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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KaHaL 님의 서재입니다.

극랑전(極狼傳)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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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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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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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60화. 천우신조, 천우신조(天佑神助, 天紆神鳥) (2)

DUMMY

“방장, 소의당주가 당도하였사옵니다.”

“오, 어서 들라 하시게.”


설총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방장실 앞에 섰다. 격자형으로 짜인 문틀에 붙은 창호지 뒤로 인영이 하나 보인다. 설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한 번은 꼭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언젠가 한현보의 가주 자리를 물려받고, 아버지와 함께 찾아와 ‘소림방장’의 덕담과 조언을 듣는 날을 상상했었지, 이렇게 마치 적진에 홀로 들어서듯···.


‘아니, 그간 내가 알지 못했을 뿐. 강호는 본래부터 용담호혈이었다.'


설총은 각오를 다지고 방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표정이구려, 소의당주.”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방장.”

“허허허···.”


원종대사는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원종대사가 어떤 인물인지 뼈저리게 경험한 뒤임에도, 설총은 그의 웃음 속에서 인간적인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오히려 설총을 소름 끼치게 했다.


“아직 젊군, 젊어.”


동요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 설총은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원종대사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보통 웃어른과 대면할 때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물어볼 것이 아니라 그간 강녕하셨느냐, 하고 안부도 좀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좀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의견도 좀 구하는 것이 법도가 아니겠는가? 어찌 이리 서두르신단 말인가.”


속에서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느꼈지만, 설총은 그것을 억눌렀다. 치대는 것이 통하는 상대가 있고, 안 통하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방장. 결례를 범했군요.”

“오호···!”


원종대사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흡족한 미소를 띠고 설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간 한현보의 일을 면밀하게 관찰했던 원종대사다. 또한 지난 천하지회 간에도 설총과 그 일행은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실로 배포가 크고 성장이 빠른 사내가 아닌가?


“과연, 과연. 역시 사람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는 다 알 수가 없는 법이로구먼.”


애매모호한 감탄이었지만, 설총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주규, 그자의 이야기다. 그는 설총을 직접 대면한 이후로 무언가 심경에, 그리고 설총에 대한 평가에 어떤 변화가 있었고, 원종대사는 방금 그것에 동의하게 되었단 뜻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이럴 수 있나? 무종 정덕제의 장자(長子)를 자처한 그 사내의 신분을 생각해 보면 평범한 사제관계일 리는 없다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관계일지도.


예의를 논하고서 오랜 침묵은 좋지 않다. 빠르게 생각을 갈무리한 설총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결례를 범한 것을 깨달은 범부에 불과합니다.”

“허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범부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겸손이 지나치군.”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후후후···.”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리던 원종대사는 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 각설하고. 소의당주께서 맡은 직분이 있을 것인데, 이런 뒷방 늙은이가 주책없이 시간을 뺏었구먼그래. 본론으로 넘어감세.”

“···감읍할 따름입니다.”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킨 설총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인가, 떨리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설마, 설마 싶지만··· 아버님이 어찌 되기라도 한 것은···.


“정천맹은 천하의 무문에 입맹을 강요하지 않을 생각이라네. 무슨 뜻인지 아시겠는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주제가 나와서 잠깐 얼이 빠졌던 설총이지만, 이내 원종대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고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과거 계묘혈사 당시와 같이─ 보다 분명하게 강호인들에게 정천맹의 깃발 아래에 집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도리일지도 모르겠네만.”


잠시 말을 끊은 원종대사는 피식, 웃는 소리를 내고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군.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한 잡류 따위가 얼마나 모이든, 백련교와 같은 거대한 위협을 앞두고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재차 확인할 생각도 없고 말이네.”

“···어찌,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자네이기 때문일세.”

“···!”

“인제 와 뻔뻔하게 굴고 싶지는 않구먼. 이미 많이 뻔뻔했다는 자각은 있네만, 작금에 와서 그걸 사과하는 것도 우습지. 아니 그런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설총은 머릿속 가득 부풀어 오른 혼란의 누룩을 잠재우기 위해 애를 썼다. 저 원종대사가 이렇게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이겠는가? 진정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불안의 먹구름은 계속 커져만 갔다.


“당황하셨는가? 실로 처음 보는 모습이로군.”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후후후··· 그렇군. 자네에게는 이 상황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하나 있었지. 내 그것을 깜빡하고 있었군.”


아버님을 말하는 것인가? 설총은 대놓고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마터면 살기까지 내비칠 뻔했다. 그런 동요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던 원종대사는 한결 짙은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자네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테니··· 긴말은 않겠네.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쯤이야 대충은 아실 테지. 동행한 이가 다른 이도 아니고 염라왕, 그 친구 아닌가? 염천호··· 솔직한 이야기로, 하오문 같은 삼류문파와 얽히지만 않았어도 천하십이본의 일각을 좌지우지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친구니까 말일세.”


이런 상황에서까지 딴소리라니. 이 정도면 병이 아니냐 쏘아 붙여주고 싶었던 설총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하여 말했다.


“···말씀대로, 작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대강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방장께서 가지고 계신 그림과 같은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후후후···! 그렇군. 솔직하게 대답해주어 고맙네. 허면, 이 늙은이도 솔직하게 한 번 패를 까 보이는 것이 옳겠구먼.”


잠시 숨을 고르듯이 말을 멈춘 원종대사는 다구와 차를 꺼냈다. 느린 손길로 물을 덥히고, 찻주전자를 정비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실은, 여기까지 온 마당에··· 적어도 이 늙은이의 계획에서 한현보는 큰 의미가 없어졌다네. 물론 아직까지 미련을 가진 사람이 몇 있긴 하네만.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일세.”

“···.”

“자네만 원한다면, 하남제현과 한현보를 내 보호 아래에 둘 수 있네.”


두 귀를 의심케 하는 제안이었지만, 설총은 도리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원종대사가 본색을 드러낸 동기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치러야 할 대가가 있겠지요?”

“물론일세.”

“무엇입니까?”

“자네.”

“목숨··· 이라도 내놓으란 뜻입니까?”

“목숨은 아니지만··· 목숨보다 중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


원종대사는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뜻을 꺾으시게.”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설총의 가슴을 울렸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이미 무의미해졌으니, 이제는 저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굴종하란 그 말이 지난 천하지회의 마지막 순간에 맛보았던 패배와 절망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세운 뜻을 꺾지 않으리라.’


뜻을 꺾으란 말은 분명, 이 구결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제안··· 일걸세. 이다음은 없겠지.”


설총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원종대사는 계속 무심한 말투로 툭툭, 말을 내던졌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다구를 매만진다. 설총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고, 마침내 아예 눈을 감아 버린 그때, 원종대사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찌하시겠는가?”



* * *



진량은 자기 손을 맞잡은 손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손의 주인이 다름 아닌 지휘사 홍위윤이었기 때문이다.


“진 천호.”

“예, 지휘사 대인.”

“내 이제부터 진 천호를 사숙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예에? 아, 아니, 어찌 소인이 지휘사 대인께 사숙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하, 진 천호께선 겸손이 과하시군요. 천호께서도 아시다시피 본 지휘사가 처음 무(武)에 발을 들인 곳이, 다름 아닌 한현보가 아닙니까? 듣자 하니, 한현보가 군문세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 진 천호께서 계셨다고 하더군요.”


진량은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다.


“대··· 대인! 당시의 일은, 그, 그것이··· 그게···!”


홍위윤은 진량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천호, 일단 진정하시고··· 무슨 연유인지 끝까지 들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소?”

“아, 그··· 예, 예.”


간신히 이성을 되찾는 데 성공한 진량은 홍위윤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곧 홍위윤은 다시 한번 진량의 심장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홍위윤이 진량을 향해 공수례를 취하며 머리를 숙인 것이다.


“대, 대인!”

“어허, 아무 말 말고 어서 절을 받아주시오.”

“그··· 그것이.”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엄숭의 복심으로 일컬어지는 사내의 앞에서라니. 온 저잣거리에 방문을 만들어 붙여도 이보단 소문이 덜 날 것이다. 아마도 저 사내가 입만 벙긋하는 순간 온 나라의 관리들이 알게 되리라. 위지휘사가 고작 정천호 따위에게 절을 올렸고, 방만한 정천호가 또 그것을 받았노라고 말이다.


“부, 부디, 지휘사께서는 미천한 소인이 이 절을 왜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만이라도 알려주시길 간청하나이다.”


홍위윤은 공수례를 취한 허리를 펴지 않은 채 그대로 답했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소?”

“무··· 무엇을.”

“진 천호께서는 본 지휘사에 있어서 사숙과 같은 분이라고 말이오.”


그 순간, 진량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제야 비로소 진량은 이해할 수 있었다. 홍위윤은 지금 진량에게 ‘동문의 예’를 청한 것이다. 즉, 관리로서 위지휘사와 정천호의 관계가 아니라, 한현보를 매개로 동문의 관계를 원한다는 뜻이다.


애초에 과거 진량이 한현보 같은 반편이 무가를 무리하게 군문세가로 만든 것이 바로 이것을 위함이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홍위윤의 아버지, 홍수덕 장군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한동안은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야만 했었다. 홍위윤에게 쓸만한 무공을 가르쳐놓으라 했는데, 도리어 다리 병신을 만들 뻔했으니 말이다.


홍위윤 또한 그간 진량을 보는 눈이 썩 좋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 아닌가?


“어, 그, 그것이···.”


진량은 저도 모르게 우거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우거는 가느다랗게 뜬 눈을 초승달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아마도 홍위윤의 지금 행동은 저 사내의 머릿속에서 나왔으리라.


“소, 송구스러우나 과거의 연을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 지휘사 대인께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떨떠름한 자세나마 진량이 공수례를 받자, 홍위윤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크게 웃으며 진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하핫! 이 얼마나 복된 날이오? 내 진 천호를 진즉부터 눈여겨보기는 했소만, 설마 동문이란 연이 우리 사이에 맺어져 있음은 그간 생각지 못했소이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 설마하니 한현보란 잡문에서부터 이런 보검을 찾을 날이 올 줄 뉘 알았겠소?”

“보검이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하하, 과공은 비례요, 진 천호. 아니··· 사숙.”


홍위윤의 호칭에, 진량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 하하하.”


홍위윤의 눈이 우거를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진량 역시 우거에게로 눈을 옮겼다. 우거는 알 듯 모를 듯한 미묘한 미소를 만면에 띄운 채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았다.


“본 지휘사는 그간 공(公)을 뵈옵기를 갈망하고 또 갈망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기회가 닿질 않았는데 말입니다. 한데, 이리 가까운 곳에 공과 인연이 있는 분이 있었을 줄이야. 이는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 또한 다 때가 있는 게지요.”

“하하, 맞는 말씀이십니다.”

“사람의 의지로 만사를 주관할 수 있다면야 오죽 좋겠습니까만··· 진인사대천명이라,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도 꽃을 피우려 봄을 앞당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봄이 이르렀을 때 늦지 않고 이리 아름다운 자리를 가질 수 있음이 감사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홍위윤은 감격에 차다 못해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우거를 바라보며 포권례를 취했다.


“이를 말씀이십니까.”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 만남에 가장 큰 공을 세우신 분은 역시 진 천호 대인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예의 그것은 역시 진 천호께 먼저 기회를 드리는 것이 어떠하신지?”

“음···.”


우거의 말이라면 간이라도 빼서 내줄 것 같던 홍위윤의 얼굴이 굳었다. 그 찰나에 열두 번도 더 심장이 내려앉았던 진량은 간신히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고 우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거는 가만히 검지를 세워 들고 입술에 대고 있었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다. 진량은 요동치는 혓바닥을 당장 잘라버리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자신의 시선이 혹여 홍위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엄하신 황상 폐하의 법도는 아직 출진의 기회를 받지 아니한 장수들이 있음에도, 패장에게 재전(再戰)의 기회를 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을 공께서도 잘 아시는 바가 아니오?”

“물론입니다. 공평무사하신 천자께서 세우신 법도로 젊은 장수들의 등용문이 크게 열린 것이 이 시대 제일의 홍복이 아닙니까? 저 남해의 명장 용행검이 그 용맹을 떨칠 기회를 얻은 것 역시 천자께서 인덕으로 이 나라를 통치하신 덕이지요.”

“하니, 말이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의 홍위윤을 쳐다보며, 우거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보아도 비웃는 듯한 표정에 홍위윤의 얼굴이 더 굳었고, 진량의 심장은 내려앉았다.


“지휘사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무엇을 말이오?”


조금 전과 달리 불쾌함이 가득 묻어나는 홍위윤의 답변에, 우거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북경은 지금, 전에 없이 고요합니다.”

“···천하가 이리 평안하거늘, 북경이 고요한 것이 당연지사 아니겠소이까?”


흥, 코웃음을 치는 홍위윤을 보며 우거는 혀를 쯧쯧 차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우거의 무례에 홍위윤의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본 지휘사를 한낱 시정잡배로 보기라도 하는 것이오?”

“큰바람이 일기 전에는 반드시 침묵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법. 하루가 멀다고 엄숭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는 와중에도 이토록 고요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말을 맺은 우거의 얼굴에 웃음기라곤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엄숭을 이름 그대로 부른 탓에 그의 말이 끝나고서야 내용을 이해한 홍위윤은 식은땀을 흘리며 우거를 쳐다보았다.


“어··· 그, 그러니까···.”

“도무지 이해를 못 하시겠다면, 소생은 이만 가봐야겠군요.”


우거는 진짜로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버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홍위윤 대신 진량이 그를 발작적으로 잡았다.


“서··· 선생!”

“예, 천호 대인.”


그대로 매정하게 떠나갈 것 같았던 우거가 순순히 멈춰 서자, 진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빠르게 말했다.


“여기 있는 지휘사 대인께서 그간 선생 뵙기를 원하고 또 원하였던 것은, 군문에 속한 무부(武夫)로서는 알 수 없는 세상의 깊은 지혜를 얻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서야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며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세상의 이치를 깨치시지만, 군문에 속한 무부가 어찌 선생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무부에겐 무부의 분량이 있으니, 모자람을 선생께서 채워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야말로 청산유수로 뱉어내는 말에 우거의 입꼬리가 슥, 말려 올라갔다. 아부하는 혀 놀림만큼은 여느 사대부 뺨을 쳐도 열 번은 후려칠 실력이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로군요.”

“하면 선생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후후···. 그럴까요?”


힐끗, 우거의 시선이 홍위윤을 향했다. 어물거리던 홍위윤은 잽싸게 분위기에 올라탔다.


“사숙의 말씀대로입니다, 선생. 가르침을 주십시오!”

“음··· 그러죠, 뭐.”


조금 전 진량의 절박했던 태도가 무색할 정도로 우거는 싱겁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야말로 기행이라 부를 태도였지만, 그의 행동에 딴죽을 걸 만큼 용감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하늘의 날씨가 늘 같지 않은 것처럼, 천자의 마음 역시 그러합니다. 어느 때는 큰 볕이 들지만, 또 먹구름을 가득 몰고 올 때가 있는 법이지요.”

“···그, 그렇군요.”


두 사람의 표정을 본 우거는 한숨을 내쉬고 좀 더 직접적인 비유를 들기로 했다.


“권좌에 오른 사내가 한 여인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엄숭이 천자의 총애를 독식한 이래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그야말로 살에 닿는 비유에 두 사람은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주색잡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들답다. 우거는 끓어오르는 경멸을 속으로 곱씹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북경이 요동칠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지휘사께서 고작 하남성의 일에만 매달려 계신다면··· 어찌 될까요?”


홍위윤은 두 눈을 번쩍, 부릅떴다. 그의 인생에서 한현보란 이름 석 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야말로 지대하다고 할 만했지만, 그 비교 대상이 북경의 조정이라면 입에 담을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복수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지만, 야망은 인생 아닌가?


“공의 말씀이 백번 지당합니다.”


홍위윤의 어조가 극존칭으로 바뀌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하는 그를 따라, 진량 또한 포권례를 취했다.


“선생··· 아니, 공의 신묘한 지혜에, 이 진모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거는 포권례를 받고 말했다.


“지혜 있는 사람은 귀를 열고 다른 이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아는 사람이지요. 소생이야말로 지혜 있는 분들을 만난 것 같아 기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리도 고귀해 보이는 꼽추가 또 있던가? 진량은 흡족한 미소를 띠고서 전조를 불렀다.


“밖에 있느냐!”

“예, 대인. 부르셨사옵니까?”

“준비한 상을 들이라.”


우거가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가로젓는데, 진량이 말했다.


“일전에 공께서는 술과 여인을 멀리하신다 하셨지 않습니까? 하여, 변변찮지만 보신(保身)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로 준비하였으니, 부디 이번에는 자리를 물리지 말아주시지요.”

“···흠, 그렇군요.”


우거는 쓴웃음을 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량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홍위윤에게 말했다.


“지휘사께는 차후 좋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삭막한 개봉부보다야 정주가 운치도 있고, 자리도 더 즐겁지 않겠습니까?”

“어흠, 이를 말씀이시오. ···사숙.”

“으허, 이런, 하하하,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곧, 의미 없는 웃음소리가 방을 메웠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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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52화. 거래 (2) 24.02.08 274 8 13쪽
172 52화. 거래 (1) 24.02.07 297 6 13쪽
171 51화. 운명(運命) (2) 24.02.06 284 7 16쪽
170 51화. 운명(運命) (1) 24.02.05 288 8 13쪽
169 50화. 예언(豫言) (2) +1 24.02.04 288 10 13쪽
168 50화. 예언(豫言) (1) 24.02.03 292 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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