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환령검(鬼魂幻靈劍) - 약왕문(藥王門) <29>
손일극은 절망에 젖어있는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넌지시 제안을 하였다.
"약왕문의 동서남북이 모두 우리측에 의해 정리되었을 것이니 괜한 저항으로 부질없는 인명손실을 일으키지 마십시다. 그만 투항들 하시오. 마교에 수많은 인재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 구태여 당신들을 죽이기라도 하겠소이까? 적월교는 오래 전부터 두 분과 같은 인재를 찾고 있었으니 투항만 하시면 극진한 예로 대접을 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러 누구라도 솔깃할만한 호의적인 권유였다.
허나 그의 간곡한 권유를 유원학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시끄럽다. 잔말 말고 어서 덤비거라!!"
유원학이 냉랭한 음성으로 고함을 쳐대자 좋은 의도를 품었던 손일극의 안색은 차갑게 변하였다.
"유원학 대협! 서장 일대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고 보니 객기(客氣)만 든 한심한 작자였구료!."
"뭐라!! 네 놈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
유원학이 분노를 터트리자 양측은 병장기를 들고 당장이라도 충돌할 기세가 되었다.
이때 손일극이 한 손을 쳐들면서 대막천궁의 무사들을 진정시키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유대협이야 그 혈기로 죽기를 각오하겠지만, 과연 다른 무사들도 유대협과 같은 생각이겠소? 비록 이들이 수장을 잘 못 만나 헛된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도 죽음의 기로(岐路)에서 삶에 대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오."
손일극은 무학도 출중하지만 지략 역시 뛰어난 자였다.
어차피 마교 잔당을 다 죽여 없애는 일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허나 그는 마교 무사들을 무혈(無血)로 제압함으로써 허운과 유원학의 의지를 꺾고, 적월교로 투신하게 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현재 새외의 군소문파를 관장하는 적월교와 그 산하에 있는 무력집단인 대막천궁의 기세가 드높다고는 하지만, 중원의 문파들과 비교했을 때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적월교는 마교에 집결되어 있는 수많은 인재들을 부러워하였고 탐을 내었다.
그들만 고스란히 들어와 받쳐준다면 얼마안가 중원을 손쉽게 점령할 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허운이 그가 노리는 바를 금세 간파하고는 크게 비웃었다.
"손대협의 계책이 그럴듯합니다만...손대협이 한가지 잊고 계시는 게 있습니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저희는 마교출신입니다. 새외에서부터 마교가 어떤 집단이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손일극은 허운의 말을 들으면서 슬쩍 마교 무사들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그들의 얼굴에는 죽음을 각오하는 결의만 있을 뿐 추호도 두려움이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랬다.
이들은 다른 문파도 아닌, 바로 충성과 복종을 생명처럼 여기는 마교인들이었던 것이다.
(마교인들이 골수분자(骨髓分子)들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손일극은 쓴 입맛을 다시다가 그래도 미련이 좀 남아서 재차 입을 열어보았다.
"뭐...그대들이 마교인들인 것은 잘 알겠소. 허나 한가지 사실만 떠올려 주시구료. 과거 적무평 대협이 필부지용(匹夫之勇)만 믿고 반월곡에 들어갔다가 제자처럼 따르는 수하들을 허무하게 잃어버린 사건을 말이오. 허운 참모와 유원학 대협은 그날의 그 비극을 듣고 뭔가 깨닫는 바가 없단 말이오? 마교는 어차피 멸망한 문파! 지금 당장 두 분께서 결단을 내리시면 여기 있는 백 여명의 목숨을 고스란히 살릴 수가 있소이다. 그런데도 고집을 피우실 작정이시오? 마교인들은 자신들의 명예만 중요하고 따르는 이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단 말이오? 부디 그릇된 판단으로 적무평 대협의 전철(前轍)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오."
그 순간 열변을 토하던 손일극의 뒤쪽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가 얼른 고개를 돌리자 마교를 포위하고 있던 한 축이 우르르 무너지면서 십여 명의 인영(人影)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사람은!!"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오른 팔이 없는 외팔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비스듬히 늘어트린 채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신형에서는 막강한 무형지기가 뿜어져 나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허운과 유원학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적무평 대협!!!"
적무평이라는 이름 석자가 메아리를 울리자마자 침입자를 잡아보겠다고 몰려들던 대막천궁의 무사들이 얼음처럼 굳어져버렸다.
새외에서 적무평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악귀처럼 나타난 그를 보자마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저...적무평이다..."
"맙소사!! 우리가 지금 적대협과 싸워야 하는 건가??"
"아이고....우린 모두 죽었다..."
대막천궁 무사들 사이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손일극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적무평이 한때 마교에 몸담았던 사람이었으니 이 사태를 결코 좌시(坐視)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손일극 대협이 아니시오?"
적무평이 차가운 웃음을 지으면서 먼저 아는 척을 하였다.
이에 잠시 주춤거리던 손일극은 얼른 포권(抱拳)을 취했다.
"적대협께서 어쩐 일로..."
"하하하, 손대협이 이렇듯 뻔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우습구료."
손일극의 등줄기로 식은 땀방울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젠장...적무평은 이미 약왕문을 떴다고 알고 있었는데....)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용기를 내어 적무평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쩌실 의향이십니까? 이미 반란을 일으킨 마교는 대천마교에 의해 멸망하였고, 적월교와 대막천궁이 마지막으로 마교 잔당들을 섬멸하려는 참입니다만..."
일부러 그는 적월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이것은 적무평이 함부로 나선다면 새외에서 공공의 적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우회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무평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당신들을 모두 죽이면 소문이 나지 않을 텐데 무슨 걱정이란 말이오? 안 그렇소?"
적무평이 검을 들고 한발자국 다가오자 손일극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이 아무리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하더라도 적무평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을 수는 없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척 보니 적무평의 칼날을 절대로 피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 눈앞이 다 캄캄하였다.
그런데 막 적무평을 필두로 두 세력간에 대혈전이 벌어지려던 찰라, 뜻밖의 무리들이 출현하였다.
손일극은 그들을 이끌고 당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제갈대협!!!"
손일극의 손짓을 받고 다가온 사람은 대략 사십 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백의인(白衣人)이었다.
"손대협! 아직도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단 말이오?"
은근히 책망하는 말투였으나 손일극은 기분 나빠할 겨를도 없이 그의 귀에 대고 뭐라 소곤거렸다.
아마도 적무평의 출현을 알리고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를 의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유원학은 손일극에 의해 제갈대협이라 불리던 사람을 눈짓하면서 나직이 입을 열었다.
"대막천궁에 저런 사람도 있었소?"
마교가 중원에 거점을 이루고 있었기에 새외 인물들을 속속들이 다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손일극이 깍듯이 존칭할 정도라면 대막천궁 내에서 꽤나 높은 서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였고, 그런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알려지고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유원학은 혹시나 허운이 저 사람을 알까 하여 물어보게 된 것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마흔을 넘어 보이는 그가 손일극보다 서열이 높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군요. 아시다시피 새외란 곳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마교처럼 파격적인 인사정책을 시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허운의 말에 유원학도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이때 손일극과 잠시 속닥거린 제갈대협이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당신이 그 적무평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오?"
제갈대협의 입에서 거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에 적무평은 슬쩍 웃음을 내비치면서 말했다.
"나를 모르는 것을 보니 새외인이 아니군."
그러자 그는 가볍게 놀라면서 껄껄댔다.
"과연! 적무평의 지모와 무학이 하늘을 놀라게 한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구료..."
잠시 제갈대협이라는 사람의 행동을 살피던 적무평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제갈무라고 하오."
"제갈무?"
"처음 들어보는 자로군..."
"하하하, 그렇소?"
허운은 제갈무라는 이름 석자를 입에 몇 번 올려보다가 무엇인가가 갑자기 떠올랐다.
제갈무라면 과거 제갈세가 가주로서 현재 무림공적이 되어 도피중인 사람이 아닌가.
그는 얼른 적무평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하하, 그 유명하신 허운참모께서 나의 이름을 기억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제갈무가 과장된 언사로 자신의 여유로움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었다.
적무평은 무림공적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적월교나 대막천궁도 많이 썩었군...흑포마성도 모자라 제갈세가 가주 제갈무라...이렇게 무림공적들을 모두 수집해서라도 세력을 키우고 싶었던 것인가?."
그의 말에 제갈무의 눈초리가 슬쩍 올라갔다.
"무림의 생리라는 것이 강한 자가 정의(正義)이고, 약한 자는 불의(不義)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내가 강해지게 되면 될 일, 무림공적이든 아니든 크게 개의치 않소이다."
광오(狂傲)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적무평은 기가 다 막혔다.
"보아하니 대막천궁으로 들어간 모양인데...과연 어느 정도 실력이기에 대막천궁에서 최고서열까지 올랐단 말이오? 대막천궁 궁주의 실력도 그저 그런 것으로 아는데..."
"적무평대협은 뭔가 착각을 하고 있소이다. 과거 적대협이 종횡무진(縱橫無盡)하던 때와는 많은 것이 변하였소. 대막천궁이 과거의 그 대막천궁인 줄 아시는 게요?"
"그럼 아니오?"
"하하하, 정 부정하고 싶다면 하시오. 허나 오늘 내가 적대협께 무학의 깊이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드리리다."
"날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오?"
"아마도 내가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오."
두 사람 사이에 설전(舌戰)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슬슬 팽팽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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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제갈세가 가주 제갈무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저리 자신만만해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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