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저거 바꿔치기할까요?
준영을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아니, 반대로 준영이 날 다시 만날 줄 몰랐다는 표현이 더 합당하겠다. 일행이 흩어진 원래 계획대로라면 하루 이상 차이가 났어야 하는데 같은 마을에 있으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슈퍼마켓에 가다가 다른 알베르게에 묵고 있던 쓰리(three)박(프로미스타에서 만난 세 여인의 성이 모두 박 씨다)을 만났는데 20살의 한국인 남자도 같은 알베르게에 묵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몇 번의 안면으로 그들이 묵고 있는 알베르게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동행했고 그렇게 준영과 재회했다.
준영과 재회와 더불어 그날의 식사로 자연스럽게 쓰리박과 일행이 됐다. 아일랜드에서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카미노를 찾은 마흔의 순영 누님, 걷는 속도와 체력이 나와 거의 비슷한 혜수, 그리고 소녀 같은 해맑음과 쾌활함으로 가득한 22살의 민아는 생장에서 만나 일행이 되었다.
새로운 일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상과 출발은 자신의 호흡에 맞추고 목적지만 같다. 목적지 도착 후 자유로운 휴식과 상황에 맞는 저녁 식사와 수면까지 사람만 바뀔 뿐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다.
일행이 되어 동일한 목적지에 처음 머무는 날 역시 식사가 부담이다. 변변한 식료품점도 없고 주방도 쓸 수 없는 곳에서 홀로 끼니를 때우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10유로나 하는 식사를 선뜻 선택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지난 일행은 꽤 긴 시간을 함께 걷는 동안 자연스럽게 주머니 사정을 알게 됐다. 피차 사정을 알게 된 마당에 부담 없이 식당을 이용할 사람은 이용하고 굶거나 간단한 주전부리로 해결하는 것 역시 서로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확실히 관계가 지속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것들이 공유될 때가 편했다. 사정과 여건이 공유되지 않은 관계 속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부러 피할 목적이 아니라면 첫날 저녁 식사 정도는 같이 할 필요가 있다.
알베르게와 같이 운영돼도 레스토랑은 레스토랑인 건가? 대부분 길 위에서 만났던 익숙한 얼굴인데 지금까지 보던 허름하고 편한 복장의 순례자는 우리뿐이다. 백인 순례자 대부분은 말끔한 복장으로 인연과 관계에 따라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마치 순례길이 아닌 다른 도시의 레스토랑에 들어온 기분이다.
많지 않은 종류의 순례자 메뉴 중 익숙한 것들을 다양하게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음료를 질문한다. 물, 와인, 맥주, 콜라. 어떻게 물과 술, 음료가 동급일 수 있는 거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공짜로 물을 주는 것에 놀란다는 이유가 실감이 났다. 더군다나 우리는 생수를 주는데 여긴 수돗물이란 게 더 놀랍기도 하다. 순영과 준영은 물을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와인을 주문했다. 식사와 함께 나온 와인 한 병은 순식간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쉬워도 식료품점에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와인을 비싸게 주고 먹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백인 여자 두 명이 와인 한 병을 시켜 거의 마시지 않고 있다. 식사는 거의 끝나가는데 와인은 거의 그대로였다.
“저 사람들 일어나면 우리 빈 병이랑 저 와인이랑 바꿔치기할까요?”
같은 나라, 같은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비슷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지만 혜수와 민아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백인 여자는 와인을 그대로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준영의 자리가 가까웠는데 두 사람이 일어나고 웨이터가 보이지 않자 기민한 동작으로 병을 바꿔치기했다. 잔뜩 긴장한 다섯 사람은 가득 찬 와인이 테이블에 올라오자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을 끌만큼 유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겨우 웃음을 진정하고 즐겁게 식사를 이어가는데 반대쪽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백인 무리 중 유일한 황인 여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미 다른 일행과는 안면이 있었던지 한국말로 인사를 하고는 음료의 진실에 대해 알려줬다. 식당에서 시킬 수 있는 음료 중 콜라와 맥주는 한 잔, 그리고 와인과 물은 한 사람당 반병이었다. 그러니 세 명이 시켰으면 한 병 반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처음 주는 한 병으로만 만족했었다.
젊은 한국인들의 유쾌한 모습을 보고 있던 백인 노인이 며느리에게 알려주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닿자 인상 좋은 백인 노인 남자가 흐뭇한 미소와 눈인사를 건넸고 크지 않은 몸짓과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쩌면 이 길이 끝날 때까지도 모를 수 있던 상식. 이런 기회가 아니면 알 수 있었을까?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다른 상황 속에서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계속 혼자였다면 이런 식당에 올 일이 없으니 알게 될 확률은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취기와 다양한 사람과 나누는 그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와 철없는 장난과 웃음.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의 일부가 되어 웃고 떠들며 유쾌하게 보내는 시간이 좋다. 혼자 있을 때 찾아오던 건조 하고 무료하던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는 이 밤이 좋다. 가만, 그럼 역시 나 혼자 있을 때 외로웠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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