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화. 아이가 움직여요.>
“아. 안녕하세요. 장한별 씨. 당신이 장관인 줄 몰랐어요. 이렇게 어린 장관이 우리나라에 있었나? 나만 몰랐던 거예요? 아무튼, 알렉의 친구라니. 반갑군요. 그런데 외계 외교부는 뭐예요? 혹시···.”
“말 그대롭니다. 당신이 만났던 캐플러 438-B 행성의 종족, 아! 그들은 자신을 샬마라 부르죠? 샬마인과 같은 외계인, 그들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기관이죠.”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 모든 장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속부터 시원하다 못해 짜릿했다.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야기를 저렇게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내 말이 진실임을 아는 한국 사람을 만난 것이 기쁘다가도 화가 났다. 난 여태 무엇을 하며 살아온 걸까. 미국에 다녀오기 전엔 나도 나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었는데···.
“그 일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한다고 예상은 했지만 다른 사람 입에서 샬마의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오묘하군요. 나는 평생을 그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지만 가족조차 믿지 않았죠. 다른 사람 입에서 샬마라는 단어를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지난 세월 외계 외교부에서 승인했던 비윤리적인 실험에 대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 무척이나 놀랐던 보고였습니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주시죠. 당신의 기억이 필요합니다. 저들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있어야 하죠.”
나는 장한별 장관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죠? 샬마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혹시 우주 전쟁을 준비해요?”
“전쟁이요? 아. 아닙니다. 그들은 안전해요. 우리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죠. 전쟁은 다행히 행성 간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요.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1급 기밀이에요.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수 있죠. 결국엔 모두 알게 될 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그때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나요?”
“그러니까 내 얘기를 듣고 싶다는 거죠? 이런 날도 다 오네요.”
나는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20년 전 이야기를 장한별에게 털어놓았다. 누군가 녹음을 해가며 나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는 것이 어색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 오드아이 이야기를 할 땐 어김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익숙한 것들이 휘몰아치던 내 마음을 차분히 안정시켜 주었다. 장한별 장관은 이야기를 듣고 나를 위로했다.
내가 그렇게 그들을 사랑한 대가로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피곤했다. 얼른 내 침대에 벌러덩 눕고 싶었다. 2층으로 올라와 창문 커튼을 젖히자 어둠 속에서 나를 경호하는 사람들의 차가 보였다.
장한별 장관이 말해줬다. 내일이면 제일이를 집으로 데려올 거라고. 동생을 위해 내일 이것저것 반찬이라도 해 두려면 얼른 눈을 붙여야 했다.
여행의 고단함을 씻고 싶어 따뜻한 물을 틀었다. 얼른 옷을 벗고 샤워기 안으로 뛰어들었다.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물결이 부드러웠다. 샤일로의 손결처럼. 20년이 지났어도 잊을 수 없었다. 아니 더욱더 생생해졌다. 나는 샤워기 아래에 서서 샤일로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
<샤일로. 당신은 정말 바보 같아요. 어쩜 그렇게 솔직해요?>
<솔직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드네요. 내가 느낀 당신의 언어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뭐죠? 지구인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나요?>
우리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하루 종일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주파수를 맞췄다. 서로에게 집중하면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지구인들은 자신의 마음을 숨길 때가 많아요. 왜 그럴까요? 나도 그렇죠. 약해 보이기 싫어서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해요. 상처 받을까 봐 내 신경이 온통 쏠려있어도, 관심 없는 척하기도 하고요.>
<그럼, 추측이 문제네요. 지구인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요.>
<말이 되네요. 난 당신이 그래서 좋아요. 내 생각을 읽어버리니 날 어떻게 생각할 지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리고 당신은 솔직히 모든 것을 말해주니 추측할 필요도 없네요.>
반짝이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난 두려움이 사라졌다. 낯선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생체 실험까지 당하고 뱃속에 그들의 씨앗을 품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나에게 주파수를 맞춰 준 그가 있었기에. 샤일로는 나를 보호하고 감시하는 샬마인 감시관이었다.
<아!>
내 몸에 배아를 이식한 지 6개월이 지나자 뱃속 아이의 움직임에 꽤 힘이 실렸다.
<왜 그러나요? 수치들은 별 이상이 없는데.>
<아이가 움직여요. 발로 찼어요. 저번보다 꽤 컸는지 이제 아파요. 신기해요. 만져봐요. 아이가 느껴져요.>
나는 샤일로의 손을 잡아끌어 내 배로 가져갔다. 샤일로는 어떤 감정의 변화도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다.
<샤일로. 어떻게 아무렇지 않아요? 당신 아이잖아요. 당신의 유전자로 만든 배아라고 하지 않았나요?>
<우리에겐 그런 개념이 없어요. 난 유전자를 제공해야 하는 샬마인의 의무를 했을 뿐이고, 당신 뱃속 아이는 우리 종족의 새로운 구성요소일 뿐이에요. 우리는 시스템을 위해 살아가요. 개인적인 감정이나 욕심은 없어요.>
그들 종족의 특성이야 몇 번이나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인간인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을 숨기고 신기한 척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됐어요! 이제 잘래요. 나가봐요. 샤일로씨. 쳇! 짜증 나. 가서 나에 대해 보고나 하라구요. 샤일로 당신의 차가운 얼굴을 보니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하네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잠깐 자리를 비켜 줄게요. 그 전에 당신의 맥박이 빨라져서 체크를 해야겠어요.>
푹신했던 침대가 딱딱해지며 내 몸을 결박했다. 하루에 몇 번씩 그들은 내 몸을 체크했기에 난 순순히 침대에 몸을 맡겼다. 냉정한 샤일로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 앞에선 난 항상 실험체일 뿐이었다.
자유롭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인공지능 침대가 나를 스캔했다. 검사 결과가 샤일로의 차트로 전송되고 있었다.
’어!‘
침대가 스캔을 마치고 푹신해지고 있었다. 다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렇지만 난 결박당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렇게 냉정하던 샤일로가 내 배에 살며시 손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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