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술래잡기
최대한 빨리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늘어난 한국인들의 아점(아침+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니 약속했던 시간보다 10분이나 늦었다. 다급한 마음에 멀지 않은 거리를 단숨에 뛰었지만 우려하던 대로 수정은 이미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감동? 눈물? 그 상황에서 수작을 놓치지 않는 나도 대단하다. 성당 안에 감동이 절정에 달했던 평화의 인사 때 제단 위에 있던 순례자들은 모두 서로를 뜨겁게 안아주었다. 그 온기의 전달은 자연스럽게 수정과도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고 감동의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9시에 아까 그 파라솔에서 기다릴게.”
마을에 도착했을 때 휴식을 취하던 파라솔 의자에 앉아있던 수정은 발걸음 소리에 뒤돌아봤다. 이 친구를 왜 불러냈지? 어젯밤처럼 타인 눈치 보지 않고 단둘이 시간 보내려고? 듣지 못한 대답을 듣기 위해? 만남을 제시한 남자도 모르는 목적에 수정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일정 고민에 푹 빠져있다.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이 있는데 계속 사람들하고 같이 움직이니까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루다는 제가 꼬셔서 온 거잖아요. 그런데 루다를 두고 저만 생각하고 혼자 간다는 게 걸리더라고요. 그렇다고 계속 신경 쓰면서 불편하게 걷고 싶지 않아서 어머니-사비나 아주머니께만 슬쩍 말씀드렸어요. 내일부터 얘기 안 하고 따로 다른 마을에 묵을 거라고요.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까지 며칠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고요.”
감이 잡히질 않는다. 혼자 있고 싶다. 그러니 너도 이제 붙지 마라. 인지 일행과 떨어질 테니 따라와라. 인지 헷갈렸다.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혼자 괜찮겠어? 이 길이 다른 여행지에 비해 훨씬 안전하긴 하지만 여자 혼자 다니긴 좀 그렇잖아. 오빠도 이제 일행하고 일정이 달라서 혼잔데 같이 걸을까?”
이 길을 한 달 가까이 걸었으면서 기껏 생각한 게 안전 문제라니. 한심할 정도로 어색한 임기응변을 후회할 틈도 없이 수정의 대답은 간결했다.
“좋아요.”
길을 걷는 목적은 산티아고에 닿기 위해서다. 그 안에서 얻고자 했던 것과 얻어진 것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목적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 다양한 마을과 풍경을 지나쳐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길의 끝이 산티아고라는 사실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처음으로 걸음의 새로운 목적이 생겼다. 발가락의 상처가 완전히 나은 덕에 전투화를 다시 신어 걸음이 편해진 덕도 있겠지만 기대와 설렘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출발과 걸음으로 여자는 자신의 걸음을 걷는다. 그녀의 일행 역시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약속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이 길에서 만난 누구보다 빠른 걸음을 걸을 수 있는 남자는 느긋하게 출발하나 여전히 빠르게 걷는다. 먼저 출발한 한국인들을 하나둘 추월하며 빠르게 걷는다. 남자의 출발은 지난 시간과 같았으나 목적은 한계에 가까운 속도로 일행과 거리를 벌리는 여자다. 길 위 어딘가에서 결국 두 사람은 재회한다. 그리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의 시선을 경계하며 여자의 일행과 거리를 둔다.
젊은 남녀가 여행 중 눈이 맞아 같이 다닐 수 있지만 이미 구성원의 한 사람이 된 수정의 입장을 고려할 때 가급적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 내린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다시 만난 수정의 표정은 복잡했다. 사비나 아주머니를 제외한 일행에게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사라진 미안함, 특히 루다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미안함에 생긴 근심이 얼굴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마음을 고쳐 다시 일행과 합류하고 싶은 마음과 다짐을 관철하고 싶은 마음이 팽팽하게 맞섰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공범까지 생긴 마당에 돌이키긴 어려웠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수정의 근심걱정을 얼굴에서 지우기 위해 당면한 과제로 말을 돌렸다.
수정과 만나기 전 용식 형님과 정수는 이미 한 시간 전에 지나쳤다. 그들의 속도를 생각했을 때 한자리에서 한 시간 이상 휴식을 취하지 않는 한 목적지 도착 전 만날 확률은 낮았다. 하지만 오늘도 새벽 일찍 출발한 사비나 아주머니와 루다는 여전히 앞길을 걷고 있을 게 분명했다. 혼자라면 모를까 목적지 전 그들을 추월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사실 추월하게 되더라도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지금까지 고민한 게 모두 허사가 될 수도 있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우리가 뒤에 있다는 사실이다. 멀찌감치 그들을 확인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걷다가 기회가 될 때 지나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그들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적당히 둘러댈 변명과 새로 시작될 숨바꼭질에 대한 대안까지 세웠다.
가늠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나름 적절히 준비했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말끔히 사라지진 않았다. 결국 노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순례길에서 벗어나 1.5km를 단축할 수 있는 도로를 택했다. 실수가 아닌 이상 지름길을 선택한다는 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운이 좋다면 그사이 사비나 아주머니와 루다를 앞지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택은 옳았다. 수정 일행의 목적지인 사리아(Sariia)에 도착할 때까지 사비나 아주머니와 루다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제법 규모가 있던 도시를 벗어날 때까지도 그들과의 조우는 없었다. 이제 안심할 수 있다. 매일 이렇게 그들이 정한 목적지보다 한 마을씩 앞선다면 이젠 술래에게 잡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조금 걱정인 건 안면이 있던 몇몇 한국인들에게 동행이 목격됐다는 점이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행위가 내 공작에서 시작됐다 생각하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이제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다. 남은 일정 중에도, 한국에 돌아가서도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던 하등 신경 쓸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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