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상처받지 않게 하소서.
생장에서 같은 날 출발했던 이를 며칠 후 다시 만나거나 거의 매일 마주치고, 며칠 일찍 출발한 이들을 만나는 건 흔한 경우다. 하지만 무려 닷새나 늦게 출발한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자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이런 속도면 거의 하루에 40km에 가까운 거리를 걸어야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는 못 걸어요. 그래서 4~5는 되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녹초가 돼서 거의 밥만 먹고 자요. 그래도 이 길이 너무 좋잖아요. 남들은 좋으면 천천히 즐기면서 걸으라고 하는데 전 일정에 여유가 없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최대한 걷다가 안 되면 가끔 버스도 탈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산티아고에 얼른 도착해서 버스 타고 좋았던 길로 돌아가서 다시 걸으려고요.”
슈퍼맨이란 별명을 얻은 게 민망하다. 수정과 루다의 신발 사건을 전했던 부부는 병원 신세를 졌고, 정수의 팔은 고약한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팔의 살이 다 벗겨졌다. 순영 누님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지만 약을 꾸준히 바른 덕이었을 뿐 꽤 고통스러워했다. 베드버그의 피해와 고통은 상상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모기에 물린 흔적인 줄 알았던 것이 베드버그에 물린 증상이었다. 병원 신세를 졌던 부부와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을 때부터 증상이 나타났으니 그곳에서 물렸을 텐데 왠지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모기에 물렸을 때처럼 작은 붓기가 여러 개 돋고 며칠 지속된 증상 정도였지 심하게 가렵지도 않았다. 역시 난 슈퍼맨이 맞았어. 범인(凡人)과 다르다며 우쭐했는데 이 여인을 보니 그냥 좀 튼튼한 평범한 남자였을 뿐이다.
“혹시 그 얘기 들으셨어요? 자매가 같이 왔는데 프랑스 여자가 동생 신발을 훔쳐 갔대요. 그래서 언니가 쫓아가서 결국 신발 도둑을 잡았다던데 혹시 만나신 적 있으세요? 비슷하게 걸으셨을 것 같은데··· 아무튼 대단하지 않아요? 어떻게 그걸 쫓아가서 잡았을까요?”
도대체 이 길 위의 소문은 어디서 어디까지 흐르는 걸까? 심지어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퍼지던 그 소문은 독일 여자의 국적이 프랑스로 바뀌었다.
“혹시··· 태극기 청년 맞죠? 엄청 유명해요. 짧은 머리에 수염 기르고 배낭엔 태극기 두르고 한복 입은 한국인 순례자가 어떤 분인지 되게 궁금했어요. 상상에는 도인 같은 외모였는데 보는 순간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그 소문 들은 다른 순례자들도 태극기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 굉장히 궁금해해요.”
수정의 소문이야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만한 사건과 이야기가 있으니 납득이 되는데 도대체 난 왜지? 세탁이 어려워 배낭 속 고이 간직할 뿐 순례길에선 두어 번밖에 입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소문이 돈 걸까? 군인보다 짧은 머리,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 한복, 태극기 두른 배낭, 순례자······. 객관적으로 상상해 보니 충분히 특이한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마을 내 유일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다정한 걸음은 누가 봐도 연인의 모습이다. 정답게 주고받는 대화와 다정하게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서로에게 맞추는 걸음까지 완벽히 연인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관계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지 말고 얘기해 주라. 아까 성당 방명록에 뭐라고 쓴 거야?”
한국인 원더우먼(?)을 만나기 전 산책을 하며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종교가 없는 수정이었지만 이 길의 분위기 때문인지 어제 미사에 참여했던 것처럼 기도하거나 종교적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었다. 작은 시골 마을의 딱 그만큼 소박한 성당 내부는 그저 최소한의 형태만 갖춘 종교 건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구경의 목적도 있었지만 특별할 게 하나 없는 성당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게 했다. 수정도 따라 무릎 꿇었다. 나름 표정과 자세가 진지하다. 기도의 내용을 물을 순 없지만 내가 일어난 뒤에도 한참이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뭔가 개운한 얼굴로 일어난 수정은 성당 입구 한쪽에 위치한 방명록에 관심을 보였다. 뒤 내용을 열심히 훑어봤지만 한글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수정은 먼저 나가 있으라며 성당 밖으로 밀어내고 순식간에 무언가를 적고 방명록을 덮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던 그 방명록 속 짧은 글이 관계를 결정지을 단서가 될 것 같은 생각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진짜 별 내용 아니에요. 그저··· 다시는 오빠 마음 불편하지 않게 해달라고, 상처받지 않게 해달라고 썼어요.”
그래도 제 잘못은 아니 다행이다.
“그날 이후로 계속 후회했어요. 그렇게 보내면 안 되는데, 상처만 주고 그렇게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오빠 좋아해요. 그때도 좋아했고요. 그래서 키스도 할 수 있었고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무서웠어요. 전에 받은 상처가 너무 아파서 다시는 그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가 아프기 싫다고 오빠한테 상처 줬다는 게 계속 미안하고 후회스러웠어요.”
부르고스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뱉으며 울먹이는 수정의 감정은 충분히 공감된다. 나도 그런 경험은 있었다. 그땐 여자가 몸에 손대는 것조차 역겨울 정도였다. 사랑은 더러운 속임수며 다시는 이성에 감정을 품지 않으리란 젊은 날의 흉터는 결국 시간이 흘러 조금이나마 어른이 된 뒤 찾아온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얼씨구, 얘 좀 봐. 전에도 그랬지만 울고 싶은 건 나지. 어디 가해자가 피해자 앞에서 눈물을 보여? 너 아까 성당에서도 그렇게 기도한 거야? 상처받지 않게 해달라고? 근데 왜 또 상처를 주려고 그러냐. 앞으로 일은 잘 모르겠어.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네가 나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그건 지금 걱정할 일이 아니잖아. 매일 이 길을 걸으면서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잖아. 많이 걸으면 다리하고 발도 아프고, 어떤 날은 다칠 때도 있잖아. 우리 그런 거 다 걱정하면서 출발 전에 망설이지 않잖아. 물론, 문제가 생길 게 예상되면 겁은 좀 나지.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옷 입고 신발 다 신고 알베르게에서 나왔으면 출발해야지. 봐. 임마. 너 지금도 오빠 손 이렇게 꼭 잡고 있잖아. 이거 누가 봐도 연인사이야. 아까 같이 밥 먹은 창연이하고 민아. 걔네가 우리 보고 뭐라고 생각했겠니? 아, 쟤네는 특별히 친해서 저렇게 단둘이 다니는 순례 동지구나. 이렇게 생각하겠어? 우린 거의 사실혼 관계라니까? 너 지금 이 손 놓으면 오빠한테 위자료 줘야되는 거야.”
마음은 확인했으니 수정의 입을 통해 대답만 들으면 되는 상황이다. 어차피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라는 건 수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거부와 부정이 익숙했던 수정은 긍정에 대해 표현하는 게 어색하고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아직도 눈물이 살짝 고인 눈망울로 올려봤다.
“그냥··· 좋아요. 그래. 그럼 되는 거야.”
“좋···아요.”
부르고스에서 작별하고 정확히 보름이 지난날 수정의 입에서 그토록 원하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수정의 말처럼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의 설레는 감정이 사라지고 익숙함이 찾아오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연애에 앞서 의미 없는 기우일 뿐이다.
어제와 오늘 이 길 위에서 그토록 찾던 두 가지를 전부 얻었다. 이제 산티아고에 도착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보상도, 선물도, 이 길의 가치까지 이미 다 받아 내 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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