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이 가격에 이정도 주택을 살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내겐 큰 행운이 었는지도 모른다.
집은 60~ 70년대에 유행 했을 법 한 옥상이 있는 이층집이었다.
나는 집을 계약하고도 급한 출장으로 인해 보름 만에 겨우 이 집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보름 만에 다시 찾은 그 집은 그때 날 기쁘고 설레게 했던 그 집이 아니었다.
그 땐 보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은 가시처럼 내눈을 파고 들고 있었다.
벽체는 가뭄에 논밭이 쩍쩍 갈라진 것처럼 손가락 굵기의 금들이 여기저기 흉하게 나 있었다.
비가 세지 않는 다면 그건 기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단언컨데 집을 건축 한 이래 단 한 번도 손을 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싸게 샀잖아.
이 가격에 살 때는 이 정도는 각오를 했어야지!
안 그래?..."
스스로를 위로 해 보았지만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집 앞에 제법 넓은 마당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 역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마당은 온통 이름 모를 잡풀들로 뒤덮여 있었다.
더구나 그 키가 담장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낮인데도 집 안에는 온통 그늘이 져 있었다.
" 젠장!...
귀신 나오기 딱 좋겠군...."
그 말을 뱉고 나니 왠지 등골이 오싹해 졌다.
" 에이 모르겠다.
일단 가고 다음에 다시 오자."
나는 현관 문을 닫고 대문을 걸어 잠그기가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면 꼭 뭔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 젠장!...
이게 아닌데...."
나는 금요일 점심 때부터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녀석들은 내가 집을 산 걸 어떻게 알았는지 한 턱을 내라고 난리가 아니었다.
나는 알았다며 대신 이번 주말에 집 정리 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약속이 있단다.
아무래도 사람을 사야 될 것 같았다.
돈은 좀 들겠지만....
그날 저녁 소영이한테 전화가 왔다.
퇴근후에 "나그네쉼터"로 나오라는 전화였다.
그곳은 우리 멤버들이 소싯적부터 모이던 포장마차 이름이었다.
" 오늘 다들 모이기로 했으니까.
너도 빠지지 말고 꼭 나와.. 알았지?
안 나오면 죽어~ 늦어도 죽어~"
소영이. 창배. 길수. 현민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단짝 친구들이다.
그날 나는 일이 늦게 끝나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창배였다.
" 야. 김건우!
너 내가 뭐라고 했어?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약속 시간 보다 30분 먼저 도착 해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그러니까 니가 맨날 평사원인 거야.
사회에서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도대체 몇 번이나 말했냐?"
창배의 잔소리는 내가 자리에 앉고 나서도 한참동안 이어졌다.
그때 창배의 말을 자르며 소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사는 언제 하는 거야?"
" 월요일하고 화요일 이틀간 연차를 썼어."
" 왜?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이사하지."
" 이사가기 전에 손 볼 곳이 많거든.
참 너희들 직업소개소 소장님 알지?
우리 대학다닐 때 등록금 벌려고 여름 방학 내내 거기서 노가다 했잖아."
내 말에 창배가 손벽을 치며 말했다.
" 아 그 딸기코 대머리 소장!
아직도 그 일을 하고 계셔?
지금 연세가 꽤 되실 텐데...
아니! 넌 아직도 그 딸기코 대머리 소장 하고 만나는 거야?"
" 소개소가 우리 집 근처라 가끔 들려.
그리고 이사가기전에 정리할 사람 좀 구하려고 잠시 들려 봤어.
소장님에게 대충 얘기를 했더니 한 3명이서 토요일 일요일 이틀이면 충분할 거라고 하시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영이가 탁자를 "탁" 소리가 날 정도로 힘껏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 너 미친거 아냐?
왜? 요즘 돈이 막 썩어 들어가냐?
집 한 채 사고 나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그치?
김건우 정신차려...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도 모자라서 반은 대출 받아서 산 거잖아.
너 그돈 다 갚으려면 앞으로 10년 동안은 밥하고 김치만 먹고 살아야 돼.
알고 있는 거야?"
소영이 말에 나는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 못 됐다.
나도 다 알고 있어...
각오도 했고...."
" 이 바보야...
그런데 왜 그런 쓸데없는데 돈을 쓸려고 그래?
여기 남는 건 시간하고 힘 밖에 없는 인간이 셋이나 있는데..
놀면 뭐 하냐?
이럴 때 친구 위해서 한 몸 바치는 거지...
안 그래?"
소영이가 고개를 돌리자 세 녀석의 시선은 방향을 찾지 못 하고 떠도는 배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 소영아 그러지 마.
얘네들 약속이 있대.
그래서 그런 거야."
내 말에 순간 소영이의 눈에 날이 섰다.
" 약속이라고!...
쉬는 날마다 어디 공짜 술 얻어 먹을데 없나 매일같이 기웃거리던 놈들이 친구가 집 정리 좀 도와 달랬더니 갑자기 한날한시에 그것도 세 명 모두 다 약속이 있다 이거지?..."
소영이의 시선이 스칠때마다 세 녀석은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상황을 모면이라도 하려는 듯 창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소영아 너도 알잖아 김 과장...
그 인간이 갑자기 단합대회를 갖는다는 거야.
하여간 그인간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라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냐?
솔직히 말해서 나도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더 황당한게 뭔지 알아?
그 인간이 글쎄 단합대회를 낚시터로 가겠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되냐?
내가 낚시 엄청 싫어 하는 거 너희들도 다 알잖아.
나는 정말 죽지 못해 가는거다."
창배 말을 듣고 있던 소영이가 미덥지 않다는 눈빛을 흘리며 말했다.
" 낚시터가 어딘데?"
" 넌 말해도 모를 거야.
워낙 외진 곳이라...
주암리에 있는 칠곡낚시터라고...."
창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영이가 아는 척 하며 끼어들었다.
" 칠곡산 안쪽 깊숙히 있는 그 낚시터 말하는 거야?"
순간 소영이의 말해 창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소.. 소영이 네가... 거.. 거길 어떻게 알아?"
" 그곳이 내 친구 남편이 하는 곳이거든.
며칠 전에 통화 할 때만 해도 손님이 없어 걱정을 하던데.
잘 됐네.
너네 부서면 30~ 40명 되지?"
" 어.. 그.. 그 정도 되지...."
" 가면 꼭 내 이름 대라.
그러면 아주 잘 해줄 거야.
만약에 가서 내 이름 안 대면...
죽을 줄 알아...
알았어?"
소영이의 호통소리에 창배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잠시 상황을 살피며 두 눈만 깜빡이던 창배가 이내 어떤 결심을 한 듯 목소리에 한 것 힘을 주며 말했다.
" 내가 누구냐?
나 의리의 사나이 창배다 이거야.
친구를 위해서라면 간담회 정도는 재낄 수 있는 의리의 사나이가 바로 나다 이거지.
건우 너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 회사 다니는 거 알지?
내가 다 도와줄테니까.
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알았냐?"
창배의 말에 나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창배야.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 없어. 정리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그냥 간담회 참석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배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넌 입 닥치고 있어. 임마..."
눈알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이던 창배가 아차 싶었는지 잽싸게 소영이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 하하하~ 자식이 도와 준대도 그러내...."
잠시 후....
소영이의 시선을 느낀 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내가 부득이하게 빠질 수밖에 없는 건 우리 어머니 때문에 그러는거다.
생신도 챙겨드리지 못 하고..."
" 어머니 생신?
겨울 이잖아."
소영이 말에 말문이 막힌 길수는 얼버무리며 다시 말 했다.
" 그.. 그렇지 겨울이시지....
그러니까.. 그때도 챙겨드리지 못 했는데....
아버지 제사라."
" 제사는.. 두 달 후잖아."
" 그렇지! 두 달 후지...."
잠시 길수를 바라보던 소영이가 미심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런데 말이야.
너 어머님 몰래 적금깨서 주식투자 하다 홀딱 날린 거... 아직도 어머니가 모르시지?"
소영이의 갑작스런 말에 길수가 펄쩍 뛰며 말했다.
"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데...
그 일 어머니가 알면 그날로 난 끝장나는 거야.
내가 그거 메꾸려고 그 좋아하던 담배도 끊었잖아.
내가 하루에 세 갑씩 피던 거 너희들도 다 잘 알잖아.
그거 절대 어머니한테 말하면 안 돼.
어머니가 알면 나 진짜로 죽는단 말이야.
알았지?"
다급한 길수와는 달리 소영이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아니 얘가 왜 오바하고 그래...
누가 어머니한테 말한다고 그랬어?
어머니가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궁금해서 한번 물어본 건데 왜 이리 오바하고 그래...
그건 그렇고 그래서 내일 못 온다는 얘기지?"
소영이 말에 길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 아니 얘가 섭섭하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친구 건우가 다른 것도 아니고 집을 샀다는데 이 형님이 직접 가서 꼼꼼히 살펴 줘야지.
깜짝 이벤트야 며칠 늦게 한다고 큰 일 나는 것도 아닌데 뭐.
안 그래? 하하하~"
웃고는 있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길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영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현민이가 먼저 썰을 풀기 시작했다.
" 소영아.
그럼 내일 몇 시까지 모이면 되는 거야?
나는 퇴근하면서 토요일하고 일요일 시간 다 비워 뒀어.
오늘따라 주말에 뭘 하자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던지 거절 하느라고 혼났다.
나 잘했지?"
소영이는 얼굴 가득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래 현민이 잘했어요."
소영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황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민이를 창배와 길수가 도끼눈을 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사단이 현민이 저놈으로부터 시작 됐기 때문이었다.
[ 며칠 전 SNS ]
창배: 들었냐? 건우 집 샀대.
현민: 헐~ 대박
길수: 그거 뻥 아니야?
돈이 어디 있어서 집을사.
아직 학자금대출도 다 못 갚았다고 하던데...
창배: 진짜야 소영이한테 들었어.
거저다 싶을 정도로 싼값에 나왔대.
그래서 대출 왕창 받아서 샀다던데....
현민: 어쨌든 부럽다.
길수: 한턱 내라고 해야지.
현민: 잠깐만. 민수한테 전화 왔다.
창배: 무슨?
길수: 한잔 사라고 해.
현민: ㅇㅋ
창배: ㅋㅋ
[ 한참 후....]
현민: 어이 없는 놈이네.
길수: 무슨 일인데?
현민: 이사 들어가기 전에 집 손 좀 봐야 된다고 도와 달라고 그러더라.
창배: 그래서 간다고 했어?
현민: 미쳤냐.
이 몸은 급한 선약이 있다고 했지롱~
창배: 나도 민수한테 전화 왔다....
현민: 너도 못 간다고 해.
창배: OK
길수: ㅋㅋ
그랬던 놈이 혼자서 살겠다고 배신을 한 것이다.
그때 소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마음껏 먹자."
소영이 말에 창배가 주둥이를 삐죽거리며 말했다.
" 아니.. 건우가 집을 샀는데 소영이 네가 왜 술을 사는데?
뭐 그게 네 집이냐?"
" 그래!.. 그럼 창배 네가 사."
소영이 말에 창배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 야! 너희들 뭐 하냐?
오늘 소영이가 쏜대잖아.
자 소영이한테 박수...."
창배가 그렇게 자기 말을 주워 담는 사이 포장마차의 술병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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