이 없는 바주카포를 집어던지고 KS-도서관 특급을 집어들었다.


콰콰콰콰콰콰쾅!!


17마기 마나탄이 혜성처럼 길고 새파란 꼬리를 남기며 음속을 넘어 날아든다. 한발 한발에 담긴 힘이 포탄 못지않은 무시무시한 중기관총의 탄환이 한 그루의 나무에 수도없이 명중했다.


찰칵, 찰칵...


쿵!


마침내 도서관특급도 가진 모든 탄환을 쏟아내고 동작을 정지했다. 아르모어는 그 육중한 물건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C-8화탄 발사기를 집어올려 미친듯이 쏘아댔다. 15mm 포구에서 순간 온도 5천도의 고열을 자랑하는 시퍼런 불덩어리가 끝임없이 쏘아져나왔다. 당장이라도 세계수를 활활 태워버릴 것만 같던 불덩어리는 껍질에 닿기만 해도 환상처럼 스러져버린다. 마침내 화탄 발사기조차 탄환이 떨어지자 그것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아르모어는 지친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빌어먹을! "


호흡이 진정되기가 무섭게 터져나온 것은 욕지거리다. 이 짓이 벌써 세시간째다. 이전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는 도서관장의 약속을 들먹여 도서관을 탈탈 털어 AMF가 없다면 기간트가 아니라 성이라도 벌집이 되었을 강력한 포화를 쏟아부었지만 세계수는 분질러지기는 커녕 껍질에 상처하나 없었다.


아르모어는 잠시 장갑을 빼고 속에 찬 땀을 닦아냈다. 마법이 걸린 장갑은 사용자의 근력을 마력으로 감싸 강한 힘을 내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그는 장갑을 끼고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의 손등에 새겨진 원형의 고리는 20%만이 새파란 빛을 띄고 있을 뿐, 나머지는 백지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 벌써 이렇게 됐나? "


장갑의 내장 마나가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장갑의 힘 없이 아르모어가 중화기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반동을 감당하지못해 명중률이 떨어지는 것은 애교다. KS-도서관 특급과 같이 사람이 혼자 들고 쓰라고 만들어진게 아닌 물건들이 많은 탓에 장갑이 없으면 손놓고 마나가 축적되기만을 기다려야 할 지경이었다.


" 할 수 없지. 이건 안쓰고 끝내고 싶었는데... "


아르모어는 들고오면서도 내심 쓰기 싫었던 '취급주의'라고 큼지막한 붉은 글자로 적힌 상자를 개방했다. 그것은 도서관장이 지극히 실험적인 사고로 제작한 대기갑용 지뢰였다.


탱크부터 시작해 기간트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궁댕이를 날려버리겠다는 사상으로 제작된 이 물건은 폭발력 하나는 확실하지만 드래곤이 직접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불안정한 실패작이었다. 지금은 이중 삼중으로 봉인이 걸려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부의 폭발을 감싸 피해를 줄인다는 개념의 봉인이지 폭발 자체를 억제하는 봉인이 아니다. 때문에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터져버리면 제 아무리 봉인이 있다고 한들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르모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폭탄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조심조심 굼뱅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이동한 그는 세계수 아래에 그것을 내려놓고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약 500M 정도 거리를 확보한 그는 숨을 가볍게 몰아쉬곤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지뢰의 특성상 꼭 있을 필요는 없지만 상황 종료 후까지 아무도 밟지 않을 경우, 원활한 폐기를 위해 제작된 물건이었다.


5,4,3,2,1.


" 폭살! "


어딘가의 파트너처럼 흉악한 외침과 함께 폭파 버튼을 누른 아르모어는 즉시 귀를 틀어막았다.


쿠-웅!


가슴을 누가 철퇴로 후려갈긴 듯한 묵직한 느낌과 함께 대기의 떨림이 여기까지 전해져온다. 아르모어는 순간 하늘을 뚫을 듯이 높이 치솟은 시퍼런 마나광을 보며 성공을 확신했다.


" 됐어! "


이만한 폭발이라면 나무가 아니라 성벽이라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제 아무리 굉


작가의말

한화로 합체 완료. 가독성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왜 이래야 했는지는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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