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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 님의 서재입니다.

고금지 천하쟁패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방만호
작품등록일 :
2015.04.08 13:30
최근연재일 :
2015.05.13 15:1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15,509
추천수 :
155
글자수 :
145,993

작성
15.04.1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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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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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18쪽

제6화 척준경(拓俊京)

高金志




DUMMY

화마는 어린 동생과 대충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집에 아비가 없는 것이야 다반사였지만, 누이가 보이지는 않는다. 설사 오랑캐가 쳐내려와 전란이 터진다 해도 제일 먼저 동생들부터 챙기는 것이 누이 달래였다. 밤이 이토록 깊어 가는데 누이는 보이지 않았다. 신임 사또가 온 이후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뒤숭숭했다. 꼭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 같다.

밤이라 날은 쌀쌀했다. 화마는 윗옷을 훌렁 벗고는 마당에서 봉술 단련을 시작했다. 무예로 단련된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화마의 목봉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수백 개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봉술 단련에 한 참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부리나케 대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더니 숨 너머 가는 소리를 질렀다.

“화마야, 큰 일 났다. 큰 일 났어!”

보니 갖바치패 꼭두 인점이다. 인점이는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성님이 갑자기 여기 웬일이우?”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인점이는 오뉴월의 개처럼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을 이었다.

“호장 나리께서....... 최행이란 놈에게 곤장을 맞으시고....... 지금 옥에 갇혀 계신다.”

화마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이우? 우리 아버지가 왜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다는 말이우?”

인점이는 땅에 풀썩 주저앉더니 울먹거렸다.

“쥐새끼 같은 부호장 놈이 호장 나리를 죽이려고 사또 놈하고 작당해 누명을 씌었다. 나와 아버지를 잡아 매질을 하더니, 호장 나리께서 공납품을 빼돌렸다고....... 내일 오후에 해주로 압송한다고 하더라. 거기가면 대역죄로 죽을 거란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순간 화마의 얼굴은 망치로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러다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염병할 소리우? 우리 아버지가 뭐 때문에 나라에 바치는 공납품을 빼돌린단 말이우?”

“그게 다 그 쥐새끼 같은 부호장 놈이 꾸민 함정이 아니냐. 그것만이 아니다.”

“대체 무슨 소리우?”

인점이는 미친놈처럼 넋두리를 했다.

“그 사또 놈은 개만도 못하다. 호장 나리를 살려주겠다며 글쎄 네 누이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마는 인점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화마의 얼굴은 점차 악귀(惡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우? 내 누이가 어찌됐단 말이우?”

“나리를 살려보겠다고....... 그 망할 사또 놈의 방으로 들어가 술시중을 들며........”

“이런 개 같은 새끼들!”

화마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곧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잠시 후 첫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장검을 들고 나왔다. 아비가 목숨처럼 아끼는 집안의 가보였다. 인점이는 화마의 팔을 붙잡았다.

“어쩌려고 그러냐?”

“성에게 부탁이 하나 있수. 내 어린 동생을 잠깐 봐주고 있으시우.”

“그 무슨 섭섭한 소리냐? 네가 가면 나도 가야지.”

“왈패로서....... 내 간곡한 청이우. 겨우 다섯 살 아이우. 잠시만 봐주고 있으시우.”

화마는 그 말을 남기고는 바람처럼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방문이 빠끔 열리면서 어린 아이 하나가 기어 나왔다.

“형아, 어딨어? 아버지와 누이는 어디 있어?”

화마의 동생이다. 누이도 형도 안보이니 아이는 마루에서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인점이는 아픈 몸을 끌고 마루에 올라 악을 쓰며 울고 있는 어린애를 어떻게 해서든 달려 보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는 앞으로 닥쳐올 그 엄청난 참극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몹시도 울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북쪽이라 겨울의 시작이 빨랐다. 화마는 벌써 관아의 담을 둘이나 가뿐히 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저 담만 넘으면 최행이란 놈이 있는 안채였다. 숨을 죽이며 주위를 잠시 살피고 막 안채 담을 뛰어넘으려는 순간.......

뒤에서 앙칼진 고함소리가 들렸다.

“웬 놈이냐? 뭐하는 놈인데 여기서 얼쩡거리는 것이냐?”

화마는 멈칫했다. 보니 안채를 경비하는 나졸 둘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창을 겨누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화마는 장도를 뒤로 감추고는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호장님의 아들이우. 저 안채에 누이가 있는데, 뭘 좀 가지고 오라해서 들어가려는 참이우.”

나졸 하나가 횃불을 비춰 화마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우린 그런 명을 전달받은 사실이 없다. 아무래도 수상쩍구나. 일단 우리와 함께 같이 좀 가줘야겠다.”

그러자 다른 나졸이 오라를 들고 화마에게 다가왔다. 화마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호장의 아들이라 밝혔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수?”

다가 선 나졸은 화마의 얼굴이 아직 앳된 것을 보더니 짐짓 놀라는 표정이다.

“어린놈이 이 한밤중에 집에서 잠이나 쳐 자지 왜 여기서 얼쩡거려?”

화마는 뒤에 감추고 있던 장도를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칼날을 빼지는 않았다. 나졸은 갑자기 나타난 장도를 보더니 기겁했다.

“어린놈이 칼을 꺼내. 네가 도적놈이냐?”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도는 번개같이 어둠을 갈랐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졸은 땅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그런데 피는 보이지 않는다. 화마는 칼날을 뽑지 않았다.

그 바람에 다른 나졸은 기절초풍했다. 건장한 나졸이 지금 눈앞에서 어린놈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그 순간 화마의 몸이 다시 재빠르게 움직였다.


쉬윅!


또 다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더니 나졸은 썩은 볏단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번에도 역시 피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화마는 눈 깜짝할 사이에 훈련 받은 나졸 둘을 기절시켰다. 졸도한 두 나졸의 몸뚱이 위에 흰 눈만 무심히 쌓였다.


안채에 들어선 화마는 재빠르게 대청으로 뛰어올랐다. 방에 불은 꺼져있다. 귀를 살며시 대니 코고는 소리만 요란하다. 화마는 방문을 살며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술 냄새가 진동한다. 아랫목에 요란하게 코를 골며 누워 있는 커다란 몸뚱이가 보였다. 최행이 분명하다. 그리고 방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도 보였다.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다. 화마는 누이 달래임을 직감했다. 그때 겁에 질린 누이의 음성이 들렸다.

“누, 누구냐?”

화마는 재빠르게 달려가 먼저 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달래 역시 지금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이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달래는 화마의 손을 뿌리치더니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네가 여기....... 어인 일이냐? 동생은?”

착한 누이는 막내 걱정이 앞섰다. 화마는 어둠 속에서 누이의 옷이 풀어헤쳐져있음을 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승 같은 놈이 달래에게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분명했다.

달래가 말릴 사이도 없었다. 화마는 훌러덩 벗은 채 곯아떨어진 최행의 몸을 깔고 앉았다. 한 손으로 짐승의 입을 막고 한 손으로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냈다. 집안의 가보인 장검은 쓰지 않았다. 짐승의 피를 묻히기에는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화마의 시퍼런 단도는 짐승의 심장을 향해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흡!”

짧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최행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순간 놈은 아마도 저승사자를 봤으리라. 놈의 몸뚱이가 잠시 부르르 떨렸다. 잠시 후.......

“진주야.......”

이것이 최행이 이생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그래도 진주가 떠올랐나 보다. 기적에서 파주겠다고 약조했던 그 진주 말이다.

방안에는 입을 틀어막고 흐느끼는 달래의 가느다란 울음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색마의 몸은 이미 굳어있었고 더러운 피가 스멀스멀 흘러내려 바닥을 붉게 적셨다. 이렇게 화마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나랑 어서 여기를 떠납시다.”

화마는 우악스럽게 달래의 손을 붙잡고 나직이 외쳤다. 그러나 달래는 이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아버지와 어린 동생은 누가 돌보냐?”

“그딴 걱정 마시우. 다 같이 멀리 도망가면 되지. 아버지랑 누이랑 동생이랑........”

그러나 달래는 동생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다 죽고 싶은 것이냐? 아버지는 지금 옥에 갇혀 계시고, 막내는 아직도 어리다. 여기는....... 내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볼 터이니 너만이라도 빨리 도망쳐라!”

“여기 있다가는 누이도 죽소. 내가 사또를 죽였는데.......”

그때 갑자기 달래가 단도를 쑥 뽑더니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과연 여장부가 아닌가?

“당장 여기를 나가지 않으면....... 이 누이는 이 칼로 자결하고 말 것이다.”

화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비를 빼닮은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불이 아닌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비록 계집이지만 우리 집의 맏이다. 나머지 일은 내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어서 몸을 피해라. 그 길만이 우리 집안이 살 수 있는 길이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화마는 잠시 머뭇했다. 누이는 한 번 하겠다고 결심하면 끝장을 보았다. 화마는 시퍼런 단도를 들고 있는 누이의 손을 붙잡았다.

“누이, 내 약조하겠수. 언젠가 반드시....... 내가 누이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을 데리러 올 것이우. 그때까지 제발....... 살아만 있으시우.”

화마는 끝내 흐느꼈다. 달래는 부리나케 문갑을 뒤졌다. 여러 옷가지를 모아 등짐을 하나 만들었다.

“촉박하다. 어서 가거라!”

화마는 망설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순간 달래가 화마의 뺨을 후려쳤다.

“못난 놈! 사내대장부가 그깟 일로.......”

화마는 정신이 번쩍 났다.

“알겠수! 꼭 살아 있으시오. 이 동생이 반드시 데리러 올 것이오.”

“급하다. 어서!”

누이는 재촉했다. 화마는 누이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날쌘 범처럼 밖으로 사라졌다. 달래는 그제야 애써 참았던 눈물을 소리 없이 쏟아냈다. 무심히 내리는 눈은 점점 쌓여만 가고 있었다.


안채의 담을 훌쩍 넘은 화마는 옥으로 향했다. 도망치기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불러서 잠시 왔다고 하니 늙은 옥장은 별 소리 없이 화마를 옥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사실 부호장만 빼고는 곡주 관아의 모든 아속들은 모두 석위공을 존경했다.

한 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아들의 모습을 보자 석위공은 적이 놀랐다.

“이 밤중에....... 네가 여기 어인 일이냐?”

화마는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옥에 갇힌 아비 앞에 무릎을 굻었다. 석위공은 큰 사달이 났음을 직감했다. 아들의 눈에는 아직 살기가 어른어른하고 그 몸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아버지, 사람을....... 죽였수.”

아들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아비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조용히 물었다.

“사또를....... 죽였더냐?”

“그놈은 짐승이우. 아니 짐승마도 못 하우!”

“어찌 그런 경거망동을!”

아비는 노한 눈으로 아들을 꾸짖으려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석위공은 눈을 부릅뜨고는 옥장을 불렀다.

“여보게, 여기 종이와 붓을 좀 가져다주게.”

비쩍 마른 옥졸 하나가 종이와 붓을 가지고 와서 화마 앞에 내려놓았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우리 가문의 성을 써 보거라.”

뜻밖의 말이 아닌가? 화마는 어리둥절했다.

“무엇을 하느냐? 어서 우리 집안의 성을 써보라니까.”

아비의 재촉에 화마는 떨리는 손으로 붓을 집어 글을 썼다. 돌석(石)....... 석위공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했다.

“우리 집안은 석씨로서 본시 옛 고구려의 장군집안이었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망했고, 신라는 고려에 망했다. 그 바람에 너의 고조부께서는 이곳 곡주에서 아속으로 살아가게 되셨다. 비록 지금 이 애비는 아전에 불과하지만 본래 고구려의 당당한 검교대장군의 후예이다. 너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들은 모처럼 아비의 말을 진중하게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옥에 갇힌 아비는 사람을 죽인 아들에게 말했다.

“이번 엔 석자 옆에 손수(手) 자를 적어 보아라.”

이것은 또 무엇인가? 화마는 석(石)자 옆에 아비의 명대로 수(手)자를 썼다.

“읽어 보거라.”

“돌석에 수가 붙으면....... 이것은 척(拓) 자입니다.”

그러자 석위공의 부리부리한 눈이 번쩍이더니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지금부터 우리 집안은 더 이상 석 씨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척 씨니라. 이제 이 애비는 석위공이 아니라 척위공이며, 너는 석준경이 아니라....... 척준경이니라!”

화마....... 아니 척준경은 끝내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아비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던 성마저 버린 것이다. 척준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마라. 최행이란 놈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죽이려했다. 허나....... 그래도 조정의 관리가 아니더냐? 너는 어서 일단 몸을 피해라. 나머지는 이 애비가 알아서 하마.”

아비는 누이와 똑같은 말을 했다. 척준경은 속이 타들어갔다.

“아버지, 어찌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친단 말이우? 내 옥문을 부수겠수!”

그 말에 졸고 있던 늙은 옥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어리석은 소리! 나는 여기 곡주의 호장이다. 내가 왜 도둑놈처럼 달아난단 말이냐?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있다. 날이 밝으면 해주 도호부로 가서 그간 최행이란 놈과 김전이란 놈이 어떤 사악한 짓을 했는지 낱낱이 고할 작정이다. 증인도 여럿 있으니 반드시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척위공은 단호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살짝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척준경은 차마 누이의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나가 대각산을 넘어 동계(東界)로 가거라. 거기까지만 간다면 천리장성을 넘어 야인들의 땅으로 가는 것은 쉬울 것이다. 거기서 때를 기다리고 있어라. 하늘이 도운다면 반드시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이다.”

아비의 말에 척준경은 망설였다. 그러자 아비는 단호했다.

“이놈! 우리 집안을 다 말아먹을 작정이냐? 무엇을 망설인단 말이냐? 어서 나가지 못할까!”

아비의 호통소리에 망설이던 척준경은 일어서 큰절을 올렸다. 아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놈! 죽으러 간 다더냐? 애비 앞에서 그 무슨 청승이냐?”

“아버지, 몸조심하시우. 소자 꼭 돌아와서 아버님 모시고 누이와 동생과 함께 살 것이우. 부디....... 꼭 살아계시우.”

“못난 놈!”

아비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고개를 돌렸다. 척준경은 그런 아비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늙은 옥졸은 여전히 졸고 있었다. 잠이 와서 그러는지 아니면 난감해서 그러는지.......


어둠 속에서 세찬 눈보라 휘몰아치고 있었다. 척준경은 바로 대각산으로 가지 않았다. 처리해야할 한 놈이 남았다. 바로 김전이다. 놈의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비의 심부름으로 몇 번 가봤던 집이다. 척준경은 어둠 속에서 눈에 익은 한 집을 여러 번 살폈다. 놈의 집이 분명했다.

담을 훌쩍 뛰어넘은 준경의 몸은 벌써 안방 앞에 와있었다. 방문에 귀를 대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슬며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드니 방은 텅 비어있다. 놈은 홀아비였기에 식솔은 없었다. 여기저기 뒤져도 놈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기생집에서 밤새 술 처먹을 모양인가?”

척준경은 속으로 뇌까렸다. 운명이었을까? 그날 밤 김전은 집에 있지 않았다. 준경은 단도를 꺼내 손가락 하나를 그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벽에 피로 네 글자를 썼다.


必.......殺 .......洗 .......恨


반드시 죽여 한을 씻으리라! 어려서 매 맞으며 배운 천자문이 결국 이렇게 쓰일 줄이야. 복수를 천시신명께 맹세하고 척준경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쌓인 눈은 무릎까지 올라왔다. 눈보라는 더욱 세찼다. 척준경은 그렇게 세찬 눈보라를 뚫고 대각산을 넘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방향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인데다가 눈까지 쌓여있으니 어디가 북쪽인지 남쪽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척준경의 몸이 비록 단단한 돌덩이 같았지만 그래도 이제 겨우 열일곱이다. 대각산의 무시무시한 추위는 벌써 준경의 다리와 손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급하게 나서는 바람에 두꺼운 겨울옷조차 입고 나오지 못했다. 누이가 얼떨결에 챙겨준 옷가지가 전부다. 그래도 준경은 이를 악물고 어둠 속에 눈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가고 또 나갔다.

그렇게 산길을 얼마나 헤맸을까? 척준경의 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마침내 눈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솜처럼 새하얀 눈밭위에서 준경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그 숨소리도 점점 약해졌다. 준경은 어미의 품속에서 잠이든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잠이 들었다. 그의 몸 위로 무심한 눈만 계속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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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19화 전투는 무사가 하지만, 전쟁은 선비가 한다. 15.05.07 752 3 17쪽
18 제18화 흑수(黑水) 기병이 얼어붙은 도문수를 넘어오다 15.05.03 571 1 14쪽
17 제17화 연개위는 개마산으로 도망치고 15.05.02 516 4 16쪽
16 제16화 왕국모는 병목에서 석적환의 복병에 당하다 15.04.28 539 4 13쪽
15 제15화 고려군은 사면(四面)에서 여진을 공격하다 15.04.22 507 5 15쪽
14 제14화 반간지계(反間之計) 15.04.21 863 5 16쪽
13 제13화 아! ‘밝은 해’ 발해(渤海)여! 15.04.15 588 6 15쪽
12 제12화 윤관(尹瓘)은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하다 15.04.15 509 6 14쪽
11 제11화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는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다 15.04.13 672 7 17쪽
10 제10화 도탕군(跳蕩軍) 15.04.13 653 5 19쪽
9 제9화 대장군 왕국모(王國髦) 15.04.13 512 8 14쪽
8 제8화 여한(餘恨)을 칼에 묻고 15.04.13 670 7 15쪽
7 제7화 쌍용대도(雙龍大刀) 15.04.11 638 9 13쪽
» 제6화 척준경(拓俊京) +3 15.04.11 783 11 18쪽
5 제5화 파국(破局) +2 15.04.11 657 7 15쪽
4 제4화 호장(戶長) +4 15.04.08 735 13 16쪽
3 제3화 왈패 +4 15.04.08 899 11 12쪽
2 제2화 이자겸(李資謙) +4 15.04.08 943 14 14쪽
1 제1화 천하 난봉꾼 +4 15.04.08 1,218 1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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