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에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가 빈형(臏刑)을 선고받으면서 앉은뱅이 신세로 전락함과 동시에 삭탈관직에 처해졌다.
비록 목숨을 건졌으나 사실상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권신(權臣)이 쓰러졌다.
황실과 조정을 쥐락펴락해온 늙은 환관이 퇴장하면서 권력구도의 공백이 발생했다.
함양에서 소식을 접한 진나라의 귀족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조고에게 금은보화를 바치면서 청탁했던 귀족들이 수두룩했기에 자중지란에 빠지게 되었다.
“조정이 어떻게 되겠느냐?”
“호해 공자를 옹립하려 했던 조고가 무너졌습니다. 이제 부소 공자가 태자에 책봉될 겁니다.”
대장군(大將軍) 풍겁. 우승상(右丞相) 풍거질.
진나라의 문무(文武)를 관장하는 풍씨 가문의 형제가 후일을 의논했다.
조정대신들은 부소의 편에 섰다.
그리고 중립을 고수하던 변방의 장수들도 부소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북방에서 놀라운 활약을 거듭했던 황제의 적장자는 마침내 늙은 환관마저 쓰러트렸다. 사태를 조심스럽게 주시하던 진나라의 귀족들은 조고를 배신하고 부소에게 붙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최대한 빨리 결정해야 한다. 결정이 늦어질수록 후순위로 밀려날 테니.”
“하지만 조고가 이대로 포기하겠습니까? 섣불리 부소 공자를 지지했다가 절치부심하여 돌아온 조고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예상을 깨고 호해가 이세황제로 즉위한다면 부소에게 붙었던 신하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숙청될 터였다.
조고는 자신을 배신한 변절자들을 결코 용서치 않는다.
환관 세력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이번 국문으로 구심점이 몰락했지만 조고의 영향력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다.
조정을 대표하는 고관대작들의 위에서 군림해온 존재가 바로 환관이다. 조고에게 충성하는 무리들이 함양뿐만 아니라 전국 36개 군에 산재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
“부소와 호해···. 대체 어느 쪽에 서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우리 조카님께서 후계구도를 주도하셨다면 이렇게 고민할 일은 없었을 터인데.”
풍겁과 풍거질의 여동생이 황제의 후궁인 미인(美人) 풍씨였다.
미인 풍씨의 슬하에 아들이 한 명 있었다.
황제의 여덟 번째 공자였다.
여동생의 아들을 이세황제에 옹립한다면 풍씨 가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명문가로서 명망을 떨치겠지. 하지만 미인 풍씨는 궁중의 권력암투에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사랑하는 아들이 후계구도에 거론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형님께선 진나라의 군부와 함양의 방위를 관장하는 대장군이십니다. 부소와 호해를 지지하는 객경들이 필시 형님에게 도움을 요청해올 겁니다.”
“난감하군. 하필이면 폐하께서도 위중하신 상황에···.”
대의와 명분은 황제의 적장자인 부소에게 있었다.
조상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은 명문가로서 적장자를 지지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부소를 지지한다면 몽염과 왕리에게 입지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부소를 이세황제로 옹립하더라도 모든 영광과 명성은 몽씨 가문과 왕씨 가문에게 주어지리라.
결국 이등공신이 될 수밖에 없다.
예전부터 몽씨 가문과 왕씨 가문을 시기해온 풍겁이었기에 꺼림칙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형님, 부소 공자에겐 상장군 몽염과 북방의 30만 대군이 있습니다. 30만 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상경한다면 누구도 막지 못할 겁니다.”
“흐음···.”
함양을 방위하는 병력은 3만에 불과하다.
내사(內史)의 근왕군(勤王軍)을 소집하더라도 10만에 그칠 것이다.
힘의 싸움은 부소에게 유리했다.
제아무리 조고가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북방의 정예군단을 이길 순 없었으니까.
“이제 폐하께서 돌아오시겠지. 그럼 부소 공자도 함양으로 돌아오는 건가?”
“아닙니다. 부소 공자는 상장군 몽염과 다시 상군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제께서 칩거를 이어갈 정도로 병세가 위중하다는 불길한 풍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함양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후계구도의 난립이 예상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함양을 중심으로 내전이 발발하게 될지도 모르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튼튼한 배에 몸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풍씨 가문을 위시한 진나라의 명문가들은 가문의 운명이 결정될 위험천만한 도박을 벌여야 했다.
* * *
이제 공자님께서 그동안의 활약을 인정받아 태자에 책봉되시겠지.
은리는 강한 기대감을 내비치면서 황제의 분부를 기다렸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기대감을 박살내듯 황제를 보필하는 무관에게서 “공자 부소와 상장군 몽염은 상군으로 돌아가라는 폐하의 분부이십니다.” 라는 전언을 듣게 되었다.
“사, 상군으로 돌아가라고요?! 그럼 함양은···.”
“다른 분부는 없으셨습니다.”
분부가 없었다는 말은 불허(不許)를 의미했다.
여전히 함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죽을 위기를 수차례 겪으면서 전공을 세웠음에도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부소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은리는 본인이 불합리에 처한 당사자처럼 씩씩대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까지 공자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싸우셨는데···! 태자 책봉은 후일로 미루더라도 함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추방령은 거두셨어야지! 그게 인간적인 처사잖아!’
대규모 원정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고가 보낸 독무대의 자객들로부터 살아남아 역모의 전말을 밝혔다.
언제나 곁을 보필했던 은리였기에 부소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부소가 너무도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독불장군 황제가 있는 처소에 난입해서 퉁명한 정신머리를 꾸짖어주고 싶었다. 당신이 내쫓았던 아들이 변방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아냐며 소리를 내질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런 속내를 꿰뚫어본 걸까?
황제의 전언을 고했던 무관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은 환관을 부르십니다.”
“저, 저를요···? 왜요?”
은리의 물음에 무관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은리는 포악한 귀신처럼 황제의 험상궂은 얼굴을 떠올리면서 온몸을 떨었다.
“나도 따라가겠네.”
“안 됩니다. 폐하께선 은 환관만 부르셨습니다.”
황명은 절대적이다.
부름을 받았다면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소가 손을 흔들면서 배웅했다.
그러자 은리는 본인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행동하는 부소를 따갑게 노려보았다.
* * *
황제를 알현하는 관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한 검문을 받아야 했다. 관료로 위장하여 궁중에 잠입했던 자객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리는 제외였다.
황제를 호위하는 무관들이 신체를 수색하려 했지만 몽의가 가로막았다. 아름다운 용모의 환관은 검문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유일한 대상이었기에 바로 처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
어전에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분위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후각을 찌르는 고약한 악취와 함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다가선 은리는 상석에 앉은 황제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폐, 폐하···!”
오랫동안 방치된 주검처럼 창백하게 질린 모습을 목격했다.
흐릿한 안광만이 남은 두 눈은 사자(死者)에 가까운 상태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
천하를 호령하던 지배자가 이토록 쇠약해지다니.
후각을 강타했던 고약한 악취는 황제로부터 흘러나온 냄새였다. 혈관에 침착된 수은이 혈액의 순환을 방해하면서 살을 서서히 썩어문드러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짐의 유언장을 건네겠다. 때가 되거든 부소에게 보이거라.”
“유, 유언장이라고 하시면···.”
가쁜 호흡을 내쉬던 황제가 손짓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던 몽의가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글귀가 적힌 종이를 펼쳤다.
-공자 부소는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장례를 치르라. 병권은 몽염이 맡으라.
짧고 간결하다.
다음 황제를 위한 유언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간략했다.
한두 줄에 불과한 글귀.
그리고 바로 옆에 전국옥새의 인영(印影)이 있었다.
은리는 떨리는 손길로 황제의 유언장을 접으면서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동봉했다. 온전하게 보전하여 부소에게 보여줘야 했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품에 넣었다.
“그럼 언제쯤 부소 공자에게 보여주면 되겠사옵니까?”
“너의 판단에 맡기겠다.”
강한 신뢰가 담긴 황제의 대답에 은리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친어머니처럼 자신을 보살펴준 황후 미씨와의 추억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에 고개를 숙이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황후가 너를 예전부터 많이 총애했지. 어미와 딸처럼 보일 정도로. 너를 마주할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짓던 황후의 모습이 생생하구나.”
“예, 가문과 부모님을 잃은 저에게 과분할 정도로 사랑을 주셨사옵니다.”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지난날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것일까.
황제가 쓴웃음을 흘리면서 황후 미씨에 대해 말했다.
“항연과 너의 부친이 창평군을 옹립하자 황후는 필사적으로 너를 지키려고 했다. 자신이 황후에서 폐위될지언정 너를 잃을 수는 없다며 며칠 동안이나 간청했지.”
“······.”
은리의 가문은 창평군(昌平君) 웅계를 초왕(楚王)으로 옹립했던 명문가들 중의 하나였다.
또한 은리의 부친은 대장군(大將軍) 항연과 함께 거병하여 왕전을 상대로 회남(淮南)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렀던 좌장군(左將軍) 은백이었다.
역적을 섬긴 가문의 후예였다.
또한 천하통일의 대업을 방해했던 역도의 딸이기도 했다.
당장 극형에 처해져도 이상하지 않은 신분이었다. 창평군과 연관된 초나라의 수많은 가문들이 구족(九族)을 진멸하는 극형에 선고받지 않았는가.
하지만 창평군의 딸인 황후 미씨의 궁녀였던 은리는 황제의 비호 덕분에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가 사망한 이후에는 환관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지냈다.
“짐을 원망하느냐? 원망해도 괜찮다. 짐은 너의 가문을 비롯하여 창평군을 옹립했던 초나라의 수많은 귀족들을 척살한 불구대천의 원수이지 않느냐.”
“그럼 폐하께선 어찌하여 소녀에게 유언장을···.”
“너는 황후가 키운 딸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부소를 걱정하는 사람이지.”
“······.”
부소의 의동생이었다.
그리고 부소가 가장 신뢰하는 환관이기도 했다.
유언장을 맡기기에 이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겠지. 함양에서 어떤 참변이 벌어지더라도 은리는 부소에게 유언장을 공개할 터였다.
“네가 보기에 부소는 황제의 재목으로 보이더냐?”
“부소 공자는··· 아니, 부소 오라버니께선 위대한 성군이 되시겠지요. 소녀가 장담하겠습니다.”
위대한 폭군으로부터 진나라의 황위를 물려받은 위대한 성군.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은 황제는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감사를 표하마. 최후를 앞둔 순간에 너를 바라보면서 황후를 떠올릴 수 있었다.”
“폐하, 마지막으로 부소 공자를 만나보시지요. 분명 공자도 바라고 있을 겁니다.”
은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다.
그에 황제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상냥한 배려를 사양했다.
“이제 부소에게 가르칠 것은 없다. 충분하다.”
“······.”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던 위용을 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장졸들을 능숙하게 거느리던 명군으로서의 자질을 보았다.
훌륭하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유약한 백면서생이던 맏아들은 훌륭하게 모든 시험에 합격했다. 함양에서 추방했을 때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보게 되겠구려, 황후.’
황제 영정은 태어날 때부터 모친에게 버림받고 수많은 이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불운한 인간이었다. 그런 불운한 인간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 바로 황후 미씨였다.
황후가 남긴 아들을 자신처럼 도살자로 만들 순 없다.
그렇기에 후환이 될 모든 것들을 없애겠노라고 다짐했다.
- 작가의말
1시간이나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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