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나라를 옥죄는 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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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나라를 옥죄는 족쇄
“지금 제물포에 남경에서 보내온 하사품이 와 있소이다.”
“......예?”
부름을 받고 급히 와서 들은 말에 영의정 홍서봉은 여러모로 이상한 말을 듣고 답지 않게 얼이 빠져서 되물었다.
‘명나라에서 하사품이 와? 어떻게? 거기에 남경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혹여 늙어 쇠하여 잘못 들은 것인가?’
혹여 자신이 무언가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든 홍서봉은 곁눈질로 좌의정 이성구와 우의정 최명길을 살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의 얼굴에 깃든 것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고민이 아니라 모름을 바탕으로 한 고민이었다.
또한 그들의 심정을 알고 있다는 듯 임금이 다시 말을 꺼내니 그제야 홍서봉은 제가 잘못 듣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제물포에는 막가외, 아니 불란국 사람들의 배가 와 있소이다. 그 배를 통해 남경에 있는 명나라 태자가 우리 조선에 하사품을 보냈소이다.”
상황을 조금 더 풀어서 이르니 그나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와 별개로 이상함은 여전했기에 홍서봉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소신은 어리석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여 몇 가지 여쭙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편한 대로 물으시오. 나도 이 일에는 마음과 생각이 복잡하니 그대들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동질감을 심어주는 말에 홍서봉은 살짝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끼며 가장 큰 의문을 꺼냈다.
“이건 명나라 황상의 뜻이옵니까?”
“아니오. 내가 살피니 이는 남경에 있는 태자가 단독으로 한 일인 듯하오.”
태자가 단독으로 벌였다는 말에 이치고 예의고 맞지 않는 일처리가 단박에 해명되었다.
조선 사람들, 특히나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언제고 명나라 사정에 귀와 눈을 두는 법이니 당금 명나라 태자가 어림은 홍서봉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는 이해하나 그 대책은 여러모로 심란함이 들었다.
홍서봉이 망설이고 있자니 그를 대신하듯 다른 사람이 나섰다.
“전하, 참으로 감사한 일이나 이는 도로 돌려주심이 맞는 듯합니다.”
“우의정은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렇습니다. 이 일은 명나라에서 조선을 잊지 않았음을 뜻하니 분명 기뻐할 일이요, 그들이 다시금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하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뿐이라고 단언한 최명길은 굳은 의지로 말을 이었다.
“제물포를 통해 전해진 하사품이 당장에 백만 군세가 되어 청나라를 막아줄 수 없다면 정묘년과 병자년의 일이 다시 되풀이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큰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명길이 하는 말을 들은 홍서봉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내심 동의했다.
‘우상의 말이 맞아. 이건 분란과 화의 씨앗이다.’
“.....허나 그렇게 하여 하사품을 돌려보내면 조정 신료들이나 사대부에게는 무엇이라 말할 겁니까?”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슬그머니 제 존재감을 내미니 홍서봉의 이목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함께 불려 온 좌의정 이성구는 그 목소리에 걸맞게 불안함과 걱정을 얼굴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불안함과 걱정을 그는 담아둘 수 없다고 하듯 재차 입으로 내뱉었다.
“이 나라에서 사대부라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좋아서 지금 관계를 두고 보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고 타파할 방책을 찾을 때까지 숙이는 것이지요.”
이성구가 하는 말은 홍서봉은 물론이고 최명길의 가슴에서 답답함을 심어주었다.
그가 하는 말이 소극적이거나 걱정투성이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이유가 전혀 아니 된다고 하진 않으나 그보다는 그 말이 사실이자 현실이라는 걸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삼사에서도 그렇고 육조 판서들 가운데도 여럿이 명나라에서 다시 손을 벌리고자 하면 심각하게 고민할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당장에 뒤도 보지 않고 옛 은혜를 갚자고 말할 이들도 있었다.
전에 병자년부터 정축년에 걸친 전쟁에서 명나라가 제대로 도와주지 않음에 더해 근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사이가 전과 같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음이 알려지면 혹여나 예전 만력제 시절과 같은 일이 다시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사대부들 마음속에서 피어날 게 뻔했다.
“받지 않음도 어렵고 받음도 어렵구나.”
임금이 하는 말이 세 사람에게 들리니 그들은 직위를 가리지 않고 그 말에 공감했다.
받으면 청나라를 자극할 것이고 받지 않으면 아직 명나라에 향수를 품은 이들을 자극할 것이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은 실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다시 묻자면, 좌상은 걱정은 있으나 받아들이자는 쪽이고 우상은 전쟁이 있을 수 있자니 받지 않다는 쪽인가?”
“그러합니다.”
“좌상이 하는 말이 일리는 있으나 당장 불만이 금세 닥쳐올 창칼보다는 낫다고 여깁니다.”
두 사람이 의견을 정하여 바뀜이 없음을 고하니 홍서봉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목울대를 움직였다.
‘진즉에 사직할 것을.’
“그러면 영의정의 의견이 중하다고 하겠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상했으나 빗나가길 간절히 바랐던 예상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런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내 만일 일주일, 아니 하루만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장에 사직할 것이다.’
부질없는 소망으로 답답함을 해소한 홍서봉은 천천히, 매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소신이 감히 말하자면, 받고서 덮어두는 것이 그나마 중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좋게 말하여 덮어두는 거지, 사실상 후일로 책임을 미룸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에 임금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 받거나 받지 않음을 정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고, 이는 비밀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말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듯 상은 그것을 시작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더욱 말했다.
“영상이 말한 것처럼 한다고 하자. 그렇게 하여서 나중에, 가령 십 년 어쩌면 더 빨리 사실이 드러나 오 년 정도 후에 알려진다고 하면 명나라나 청나라나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좋게 보아야 엎드린 박쥐에 불과할 것이다.”
“그, 그것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에 홍서봉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듯 들리는 말을 듣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또한 사대부들은 어찌 생각하겠는가? 명나라가 망했다면 정세에 밝지 않은 자들은 조정에서 은의와 의기를 잊어 명나라에 보은하지 못하고 망했다고 떠들 것이며, 청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다시 기세를 찾았다면 왕과 조정이 모두 어리석고 사욕에 급급해 정도를 버렸다고 할 것이다.”
“소, 소신이 어리석고 생각이 짧아 구차한 말을 하였나이다.”
있을 수 있는 일들에 홍서봉은 두려워하며 말을 꺼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아니나 정녕 그렇게 되면 조선은 그 종묘사직이 끝을 고할 수도 있고, 홍서봉은 아마도 수백 년을 이어온 왕조를 닫아버린 희대의 간신 혹은 난신으로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나중 일이 심하다면 아마 세간에서 회자되는 이름 가운데 망탁조의 다음으로 이름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들었고, 차마 보기 두려운 미래였다.
그런 그의 심경을 헤아리고 안쓰러워하였는지 살짝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으니 후일을, 후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고 힘들다고 하여 넘기는 일은 함부로 취할 일이 아니다.”
상은 그렇게 말하더니 홍서봉을 향해서 말을 덧붙였다.
“어찌 당장의 부끄러움을 면하고자 뒤를 힘들게 하겠는가. 굴레는 우리의 몫이지, 후대의 몫이 아니다.”
당장의 부끄러움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말에 홍서봉은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최명길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나 그 역시 주화가 길이라 여겨 척화를 주장하는 이들과 언성을 높였었다.
하물며 저들 군영에 드나들고 함이 있었음을 기억하니 당장 모면하고자 함이 그때와 같으면서 다름을 확 느꼈다.
당장의 위기를 넘기고자 함은 같으나 그 이유와 결과가 후일을 기약하자고 함과 후일로 미루자 함은 절대 같을 수가 없으니 그 부끄러움은 삽시간에 홍서봉의 몸을 벌겋게 달구었다.
‘이 홍서봉, 어리석은 일을 하였구나.’
자신이 어리석었다 생각하니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 꺼리던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동시에 머리가 기민하게 움직이니 입은 곧 그 생각한 말을 힘있게 내뱉었다.
“전하, 허면 받으나 받지 않은 것으로 하소서.”
“받으나 받지 않는다?”
“그렇사옵니다.”
홍서봉이 하는 말에 상은 그를 보며 흥미를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시오.”
“사람이 어찌 받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받되, 당장 명나라가 어지러우니 이러한 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십쇼. 하여 그대로 돌려보내어 이것들이 명나라, 아니 대명이 다시 바로 서는 일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하면 명나라는 물론이고 그들을 아직 마음에 그리는 사대부들도 누구 하나 그릇되다 여겨 화를 품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최명길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묘안입니다. 이렇게 하면 명나라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여전히 지극하다 여길 것이며, 청나라에서는 이러한 변명으로 자신들의 눈치를 살핀다고 여길 것입니다.”
최명길이 이렇게 말하니 자신도 여기에 함께 말을 올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는지 이성구가 말을 보태었다.
“실로 좋은 대처입니다. 나라가 강성하다면 모를까, 당장은 스스로 돌보기도 어려우니 멀어지지 않되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처신이 아닐까 합니다.”
“......처신, 처신이라.”
이성구가 하는 말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홍서봉은 혹여 상께서 다른 마음이 드신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홍서봉은 기왕 내친김에 꺼림이 없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굳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혹여 재물을 아쉬워하신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재물이라? 그런 것은 아쉽지 않다. 하지만 그대들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한동안 저들과 거리를 두어야 하며, 그것은 교역이 멈춤을 의미한다. 아니면 극히 적은 교류만 이어지거나 말이다.”
교역이라는 말에 홍서봉이 잘 몰라 우물쭈물하니 대신하듯 최명길이 나서서 말을 아뢰었다.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나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목을 내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보장되지 않은 이득이라면 말할 가치가 없다 하겠습니다.”
“보장되지 않는다? 재밌는 말이다.”
재밌다는 말에 홍서봉을 대신하여 나선 최명길은 물론이고 홍서봉이나 이성구 역시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하며 상을 바라보았다.
“보장되지 않은 것을 사람은 믿고 움직이며 노력하지. 과연 명과 청, 두 나라는 어떠할 거 같은가?”
“물으시는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소신 역시 상께서 품으신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소신도 두 분 정승과 같습니다.”
세 정승이 각각 알기 어려움을 호소하니 이맛살을 찌푸린 임금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우려하는 것은 영의정의 의견은 좋으나 그것 역시 한 때에 그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소이다. 돌려보낸 것을 좋게 여겨 이 정도는 괜찮으니 받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받아야 하지 않소?”
묻고 난 후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쐐기를 박듯이 말이 이어졌다.
“거절을 여러 번 하는 것도 예가 아니며, 그 저의를 의심받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그렇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기에 홍서봉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임금은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듯이 또다시 부정할 수 없는 말을 건넸다.
“또한 하사품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 산림에 있는 고루한 이들을 격동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인다.”
“전하, 저희는 헤아림이 작아 뜻하신 바를 모르겠으니 부디 전하께서 품으신 뜻을 소신들에게 일러주소서.”
홍서봉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니 임금은 굳이 감출 생각이 없다는 듯 곧장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재조지은을 잊지 않았소.”
지금까지와는 다른 말에 정승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과연 뜻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그들은 곧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일들은 사람으로서 보은하기 위해 당연한 일이고, 유학자로서 당연한 일이었지. 그러나 정묘년을 겪고 병자년을 겪으니 나는 그 보은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면서 동시에 나라를 옥죄는 족쇄라는 걸 깨달았소이다.”
보은은 마땅히 하되 나라를 옥죄는 족쇄라는 말에 정승들은 말을 잃었다.
조선에게 있어서 그건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는 조선이 보은을 남에게 베푼다면 모를까, 받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하오. 하여 이번 일을 토대로 오히려 저들에게 보은을 베푸는 일로 삼고 싶소이다.”
상이 꺼내놓은 말에 홍서봉, 최명길, 이성구 세 사람은 각각 개인적인 성향이나 생각을 떠나서 그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받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쪽이 되어야 한다.
“허면 이번 일에 어찌 행할 생각이십니까?”
“영의정의 말을 듣고 깨달았소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사품이 하사품이 아니게 하는 것. 나는 이번에 온 하사품을 하사품이 아닌 ‘빌린 것’ 혹은 ‘맡은 것’으로 하고자 하오.”
- 작가의말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kkatnip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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