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동네 미친 여자 3>
“딩동. 딩동”
짜증스럽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늦은 시간에 누구지? 아래층으로 내려와 인터폰 화면에 비친 얼굴을 확인했다. 어라? 마트 점장이다.
저 새끼 시커먼 속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배짱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점장님. 여긴 어쩐 일로···.”
“일찍 퇴근하길래.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와봤지.”
저놈이 날 취직시켜 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다크 써클인지 검버섯인지 눈 주위를 둘러싼 어두운 기운. 두꺼운 쌍꺼풀을 껌뻑일 때마다 반만 드러나는 눈동자를 보고 눈치챘다. 음흉한 새끼. 여자들이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야한 농담이나 찍찍 던져대는 한심한 놈.
“문 좀 열어주겠어? 사장이 당신 얘길 해서. 좀 복잡하게 될 것 같아. 얘기가 길어서 얼굴 보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야.”
사장이? 분명히 마트 이미지가 어쩌고저쩌고. 날 자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기에 쉽게 예상이 됐다.
“들어오세요.”
난 문을 열어주고 주섬주섬 책들을 정리한다. 우주, 외계인과 관련된 것들을 최대한 안 보이게 구석에 쑤셔 넣었다.
“아이고. 구원희씨.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네! 집이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 좋은데 사는구만. 오래되긴 했어도 대지 면적이 꽤 되겠어! 설마 원희씨 집이야?”
그래! 내 집이다! 니가 무슨 상관인데? 왜! 내 집이면 어떻게 등쳐먹을까 머리 좀 굴려보시게? 시커먼 점장의 눈이 오늘따라 더 기분 나쁘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친척이 잠깐 빌려준 집이에요. 그런데 저희 집은 어떻게 아시고···.”
“아! 그럼 그렇지. 이력서에 주소 있잖아. 그래도 점장인데 직원이 어디 사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안 그래?”
“네. 사장님이 뭐라시던가요?”
“뭘 그렇게 급해.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천천히. 뭐 좀 마시면서 말야. 집에 맥주 있나?”
내 집에 궁둥이를 붙이겠다고? 맥주? 성격 같아서는 본론만 말하고 꺼지라고 하고 싶지만, 제니퍼를 만나야 했다. 간신히 그녀와 연락이 닿았는데···.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몇 달 더 일해야 했다. 지금 마트에서 잘리면 한동안 돈벌이는 못 할 것이 뻔하다. 있는 돈 까먹으며 지내겠지. 그럼 다 허사로 돌아갈 게 뻔했다.
“흠.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는 캔맥주 하나를 가지러 부엌으로 향했다. 내 가슴을 지나 엉덩이로 이어지는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메스꺼웠다.
“역시. 술은 여자가 줘야 제맛이지! 잘 주는 여자가 좋아. 술 말이야.”
쓰레기 새끼. 니 뜻대로 될 것 같아? 싱크대 유리창으로 점장을 비춰봤다. 그는 내 엉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왼손으로 신문을 주워들더니 사타구니를 가렸다. 내가 창으로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오른손을 바지 속에 넣어 자기 것을 조물거렸다.
‘변태 새끼. 성격도 급하네. 너 오늘 잘 걸렸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어디 한번 당해봐라 이 새끼야.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가 허리를 숙이자 점점 허벅지 위로 올라가며 짧아졌다. 잘 보이냐? 다시 한번 일부러 물건을 떨어트리고 다리를 최대한 굽히지 않으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는다. 점장의 눈은 선명하니 커졌고 조물거리는 손이 바빠졌다. 호흡 소리도 가빠졌다. 이쯤이면 됐다.
“사장님이 저 자르라고 하시는 거죠? 하긴 맛이 간 여자가 캐셔를 하면 마트 이미지가 좋진 않을 거예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바지에서 손을 뺄 시간은 줘야지.
“아···. 아. 그래요. 그 말 하려고 왔지. 어쩌겠어.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은 건 원희씨도 알지? 그 정도 인지는 하는 사람이니까 일도 시킨 거고.”
최저 시급보다 싸게 줘도 일한다니까 날 고용한 거잖아. 몇십만 원이라도 니가 중간에서 뜯어 먹으려고. 선심 쓰는 척하며 나한테 작업을 걸어보려는 심산인 거 내가 모르는 줄 알겠지? 나는 쟁반에 캔맥주 하나와 물 한잔. 과일과 과도를 담아 들고는 뒤돌아 점장이 있는 거실로 향했다.
“제가 업무에서 차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근무시간 한 번 어긴 적도 없구요. 점장님이 그런 이야기 좀 잘 해주세요.”
“그래서 말이야. 나도 돕고 싶어. 사람들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얼마나 외롭겠어. 우리 불쌍한 원희씨. 일은 잘 해도 보아하니 아직 정신이 돌아오진 않은 것 같은데···.”
점장은 쿠션 뒤에 숨겨 둔 <지구에 사는 렙틸리언의 충격적 모습>이라는 잡지를 집어 들고 나를 바라봤다.
“아직도 공상 속에서 살고 있나 보군. 뭐. 난 그런 원희씨가 싫지 않아. 독특하잖아. 잘 들어. 원희씨. 상황판단은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은 있어 보이니까 말야.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내가 사장 잘 설득해서 계속 일 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내 비밀 애인이 돼주라. 외로운 사람들끼리 의지하며 살자고.”
점장은 캔맥주를 까서 꿀떡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셨다.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사를 읊는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물 한 잔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점장님. 제가 과일을 잘 못 깎아서요. 앞에 있는 과도로 사과 좀 깎아주시겠어요?”
내 말을 들은 점장은 내가 제안에 승낙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는지 화색을 했다.
“그래. 그래. 못 할 것도 없지.”
오른손에 과도를 움켜쥔 점장은 신이 나서 과일을 깎았다. 나는 물컵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점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이 변태 새끼야. 사귀려면 공개적으로 사귀지 왜 비밀 애인이냐? 왜? 반반한 동네 미친년이랑 공개적으로 떡 치는 사이는 되기 싫은가 보지?”
“...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점장은 많이 놀랐는지 왼손에 든 깎다 만 과일을 떨어뜨렸다. 나는 잘 됐다 싶어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나자빠졌다.
“뭐 하는 거야? 놀란 건 나인데 왜 니가 나자빠져?”
나는 겁먹은 표정을 유지하는 것을 잊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현관 천정을 봐. 이 새끼야. CCTV 보이지? 동네 미친년으로 사는 게 어떤지 알기나 해? 걸핏하면 돌 던지고 오물 갖다 놓고. 주거침입도 빈번하게 있지. 어디선가 열 받았을 때 미친 짓 하기 딱 좋은 대상이 나야. 내가 미친 건지 너희가 미친 건지 가끔 헷갈려. 싹 다 고발했어. 나도 살려고 온통 CCTV를 달아놨지. 너 우리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다 찍혀있어.”
“이거 진짜 돌아도 한 참 돌았네. 그래서 뭐! 내가 뭘 어쨌는데! 어차피 저건 녹음도 안 되는 거잖아. 직장 동료로 찾아왔을 뿐인데.”
“아! 내 뒷모습 보며 은근슬쩍 네 똘똘이를 주무르는 장면을 보면 경찰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지금 이 장면은 니가 과도로 날 협박하는 거로 보일 텐데 말이야. 니 말대로 목소리는 녹음되지 않으니까.”
점장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과도를 내 팽개쳤다.
“울며불며 옷이라도 벗어 줄까? 지금 이 장면 내 핸드폰 앱에서 다시 보기 가능하거든? 녹화 떠서 다 뿌릴까? 아니야. 나도 널 돕고 싶어. 얼마나 외롭겠니. 여자 가슴 주물러 본 게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목구멍까지 올라왔지? 그러니 외로운 사람끼리 의지하자고. 내가 너 봐줄 테니 너도 나 계속 일하게 만들어. 어차피 오래 있을 건 아니니까.”
“미친년.”
“빨리 나가 변태 새끼야. 나 진짜 돌았거든? 무서운 거 없어.”
점장은 거실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그러게 괜히 건들긴 왜 건드려! 안 그래도 간신히 참고 사는 사람을···.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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