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그날1>
원희씨?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나요? 이것 좀 먹어봐요. Helf yourself.”
제니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식탁 위엔 베이컨을 넣은 샌드위치가 접시에 예쁘게 담겨 있었다. 제니퍼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향긋한 커피도 한잔 건넸다. 미소로 감사 인사를 한 뒤 나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배가 고파 금방이라도 한 접시 다 비울 줄 알았는데···.
내 품 안에 아직도 안겨져 있는 듯 생생히 기억나는 아이의 신비한 눈동자 때문에 목이 메어 얼마 먹지 못했다.
“당신 딸의 눈동자를 보니 제가 낳은 아이가 떠올랐어요. 오드아이였죠. 한 번만이라도 다시 안아볼 수 있다면···. 당신은 가끔이라도 딸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나는 잘 삼켜지지 않는 음식을 넘기려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사실 그리움에 튀어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려 커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쓴 커피 한 모금에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첫 대면에 눈물부터 보인다면 제니퍼마저 날 미친 여자로 볼지도 몰랐다.
“아이가 있었군요. 당신 이야기가 궁금해요. 유튜브를 보고 외계인 납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잖아요. 당신에게도 어떤 사연이 있는지 들어보고 싶었어요. 더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도 내 팬이 있다는 사실이 날 들뜨게 했죠. 그래서 만날 약속도 잡았고요. 얘기해 봐요. 원희 씨.”
20년 동안 아무리 말해도 누구도 믿지 않았던 이야기.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이야기. 나의 전부가 되어버린 스물다섯 살 그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니퍼는 내 앞에 바짝 다가와 앉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바람은 쌀쌀해도 햇볕이 좋은 겨울날이었어요. 나는 대학교 졸업을 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죠. 정확하고 이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에 딱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집과 도서관에서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답답하더군요. 그 날은 금요일이었는데, 먼저 취직해서 직장을 다니던 유아리라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원희야. 공부하느라 힘들지? 오늘 하루만 나와. 친구들도 너 짱박혀서 공부만 한다고 난리다. 사람이 좀 풀어질 때도 있어야지. 너무 꽉 막혀 있어도 안 돼. 너 정도 실력이면 시험 붙고도 남으니까 잠깐 나와. 내가 한잔 살게. 오늘 다 나온대.”
그 말에 흔들린 게 모든 일에 시작이었죠.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오랜만에 외출을 한 거예요.
“구원희! 이렇게 얼굴 보니까 얼마나 좋아. 머리를 가끔 비워야 다시 채우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안 그래?”
“그래. 답답하던 차였는데, 불러줘서 고맙다. 오늘 하루만 실컷 수다 떨고 내일부터 다시 의자에 꼼짝 않고 붙어 있으면 되겠지. 나도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고 그래. 미란이처럼 돈 걱정 없는 남자한테 시집가는 게 답인가 싶다가도 그렇게 도피성 결혼하긴 싫고. 열심히 준비해서 탄탄한 직업부터 갖고 싶어.”
“그래. 미란이는 팔자가 폈다던데? 싸이월드 봤어? 나 걔랑 일촌이거든. 이번에 둘째 낳았나 봐. 하긴, 남편이 나이가 많지? 부지런히 낳아야겠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스트레스를 날리고 있었죠. 물론 맥주도 기분 좋을 만큼 먹었어요. 한창 떠들고 있는데 그 새끼가 나타났죠. 고등학교 때 날 따라다니던 정신 못 차리는 한심한 새끼.
“뭐야? 니가 여기 왜 와?”
전 차갑게 그놈을 쳐다보며 말했어요.
“어~ 내가 불렀어. 너도 기억하지? 남 근우. 아이러브스쿨에서 만났어. 쟤 요새 잘나가거든. 맛있는 것 좀 사달라고 불렀지. 너희 요새 신도시 짓는다고 난리 난 거 알지? 쟤네 아버지가 개발지에 땅이 캡 많았나 봐. 복 받은 놈이지.”
유아리가 불러낸 거였어요. 주둥아리!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쓸데없는 말로 문제를 만들더군요.
남 근우는 자신이 졸부가 된 것을 이제야 들었냐는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자리에 앉았어요. 내가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죠. 허세만 가득 차고 대가리엔 똥만 들었으면서 뭐라도 되는 양 여자한테 강압적인 스타일. 그렇게 센 척하면 여자가 ‘깨갱’ 하며 따라올 줄 아는 멍청한 놈. 그런 새끼한테 이제 돈까지 두둑이 생겼으니 어떤 주접을 떨지는 안 봐도 훤했죠.
“나 오는 거 다들 모르고 있었어? ”
“나 먼저 일어나야겠다. 근우 너 올 줄 알았으면 오늘 안 나왔지.”
저는 기분이 상해 먼저 일어나려고 했어요. 근우는 내 팔을 잡아끌어 강제로 앉히고는 피처 잔에 있는 맥주를 한 잔 따라 마시더군요.
“야. 구원희. 아직도 쌀쌀맞은 건 여전하구나? 그런데 있잖아. 나 이제 옛날에 내가 아닌데. 너한테 관심도 없다고. 얼굴은 반반해도 너같이 꽉 막힌 여자 좋아하는 남자 없을걸? 적당히 맞춰 주기도 하고, 하자는 대로 따라 주기도 하고 그래야 맛이지. 안 그러냐? 아리처럼 말이야. 이리 와봐.”
남 근우는 내 앞에서 유아리에게 키스를 했어요.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 모두 깜짝 놀라 눈이 둥그레졌죠.
“맞아. 우리 사귀어. 내 남자친구 소개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어 주면 안 되겠어? 어차피 거의 다 마셨으니 다 같이 일어나자. 너 지금 나가면 서운할 거 같다. 구원희.”
난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아리가 왜 그런 놈을 사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내가 그 자리를 뜨면 여러 오해가 생길 것 같아 조금만 참기로 마음먹은 거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때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어쨌든 곤욕스러운 그 새끼 돈 자랑을 한 시간은 더 듣고 나서 집으로 갈 수 있었죠.
차 자랑을 하려는 건지 굳이 여자 세 명을 모두 데려다주겠다며 남 근우는 우리 모두를 차에 태웠어요.
“야. 나 맥주 한 잔 밖에 안 마셨으니까 괜찮아. 아리 친구들이니까 극진히 모셔야지. 니네 먼저 내려주고 난 아리랑 할 일이 있어.”
“어우 진짜! 꼭 그렇게 티를 내.”
아리의 목소리는 낯설 정도로 애교가 섞여 있었죠. 아리가 조용히 내게 말했어요.
“야. 구원히. 니가 몰라본 다이아몬드. 이제 내꺼다. 나라고 미란이처럼 살지 말란 법 없잖아. 난 더 좋지. 미란이 남편보다 젊어서 많이 밝히거든.”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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