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반갑습니다!
너무 오래 같이 걸은 걸까? 짜증 섞인 외침을 들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 봐도 짜증을 부릴 정도로 내가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얼마 전부터 혜수와 준영이 비박에 꽂혔다. 간혹 침낭 하나에 몸을 묻고 비박하는 순례자를 볼 수 있는데 그들의 영향인 것 같다. 벌써 10월 중순이다. 해가 떨어진 뒤의 추위와 바람은 한낮관 비교도 할 수 없으며 한국인의 상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캠핑 한 번도 안 해본 일행이 위험을 감수하려 하니 말리게 됐다. 추위와 이방인이 가늠할 수 없는 환경 등을 들어 포기를 권했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만 했던 탓일까. 혜수가 왜 안 된다는 말만 하냐며 버럭 소릴 질렀다. 순식간이 차가워지는 분위기가 어색해 웃음과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꿨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걸 모두 아는 눈치다.
한낮의 열기를 피하고 먼 길을 걷기 위한 혜수와 준영의 기상은 점점 일러지더니 결국 5시까지 당겨졌다. 걸음도 느리고 체력이 부족한 순영 누님과 민아도 비슷한 시간에 출발할 때가 있었다. 순간의 목적이 맞았기에 같은 목적지와 비슷한 걸음으로 함께 했지만 이제 동행할 이유가 없어졌다.
알고 있었다. 내 일정은 크게 변했고, 새롭게 이룬 일행의 걸음은 빨랐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4~5일 뒤에야 도착할 곳에 있는 셈이니 하루 이틀 안에 만나리라 생각했다. 같은 알베르게에 묵거나 걷는 중 따라잡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이, 그때가 지금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질퍽한 진흙을 밟으며 옮기던 걸음은 알베르게가 600m 남았다는 표식을 확인하고 더욱 빨라졌다. 아직 알베르게 문이 열리기에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산을 오르며 지쳤던 몸을 쉬고 싶었다. 언덕을 올라 마주한 건물을 도는데 익숙한 뒷모습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정수였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이들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났다. 사비나 아주머니, 용식 형님, 루다, 수정. 준영을 뺀 초반 일행들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날 보지 못하고 있다.
“반갑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우렁찬 한국말에 놀란 눈들이 쏟아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자 제일 먼저 사비나 아주머니가 뛰어와 덥석 안으며 재회를 기뻐했다. 뒤이어 용식 형님과 정수, 루다가 다가와 인사하고 수정과도 어색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하며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의 만남을 기뻐하며 다가온 이들의 상기된 표정과 한껏 높아진 목소리, 과장된 몸짓. 어색하다. 이럴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의 뒤엉킴 속에 있는 자신이 너무 어색했다. 이들이 표현하는 만큼 반가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저 상대가 다가오는 만큼 적당히 받아주는 건 아닐까? 아직도 사람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낯설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공감은 되지 않는 감정 속에서 수정을 대하는 건 더 불편했다. 억지로 어색함을 감추려 해봐도 헛수고다. 수정의 반응이 마주하기 불편할 정도로 어색하고 나만 모를 뿐 다른 이들이 보기에 내 모습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다행히 식당과 병행하는 알베르게 주인이 주문하지 않을 거면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하는 바람에 각자의 걸음 방향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행과 약속된 알베르게는 이곳이었고, 수정의 일행은 다음 마을이 목적지였다.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온다면 모를까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멀어지는 게 편하다. 그런데 이건 또 뭔 경우인지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아직 1시도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자리가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과 다시 만나게 될 기대가 공존하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시 만난 어색함은 더 컸다. 알베르게 자리가 없어 올라왔다는 말 외엔 더 나눌 말이 없다. 게다가 알베르게 문도 아직 안 열려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답답할 정도다. 어떻게든 어색함을 줄이려 말도 걸고 농담도 건넸지만 수정은 눈에 띌 정도로 거리를 뒀다. 한술 더 떠서 입실 순서에 따라 자리가 배정된 덕에 침대도 옆자리다. 2층이 편하다는 사비나 아주머니와 자리를 바꾸고 나니 옆 침대 1층은 루다, 그리고 2층은 수정이 자릴 잡았다.
어색하다. 주변을 메우고 있는 모든 공기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말을 사용하는 10명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거나 새로운 만남을 반가워하며 다양한 감정을 뿜어냈다.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 달리 보고 달리 쌓았던 기억과 감동을 나누는 그들의 목소리엔 생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영어 실력이 좋아도 외국인과 나누는 대화엔 한계가 있으며 오랜 시간을 공유한 이들과의 대화와도 다를 테니 이 분위기는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하지만 섞이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저 분위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마음이 조금도 안 생긴다. 어제 갑작스럽고 황당한 혜수의 짜증에서 시작된 걸까? 수정의 이해할 수 없는 이기심 때문일까? 일행을 통솔하려던 사비나 아주머니의 강압에서? 어울리지 않고 기대지 않겠다던 첫 다짐? 원래 내 성격? 어디서 시작한 걸까? 모든 게 원인이고 모든 결과가 어우러진 탓이겠지만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감정만큼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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