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슈퍼맨, 태극기 청년
작은 마을이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은 현지인이나 순례자들이다. 이따금 대도시에 갔을 때 관광객을 만날 수 있는데 서로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하다. 항상 순례자만 보던 순례자에게 말끔한 차림의 관광객은 낯설고 새롭다. 더군다나 그들이 순례자를 보는 시각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새롭다. 보통 순례길이 지나는 도시를 찾는 관광객은 순례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그 도시를 일부러 찾아온 관광객도 많지만 순례길의 간접체험이나 순례길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에 순례자는 선망과 동경의 대상으로 비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그저 내 목적을 위해 걷는 것뿐인데 누군가 그렇게 바라본다는 건 어색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즐비한 기념품 가게 중 가장 커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을 때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일행을 보는 눈빛도 그랬다. 하지만 그들의 눈엔 선망이나 동경보단 흐뭇함과 대견함이 드러나 있었다. 인자하고 자상한 눈빛에 웃으며 눈인사하고 가게를 둘러보는데 순영 누님은 어느새 노인 남자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빠른 영어 속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지만 코리아, 서울 같은 단어가 귀에 꽂혔다. 궁금함에 곁으로 다가가자 순영 누님이 그간의 대화를 짧게 설명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부부는 친척이 있어 여행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다. 노인 남자는 한국에 두 번 가봤으며 서울이 무척 아름답다거나 한국 여자가 예쁘다며 공감대를 얻으려는 듯 보였다. 새로운 말벗에 반갑게 말을 이어가던 노인 남자는 내 얼굴과 종아리를 번갈아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위로 뻗어 보였다.
“슈퍼맨!”
그리곤 다시 빠른 영어를 이어갔다. 분명 건강한 신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것 같은데 정확한 표현은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속에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문장이 오고 갔다.
Your family? - No. Just friend. - Great! #$!@$$!@ - no. no. he’s brother. friend.
대부분 못 알아들었지만 문장 속 알아들은 단어로 유추한 대화는 대충 이랬다. 완벽한 문장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함께 있는 사내가 가족인지, 가족이 아닌 친구라는 대답에 기뻐했다. 그리고 순영 누님의 강한 부정과 친구고 동생이라고 얘기했다. 어떤 대환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느새 곁에 다가온 준영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통역했다.
“누님한테 형님하고 잘해보래요. 남자는 형님처럼 건강한 사람 만나야 한대요. 나이 차이 크게 난다고 하니까 더 잘 됐다고 좋아하는데요?”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던 건 극히 일부였다. 노인 남자는 기념품점 문 앞까지 배웅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순영 누님에게 잘해보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번째다. 메세타에서 만난 한 노인 여자도 날 슈퍼맨이라 불렀다. 병에 가까울 정도로 사람 얼굴을 기억 못 하는데 외국 사람은 오죽하랴. 더군다나 덥고 힘들 때 지나친 사람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노인 여자는 반갑게 인사하며 몇 번 마주쳤던 것처럼 말했다. 손을 뒤로 젖혔다 앞으로 빠르게 뻗으며 ‘슝’ 지나치는 슈퍼맨이라 했다.
시끌벅적하게 열린 시장 속에서 일전에 수정과 루다의 사건을 알렸던 한국인 부부를 다시 만났다. 이틀 전 묵었던 비야당고스 델 빠라모(Billadangos del Paramo)에 하루 먼저 묵었던 부부는 베드버그(bed bug,빈대)에 물려 하루 병원 신세까지 졌다.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고통에 가까운 가려움에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다며 같은 알베르게에 물린 나를 걱정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괜히 신경쓰였지만 벌써 이틀이나 지났고 팔에 모기 물린 자국밖에 없는 걸 보면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짧은 재회 속에서 그들은 나를 태극기 청년이라 부르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만났던 어떤 한국인의 입에서 시작된 태극기 청년이란 별명은 이 길 위에서 소문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굉장히 빨리 걷는 건장한 체격의 태극기 청년. 거기에 슈퍼맨.
시간이 흐르고 그만큼의 걸음을 걷는다. 그렇게 나아가는 만큼 연관된 모든 것들이 함께하는 줄만 알았다. 인연, 몸짓, 추억 등 발자국만 빼고 모든 것이 곁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억도 못 할 만큼 짧은 만남이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리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름을 알리고 싶다거나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시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시나브로 익숙해지고 사랑하게 된 이 길 위에 내 흔적이 오래지 않아 지워질 발자국처럼, 딱 그만큼 기억되는 것이 감사하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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