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화. 내 동생 구제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시장을 봤다. 제일이는 엄마가 해 준 제육볶음을 좋아했다. 얇게 썬 고기를 고추장에 버무렸다. 된장찌개도 끓이고 나물도 조물조물 무쳤다.
”탁. 탁. 탁. 탁."
오랜만에 도마 소리가 집을 채웠다.
바쁘게 움직이며 생각을 떨쳐내고 싶지만, 생각처럼 되질 않았다.
‘제일이에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어떻게 살아왔는지. 개고생하며 지낸 건 아닐지. 날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여러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이 동네에서 여태까지 이 집을 지켜가며 산 것은 오직 동생 때문이었다. 난 동생에게 큰 빚을 졌다. 나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처음엔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동생에게 화도 났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어주며 같이 미친 사람이 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두부를 깜빡했네. 된장에 넣어야 하는데···.“
<야! 구제일! 가서 두부 좀 사와.>
<아. 짱나. 엄마가 누나한테 시켰는데 왜 떠넘겨!>
제일이의 목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난 수저로 의미 없이 된장을 뒤적이며 옛 추억에 잠겼다.
*****
<이게. 죽을라고! 누나가 시키면 재깍재깍 튀어와야지. 국민학생이 싸가지없이.>
<진짜! 고작 두 살 많으면서 꼰대 짓이야.>
<잔말 말고 갔다 와라. 뒤지기 싫으면. 꼽냐? 그럼 먼저 태어났어야지!>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터벅거리는 동생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어딜 덤벼. 성장이 느려 키가 작았던 동생은 내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나에게 맞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원희야. 두부 반 모 사 왔니? 엄마가 언제 시켰는데 아직까지 안 사 온 거야?>
가까운 슈퍼에 간 동생이 30분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나는 신경질을 내며 동생을 찾아 나섰다.
<이 새끼. 딴짓하고 있는 게 분명해. 잡히면 가만 안 둬.>
뭐 하느라 늦는 건지. 문방구 앞에서 쪼그려 앉아 게임이라도 하고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생각으로 나는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골목 코너를 도는데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파요. 진짜 돈 없어요.>
구석진 곳에서 동네 양아치들에게 맞고 있는 동생의 목소리였다. 난 한달음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야! 니네 뭐하냐! 뭔데 내 동생 때려?>
<얘가 니 동생이냐? 그럼 니가 대신 돈 좀 주고 얘 데려가라.>
주저앉아 울고 있는 동생 옆엔 으깨진 두부 반 모가 투명 봉지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동생을 일으켜 세우고 형체를 잃은 두부가 담긴 봉지도 추슬러 집어 들었다.
<야. 누나랑 가자.>
<가길 어딜 가? 돈 가진 거 있으면 내놓고 가라.>
<씨발. 니네 감당할 수 있냐? 우리 아빠 오늘 출소하셨다. 이거 아빠 주려고 산 두부야. 지금 슈퍼에서 소주 사고 계셔. 내가 소리치면 바로 달려올 텐데.>
<구라치고 있네. 여자라고 안 봐준다. 죽을래?>
<교복 보니까 우리 학교 옆 남중인 거 같은데, 일 커지기 전에 가라. 내가 소리쳐보면 진짜인지 아닌지 알겠네. 조심해라. 우리 아빠 어떤 개새끼가 꼬질러서 빵에 갔다 왔다고 화가 많이 나 있어.
사람 죽기 직전까지 때리는 거 우리 아빠 특기인데,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어쩌면 죽일지도 몰라. 진짜 부른다. 아! 빠! 아빠!!>
나는 목이 터지라고 아빠를 불렀다. 그 사이 그 새끼들은 바닥에 한 번 침을 퉤 뱉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내달렸다.
<이 바보야. 왜 거기서 당하고 있냐! 병신새끼.>
뒤통수를 후려치는 나를 동생은 쏘아봤다.
<아이씨! 또 이렇게 때릴 거면 뭐 하러 구해줬어! 그 쌔끼들한테 맞으나, 누나한테 맞으나! 내가 동네북이야?>
<이 새끼가. 그걸 말이라고 해? 구해줬더니만. 넌 나만 때릴 수 있어. 다른 놈이 내 동생 때리는 건 절대 못 봐. 다 가만 안 둬.>
튀어나온 나의 진심에 제일이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런 동생을 뒤로하고 골목을 저벅저벅 걷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 날 엄마는 아깝다며 으깨진 두부를 깨끗이 헹구어 된장에 넣었다. 네모반듯하지 않아도 두부 맛은 좋기만 했다.
*****
”딩동. 딩동“
”어? 벌써 왔나? 이걸 어째. 제일이니? 내 동생 제일이 맞아?“
나는 현관을 박차고 작은 마당을 내질러 대문으로 향했다. 대문을 활짝 연 나는 생각지 못한 상황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 점장님. 여긴 왜 온 거예요? 나한테 볼 일이 남았나요?“
마트 점장은 울그락 불그락 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띤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니 년 집에 불 켜질 때만 기다리고 있었지. 니가 감히 나를 엿 먹여? 사람들이 네 말을 믿을까? 내 말을 믿을까? 날 협박할 영상도 삭제한 마당에 이제 어쩌나···.
너 이제 이 동네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어줄게. 너에 대한 괴담을 생각 중이야. 잘 듣고 골라 보도록 해.“
”저리 가요. 당신이랑 할 말 없어요.“
”동생을 기다리나 본데, 잘 되었네. 그 동생이랑 이 마을을 뜨면 되겠어. 떠난 남자 못 잊고 남의 남편 홀리는 색에 미친 여자 이야기를 퍼트릴까? 아님. 이건 어때?
너 외계인 잡종을 낳았다며? 그게 말이 되냐? 참나. 어쨌든, 그 아이 못 잊어서 아이들만 보면 납치해 니네 집 비밀 창고에 가두고 몹쓸 짓을 한다고 소문을 낼까?
어떤 게 맘에 드시나. 구원희씨. 미친년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은 없을 테고. 소문 돌기 시작하면 넌 이제 끝이야. SNS 괴담으로 시작하는 게 낫겠지? 네 사진 좀 곁들여서 말이야.“
점장은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 얼굴을 찍으려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저리 치우지 못해? 이 개새끼야!“
두 손을 바둥대며 소리를 치는 날 보며 마트 점장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거야. 더 지랄 좀 해봐. 이 영상 올리면 제대로겠는걸?“
신나서 동영상을 찍고 있는 마트 점장의 손에서 누군가가 재빨리 휴대폰을 낚아챘다. 번개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점장은 황당해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 놔. 씨발! 뭐야?“
검은 양복 차림의 건장한 보디가드가 점장을 매섭게 내려봤다.
”꼴깍.“
점장은 허옇게 굳은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 분만 봐주신다 해도 끝까지 힘내서 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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