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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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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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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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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매.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다음날.

남매가 서울 중구 정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다 왔다!”


류아라의 성화에 류지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꼭 실명으로 해야 돼?”

“오빠 같은 대단한 인물이 나서줘야 다른 재벌들도 나서지.”

“차라리 순호가 더....”

“걱정 마. 작은 오빠도 가입하기로 했어.”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 류지호와 가족들은 매해 여름에는 태풍피해 성금을, 겨울에 구세군 성금을 또 적십자비도 꾸준히 기부해 오고 있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이후로는 홀트아동복지회,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등 수많은 단체에 최소 500~1,000만 원까지 기부하고 있다.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된 후로는 각 단체에 1~5억 원을 기탁하고 있다.

한국의 자선단체들이 고액기부자를 언론을 통해 공표하기 마련이다.

류지호는 예외다.

20년 가까이 거액의 기부금을 각종 단체에 기탁하고 있는 것을 국세청밖에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철저히 비공개로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랑의 열매에만 기부를 안 했다.

이전 삶에서의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리문제가 워낙에 강렬하게 남아있어야 말이지.’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한국 유일의 법정 사회복지사업모금이다.

영리기업으로 대입하면 독점 기업이란 소리다.

그런데다 류지호에게는 이전 삶의 뉴스에서 봤던 비리사건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못미더운 단체로 뇌리에 남아 있다.

다울재단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류아라는 한국의 수많은 자선단체들과 친분이 있다.

류지호가 불신하는 사랑의 열매가 미국의 공동모금회의 ‘토크빌 소사이어티’를 벤치마킹한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를 출범시켰단다.


“오빠는 이미 미국의 토크빌 소사이어티 회원이거든.”

“아휴, 참. 미국은 미국이고, 한국은 또 한국이지!”


류아라가 잔말 말라는 듯 오빠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류지호가 사랑의 열매회관으로 들어섰다.


짝짝짝.


미리 이야기가 되어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임직원들이 나와서 열렬히 남매를 환영했다.

세계적인 유명인사이니 떠들썩한 환영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라지만.

사랑의 열매 차원에서 오늘은 꽤나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예정이다.

바로 류지호가 아너 소사이어티 1호 회원이 되는 날이자, 개인적으로 처음으로 사랑의 열매에 기부금을 전달하는 날이기에.


“자, 먼저 우리 오빠에게 그것부터 확인시켜 드리세요.”


사랑의 열매 직원이 보고서 파일을 가져와 류지호에게 내밀었다.


“.....?”


류지호가 받아서 보고서를 넘겨보았다.


사락.


류지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피식.


사랑의 열매의 전국 시도 지회 내부감사 내역이었다.

공동모금회에 비리가 발생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기관인 보건복지부와 감사원으로부터 감사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감사원 감사를 받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는 사실이다.

돈이 모이는 곳에는 부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류아라는 가족 전부가 사랑의 열매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외부 기관에 의한 모금회 감사를 제시했다.

당연히 사랑의 열매 측에서는 펄쩍 뛰었다.

감사원으로부터 감사도 받은 적이 없는데, 외부인에게 모금회 내부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헌데 보건복지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을 후로 태도를 백팔십도 바꿨다.

다온로펌 및 KPMG로부터 감사를 받게 됐고, 그 결과 사랑의 열매의 16개 지부의 각종 비위와 부정행위가 적발되었다.

인천지회 모 직원은 시 공무원으로부터 300만 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을 성금으로 받았으나 이 상품권이 현재는 행방불명이다.

게다가 지회는 이를 분실·도난 신고하지도 않았다.

해당 직원처리를 위한 인사위원회 개최 등 공식 절차를 전혀 거치지 않았다.

또 다른 지회는 사랑의 온도탑을 해마다 재활용해 사용하면서 매년 1,000만 원 안팎의 제작비를 들인 것처럼 위조해 공금을 유용했다.

경기지회는 간부의 공금유용은 물론 경비 부당 집행, 부실한 구매 관리 등 총체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또 다른 지방의 지회 한 곳은 여러 차례 실내건축공사를 시행하면서 구매실무책임자의 친척이 운영하는 부실 업체와 계약하면서 구매 관련 법령도 함께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다.

어떤 지방 지회는 충분한 사전 검토 없이 모금 행사를 개최했다가 귀중한 예산만 낭비해 경고 조치를 받은 적도 있다.

그 동안 쉬쉬했던 작은 부정부터 실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중범죄까지 감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보여줘도 되는 겁니까?”


사랑의 열매 회장이 시름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우리 조직이 심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회복지모금회는 무엇보다 투명한 모금 집행과 사용이 중요한 단체다.

내부에 비리가 만연하고 있음을 확인하자 큰 충격에 빠졌다.

그나마 양심이 있는 모금회 임직원들이 느끼는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부 감사와 징계로 끝나는 겁니까?”


9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확인하곤 실망도 하고 화도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었다.

이젠 냉소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류지호다.


“류 실장이 알게 된 이상 조용히 처리하긴 글렀다는 걸 잘 압니다. 이미 보건복지부에 자체 감사 자료를 제출했고, 보건복지부와 감사원의 감사를 다시 받게 될 겁니다. 언론에도 사실대로 알릴 생각입니다.”


그런 것이다.

남의 돈이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 거리고 그걸 사용해도 별 탈이 생기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자기 주머니 속의 쌈짓돈처럼 되어버린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사회복지법인뿐만 아니라 국내 NGO 회계 역시 엉망진창이다.

신뢰를 유지하는 것은 별거 아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란 기본만 지키면 된다.

그를 위해 외부로부터 감시와 견제를 받으면 된다.

한때 류지호는 이름만 되면 누구나 아는 국내 대형 시민단체들에 기부를 많이 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기부금을 대폭 줄였다.

그놈에 회계장부에 떡하니 들어가 있는 ‘활동비‘ 혹은 ’업무추진비‘ 항목에 정나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에 왜 ‘활동비’가 필요한 것인지, 용처에 대해서 그들은 류지호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일부 회식비나 공금으로 활용했다고 밝히면 될 것을.

끝까지 발뺌하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문제다.


“기자들 불렀습니까?”

“예!”

“갑시다.”


회관 소강당에 이미 주요 언론사 사진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 행사에 사랑의 열매 임직원 50여 명과 20여 개 언론사가 참석했다.

준비된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서에 류지호가 멋들어지게 서명했다.


“축하드립니다. 아너 소사이어티 1호 회원이자 정식 공개회원이 되셨습니다.”


비공개 회원도 가능했다.

류아라가 사회지도층 고액 기부자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류지호의 이름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설득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공개하기로 했다.

간소한 가입식을 마치고 류지호가 카메라 앞에서 소감을 말했다.


“미국에서는 기부를 적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우리의 정서는 많이 다르죠. 선행을 남모르게 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였을 겁니다. 기부를 한 사실이 알려지자 친지들, 동문이나 동료들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뭐겠습니까? 생판 모르는 사람 돕기 전에 주변 사람부터 도우라는 거겠지요.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아너 소사이어티’에 회원 가입을 하려면 용기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도 익명이 아닌 실명으로 기부하는 문화가 확산돼 자연스럽게 정착됐으면 합니다. 앞으로 책임감을 더 느끼고 열심히 살아서 사회적으로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찰칵찰칵.


류지호는 사진 포즈도 취해주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변해줬다.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사회 지도층이 나눔운동에 참여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든 개인 고액 기부자 모임이다.

헨리 게이츠를 비롯해 2만6천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미국 공동모금회의 ‘토크빌 소사이어티’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1억 원 이상 기부 혹은 약정할 경우 개인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류지호는 10억 원을 가입 성금으로 냈다.

5년 간 매해 2억씩 기탁해 최종적으로 20억을 채우기로 약정했다.

마음만 먹으면 1천만 달러(120억 원)도 쾌척할 수 있다.

앞으로 사랑의 열매가 얼마나 투명하게 운영되는지에 달렸다.

여담으로 사랑의 열매는 이번 감사결과로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그로인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쇄신안을 마련하고 모금액과 배분 내역을 인터넷으로 실시간 공개하는 것과 시민감시 기구를 구성하겠다고 공표하게 된다.

또한 사유화·권력화 논란을 빚는 지방의 공동모금회 지회의 인사채용권을 중앙회로 회수해 지회 통제권을 대폭 강화하게 된다.

16개 지회장과 사무처장의 재신임을 묻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되는 대로 감사에서 징계요구를 받은 직원 50여 명에 대해 전면적인 인적쇄신에 나서게 된다.

국민들의 비난과 비판이 거세지면서 후원금이 대폭 감소한다.

평소 지원하던 작은 규모의 복지시설에 지원금이 돌아가지 못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금융위기까지 찾아와 성금 모금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대표적인 모금 행사인 사랑의 온도 모금액은 예전의 2/3로 뚝 떨어진다.

류지호의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으로도 사랑의 열매의 위상 추락을 막지 못한다.

그런 만큼 공동모금회 비리에 대한 국민의 충격이 컸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터.


“내가 너무 했나?”


류아라의 찜찜한 표정을 보며 류지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내가 모금회를 압박해도 될 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닌데. 그치?”


다울재단 운영실장 타이틀은 국내 NGO 세계에서 그리 만만한 위치가 아니다.

무려 미스터 할리우드의 여동생이기도 하고.


“네가 지위나 힘을 나쁘게 썼다면 오빠가 화를 냈겠지만,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한 거니까 이번엔 넘어가 줄 게.”

“후원이 확 줄 텐데.... 잘 한 짓인지 모르겠어.”

“매도 일찍 맞는 게 나아.”

“복지사업 하는 사람들끼리 너무했다 싶기도 하고....”

“눈 감아 줘야 맞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참고로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서울 종로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이 목표액을 다 채운 후 철거한다.

그때까지 공동모금회 감사와 관련한 기사를 내지 않는 영악한 짓을 한다.

류지호는 그런 꼼수를 보고도 뭐라고 하진 않는다.

모금회 내부 부정 때문에 내년 지원사업에 차질이 빚어져서는 안 되니까.

어쨌든 류지호를 시작으로 두 동생도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동생들은 5년에 걸쳐 1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이로써 한국의 고액기부자 모임 1호부터 3호까지 류지호 남매가 차지했다.

류지호의 부친은 칠순을 맞이하는 2009년에, 모친는 2015년에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다.


❉ ❉ ❉


매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천리포 수목원에서 트리를 집으로 보내줬다.

올해는 트리를 보내 줄 수 없었다.

12월 7일에 발생한 기름유출 사고 때문이다.

만리포 북서부 해상에서 홍콩 유조선 허베이호와 오성중공업의 해상크레인선이 충돌하면서 무려 12,547㎘의 기름이 바다로 쏟아졌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순식간에 시커먼 기름띠로 뒤덮였다.

태안해안국립공원, 전북·전남 해안, 제주도까지 오염이 확산됐다.

며칠 간 태안군민들이 절망에 빠졌다.

그때 국난극복이 취미이자 특기인 한민족 특유의 오지랖이 발동됐다.

자원봉사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앞 다투어 태안으로 몰려온 것이다.

주말마다 동호회원, 대학생, 수능이 끝난 고3 수험생, 군인, 부녀회, 종교단체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다.

자원봉사자들이 수작업으로 일일이 기름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태안군 차원에서도 생태환경회의를 열고 해외의 방제분야 전문가를 초빙하여 자문을 받았다.

지상파 방송에서는 태안 어민들을 위한 모금행사를 마련했다.

태안 지역 중·고등학생들도 기름닦기에 동참하기 위해 기꺼이 수학여행·졸업여행을 반납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발 빠르게 지원에 나섰다.

40여 개 지역의 오염조사 및 방제작업에 나섰고, 재난지역선포 및 재난장병휴가, 세제혜택 등 전방위적인 지원을 전개했다.

류지호의 가족은 떠들썩한 연말을 보내는 것 대신 태안으로 내려가 방제작업에 한 손 보태기로 했다.

오인방 가족도 동참하기로 했다.

심영숙이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며느리하고 아라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인방 부모님들도 며느리와 딸들이 태안으로 내려가 자원봉사하는 걸 만류했다.

유출된 원유에 노출되면 호르몬 분비에 영향이 있고, 여성의 불임 가능성도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기 때문이다.


“엄마, 전화 받아봐.”

“누군데?”

“내가 잘 아는 교수님. 환경오염 전문가셔.”


류아라는 친분 있는 의대 교수와 환경 분야 전문가와 상의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통화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주었다.

전문가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들며 최근 돌고 있는 유언비어의 속지 말 것을 당부했다.


“유조선 사고는 명백한 고유현 정권의 잘못에 기인한 인재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대형 인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당은 국회에 특위를 만들도록 제의했는데 여당에서 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당 자체 특위를 구성할 것이다.”


직접 해안가에서 기름 양동이를 날라본 적도 없는 주제에 정부의 대처에 대해 목소리만 높이는 국회의원들이 수두룩했다.

사고 초기에는 오성그룹의 미온적인 후속조치에 대해 따지고 드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보수언론 역시 정부에 대한 공격만 있고,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오성중공업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송 선배!”


류지호가 YNTV 사장 송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 류 의장, 오랜만. 하하하.

“YNTV도 오성그룹으로부터 협박 받았습니까?”

- 안부도 건너뛰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왜 오성중공업 예인선-홍콩 유조선 충돌사고가 아니라 태안 기름유출 사고입니까? 태안이 유조선입니까 사고를 유발한 예인선 이름입니까?”


오성그룹은 자사의 사명이 포함되면 그룹 이미지가 추락될 것을 염려해 명칭을 ‘태안 기름유출 사고’라고 부르도록 언론사를 압박하고 있다.

‘오성 비자금 의혹 관련 특별검사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당장 특검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다.

그런 상황에서 기름유출 사고에 큰 책임이 있다는 것까지 공론화가 되면 여론의 뭇매를 피할 수가 없다.

사건의 당사자이자 가장 큰 가해자이며 큰 책임이 있는 오성중공업이 명칭에서 사라지며 마치 자연재해인 것처럼 여론이 호도되고 있다.

일반적이 명명법 대신 지역명이 들어가게 됨으로써 오성의 책임 자체가 은폐되는 작용을 하고 있다.


“왜 사고 명칭에 가해자들이나 사건이 아니라 피해 지역이 들어가는 겁니까? YNTV도 이제 백원일보 같은 삼류 타블로이드로 전락한 겁니까?”


송일성이 즉각 사과했다.


- ....세심하지 못했어. 부끄러운 일이야.


정상적인 언론인이라면 류지호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책임소재가 명확한 사고의 경우 가해자를 명칭에 넣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류지호의 지적으로 YNTV이 이번 기름유출 사고의 명칭을 ‘오성중공업 예인선과 홍콩 유조선 해상충돌 사고’ 또는 ‘허베이호 기름유출 해상오염사고’로 칭하기 시작했다.

YNTV가 총대를 메자 진보신문들도 ‘오성‘이 들어가는 명칭을 사용했다.


“가뜩이나 명칭도 긴데 줄여서 부르는 것이 뭐가 문제야?”

“당신 집 앞에 기름유출 사고가 났고, 세계적으로 최악의 해양오염사고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다면 당신 집 주소지가 포함된 지역명으로 불리게 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어찌 보면 언론이 자행하는 2차 가해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해양사고에서는 사고 선박의 이름이 붙었다.

그럼에도 보수언론의 ‘오성‘을 보호하기 위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작태는 눈물겨운 충심이 아닐 수 없었다.

태안반도는 서해안 대표 해수욕장을 가진 관광지역이며 양식장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다.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최악의 해상 유류오염사고에 ‘태안’이란 명칭이 따라다니는 것만으로 관광지로써 끝장이다.

태안 주민들에게는 영원히 트라우마로 남게 되는 것이고.

주민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오성중공업이 해가 넘어갈 때까지 사과 한마디가 없다는 점이다.

태안 어민들이 자살하고, 사회적인 비난이 쏟아지는 1월 말에 가서야 부랴부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게 된다.

오성그룹은 도의적인 사과일 뿐 책임적 문제가 없다며 뻔뻔하게 군다.

심지어 유죄로 나온 1심 판결에 항의하기도 한다.

오성중공업의 변호인단은 오성의 책임한도액을 50억 원으로 제한해달라는 선박책임제한절차개시 신청을 법원에 제기하기도 한다.

왜 50억일까.

보험금이 50억이기 때문이다.

암튼 오성중공업과 홍콩 유주선 선주의 잘못을 따지는 것과 보상문제는 나중의 일이다.

당장은 양동이로 기름을 퍼 나르고 바위 사이에 낀 기름을 닦아내던 손들이 모여 거대한 인간 띠를 형성했고, 그렇게 자원봉사자들이 기적의 바다를 일궈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 덕분에 최소 10년이 걸릴 것이라 예상한 방제작업에도 속도가 붙었다.

사실 겉에 보이는 기름제거일 뿐이다.

그럼에도 2달 만에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게 된다.

자원봉사자들의 수만 123만 명에 이를 정도니 말 다했다.

당초 20년이 걸릴 것이라 예상한 태안 앞 바다의 생태복원을 그 절반 만에 이루게 된다.

그렇게 태안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과 정신을 상징하는 희망의 성지로 거듭나게 된다.

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와 함께 대한민국 국민의 저력을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이 된다.


“태안군청에 먼저 가야 한다던데?”


자원봉사자들은 방제에 필요한 물품을 태안군청에서 수령한 후 오염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류지호 일행은 태안군청에 기부할 100여 분의 보호장비를 가지고 내려왔다.

때문에 따로 군청에서 물품을 수령할 일이 없었다.

황재정이 오랜 만에 특유의 말투로 이죽거렸다.


“이건 뭐... 개판도 이런 개판이 따로 없네!”


자원봉사자들 일부가 제대로 된 보호장비 없이 유기화합물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일회용 우비를 입고 고무장갑을 낀 채 기름때를 제거하고 있기도 하고.

고무장화 역시 누군가 신었던 것들을 다시 신었다.

김우영 비서실장이 얼른 설명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조류인플루엔자(AI) 방역용으로 비축중인 개인보호복 10만 명분을 긴급 지원했다고 하는데, 20일 만에 자원봉사자가 60만 명이 몰려들다 보니, 새 제품을 공급하지 못해 재활용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류지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괜히 가족까지 우르르 데리고 왔다는 후회가 스치지도 했다.


“고무장갑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보건마스크와 방진마스크조차 지원되지 않는 것은 너무했는데?”


김우영 비서실장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송구하다는 듯 대답했다.


“보호복과 장화, 장갑은 소독 후 돌려쓰긴 한다고 합니다만. 마스크는 개인이 준비해 와야 하는 모양입니다.”

“저기 기름 빨아들이는 흡착포는 또 뭡니까?”

“헌옷으로 기름을 닦는다고....”


고우찬이 나섰다.


“비서실장 잘못이 아니잖아. 지원이 부족한 걸 어쩌겠어?”

“성금으로 몇 백억을 모았다면서? 그 돈 다 어디 쓰냐고! 하여간 이놈에 나라는... 에이 썅!”


황재정이 욕지거리를 내뱉고 먼저 갯벌로 걸어갔다.

그의 아내 윤정혜가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장비가 부족할 것 같아 나름 보호장비를 가지고 내려왔지만, 어림도 없어 보였다.


후우.


사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자원봉사자들이 새까맣게 해안 여기 저기 흩어져서 열정적으로 기름때를 제거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를 보호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주었을 때나 감동이다.

아무리 유출된 기름에 단시간 노출된다고 건강에 큰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만에 하나 단 한 명의 자원봉사자에게도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봉사의 실패다.

자연이 오염되는 것을 막아보겠다고 인간의 건강을 해치는 건 말이 되지 않기에.

자연생태계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언젠가는 스스로 복원한다.

하지만 인간의 건강은 한 번 망가지면 돌이킬 수 없다.


“매번 우리는 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본을 무시하는 걸까?”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보호장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자원봉사자든 뭐든 절대 민간인을 출입시키지 않는다.

헌데 이곳은 달랐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우비 같은 비닐옷과 고무장갑을 건네며 ‘어이쿠 고마워요. 어서 도와주세요‘ 그런 분위기다.


“지호야...”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항상 기적을 이런 무식한 방식으로 이뤄야 하는 거냐?”

“마음만 앞서서? 나도 몰라.”

“모두가 안전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재난에 대처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이래서 또 정치인과 관료를 소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광경을 추켜세우고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또 당리당략 때문에 묻지마 비난만 퍼부을 것이 아니라.

보호장비 하나 갖추지 않고 갯벌을 분주히 옮겨 다니고, 갯바위에의 기름때를 닦아내기 위해 헌옷으로 씨름하고 있는 민간인들에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질병이나 후유증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과 관료가 할 일이다.

그런 이들의 리더 즉 정치 지도자는 즉각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고.

태안 기름유출 자원봉사를 다녀간 수많은 국민들이 새롭게 봉사활동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고, 국민 스스로 알아서 위기를 돌파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매번 반복되는 엉터리 시스템은 과제로 남게 된다.


“김 실장!”

“옛! 의장님.”

“휴일에 비서실에 일을 시켜서 미안한데. 국내 위생용품 메이커들에게 연락해서 방제복과 방진마스크, 라텍스 장갑, 방제용 부츠 커버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한국 주거래은행 일반계좌에 당장 가용한 돈이 얼마나 됩니까?”

“당장 말씀이십니까?”

“당장.”

“172억 정도 됩니다.”


보통예금 통장에 200억 가까운 현금을 넣어놓고 있다니.

그런데 주변 누구도 놀라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운 일이다.


“급한 대로 30억만 씁시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 지원하길 원하십니까?”

“방제 책임자에게 현 상황부터 확인하세요. 적어도 정부가 지원했다는 10만 벌 정도까지 가능한지 알아보세요.”


전문가들도 많이 와 있다.

민간인이 나대는 것도 사실 좋은 모습은 아니다.

류지호로서는 가족들을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

봉사하는데 환경 탓하냐고 비난할 수 있다.

고생을 사서 할 수도 있다면서.

나라는 선진국으로 향하고 있는데 마인드는 여전히 후진국적 사고다.

내 몸을 버려 가면서 하는 봉사는 학대와 다르지 않다.

선행을 하기 위해 태안에 온 것이지 극기훈련을 온 것도 아니고.

류지호는 비서실장에게 물품지원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일행과 묵묵히 기름때 제거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한나절을 꼬박 기름때를 닦아냈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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