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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 회색빛의 군대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필더
작품등록일 :
2015.04.20 11:52
최근연재일 :
2016.02.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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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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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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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18화. 사투의 끝

DUMMY

"쿠안 루트가! 네 목을 받아가겠다!"


르프의 외침이 울렸다. 하지만 날카로운 쇳소리가 이어지며 비명을 지른 것은 르푸 본인이었다. 쿠안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빛났다. 쿠안의 손을 떠난 투척용 단검은 르푸의 갑옷을 피해 정확히 왼팔의 관절에 박혀있었다.


"르푸 장군. 당신에게는 무리야."


쿠안은 새로운 단검을 꺼내 들고 르푸를 노려보며 차갑게 웃어보였다.


르푸는 오랜 시간을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르던 무관이기에 고통에 익숙했다. 하지만 쿠안의 단검이 갑옷사이를 정확히 노려 팔에 박히는 순간의 고통은 여태까지 겪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눈을 노린 한개의 단검을 검으로 쳐내고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쿠안은 냉정한 눈으로 그를 관찰하듯이 바라보다가 씨익 웃고는 몸을 돌려 퇴각하는 자부대의 후방을 쫓았다.


르푸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자신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단검을 뽑아내고서야 그는 이를 갈았다.


'이건, 독... 애플시드(Apple Seed)인가.'


붉은색 단검이 박혔던 상처는 빠른 속도로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비교적 다루기 쉬운 이 붉은 독은 감각을 자극하여 지독한 고통을 수반하기로 유명했다. 쿠안의 전투방법을 몰랐기에 최대한 경계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런 독단검은 그의 상상력의 범위 밖이었다. 독 단검은 위협적인 공격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전쟁에서 쓸 기술은 아니다. 독 단검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유리병이나 특수한 밸트포치를 가지고 다녀야 하고, 사용을 위해서는 두 손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독의 보존을 위해 격한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게다가 중갑옷을 입은 적의 무기를 막아낼 수 없기에 근접전이 벌어지는 순간 독단검은 그 효용성을 잃는다. 그렇기에 르푸는 자신이 한 실책에 더욱 분노하였다.


"괜찮으십니까?!"


르푸의 부관인 플라스트릭 살라몬이 걱정스럽게 상관을 걱정했다. 르푸는 고개를 딱 한번 저었다.


"즉시 추격을 재개해라."


"알겠습니다. 선두를 맡겨주십시오. 장군님께서는 부디..."


"음. 이 상처로는 선두에 설 수 없지."


르푸는 이를 갈면서도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겁한 놈. 하지만 이런 꼼수로 전력의 부족함을 메울 수는 없을 거다.'


그는 용맹하기로 이름 높았지만 전략가로서의 자질 역시 출중했기에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 역시 쿠안의 예측 안에 있었다.




쿠안이 다시 르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겨우 20분이 지나기 전이었다. 적들은 허둥지둥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형을 펼치고 정렬하여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고, 쿠안은 가벼운 차림으로 그 선두에 서서 다가오는 르푸의 부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추격한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지만 플라스티릭은 덜컥 겁부터 먹었다.


"적들의 도주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장군님, 아무래도 여기에서는 조심하는 편이..."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벌어질 때마다 쿠안의 전술에 말려들고 있는 그들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르푸는 으르렁댔다. 슬슬 그의 참을성에 한계가 오고 있는데다가 팔꿈치의 고통이 너무 심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르푸는 적장이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대놓고 도발을 하고 있는 모습도, 독을 사용한 것도, 그리고 저렇게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점도 모조리 그의 이성을 앗아가버렸다.


"플라스트릭, 저 놈들은 어제부터 강행군을 펼쳤어. 이제 체력이 다한거지. 쿠안은 천재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부하들은 평범한 사람이야. 그걸 몰랐던 쿠안은 여기가 묫자리가 될 것이다. 즉시 저 놈들을 공격하도록."


뾰족한 수가 없던 플라스트릭은 상관의 말에 하릴없이 경갑보병을 선두로 적을 향해 돌진했다. 어찌 되었든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으니 물러날 이유는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쿠안은 즉시 병력을 운용하여 전투를 받아들였다. 거대한 함성이 천지에 울렸다. 르푸는 통증 속에서도 크게 웃으며 쿠안을 조롱했다.


"쿠안 놈, 이 정도가 한계로군. 이런 곳에서는 병력이 많은 쪽이 무조건 이긴다는 것을 모르는가!"


하지만 교전이 시작되는 순간 쿠안 역시 크게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태연자약한 모습이 병사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계책이 성공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


"이걸로 이겼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관이 드디어 미쳤다고 수근거리는 병사들은 적지 않았다. 그들의 의혹이 말끔하게 사라진 것은 10분 후. 쿠안대의 후방에 아델베르트의 부대가 마법처럼 도착한 시점이었다.




"적의 원군이 도착했습니다!"


급박한 외침에 르푸는 깜짝 놀라 바위 위로 뛰어올라 전투지역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맞싸우고 있던 적과 동수의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이걸로 숫자의 우위는 단번에 쿠안에게 넘어가 버렸다. 게다가 적의 사기가 치솟는 만큼 아군은 전투 의지를 잃었다. 노장은 화가 나서 길길이 뛰었다.


"도대체 저 놈들은 어디서 나타난 병력인가!"


"그게, 호수를 우회해서 온 부대인 것 같습니다."


플라스트릭이 송구스럽게 말하자 르푸가 외쳤다.


"파마르가 추격하던 부대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


"그건..."


플라스트릭도 파마르가 아론과 교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 리 없기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이쪽으로 전 공세를 펼쳤다는 것은, 아무래도 파마르 부대는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일 것 같습니다."


르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직접 대검을 들고 선두로 달려나가려 했다. 깜짝 놀란 플라스트릭은 허둥지둥 그를 말렸다.


"그건 안됩니다! 장군님, 지금 움직이시면 독이 더 심하게 퍼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귀공이 말해보게!"


"여기서는 퇴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마르대의 호응없이 이대로 적과 교전을 계속하다가는 큰 손실을 감안해야 합니다."


플라스트릭의 말에 그는 땅을 발로 차며 분해했지만, 결국 전군을 조심스럽게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아델베르트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상황에 감동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쿠안은 파마르대로부터 도망쳐온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던 것이다.


"아델베르트. 즉시 병력을 정비하여 르푸대와 맞서야해. 적은 얼마지나지 않아 퇴각할건데 그 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필요가 있어."


"괴멸시키는건가요?"


"그럼 좋지만 안될거야. 그보다 우리는 적이 퇴각하자마자 호수를 선회하여 파마르대를 치러 간다. 지금쯤 아론이 분투하고 있겠지만 이 호수 근처의 지형에서 기마대의 우위는 오래가지 못하거든."


"거기까지 예상하신건가요?"


아델베르트가 토끼눈을 뜨며 묻자 쿠안은 크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들썩여보였다.


"아니, 그 다음도 있는데 설명할 시간이 없어. 서둘러."


아델베르트는 쿠안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없이 묵직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명령을 즉시 수행했다. 아델베르트의 작전 수행능력은 어떤 면으로는 쿠안을 능가할 정도였다. 애시당초 쿠안은 세세한 점까지 신경쓰는 타입이 아니었고, 아델베르트는 그런 그의 약점을 매우 뛰어난 시야로 메워줄 수 있었다. 쿠안의 전략에 따라 수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병력을 넓게 펼치자 플라스트릭대의 사기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르푸가 허둥지둥 퇴각하는 병력을 통솔하려 했으나 이미 기세는 넘어가 있었다. 결국 아델베르트의 포위와 쿠안대의 공세로 르푸는 큰 출혈을 강요받으며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아론의 기병대에게 짓밟히면서도 파마르는 적을 포위하는 것에 성공한 참이었다. 늪지를 활용하여 기병대의 발을 묶은 것이다. 하지만 아론을 포함한 기병대원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쿠안대의 정예 중에서도 정예였기에 작전대로 흘러가는 이상 패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마치 종교처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신념은 타이밍 좋게도 적의 공세가 시작되는 순간 보답받았다.


“도주했던 적이 돌아왔습니다!”


경계병의 보고를 받자 파마르는 차분히 물었다.


“적수는 얼마입니까?”


“그게, 파악은 안되지만 도망쳤던 부대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파마르는 아론대를 공격하던 것을 중지시키고 즉시 병력을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반대쪽으로 돌았던 부대가 합류한 듯 합니다. 르푸 장군님이 무사하길 빌어야겠군요.”


파마르의 말에 그녀의 부하들은 창백해졌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 적수는 아군의 두배수에 이르는 것이다. 그녀는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다.


“염려할 것 없습니다. 노드대가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수의 우위를 찾게 됩니다. 지금은 적들에게서 도주하는 것만 생각하죠.”


과연 파마르의 말대로 노드의 대군은 호수 근처에 당도해있었다. 쿠안부대가 더 이상 추격하지 않은 덕분에, 심한 타격을 받은 르푸대와 비교적 피해가 적은 파마르의 부대는 그 이상의 교전없이 노드와 합류하여 진형을 정비할 수 있었다. 노드는 부상병을 추스르고 사기가 바짝 오른 적의 돌격을 막을 준비를 했다.


“이젠 늙었나보군. 완벽하게 패했소.”


르푸의 얼굴에 그늘이 깊어진걸 보고 노드는 그를 위로했다.


“타격을 받았다고 하지만 우리의 우세는 바뀌지 않습니다.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팔은 괜찮으십니까?”


“해독제를 썼지만 회복에 수일은 걸릴 것 같군.”


노드는 르푸에게 휴식을 권하고, 그의 부관 플라스트릭에게 그의 부대를 맡긴 다음 파마르를 만나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했다.




아델베르트는 적진을 관찰하다가 담담히 말했다.


“적이 다시 뭉쳤습니다. 부상병을 회수하고 있어요. 지금 공격할 찬스입니다만.”


쿠안은 유쾌하게 말했다.


“음. 그럼 우리도 부상병을 치료하고, 전군에게 휴식을 준다.”


“하지만 지금 기세가 이렇게 올랐습니다. 적과 겨우 500메세 떨어져 있는데 휴식을 취하는 건가요?”


“아델베르트, 우리는 벌써 엄청난 시간을 못 쉬고 있다고. 쉴 때는 쉬어줘야 싸울 수 있어. 음주도 허용하도록.”


쿠안은 그렇게 말하고 본인도 맥주가 가득담긴 가죽자루를 끌어안았다. 유인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낸 디지는 복귀하자마자 쿠안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죠? 목책에 숨겨놨던 건 부비트렙이었나요?”


“응. 뭐, 별거 아냐. 화살 몇 개 날아가게 해둔거지.”


“그걸로 파마르와 르푸의 추격속도를 비틀어놓으신거군요?”


“음. 순차적으로 병력의 우위를 만든거지.”


“그럼요...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요? 다음 작전이 설마 술마시는 거랑 상관있나요?”


그녀의 목소리에 불평이 섞인 것을 느낀 것을 듣고 쿠안은 “응?”하고 되물었다.


“뭘 어떻게 해?”


“지금 이대로 싸우면 이길 수 있나요?”


“없어. 이대로 싸우면 져.”


“네에?!”


“괜찮아, 괜찮아. 디지, 너 은근히 의심이 많구나.”


비명소리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쿠안은 적을 바라볼 수 있는 축대를 쌓게 하고 그 위에 올라가서 구운 고기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저.. 저기, 뒤쫓아오는 병력을 기다리는거죠?”


“아니, 와도 못이겨. 쟤들이 더 많잖아.”


“하지만 숫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에이, 훈련도 훨씬 쟤들이 잘되어있는데. 숫자에서 밀리면 못 이겨. 혹시 이겨도 우리의 전쟁은 거기서 끝나겠지.”


디지는 아까부터 포기하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는 아델베르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해보였다. 아델베르트도 고개를 갸우뚱해보임으로써 쿠안의 생각을 모른다는 것과 한 대 쳐주고 싶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럼 어떻게 하실건가요?”


“응? 축차투입(*대규모 소모전에서 병력이 소모될 때마다 보충하는 전술.)으로 이긴다.”


“그건 병력이 더 많아야 가능하잖아요.”


“그렇지.”


“...”


“염려하지마. 아델베르트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참 걱정할 것도 많다.”


“걱정되니까 그렇죠!”


“괜찮아. 그보다 우리가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됐지?”


“슬슬 해가 지려고 하니, 거의 하루로군요.”


디지는 우울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쿠안은 씨익 웃었다.


“내일 아침 해 뜰때쯤에 이길거야.”


“어떻게요?”


“우리가 적보다 많아질테니까.”


쿠안은 좌절하고 싶은 디지를 외면하고 횃불 수백개를 밝히게 했다. 그리고는 아델베르트와 디지를 축대위로 초대해서 술병을 쌓아놓았다. 디지는 거의 울상이 되어 물었다.


“설마 이거 최후의 만찬인가요? 저 아직 죽고 싶지 않은데요.”


“워워, 그런거 아냐. 이번 임무를 잘 해줬으니까 축배나 들자는 뜻이라구.”


“어차피 죽는다면 사랑 정도는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거라면 협조해주지!”


쿠안의 말에 아델베르트의 한쪽 눈썹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 방금은 척수반사야.”


“착한 척수로군요.”


아델베르트가 빈정대자 쿠안은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일단 들어봐.”라며 웃는 낯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첫째로, 적은 오늘 밤 못쳐들어와.”


“어째서죠?”


디지는 여전히 울상이었다.


“난 지금도 놈들을 도발하는 중이야. 여태까지 내가 놈들을 도발하면 적들은 항상 무시하고 덤볐고, 피해를 입고 물러서야했지. 이번에는 도저히 들어올 용기가 안날거야.”


“만약 오면요?”


“그럼 다 죽는거지!”


쿠안이 껄걸 웃자 디지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술병에 입술을 댔다.


“적의 대장은 셋이야. 그들은 지금 각자 한번씩 속았기 때문에 억지로 냉정함을 가장할 수밖에 없어. 우리를 공격하느냐 마느냐로 지금도 열띤 토의를 벌이고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침까지 못움직여.”


“왜죠?”


“그들은 전략적인 시야를 상실했기 때문이지. 만약 우리와 싸운다면 굳이 변수가 많은 밤을 노릴 이유가 없어. 대낮에 정면에서 싸우면 그들은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을 수 있지. 게다가 아론과 기마대가 시야에 안보이는 것도 불안요소야. 물론 아론은 저쪽 숲에서 쉬고 있지만, 적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한번 달궈진 쇠에 데고 나면 문고리를 잡을 때도 조심한다는 말이군요.”


아델베르트가 유명한 속담의 예를 들자 쿠안은 빙긋 웃었다.


“정확해. 적장은 셋이나 되니까말야. 누구든 한명쯤은 우리에 대해 경계하는 의견을 낼거야. 독단은 언제나 나쁜 게 아니지. 최소한 의외의 행동을 할 수 있잖아. 지금 적들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의견을 모을수록, 작전은 정석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거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지.”


쿠안의 설명을 듣고나서도 디지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두 번째 술병을 따며 물었다.


“그렇게 아침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우린 식량도 거의 안남았어요. 게다가 그 얼마 안남은 식량을 지금 먹고 있다구요! 최후의 만찬으로요!”


“최후의 만찬 아니라니까.”


“설명 좀 마저 해주시면 안돼요?”


“그럼 재미없잖아.”


디지는 두 번째 술병의 내용물을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겨버리고 세 번째 술병을 들었다.




전투는 쿠안의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새벽녘, 해가 뜨기 2시간 전에 고요한 쿠안의 본진에 목소리가 울렸다.


“쿠안 대장님! 병력이!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포를 끌어안고 빈 술잔을 손바닥으로 굴리고 있던 쿠안은 다급한 외침에 차분히 물었다.


“선두의 깃발이 보이나?”


“그게, 저건... 라즈나 일가의 문양입니다!”


쿠안은 벌떡 일어났다. 거품을 물고 자고 있는 디지를 구석에 밀어놓고 아델베르트도 조용히 일어났다.


“아델베르트. 전군, 전투준비. 라즈나 일가와 함께 퇴각하는 적을 쫓는다.”


“적은 퇴각할까요?”


“음, 틀림없이. 이대로 싸워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해주진 않겠지. 서둘러줘.”


아델베르트는 즉시 아론과 함께 전투를 재개했다. 그제야 그녀는 쿠안의 작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부터 카를로스와 알투로는 쿠안의 명령을 받고 빠져나간 것이다. 강행군을 위한 부대는 총수의 절반수인 만 팔 천으로 아론의 기병대를 포함한 기동력이 좋은 부대였다. 카를로스대가 티에세의 서쪽 평야로 오는 대신, 북쪽 전선으로 합류해버린 것을 서쪽에서 공격하던 험멜군은 알 도리가 없었다. 라즈나 일가에게 미리 전해진 서신은 이 작전에 대해 설명되어 있었다. 그 전략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았다.


“북쪽의 적을 퇴각시킨 후, 서쪽 평야로 전군을 돌려주십시오. 적은 호수를 바라보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침이 되기 전에 와주신다면 더 빨리 전투는 끝날 겁니다.”




라즈나 일가와 카를로스, 알투로의 연합군이 후미를 공격하자 험멜의 세 장군은 30초의 논의 끝에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숫자는 쿠안대가 유리해진 것이며, 티에세에서 병력이 계속 추가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쿠안대와 티에세의 민병대는 도주하는 험멜군의 후미를 두드려 쫓아낸 다음 티에세로 입성했다.


쿠안의 말대로 더 많은 병력으로 적과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델베르트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론이 술취한 디지의 주정-“사랑도 못했는데 아직 죽기엔 이르다구요!”-을 받아주며 당황하는 것을 보며 낄낄 웃는 쿠안의 모습에 그녀는 칭찬의 말을 건네는 대신 모포를 덮어주며 물었다.


“졸리진 않으신가요?”


“음. 졸려. 아델과 함께라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쿠안이 반사적으로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자 그녀는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갑작스럽게 얼어붙어버린 쿠안을 잠시 관찰하다가, 그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제야 그녀가 짖궂은 농담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멋적게 웃었다.


작가의말

애플시드는 쿠쿰이라는 독초에서 추출한 독입니다. 이 독초의 열매는 작은 사과처럼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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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3화. 험멜의 뒤를 쫓아 -3 15.11.17 151 0 26쪽
43 42화. 험멜의 뒤를 쫓아 -2 15.11.09 132 1 13쪽
42 41화. 험멜의 뒤를 쫓아 -1 15.10.30 107 1 15쪽
41 40화. 옛 연인 -3 15.09.30 119 1 15쪽
40 39화. 옛 연인 -2 15.09.21 149 1 12쪽
39 38화. 옛 연인 -1 15.09.18 123 0 8쪽
38 37화. 의도된 급변 15.08.31 169 0 15쪽
37 36화. 케를 수비전 - 흙벽 위의 아가씨 15.08.10 192 0 13쪽
36 35화. 케를 수비전 - 세번째 전술 15.08.06 165 2 16쪽
35 34화. 케를 수비전 - 데이멋 성의 사투(2) 15.08.05 156 2 15쪽
34 33화. 케를 수비전 - 데이멋 성의 사투(1) 15.08.05 142 1 10쪽
33 32화. 케를 수비전 - 두번째 전술 15.07.30 131 1 19쪽
32 31화. 케를 수비전 - 첫번째 전술 15.07.30 304 1 9쪽
31 30화. 케를 수비전 - 작전회의 15.07.28 188 2 9쪽
30 29화. 약속을 지키는 것 15.07.26 166 1 16쪽
29 28화. 예지는 진실을 담고 있는가 15.07.06 201 1 28쪽
28 27화. 쿠안은 새로운 검을 얻고 15.07.01 171 1 8쪽
27 26화. 충성의 저울질 15.06.26 240 1 7쪽
26 25화. 잡담 15.06.19 168 1 6쪽
25 24화. 패배를 앞두고 -3 15.06.15 203 1 16쪽
24 23화. 패배를 앞두고 -2 15.06.12 372 1 16쪽
23 22화. 리프베아체의 반란 15.05.27 224 1 6쪽
22 21화. 승리는 거두었으나 15.05.25 200 1 22쪽
21 20화. 패배를 앞두고 -1 15.05.20 229 1 8쪽
20 19화. 라즈나 일가의 젊은 당주 15.05.18 212 1 10쪽
» 18화. 사투의 끝 15.05.13 202 1 18쪽
18 17화. 사투- 후편 15.05.11 191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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