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화룡점정(畵龍點睛) <20>
마교인들이 들어간 창저(昌楮)라는 마을 밖 동쪽으로는 큰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사람이 죽으면 지역 관습에 따라서 화장(火葬)을 하기도 했고 매장을 하기도 했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매장을 위한 터를 따로 마련하여 그곳에다가만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늘 그렇듯이 시체들이 매장된 곳은 뭔가 음침하면서도 소름끼치는 기운이 감도는 법이었다.
그 때문에 밤은 물론이고 대낮에도 개미새끼 한 마리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인적(人迹)이 매우 드물었다.
수많은 봉분(封墳)들이 울룩불룩 솟아나 있는 가운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래....알아보았느냐?"
"넵! 그들은 현재 마을에 있는 한 여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오호라...그 동안 잘도 숨어 다니더니...이번엔 웬일로 여각으로 들어갔단 말이냐?"
"아마 이제는 그렇게 활개치고 다녀도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있나 봅니다."
"흐흐흐, 잘만하면 이번에 큰 공을 세울 수도 있겠는걸!!"
삼조곡에서부터 은밀히 추격을 해온 요각은 수하에게 보고를 받으면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 동안 마교인들은 대천마교의 추격에 혼란을 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피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뒤쫓는 요각은 아무런 기회도 잡지 못 한 채, 그들의 행방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여 정신없이 뒤쫓아 온 상황이었다.
헌데 이제 그들이 여각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그래 마교놈들이 여각에서 며칠이나 묵는다고 하더냐?"
"단 하루뿐입니다."
"뭐라! 단 하루!! 젠장...하필 하루뿐이라니...시간이 촉박하구나. 지금 당장 나머지 금월단 무사들을 이끌고 있는 사송문에게 기별을 한다해도 도착하려면 며칠이나 소요될 것이다..."
마교인들이 일정한 방향을 타지 않고 사방팔방 마구잡이식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요각은 부장 사송문에게 아무런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도망치는 마교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내는 성급한 연락은 혼란을 야기하고, 잘못하면 서로 길이 엇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요각은 끝까지 따라붙어서 최종 목적지를 확인하는가 아니면 방심하고 있는 적들을 칠 것인가 하는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공명심(功名心)에 사로잡힌 요각은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다! 일단 사송문에게 기별을 보내놓고 우리끼리 실행해보는 수밖에..."
그날 밤.
달빛을 등지고 수명의 검은 그림자가 여각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요각은 밤늦게까지 떠들썩대면서 먹고 마시는 마교인들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녀석들이 우리들이 뒤쫓아 온 줄은 꿈에도 모르고 완전히 정신을 놓았구나..."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수하 하나가 걱정을 드러내자 요각은 더욱 대담한 태도를 취했다.
"저들 꼬락서니를 보거라! 이번 일은 성공률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이게 어떻게 얻은 천금같은 기회인데 그냥 지나치겠느냐! 오늘 밤 술과 여독에 골아 떨어진 마교 수장들을 모조리 암살하도록 한다!"
요각은 이참에 마교 수장들을 몰살하는데 성공한다면 참모인 이하민보다도 훨씬 큰 공을 세울 것이라는데 들떠 있었다.
마교인들은 추적을 당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어서 경계가 매우 흐트러져 있었다.
마교수장들이 데리고 있는 무사들 또한 겨우 사십여 명이었고, 이들은 수장들이 묵고 있는 방과 꽤 떨어진 곳에 묵고 있었다.
이 점은 요각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요각을 따르는 백여 명의 무사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은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마교 수장들은 소교주를 비롯하여 허운, 사검귀천, 유원학, 백운 그리고 위현룡이었다.
다시 한번 꼼꼼히 살핀 요각은 끝낸 무리수를 피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적들의 수가 적다고 해도 마교 수장들 개개인의 무공을 간과해서는 안되지. 아무래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겠군!)
신중한 편인 요각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확실한 모략을 꾸미려 애썼다.
"일단 소교주와 참모 허운만 없애도록 한다. 이들만 죽여도 마교는 휘청거려 쓰러지고 말 것이다. 특히 허운은 무공을 못하니 식은 죽 먹기고, 소교주라고 해도 대단한 무위를 지닌 것은 아니니 내가 처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 작전은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므로 다섯 명의 인원만 대동하겠다. 나머진 마을 밖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요각은 이런 명을 내리면서 데리고 온 백여 명의 무사들 중 특히 무공이 출중한 다섯 명을 차출하였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기를 끈기있게 기다렸다.
오경(새벽 3- 5시)을 넘기고 나자 여각 안엔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유난스럽게 떠들던 마교인들은 세상모르게 골아 떨어져 버렸다.
요각은 차출한 다섯 명의 무사들과 함께 지붕위로 살그머니 뛰어 올랐다.
이미 낮부터 소교주인 허혜린과 참모 허운이 묵고 있는 방을 확인해 두었고, 암살 후 탈출할 출로(出路)까지 치밀하게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다.
여각은 총 삼층 규모였는데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의 방은 맨 위층인 삼층에 있었고, 다른 수장들은 이층에 묵고 있었으니, 이거야 말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요각은 더욱 성공에 확신을 가졌다.
그는 수하들과 함께 지붕 위를 타고 가까이 접근했다.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지붕에서 내려와 허운의 방문까지 잽싸게 몸을 붙였다.
무공을 못하는 허운부터 제거해놓고 허혜린을 노리기로 한 것이었다.
몰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침상 위에 있어야 할 허운이 보이질 않았다.
(이런...허운이 어디를 간 것이지?)
확실하게 준비한 암살계획이라 방을 잘 못 찾는 그런 미련한 실수는 절대 아니었다.
허운이 어디 뒷간이라도 간 모양이라고 생각한 요각은 계획을 변경하여 허혜린부터 없애기로 하였다.
그들은 허혜린의 방까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접근하였다.
그런데 야심한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문창(門窓)으로 몇 개의 촛불이 일렁거리는 듯 하였다.
또한 두런두런 대화소리까지 들려나왔다.
귀를 기울여보니 허혜린의 방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참모 허운이었다.
(이것 봐라? 허운을 놓쳐 아쉬워했는데 여기에 있었군.)
살기 번뜩이는 칼을 들고있던 요각은 순간 어찌 할까 생각했다.
암살할 대상이 깨어있는 데다가 두 명이라면 암살을 시도하는데 약간의 소란이 일어날 여지가 다분했다.
요각은 마교 수장들에 의해 탈출구가 봉쇄 당할 수도 있음을 염려하였다.
(재빨리 해치우고 얼른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겠다.)
그는 자신과 수하 세 명이 허혜린을 맡고 나머진 허운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요각이 방문을 밀치고 진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허운의 목소리가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소교주! 오늘밤이 지나면 우리는 봉준산으로 떠나게 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곳에는 마교를 따르는 무사 오천 명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전력이 대천마교를 무너트리는데 큰 역할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천명!!!)
오천 명의 전력을 운운하는 것을 듣게 된 요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의 와해(瓦解)되어 몰락하는 줄 알았더니 봉준산에 모든 전력을 집결시켜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사실은 대천마교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한 정보다!!)
요각은 잠시 진입을 자제한 채 더욱 귀를 기울여 보았다.
허운은 누군가 엿듣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봉준산에서 시작되는 전력으로 어떻게 대천마교를 공격할 것인지 세밀하게 언급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허혜린은 가끔씩 탄성을 지르면서도 허운의 말을 경청하였다.
요각은 그들의 대화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일단 이들을 죽이고 나서 곧장 봉준산에 있는 적의 세력들을 없애야할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대천마교에 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야만 한다!)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낸 요각은 검(劒)을 치켜세우고 암살을 위해 막 들이치려했다.
그때 후두에서 누군가 큰 소리를 질렀다.
"웬 놈들이냐!! 자객이다!"
때마침 올라온 유원학이 검을 뽑으면서 달려들고 있었다.
(이런 젠장...)
다 된 밥에 코 빠트린다고, 유원학은 막 거사(巨事)를 이루려는 중요한 시점에 등장하고야 말았다.
유원학의 무위를 잘 아는 요각이었다.
잠시 머뭇거린 그는 지체하다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곧장 피신명령을 내렸다.
"빠져나가라!!"
요각과 함께 수하들이 지붕위로 몸을 날리려 하였다.
그러나 유원학이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그들의 앞길을 막아섰다.
야심한 밤에 칼 소리가 여각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큰 소동이 일어났으므로 여각주인 송양군을 비롯해 묵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요각은 탈출구가 막혀버리자 대뜸 유원학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유원학과 요각 그리고 그의 수하들은 서로 어우러져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요각의 수하들이 협공을 시작하자 유원학은 일순 뒤로 밀렸다.
아무래도 자리가 협소(狹小)하여 죽기살기로 덤비는 적들의 협공에는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이때 아래층으로부터 마교무사들이 고함을 치면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두 유원학을 필사적으로 막아라!!!"
큰일났다 싶은 요각은 이런 명을 내려놓고 수하들을 사지(死地)에 놔둔 채 혼자만 몸을 빼냈다.
천신만고 끝에 여각을 빠져나간 요각은 전력으로 경공을 운행했다.
(어서 대천마교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비록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대단한 정보를 알아낸 것으로 만족했다.
이 정보하나만으로도 큰 전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각이 혼자만 살겠다고 달아나는 동안 그의 수하들은 유원학과 마교 무사들에게 모조리 척살(刺殺)을 당했다.
"괜찮으십니까?"
유원학이 허혜린과 허운의 안전을 확인했다.
그때 허혜린의 방 천장에서 세 명의 그림자가 뛰어내려왔다.
허혜린과 허운을 암암리에 보호하고 있던 사검귀천이었다.
"정말 참모님 말씀대로 저들이 여각 안으로 들어왔네요"
허혜린이 감탄조로 말하자 허운은 깊은 미소를 띄우면서 입을 열었다.
"삼조곡에서 매복하던 대천마교 무사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우리 뒤를 추격하리라 예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튼 이제 한고비 넘겼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백운대협과 주유천대협 그리고 위현룡대협이 마지막 처리를 하고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 **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간 요각은 금월단 무사들이 소집되어 있는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지금 당장 대천마교로 돌아간다! 어서 출발하라!"
한시가 급했기에 요각은 부랴부랴 무사들을 움직였다.
자신이 엿듣고 있는 것을 그들이 알아챘는지 못 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봉준산에 집결되어 있는 마교 전력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대책을 수립하고 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 사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혼비백산한 요각이 탈출로를 찾으려 했지만 이미 모조리 봉쇄되어 포위된 상태였다.
"이 놈들이..."
적들은 수는 이백 명이 조금 넘고 있었다.
눈앞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백운과 주유천이었다.
"요각대협...대천마교의 개가 되시더니 신수가 더욱 훤해 지셨구료.."
앞으로 나서던 백운이 느글느글한 음성으로 요각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배...백운..."
"하하하...여기는 공동묘지인데...어떻게 알고 이렇게 묏자리(묘를 위한 자리)로 직접 찾아 오셨단 말입니까? 이 사람 요각대협의 선견지명에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백운이 시덥지않은 농을 하는 사이 요각은 빠져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포위는 완벽하게 너무나도 잘되어 있었다.
요각은 과거 마교에서 백운과 함께 활동한 적이 있었기에 그의 성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백운은 매사 치밀한 성격이었고, 한번 물고 늘어지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요각은 어쩌면 여기서 살아나가기 힘들겠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황송하게도 요각 대협께서 친히 방문하신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삭막한 곳에 머물고 계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긴 누가 이곳을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역시 요각대협의 특출한 지모는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나저나 미리 기별이라도 주셨으면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으로 모셨을 텐데...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긴박하고도 살벌한 가운데서 백운은 쉬지않고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홍후인이 한마디했다.
[백운이라는 위인은 늘상 입에 농담을 달고 다니지.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겉으로는 유쾌한 농담을 하면서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요각과 그의 수하들은 백운의 저런 농담 때문에 더욱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다.]
"보아하니...여각에서 매우 중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 같은데...그렇다면 요각대협을 죽여서 입을 봉해야만 하오. 별로 하고 싶지 않소만, 봉준산에 있는 마교 전력에 대한 정보가 대천마교로 흘러 들어가면 우리도 큰일나니 말이오...그러니 다음 세상을 기약하면서 이번은 즐거운 마음으로 눈을 감아주시오. 내가 특히 피가 튀지 않도록 깔끔하게 목을 베어 주리다!"
백운이 씨익 웃으면서 검을 뽑아들자 요각과 금월단 무사들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Comment '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