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산티아고
오랜만에 느끼는 안정된 설렘이 좋다. 눈을 감을 때도 눈을 뜰 때도 고개를 돌릴 때도 반가운 얼굴이 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식사하고 발걸음을 맞추며 걷는다. 쉬지 않고 대화하고 상대의 어떤 표현과 행동도 그저 좋게만 보인다. 눈치 볼 사람도 없이 함께했던 시간은 산티아고를 목전에 두고 사흘 만에 끝이 났다. 마지막을 함께 한 곳에서 수정은 일행을 기다리기로 했고 창연을 만나 하루 이른 걸음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은 걸음을 마무리하는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던 순례자들은 지난 걸음 동안 인연을 쌓았던 순례자들과 재회를 기뻐하며 추억을 사진에 담기 바빴다. 광장 중앙에 배낭을 떨구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찌를 듯 솟은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을 멍하니 바라봤다.
피레네 산에서 찾으려 했던 곳이 여기구나. 언제 여기까지 왔지? 고작 일주일 전에 출발한 것 같은데 벌써 도착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산티아고가 더 멀리 있기를, 계속 멀어져 영원히 닿지 않기를 바라며 걸었는데 벌써 도착해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다. 우연에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는데 결국 여기까지 왔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순례자들처럼 나도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 생각보다 여운이 없다. 그저 오늘 목표로 했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처럼 다를 게 하나 없는 평범한 하루일 뿐이다.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알베르게를 찾고 식사를 한 뒤 내일 목적지를 정해야 할 것 같은 지나온 일상의 한순간과 다를 게 없다.
“꼬레아!”
익숙한 목소리다.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마드리드 부부다. 의미를 전달하는 건 여전히 언어가 아니라 마음이다. 서로 얼싸안고 완주를 응원하며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응원과 작별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어디선가 만난 한국인, 지속적으로 마주쳤지만 대화는 거의 없던 외국인, 창연의 친구, 그의 친구. 한 번이라도 스쳤거나 인연이 있는 모든 순례자는 서로를 축복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같은 길을 걸었다는 단순한 사실, 비슷한 고생을 했다는 공감대, 목적을 이룬 모든 이에게 꾸밈없이 던지는 축하와 축복 등이 광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시 올 수 있을까? 이 길을 온전히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 기회만 준다면 생장까지 거꾸로 갔다 다시 산티아고로, 다시 생장으로, 이 걸음을 평생 반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적어도 이후에 단 한 번이라도 더 걷고 싶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걸으면서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놓쳤던 것들을 다시 찾을 기회가 한 번만이라도 더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말하길 부처님과 예수님이 같이 와도 싸운다는 길. 그 카미노가 선택한 사람만이 카미노를 걸을 수 있다. 그 선택을 다시 한번 받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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