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싫지만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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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있네.. “
라티안과 피렌, 아리나는 어느 순간부터 긴장감 없이 걸어가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검은 토끼를 찾아다니는 놀이랄까..
“ 하아.. 정말.. 어딘가에서 기회를 노리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나아가는 건 우리 셋이라서 각오를 했었는데.. 이래서야 원.. “
상대가 계속 부활해서 다가온다면 아무리 강한 앨리스와 춘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
모두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본 결과, 부활은 어느 장치에 의해 행해진다고 결론을 내었으며, 그 부활 장치의 위치를 찾아 부수기 위해 크람의 지하를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춘향의 마나인 검은 토끼가 마치 이쪽으로 오라는 듯 라티안 일행을 유도하기만 했다.
최대한 사람들을 피해 이동하거나, 춘향이 모두 죽여버릴 시간을 벌기 위해 검은 토끼를 따라 대기하거나, 길을 돌아가기도 한끝에 어느 벽에 도착했다.
검은 토끼는 라티안 일행과 함께 벽 앞에서 앞발로 벽을 긁고 있었다.
“ ..벽을 긁고 있는 거로 봐서 이쪽이라는 건가? “
왠지 그런 것이 맞다고 느껴질 때쯤 아리나는 굉장히 화가 났다.
“ 아니.. 애초에 길을 알고 있었으면 직접 안내하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우리보고 찾으라 마라 그러는 거야? 야! 듣고 있지?! “
“ 쉿! 아리나! 목소리가 너무 커! 들리면 어쩌려고··· “
“ 아하하! 괜찮아! 이 벽 생각보다 방음 잘되더라고! 그리고 이 주변은 이미 싸악~ 정리했지! “
숨어있겠다던 춘향이 어느새 나타나 아리나의 볼을 꼬집고 있었다.
“ 아악! 야 이거 안 놔!? “
“ 누구는 열심히 싸우면서 정보를 알아내서 길잡이를 하고 있는데, 요 귀여운 제자가 스승을 음해하니까 벌을 줄 수밖에~! “
“ 끄아앗..! 따가워..!! “
아리나의 손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자 춘향이 세 걸음 뒤로 물러나서 웃는다.
“ 아하하! 아무튼, 우리가 깊게 침투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이곳에는 꽤 강한 적들이 있을지도 몰라~! 벽 크기로 봐서 방도 꽤 커 보이고.. 뭔가 기운이 심상치 않아~! 그럼 난 다시 숨는다! “
기운이 심상치 않다..
마치 별자리가 심상치 않다고 했던 춘향의 말버릇이 생각나는 바람에 순간 믿지 못할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적진 한가운데에서 거짓말은 안 하겠지..
“ ..자. 가자.. ‘ 문 열어 ‘ “
-문이 열립니다.
피렌의 가장 가까운 벽이 열리더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되었다.
그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가자 넓은 홀이 눈에 들어왔으며, 끝쪽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캡슐과 함께 동그랗고 굵은 선이 이곳저곳 이어져 있었다.
아마 저 선은 마나를 공급하거나 받는 관인 모양인 듯하다.
“ 저거 누가 봐도 수상한 장치 아냐? 우리가 노리는 장치일지도 몰라..! “
“ ..그러게.. 네이엘레케가 생각나는 기분이야.. 뭔가 튀어나오진 않겠지? “
“ 그때처럼 주변에 미리 기다리고 있거나 하지는 않네! 빨리 부숴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자! “
라티안과 피렌, 아리나가 멀리서 캡슐을 살펴보며 한마디씩 하자 문 뒤에서 춘향이 이마를 친다.
‘ 으.. 이 자식들.. 왜 죄다 플래그를 세우는 발언을··· ‘
“ 하~암.. 이제서야 온 거야? 머리는 좋은데 몸은 잘 못 쓰는 타입? “
‘ 이거 봐.. 하아.. ‘
라티안과 피렌, 아리나는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 야만인들도 아니고.. 바로 그렇게 싸울 생각을 하는 건 너희들의 특기니? “
“ 특기는 아니지만, 얌전히 죽을 생각은 없거든. “
살짝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역시 라티안과 아리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피렌이 가볍게 받아쳐 준다.
“ 오호라.. 그렇군.. 난 선택받은 네번째기사 벨라 멜리테인이라고 한다. 너희는? “
순간 아주 강렬했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페인레리트도 네번째라고 했던 것 같은데..
“ 네번째?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
“ 아~ 그랬나? 잘 모르겠네~ 그래서? 지구는 야만스럽고 예의란 것도 없나? 이름도 밝히지 않네. “
벨라는 사실 이름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신경을 살살 긁을 겸 물어보았던 것이 제대로 먹혀든 느낌이었다.
“ 라티안. “
“ 피렌이다. “
“ ···.네이렌 아리나. “
이렇듯 알아서 정보를 다 불어주지 않는가.
적어도 저 세 명 중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자는 없다는 것을, 그렇게 강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까지 내렸다.
“ 풉.. “
이름을 말해주니 순수하게 전부 이름을 알려주는 귀여운 상대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리는 벨라와는 다르게 문 뒤에 있는 춘향은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진다.
‘ 저 멍청이들.. 그냥 공격하면 되는 것을 바보같이.. 지들이 무슨 고결한 기사인 줄 알아..! ‘
“ ..뭐가 그렇게 웃기지? “
어딘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피렌은 살짝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 아무것도 아니야~ 단지 너희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게 웃길 뿐이지. “
창문으로 태양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점점 주위가 밝아져 오고 있다.
심상치 않다.
무언가.. 다가오는..
“ ···라티안. 조심해..!! “
-슈우우우우
콰쾅!!!
동그란 유리창을 깨부수며 여섯 개의 빛들이 마치 유성우처럼 날아와 라티안과 피렌, 아리나를 공격한다.
“ 키킼···. 크하하하! 멍청이들! 그렇게 쉽게 빈틈을 보여주면 죽이기도 미안하잖아 아하하하! 하.. 하···. 하하.. “
“ 크으··· 강하네···!! “
피렌과 라티안이 각각 바람과 불의 장벽을 펼쳐 억지로 궤도를 틀어버린 덕분에 막아낼 수 있었다.
-츠즛
“ 갑자기 공격하다니..! 이번엔 우리 차례야..! “
아리나가 벨라를 향해 전류를 흘려보낸다.
한순간 땅이 번쩍이며 다가오는 전류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벨라가 공중으로 도약한다.
“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고작 저 정도의 마나를 가진 놈들이··· “
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빠른 속도의 공격이 바닥에 한순간에 깔렸다.
무슨 기술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나의 전류를 피하는 것을 본 순간 라티안이 피렌의 바람을 받아 공중으로 높게 도약하며 검에 불꽃을 둘렀다.
“ 하아아압!! “
“ ..분명 견딜 수 없는 수준일 텐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거냐. “
라티안이 검을 내려치기 전에 피렌이 급하게 바람을 조종해 라티안을 뒤로 당겼다.
그러자 라티안이 있던 자리를 빛 한줄기가 빠르게 지나가서 바닥을 부숴버렸다.
“ 우왓..! 위험해라..! 고마워 피렌! “
“ 저 녀석의 마법은 밖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어. 이곳은 조금 깊은 지하니까 위에서 공격당할 걱정 없이 우린 유리창만 신경 쓰면서 싸우면 될 거야. “
벨라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라티안은 창문 쪽을 의식하고 검을 고쳐 쥐었다.
“ 그렇단 말이지···? “
창문이.. 아니 창문이 있던 공간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기 시작한다.
라티안도, 피렌도 우주에서 날아오는 빛의 궤적을 읽어내 빈틈을 찾아 억지로 피해낸다.
아리나를 지켜줘야 했지만··· 다행히도 방을 빠져나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 좋아.. 이정도 수준이라면.. 조금씩이라도 접근할 수 있어..! 피렌! 바람! “
아리나는 틈을 노려 꾸준히 전류를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날아오는 빛과 부서진 바닥의 잔해에 가로막혀 벨라에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마 가까이 가지 않는 이상 저 녀석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확실히 라티안이 해내야 한다.
“ 라티안. 잊지 마. 우리의 목표는 저 녀석을 죽이는 게 아니야. “
“ ···아! 맞네! 응! 알겠어! “
라티안이 깜빡했다는 듯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바람을 두르고.
달려나간다.
발을 노리고 오는 빛들은 낮게 점프해서 피한다.
머리를 노리는 빛은 고개를 숙여서 피한다.
동시에 날아오는 빛들은 빠르게 달려나가거나 한 번씩 자리에서 멈춰가며 상대의 생각을 비틀면서 접근해나간다.
“ 공격이 생각보다 허술한데..!! “
거리가 좁혀지는 만큼
라티안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벨라는 웃으며 뒤에 있는 한 사람에게 몰래 손짓한다.
“ 풉··· 귀엽네. “
라티안이 달려가며 밟은 바닥이 물결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 어..? “
바닥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라티안이 도약해서 벗어나자, 동시에 거대한 뿔이 달린 고래가 튀어나와 라티안을 집어삼키려 한다.
“ 라티안..!!!!! “
피렌이 어떻게든 바람으로 라티안을 당기고 아리나가 전류로 고래를 공격해본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게 라티안을 당겨도 고래의 입이 닿지 않는 범위까지 당겨올 수 없었으며, 빛으로 만들어진 고래는 전기에 면역이 있는지 감전 같은 건 당하지 않았다.
라티안은 공중에서 어떻게든 검을 휘둘러 고래를 베어내려 하는 그 순간..
“ 아.. 증말..! 공격하기 위한 수라니까 왜 날 방어하는 데 쓰게 만드는 거야..! “
어느새 나타난 춘향이 고래를 베어버린다.
“ 큿··· 으··· 이 마법은 다른 녀석 거잖아..! 왜 여기서 갑자기 저런 게 나타나는 건데?! “
“ 콩나물 1번은 진짜 멍청해도 너무 멍청해..! 내가 숨어있듯이 쟤네도 숨어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 되지!! “
라티안과 춘향은 다시 동시에 나아가기 시작한다.
준비한 수가 먹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본격적으로 공격해오기 시작한다.
뒤에 숨어있던 엘피아네도 앞으로 나와 수많은 피아를 만들어내 공격을 퍼붓는다.
벨라가 만들어낸 빛 역시 우주에서부터 날아와 라티안과 춘향의 접근을 틀어막는다.
벨라가 만들어낸 빛들이 주위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터지는 틈을 타 엘피아네에게 말을 건넨다.
“ 엘피아네. 우리의 목적을 잊지 마. 저 녀석이 참전한 이상 계획은 멜레인에게 맡기면 돼. 우린 무리하지 말고 상대의 약점을 찾는 데에 집중해. “
암살자와의 전투에서는 분명 상성으로 앞선다.
엘피아네는 근접전도, 원거리도, 사방에서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기에 분명히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런데도 죽이지 못한 것으로 보아 확실히 강하다고 판단해야 했다.
그런 녀석이 동료의 힘까지 빌린다면···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녀석에게 농락당한 전투를 생각하자면 머리에 피가 솟는다.
처음 지구에서 만났을 때 죽었던 것도 잊지 않았다.
후··· 하지만··· 계획이 우선이야···
벨라 역시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신경 써주고 있으니까..
“ ..싫지만 어쩔 수 없지.. “
어느 정도 접근했다고 느낀 춘향은 머릿속으로 전투의 방향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이대로 피하다가 한순간 가속하여 엘피아네와 벨라의 앞에서 시선을 끌고, 그동안 라티안이 접근하여 저 장치들을 부숴버리길 기대한다.
아마 라티안도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여기까지만 생각한 대로 해내 준다면 상관없었다.
이 정도라면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할 수 있겠지?
춘향은 날아오는 빛을 피하며 이어지는 동작으로 자세를 낮추고 발목에 마법진을 두른다.
그리고 도약하려는 그 순간, 눈앞의 공간이 일자로 일그러진다.
“ ···?! 물러나 콩나물! “
춘향은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빼자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공간이 갈라지고 바닥이 파였다.
“ 칫··· 대체 이걸 어떻게 본 거야? “
라티안과 춘향의 앞에는.. 처음 보는 인물이 서 있었다.
벨라도, 엘피아네도 그 인물이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공격을 멈췄다.
“ 멜레인.. 성급하게 굴지 말랬는데. “
“ 충분히 침착했다고? 저 녀석이 빠를 뿐이야.. 이거 기분 나쁜걸..? “
말을 끝낸 멜레인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다시 빛을 굴절시켜 자신의 몸을 숨긴다.
“ ..사라졌어..?! 어디 간 거지?! “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라티안과 달리 춘향은 냉정하게 생각한다.
이들은 빛을 마법으로 사용한다.
순간이동 같은 기술은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짓지는 못하지만..
이 녀석들은 마나를 빛으로 활용하는 공통점이 있으니 아마도 빛을 왜곡시켜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끔 은신하는 기술이 아닐까 싶다.
흐음···
“ 세상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범위공격에, 사방에서 공격하는 범위공격··· 그리고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암살자까지.. 준비 철저하게 해놨네? “
어쩌면 저 원거리 대포들에게 접근하면 근접공격에 능한 또 다른 사람이 튀어나와 춘향을 막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할까..
버텨내는 건 어찌저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단 하나의 수가 부족하다.
저 암살자라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 텐데..
혹은 모두가 움직이는 타이밍에 맞춰서 저 장치만 파괴하고 튈 수는 없을까?
춘향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한다.
“ 야 콩나물 “
라티안은 꺼내 들었던 검을 집어넣고 불꽃을 내뿜어 검을 만들고 있다가 춘향이 부르는 소리에 눈동자만 살짝 돌려본다.
“ ···.뭐야. “
정면에는 다가오지 못할 만큼 강력한 범위공격을 퍼붓는 두 명이 있었으며, 호시탐탐 춘향을 노리는 암살자가 어딘가에서 모습을 감추고 대기하고 있다.
혼자서라면 모르겠지만 콩나물들은 날아오는 빛과 날개 달린 물고기, 뿔 달린 고래등을 피하기만 해도 힘들 것이다.
춘향은 토끼를 하나 만들어 힘껏 집어다 던졌다.
“ 사방에서 수많은 빛이 덮쳐올 거야! 우리 둘이서 호흡 맞춰가며 버텨보자구? 싫어도 참아. 계획에 성공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
“ ···싫지만 어쩔 수 없지.. “
- 작가의말
라티안이 억지로 피하면서 달려가는 모습을 뒤에서 춘향이랑 지켜보며 폴가이즈가 생각난 저는 게임에 중독된 걸까요
춘향은 무슨 우주에서 공격이 날아오냐고 따지고 있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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