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Now is miracle(기적과 함께)
미사 전 성당 구경도 하고 기도도 할 겸 일찌감치 성당을 찾았다. 미사 시간 확인과 성당 위치 확인을 위해 미리 찾은 덕에 시간 맞춰 쉽게 도착했다. 성당 앞은 그동안 걸으며 지나쳤던 낯익은 다양한 국적의 순례자들이 사진을 찍거나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과 간단한 눈인사 후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미사 준비에 한창이던 신부님이 제대 위로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이유가 짐작이 가진 않았지만 그의 손짓에 이끌려 제대 앞까지 갔다. 그는 걸음을 멈춘 동양인에게 계속 손짓하여 제대 위로 올라올 것을 요구했다.
아, 그렇지. 누가 봐도 난 무거운 것을 잘 들게 생겼지. 뭘 해야 할까? 당연히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신부님은 제대 뒤쪽에 있는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사 중 일반 신자가 제대 위에 올라가는 경우는 주례 사제를 돕는 역할을 하는 복사(服事)뿐이며 미사 중간에 독서나 특별히 강의나 유사한 목적을 위해 독서대에 서는 게 아니라면 흔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선뜻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신부님은 그 뒤로 성당에 들어오는 순례들을 계속 제대 위로 이끌어 앉혔다. 12명의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사람들 가운데 사비나 아주머니와 수정도 함께 했다.
뒤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앞부터 차례로 앉힌 신부님은 제대 위 순례자들에게 국적과 언어를 물어보며 정체불명의 종이를 꺼내 나누기 시작했다. 받은 종이는 총 3장이었는데 영어로 된 해석 안 되는 한 장과 누군가 번역해서 수기로 작성한 순례길과 마을에 대한 장문의 안내문, 그리고 한글로 된 짧은 기도문 4개가 쓰인 종이였다. 이렇게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한글로 된 안내문을 보게 된 반가움을 안고 미사는 시작했다.
가톨릭교회의 미사 전례는 세계 공통이다. 비록 말이 다르고 문화에 따라 아주 작은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전례 순서와 방법은 동일하다. 모태신앙으로 지금껏 성당 다니는 동안 복사 경험은 없었기에 제대 위의 미사가 어색할 뿐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부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함께 제대에 앉아있던 젊은 백인 남자가 일어나 제단으로 향했다. 신부님은 이미 자리를 비켜줬고 그는 제단 마이크를 통해 미리 받은 종이를 들고 스페인어로 짧은 기도를 했다. 그가 들어오자 이번엔 백인 여자가 프랑스어로, 옆에 앉아있던 백인 남자는 영어로 기도했다. 짧은 기도문 4개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 차례다. 무대 공포증이 있긴 하지만 더 떨린다. 울림이 작은 마이크를 통해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분명히 발음하려고 애썼다. 기도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자 신부님은 뒤돌아 나를 가리키며 순례자들을 향해 뭐라 말하자 웃음소리가 성당을 울렸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 웃음이 뭘 말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동양인에게 흔하지 않은 굵고 울림 있는 목소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였을 것이다.
평신도(일반 신자)로 제대 위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도 흔하지 않은 일인데 제단 앞에서 기도할 기회가 있었다는 감동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사가 진행되는 내내 그 감동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평화의 인사 시간이 되었다. 신부님은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을 많은 순례자에게 평화의 인사에 대해 설명했다. 고개만 숙여도 안 되고 악수도 안 된다. 포옹하되 상대가 부서질 듯 온힘을 다해 포옹할 것을 권유했다. 그의 과장된 표현에 터졌던 웃음은 짧았다. 평화의 인사가 시작되고 여기저기서 눈물 흘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이들을 으스러지라 끌어안으며 평화를 빌어주는 동안 누군가는 슬그머니 눈물을 훔치고 누군가는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작게 흐느끼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그들 모두의 감정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눈물 흘리는 이유는 알 것도 같았다.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찡해지며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다. 타인 앞에서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다. 눈물 흘리는 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다. 이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싶지 않은데, 다른 순례자들처럼 터뜨리고 싶은데 가슴속 한 부분이 감정을 억누른다. 울면 안 돼. 넌 절대 울면 안 돼. 눈물을 막으려는 본능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궜다. 감정을 표현하는 순례자들이 시선에서 사라지고 감정을 다스리자 눈물은 눈에 고이려던 눈물은 결국 샘 안으로 돌아갔다. 겨우 눈물을 참았다 생각하고 다시 고개를 드니 이번엔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왜 십자가를 봤는데 울컥하냐고······. 눈물이 맺히기 전 다시 고개를 숙여 집중했다.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눈물을 참고 고개를 드니 이번엔 순례자와 십자가가 번갈아 눈에 들어왔다. 이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바보 놀이 같은 짓을 몇 번 하고 나니 자신의 한심함에 실소가 지어졌다.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한심한 놈······.
그동안의 걸음이 힘들긴 했지만 군 생활 행군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비록 군 행군 땐 겪지 못할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도 있었지만 목숨이 위태롭거나 견딜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전부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신발 때문에 발가락이 다친 것 외에 큰 부상도 없었다. 감사하게도 여기까지 별 탈 없이 너무 잘 왔다. 감사하게도 이런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아, 별 게 아니구나. 그냥 감사하면 되는 거였구나.
생장을 떠나기 전날 순례자를 위한 미사 후 기도를 바쳤다.
“지금까진 해야만 했기에 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했습니다. 제 길인데 어째서 전 제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겁니까? 다들 그렇게 사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없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있는 자리에서 노력했습니다.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런데 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겁니까? 도대체 저는 무엇입니까? 왜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알려주소서. 이제라도 부디 제게 허락된 소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소서.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아무리 험하고 어려워도 달게 받겠습니다. 거부하던 어떤 일이라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허락된 길을 이 길의 끝에 마련해 주소서.”
컴퓨터게임의 임무에 따른 보상 정도로 생각했다. 800km라는 말도 안 되는 길의 끝에 닿으면 30년 동안 바라기만 하고 찾지 못했던 것이 보상처럼 날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하고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이 길을 사랑하게 되고 이 길의 아름다움에 점점 깊이 빠져들수록 그런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길은 그저 길일뿐이고 새로운 사랑을 찾은 것에 만족했다. 그것으로 충분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기쁘게 걸어왔는데 정작 찾아진 것은 원하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게 이 길을 알려주셔서, 이 길을 걸을 수 있게 허락해 주셔서, 이곳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올 수 있게 해 주셔서, 이 미사에 함께 하고 이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제 곁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째서 산꼭대기 마을에서 기적의 흔적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은지 이제 알 것 같다. 자연법칙을 무시한 종교적 현상도 기적이요 우연에 우연이 겹쳐 벌어진 비상식적인 모든 상황도 기적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기적이며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기적이다.
아무도 찾지 못한 진리나 진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깨달음을 얻은 정도다. 꽃을 곁에 두고도 마음에 꽃이 없어 보지 못한 것뿐이다. 만족하고 감사하자. 이 단순한 한 마디를 찾는데 왜 이리도 오래 걸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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