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한국인 자매의 소문
놀라운 여자다. 말로는 속도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고 있다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혜수는 거의 비슷한 속도로 걸었다. 발바닥 통증 때문에 지금은 속도를 못 내고 있지만 초반에 만났던 준영도 이렇게 걷지 못했는데 볼수록 대단하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알베르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먼저 도착해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 세 명의 순례자 중 두 명은 중년의 한국인 부부였다. 우리보다 약간 일찍 도착한 그들은 융통성 없는 이곳의 문화에 다양하게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참, 그 얘기 들었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한 여자는 사건을 직접 목격한 당사자로 벌써 4일이나 지난 일인데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꽤 넓게 퍼졌다고 했다. 사건은 이랬다. 한국인 자매가 까리온데 로스 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의 수도원 알베르게에 묵었는데 아침에 출발하려고 보니까 신발장에 뒀던 동생의 신발이 사라진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당장 신고 걸을 신발이 없어졌으니 아쉬워하며 넘길 분실이 아니었다. 멀쩡한 신발이 스스로 없어질 리 없으니 분명 이르게 출발한 누군가가 범인이리라. 언니는 동생에게 목적지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앞선 순례자의 신발만 보며 열심히 뛴 덕에 2시간 만에 잃어버린 동생의 신발을 찾을 수 있었다. 신발을 신은 독일 여자는 처음에 완강히 부인했다. 제조업체가 세계적인 기업이었기에 같은 신발을 헷갈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같은 제품을 사서 언니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신발의 세부적인 걸 알고 있어 먼저 가격을 물어봤다. 환율을 생각해도 동일한 제품엔 큰 차이가 없을 거란 계산이었다. 독일 여자는 대답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는 중재를 자처하며 일이 커질 수도 있으니 솔직히 말하라고 설득했고 여기서 언니의 마지막 카운터가 들어갔다. 사이즈를 얘기해 봐라. 자신의 신발이라면 사이즈를 모를 수 없는 건데 결국 독일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리며 신발을 벗어 언니에게 건네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맨발로 사라졌다.
이야기는 그렇게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결말로 끝이 났다. 목격자인 여자는 후에 그 자매가 다시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만났을 거라 예상했다. 여기서 걸리는 건 대전에서 온 20대 자매였다. 구체적인 정보는 없지만 왠지 그 자매가 수정과 루다일 것 같았다. 언니의 외모를 설명하니 수정이 맞았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통해 전해진 강렬히 기억된 여인의 소식 때문은 아니다. 미움은 완전히 사라지고 애정조차 잊어가고 있던(잊으려고 노력하던) 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도 아니다. 한때 일행이었던, 동생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녀들에겐 스마트 폰, 통화 가능한 전화기도 없었다. 그런데 막연히 어디서 만나자는 짧은 약속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신발은 찾았지만 그 외에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끝없이 이어졌다. 그들의 걸음과 일정을 고려하면 이삼일 무리해서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일행과 헤어져 그들을 쫓아가야 할까? 쫓아가면? 이미 상황은 끝났는데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다고? 동생들에 대한 걱정은 핑계고 수정을 다시 만나고 싶은 건가? 다시 만나면? 다시 만나면 뭐가 달라질까? 그녀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받은 상처에 대한 사과라도 받으려고? 아니면 다시 잘해볼 생각 없냐고? 부질없다. 아무 의미 없다. 그런데 다시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들어와 자릴 잡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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