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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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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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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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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3.01.30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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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1)

DUMMY

죄수대의 식사는 한숨이 나올만큼 형편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빵과 한잔의 물이 얻을 수 있는 전부. 그나마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만큼 충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신병들은 쫄쫄 굶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형편없는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니다. 일부의 병사들은 화려하진 않아도 고기와 갓 구운 빵을 신선한 야채를 곁들여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가난한 집의 식탁에 비하면 훨씬 나은 식사였다. 게다가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쳤거나 그나마도 없어 겨울에도 상의를 벗고 다니는 일반적인 죄수병과 달리 비록 좋은 옷은 아니었지만 멀쩡한 옷을 입었는데다 깨끗하다 말하긴 힘들지만 크게 더럽지도 않을만큼 위생상태도 양호해보였다.


자연히 그들의 모습은 눈에 띄었다. 아르모어는 그들이 부사관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부사관과 비슷한 계층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일 그랬다면 무리 모두가 같은 복장을 하거나 눈에 잘 띄는 곳에 신분을 상징하는 표식을 달고 있어야 정상인데 그들의 복색은 제각각인데다 특별한 표식 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장교도, 부사관도 아니라면 저들은 대체 뭘까?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그는 남에게서 해답을 구했다.


" 야, 저기 쟤네들은 뭔데 저렇게 좋은거 먹냐? 꼬락서닐 보니까 저놈들도 장교는 아닌 것 같은데. "


" 뭐야? "


옆자리에 앉아있던 병사가 어이없다는 듯 아르모어를 돌아보았다. 생전 본적도 없는 신병 나부랭이가 꼭 친한 친구처럼 허물없이 반말을 쓰며 물어오니 기가막혔던 것이다. 하지만 화를 내기도 뭣했다. 같은 분대의 신병이라면 이 자리에서 때려죽일 일이었지만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타 분대의 병사들은 짬밥에 상관없이 아저씨 취급을 하며 서로 존중해주는게 관례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무작정 화를 냈다간 오히려 자신이 곤경에 빠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의 눈에 감긴 낡은 붕대도 마음에 걸렸다. 두 눈을 붕대로 칭칭 감아버렸으니 앞이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질문의 내용으로 보나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시선으로 보나 어떻게든 앞이 보이는게 틀림 없었다.


당연히 그런 인간이 보통의 인간일 리 없다. 무언가 타고난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라던가 특수한 수행을 쌓았다던가 그도 아니면 신체를 개조했던가 했을 것이다. 어느쪽이든 일반인보단 무언가 월등한 점이 있을 터. 그런 인간에게 이런 하찮은 일로 미운털이 박히기에는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


계산을 마친 병사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은 체, 친구를 대하듯이 자연스럽게 설명해주었다.


" 저 놈들 말이야? 빵에 목숨을 팔아버린 머저리들이지. "


" 아아, 그렇군. "


그것만으로도 아르모어가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병사는 신기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아르모어는 어께를 으쓱해보이곤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투로 말했다.


" 뻔하잖아. 매월 약속한 보수를 포기하고 좋은 식사와 대우를 받는거겠지. "


죄수병들은 모두 남방군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댓가로 받는 월급만큼 매월 빚이 차감되고 모든 빚을 갚으면 자유의 몸이 된다. 하지만 약속한 보수를 다른 곳에 써버리면 당장 몸은 조금 편할지 몰라도 그만큼 복무해야할 시간이 길어진다.


" 정확하게는 한끼에 10만 데카트를 내지. 그 외에 소소한 물품도 구할 수 있어. 터무니없는 값이지만 말이야. "


" 흐음. 됐어. 여러가지 가르쳐줘서 고맙다. 가서 네 볼일 봐. "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병사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아르모어는 신경도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한끼에 10만, 한달 월급이 500만이니 하루 두끼를 먹는다고 쳤을 때, 25일간 잘 먹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월급을 모두 써버린다면 복무기간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환영대의 이야기처럼 도저히 살아나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한달씩이나 생존한 병사는 필시 보통내기가 아닐 터. 그런 인재를 고작해야 먹여주고 입혀주는 선에서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다면 남방군 입장에서는 크게 남는 장사였다.


' 하지만 뭐, 악랄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군. '


터무니없는 폭리를 취하긴 하지만 특별히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병사 자신. 구태여 돈들여서 좋은 물품과 식사를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질이 나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니, 병사들의 말처럼 죽어서밖에 나갈 수 없을만큼 위험한 곳이라면 목줄은 커녕, 1개월 이상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해주는 일종의 예우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 무엇보다 나한테는 좋은 이야기고 말이야. '


한달씩이나 살아남을거라 생각지는 않지만 질긴 목숨줄이 전장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한달 뒤엔 한결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니 나쁠 리가 없다. 더군다나 대가로 지불해야할 자유도 애당초 살아나갈 생각이 없는 이상, 아까울게 없었다. 노 리스크, 하이 리턴. 최고의 조건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딱딱한 빵도 고소하게 느껴졌다.


" 여어, 표정이 좋은데? 뭔가 좋은일이라도 있어? "


그때, 낮선 병사가 말을 걸어왔다. 죄수병답게 더럽고 지저분한 몰골에 젊고 앳된 얼굴, 청록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청년은 누가봐도 가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큼 어색한 가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르모어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


" 흥. 이봐, 꼬마야. 되지도 않는 연극은 집어치우고 용건이나 말해. 설마 아무일도 없이 신병 나부랭이에게 집적대는건 아닐테지? "


" 물론, 볼일은 있지. 꼬마는 아니지만. "


" 뭐야, 헛소리나 하러왔냐? 농담따먹기는 너나 많이해라. 난 가서 잠이나 잘란다. "


" 성질도 급하시군. 하긴, 그러니까 배치된 첫날부터 자기 분대원을 다 죽여버린거겠지만. "


나직한 목소리에 자리를 뜨려던 아르모어의 발걸음이 멈췄다. 붕대 속에 감춰진 눈이 청년의 얼굴을 향한다. 그 보이지 않는 눈빛을 태연한 얼굴로 받아내며 청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자리를 옮기지. 여기엔 귀가 너무 많아. "


" 난 특별히 숨길만한 일이 없다만? "


능청스럽게 지껄이는 말에 청년은 기가 막히는 듯, 입을 떡 벌리더니 이내 혀를 내두르며 대꾸했다.


" 그래, 댁은 똥색만큼이나 깔끔한지 몰라도 나는 구린데가 많으니까 남들 빵먹는데 피해주지 말고 자리를 옮기자. 이제 됐냐? "


" 민폐라면야 어쩔 수 없지. 앞으론 청결관리에 좀 더 신경쓰는게 좋아. "


" 너나 잘하세요. 미친새꺄. "


결국 참지 못하고 걸쭉한 욕이 튀어나왔지만 청년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르모어는 피식 웃으면서 그를 따랐다. 곧이어 식사중이던 병사들 중 몇몇이 슬그머니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이쯤오면 된 것 같은데. "


천막촌의 외곽으로 나온 아르모어가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식사시간인데다 구석진 곳이라 그런지 이미 인적은 드물었다. 주변을 다시한번 둘러본 청년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아르모어와 마주섰다.


" 그렇군,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말보다는 행동으로 말이지! "


부웅!


난데없이 청년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일체의 준비자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먹에 실린 속도와 힘은 결코 일반인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왕의 눈을 피할만큼 빠르지는 않다. 공격의 징후를 빤히 포착하고 있던 아르모어는 여유롭게 왼발을 빼며 몸을 젖히는 것으로 간단히 주먹을 피했다.


" 난데없이 기습인가... "


" ! "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청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하니 그걸 피할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다. 기습의 실패는 곧바로 역습으로 이어졌다. 주먹이 빗나가면서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청년은 뒤로 뺐던 왼발을 다시 앞으로 내딛으며 후려갈긴 레프트 펀치를 무방비 상태로 열린 복부에 얻어맞고 말았다.


" 꺼억! "


" 뭐, 아무래도 좋긴한데 좀 더 신중하는게 좋아. "


강렬한 충격에 청년의 몸이 ㄱ자로 꺾였다. 아르모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년의 머리를 붙잡고 무릎으로 이마를 가차없이 들이받았다. 아니, 들이받으려고 했다.


" 어랏? "


일격에 머리통을 깨어놓을 위력을 간직한 무릎이 청년의 이마를 강타하려는 순간, 청년이 손을 들어올리더니 아르모어의 등 뒤에서 강력한 인력이 발생했다. 보통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힘이 좋은 아르모어였지만 도저히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 이건 또 뭐야? '


인력이 발생한 지점은 약 1.5m 뒤의 허공. 그곳에서 발생한 강력한 인력은 주변의 잡동사니를 무분별하게 빨아들여 공모양으로 압축시키고 있었다. 여왕의 눈을 통해 상황의 위험성을 깨달은 아르모어의 머리가 급속도로 회전했다.


'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3초도 못버텨.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힘의 크기로 봤을 때, 이대로 빨려들어가면 살아나오긴 무리겠지. 여기에 공격까지 들어온다면 끝장이겠지만... 놈도 이걸 유지하려면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아직 빠져나갈 여지는 있다. '


여왕의 눈이 활성화되며 인력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분석한다.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좀 더 활성화시키자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나의 흐름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 저건 마법처럼 차근차근히 쌓아만든 현상이 아냐. 처음부터 완성된 현상이 갑자기 튀어나온거지. 과정 없이 결과만 튀어나오는 마법 따윈 있을 턱이 없고... 그렇다면 저게 말로만 듣던 초능력이란건가? '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대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나로 이루어진 것, 구조를 파악하고 기능을 파악한 이상, 파훼하지 못할 리가 없다. 오히려 디스펠 대응이 잘 되어있는 마법보다 훨씬 대처가 간단하다. 필요한 것은 현상을 '발생'시키는 기능이나 발생 및, 유지에 필요한 마나를 공급하는 기능. 즉, 마법의 공급회로와 출력회로에 해당하는 부분을 파괴해버리면 현상은 사라진다.


티잉!


불과 1초도 안되는 사이에 모든 해답을 도출한 아르모어는 지체없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탄환 한발을 인력의 발원지를 향해 튕겨넣었다. 곧이어 흙먼지로 이루어진 공에 파묻힌 탄환은 인력을 이기지 못하고 짜부라져버렸다. 그것으로, 탄피에 구속되어 있던 7마기의 마력이 새파란 빛을 내뿜었다.


' 내버려두면 폭발하겠지만 그걸로는 해결이 안나지. '


마력이 해방되자 아르모어의 의지가 막 흩어지려는 마나를 붙잡았다. 일체의 장치(divice)없이 행사한 마력의 제어. 평범한 인간에게는 결코 불가능할 기적. 여왕의 눈이 간직한 위대한 권능의 파편이 평범한 인간을 기적의 영역에 올려놓는다.


아르모어의 제어하에 놓인 마나는 0.0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시간동안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작은 구체의 형태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던 청년의 마나들 속으로 슬그머니 섞여들어갔다. 그로부터 눈 깜짝할 시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현상이 완성되는 출구에 도달한 순간, 압축마나가 본색을 들어내며 그 몸뚱이를 크게 부풀려 출구를 틀어막아버렸다. 출력회로를 틀어막아 발현을 억제하는 전형적인 디스펠 수법의 응용이다.


휘이잉...


" 이, 이럴수가! "


청년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아르모어를 끌어당기던 인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술이 풀려버리자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청년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사이, 완전히 위기를 벗어난 아르모어는 상대가 넋이 나간 틈을 타 지체없이 또다른 총알을 꺼내들었다.


촤아악!


오른손으로 움켜쥔 총알에서 마나가 흘러나와 칼날의 형상을 만든다. 단순히 마나를 응축해 칼날 형상으로 뭉쳐놓은 것 뿐이지만 인간의 육신을 가르기엔 충분한 위력이다. 비록 탄환 한개분의 마력인만큼 지속시간은 1분도 체 되지 않을테지만 넋나간 인간 하나를 베는데는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시퍼런 칼날의 빛을 보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청년이 다급히 능력을 사용하려 했지만 이미 칼날은 그의 정수리에 근접하고 있었다.


" 아, 안돼! "


" 돼! "


슈와악!


마침내 칼날이 피를 보려던 순간, 난데없이 위쪽에서 던져진 단검이 아르모어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대로라면 청년의 머리통은 반으로 쪼개지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목도 꿰뚫릴 것이라는걸 깨달은 아르모어는 미련없이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푹!


빠른 판단 덕분에 단검은 피했지만 그 틈을 타 청년은 잽싸게 위기를 빠져나갔다. 아르모어는 자신의 목에 그어진 옅은 혈선과 바닥에 자루까지 박힌 체, 바르르 떨고있는 단검에 잠시 시선을 주고는 뚜벅뚜벅 걸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거기까지 해둬. 굳이 피를 볼 것까지야 없잖아. "


난입한 자들의 수는 넷이었다. 그들 중 가장 앞서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키는 다소 작았지만 여자로선 보통이었고 인상이 꽤나 날카로웠으며 피부는 동남아 사람들처럼 까무잡잡했다. 또한 허리에 여러자루의 단검을 꽃아놓고 있었는데 왼쪽 첫번째 칼집이 비어있는 것을 보아 단검을 투척한 범인은 그녀인 것 같았다.


' 투검술을 봐선 단순히 성욕처리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 같진 않군. '


뒤의 세 남자들도 범상치 않은건 매한가지다.

어딜가나 눈에 띌만큼 거대한 덩치의 사내는 몸집만큼이나 대단한 신체능력과 마나량을 자랑했고 그 곁에서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빡빡머리도 결코 아르모어의 아래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거리고 있는 회색 머리의 소년이 있었는데 고작해야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 탓인지 신체능력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체내의 마나 흐름이 일반인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아마 숨겨진 초능력처럼 직접 전투 이외의 특별한 재주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력을 사용하는 초능력자까지. 죄수대의 드림팀이라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조합이다.


" 좋지. 나도 굳이 피를 보고 싶진 않아. 애당초 저놈이 먼저 덤비지만 않았어도 싸울 일은 없었다고. "


계산을 마친 아르모어는 탄환을 버려 마나의 칼날을 없애면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남은 탄환을 확인했다. 양쪽 합쳐 7개. 도합 49마기로 옛날 같으면 대포탄과 맞먹는 마력이다. 불과 5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이만한 마력을 폭주시킨다면 기사는 커녕, 기사 할애비가 와도 장비의 도움 없이는 살아날 길이 없다. 최소한 동귀어진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아르모어의 태도는 한층 여유로워졌다.


" 호오, 보기보다 배짱이 두둑한데? "


" 단순히 머리가 비었을 뿐일지도 모르지. "


" 둘 다 시끄러워. 너희가 떠들어대니까 말을 할 수가 없잖아. "


그 여유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거한이 이빨을 들어내며 큰 미소를 짓자 빡빡머리가 권태로운 얼굴로 독설을 내뱉었다. 그런 둘에게 밀려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소녀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불평을 늫어놓자 거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고 빡빡머리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지만 어쨌거나 더 이상 지껄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두 사람을 입다물게 만든 소녀는 헛기침을 터뜨려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마침내 본론을 꺼내놓았다.


" 에헴, 여튼 본론은 이거야. 너, 배치받자말자 분대를 전멸시켰다며? "


" 오냐. 그랬다. 뭐 문제라도 있나? "


" 아, 뭐. 네가 무슨짓을 하고 다니든 딱히 간섭할 생각은 없어. 내가 뭐 간부도 아니고 남이야 뒈지건 말건 알게 뭐야. 그치만 네가 죽인놈들 중에 우리 동료가 섞여있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명색이 동료인데 핏값은 받아내야하지 않겠어? "


' 문제가 있긴 있었군 그래.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다. 처음 초능력자 청년이 분대 몰살을 들먹였던 점, 환영대의 스카웃 제의를 한번 걷어찬 것 외에는 죄수대 내의 비공식 조직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음에도 범상치않은 실력자가 우르르 따라붙은 것 등은 결코 우연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 한가닥하는 놈들이 다섯이나 몰려온걸 보면 내가 죽인 놈이 꽤나 실력이 있었던 모양이군. 처음 청록대가리가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건 실제로 나에게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어. '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꼭 본신의 무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략을 쓸 수도 있고, 함정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초능력이나 정령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단순히 살해당했다는 결과만 가지고선 자신의 실력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복수가 목적이라면 실력을 어느정도 가늠한 지금에 와서 이런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아르모어의 능력만이라면 저들 다섯이 덤비면 간단히 밟아놓을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대화를 걸어왔다는건...


" 그래서, 나더러 너희 노예라도 되라는거냐? "


동료의 복수보다 현실적인 이득을 우선하겠다는 뜻. 그것을 깨달은 아르모어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하지 않은 것은 단지 자신이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뿐.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환영대의 소녀는 그것을 여유를 과시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대응했다.


" 노예라... 정말 매력적인 울림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 아니, 솔직히 말해서 못해. 어차피 분대가 다른 이상, 오늘이 지나면 접촉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테니까. 아무리 감시하려해도 결국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시간이 생길 수 밖에 없지. 마음만 먹으면 우리 모두를 팔아넘기기에 충분한 시간이. "


소녀는 정말로 유감이라는 듯, 입맛을 쩍쩍다셨다. 아르모어는 순간적으로 그 입에 칼날을 쑤셔박아 뚜껑을 따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 자신에게는 지극히 다행스럽게도 그 밉살스러운 행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새 자신의 행동을 얼버무리듯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인 소녀는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동료의 핏값을 물지 않을 수는 없지. 그러니까 네가 죽은 동료를 대신해서 우리 환영대를 위해 일해줘야겠어. 아, 오해하지 마. 강요하는건 아니야. 노동이 싫으면 목숨으로 값을 치러도 되니까. 어때, 눈이 돌아갈만큼 좋은 조건이지? 10초 줄테니 마음에 드는 쪽을 골라보렴. "


" 그깟일에 10초씩이나? "


소녀가 막다른 길에 몰린 쥐를 놀리는 고양이처럼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건낸 제안에 아르모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머니에서 탄환을 꺼내 마나의 칼날을 뽑아내고는 번개같은 속도로 휘둘렀다. 시퍼런 마나의 칼날이 푸른 섬광이 되어 소녀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후투툭...


허를 찔린 소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녀의 앞머리 몇가닥이 힘없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바닥에 체 닿기도 전에 거한과 빡빡머리가 양옆에서 꺼내든 칼날이 아르모어의 목에 밀착한 상태로 멈춰섰다. 문자 그대로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모어는 경멸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 둘 중 하나를 골라보라고? X까는 소리하고있네. 낮에도 그 얼빠진 놈에게 말했지만 난 너희 환영댄지 뭔지하는 놈들이 꾸미는 소꿉장난엔 관심없어. 여기를 탈출하고 싶으면 니들끼리 꺼지라고. 알겠냐? 그래도 계속 귀찮게 굴겠다면 좋아, 어디 한번 덤벼봐 개새끼들아. 한놈도 남김없이 머리통을 날려줄테니까! "


꿀꺽.


절대적인 열세에 몰려있으면서도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태도에 오히려 환영대원들이 압도당했다. 머리는 허세라고 말하지만 전장에서 갈고닦아온 직감이 위험신호를 마구 울려댄다. 상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으면서도 빡빡머리와 거한은 오히려 자신들의 목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손만 까딱해도 바로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결코 불가능할 광경이 머릿속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펼쳐진다.


' 마, 말도 안돼! 내가, 라티움의 도살자라 불리던 이 트론님이 고작 기세에 압도당했다고? '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검을 내리려던 빡빡머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상처입은 자존감이 본능의 경고를 찍어누르고 분노의 불길을 활활 불태운다.


" 까불지마라! "


화산처럼 터져나온 분노가 본능의 주박을 푼다. 전날, 그에게 라티움의 도살자란 이명을 주었던 란타인류 강검술의 묘리가 검을 타고 꿈틀거린다. 그러나 미처 칼을 움직이기도 전에 새파란 마나의 고리가 트론의 목을 감싸쥔다. 허공에서 예고없이 튀어나온 마력덩어리는 불쌍한 희생자에게 사태를 파악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털썩.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트론의 목이 바닥에 구른다. 머리를 잃은 몸뚱아리가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진다. 트론의 목이 떨어진 이후에야 아르모어가 공격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환영대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빠르다, 너무나도 빠르다. 절대 대항할 수 없을만큼 빠르다. 빤히 보고있어도 인지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적에게 네명이란 어설픈 수적 우위는 의미가 없다. 그 네명이 각자 집단보다도 개인의 안위를 더욱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을 단단히 옭아맸다.


" 퇫, 쓸데없이 시간만 버렸네. "


완전히 공포에 억눌려 더 이상 움직이는 사람이 없자 아르모어는 불쾌한 얼굴로 바닥에 침을 칵 뱉고는 터벅터벅 자리를 떴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환영대원들은 넋나간 표정으로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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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end) +3 13.07.05 1,544 38 12쪽
152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9) +8 13.06.17 2,452 37 8쪽
151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8) +7 13.05.23 2,614 35 12쪽
150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7) +7 13.05.16 2,721 48 11쪽
149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6) +5 13.03.25 1,860 34 14쪽
148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5) +8 13.03.21 1,519 31 7쪽
147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4) +8 13.03.16 1,585 28 8쪽
146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3) +5 13.02.28 1,826 32 17쪽
145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2) +9 13.02.16 1,518 26 20쪽
»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1) +11 13.01.30 2,264 29 22쪽
143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0) +3 13.01.20 1,667 25 8쪽
142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9) +6 12.12.27 1,615 33 6쪽
141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8) +8 12.11.10 2,036 37 15쪽
140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7) +4 12.05.28 1,790 38 7쪽
139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6) 12.05.26 1,888 29 8쪽
138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5) +18 12.04.20 2,133 32 9쪽
137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4)+ +10 12.04.14 1,999 39 14쪽
136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3) +16 12.04.11 2,066 36 6쪽
135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2) +17 12.04.11 2,036 35 15쪽
134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 +20 12.04.01 2,203 51 9쪽
133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end) +11 12.03.31 1,955 32 12쪽
132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20) +16 12.03.25 1,723 31 12쪽
131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9) +14 12.03.25 1,823 41 8쪽
130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8) +4 12.03.25 1,622 23 8쪽
129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7) +7 12.03.16 1,756 24 12쪽
128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6) +13 12.03.13 1,854 23 10쪽
127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5) +6 12.03.11 3,286 54 13쪽
126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4) +7 12.03.07 3,103 47 10쪽
125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3) +13 12.03.04 1,708 2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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